1. 니체의 접근법
먼저, 프로이트에 들어가기 전에 니체를 검토하자. 계보학적 방법론(genealogical method)이란 무엇이었나. 이 니체의 접근법은 새로운 것이었나.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론에 따르면 사회의 이상(ideals)과 도덕율은 역사적 기원상, 그러한 통념과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들어, 선(good)을 한번 생각해보라. 니체는 일반적인 선good과 그 반대 개념인 비-선not-good은 상식적인 통념과는 다르게 건축되어왔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니체의 출발점은 선과 악에 대한 유대-그리스도인 도덕 비판이었다. 니체에 따르면 고대사회 선은 오늘날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 이것이 바로 계보학적 방법론이 조명한 것이었다. 니체는 고대사회의 선good이 진정한 선이라고는 주장하지 않았다. 니체의 포인트는 단지 비교학적으로 선에 대한 통념은 시대에 따라서 변천해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물론 니체의 주요 촛점은 당시 현대사회의 도덕개념(notion of morality)이었다. 니체에 따르면 현대사회의 도덕은 매우 독특하다. 그 도덕은 우리 마음 속에서 내부화하고 종속과 억압을 주입한다. 이 도덕적 가치는 우리 내면의 깊은 곳을 파고들어간다. 이것이 계보학적 방법론의 포인트이다. 이 계보학적 방법론은 비판적으로 우세한 관점(critical vantage point)과는 거리가 멀다. 비판적으로 우세한 관점이란 이를테면, 당신은 선과 도덕에 대한 보편적 개념으로부터 츨발하여 사회의 도덕 문제를 비판하는 것을 말한다. 재미있게도 니체는 이러한 비판적으로 우세한 관점을 이용하지 않았다. 니체는 계보적으로 모든 도덕 개념과 정의의 본질, 공정의 본질, 인간의 본질 등은 이상의 작업실(workshop of ideals)에서 제작되어왔다고 하였다. 이 이상의 작업실은 억압과 고문을 통하여 대단히 위대해 보이는 아이디어를 제작하는 암실이다. 따라서 여기서 제작된 아디디어는 사회와 인간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통제하게 된다. 이것이 니체의 포인트이다. 그럼, 잠깐 맑스로 돌아가자. 재미있게도, 이러한 니체의 도덕론과 맑스의 소외론 사이에는 거의 다르다고 할만한 것이 없다. 니체는 말하기를 "맑스가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fate)의 주인이 되지 못한채로 소외되었다고 말하는한, 나는 맑스와 동의한다"고 하였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은 현대세계에서 소외되었고 생life에 대한 권력을 갖고있지 못할뿐만 아니라 인간의 외부적 조건들은 마치 천둥번개와 같은 자연력처럼 우리의 생활을 일일이 결정한다. 이것이 니체의 현대진단이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니체는 맑스와 달리, 현대사회에 대한 처방을 내리지 못하였다. 맑스는 인간해방과 선한 사회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를 알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맑스의 주장을 철없는 짓(churlish)이라고 폄훼하면서 자신은 또다른 이상을 제작하지 않겠노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상을 제작하는 작업실에는 억압과 육체적, 정신적 고문으로 인하여 나쁜 냄새가 진동하기 때문이다. 엣날에는 육체적 고문이 많이 사용되었지만 오늘날에는 그것보다 더 나쁜 정신적 고문이 사용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니체의 핵심 포인트이다. 니체의 이러한 통찰은 베버와 미쉘 푸코, 그리고 포스트모던니즘 이론을 예고하였다. 재미있게도, 니체는 비판 이론을 급진화(radicalized)하였다. 원래,헤겔에서부터 맑스에 이르는 비판 이론은 의식에 대한 비판이었다. 즉, 우리 마음 속에 있는 것은 현실의 왜곡(distortion of reality)이므로 인간의식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는 것이었다. 니체는 이러한 비판을 가장 급진적 방법으로 시도하였다. 니체는 옳은 의식(도덕)의 본질에 무지하더라도 의식의 단점들shortcomings(비-도덕)을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이것이 니체의 포인트이다. 이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니체와 매우 유사하다. 프로이트 또한 비판 이론가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가 마음에 갖고있는 것은 한때 내면 깊이 억압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신경증을 일으키지만 그 억압을 발견한면 분명 치료가 된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포인트이다. 기본적으로, 프로이트는 니체의 아이디어를 따라간다. 프로이트는 <도시와 불만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에서 니체가 다루었던 갈등을 다루었다. 프로이트는 현대 도시문화(civilization)를 억압이라고 보았지만 도시를 거부하지는 않았고 다만, 도시의 가치에 대하여 고민하였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니체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한편, 프로이트는 구강암 때문에 마지막 20년 동안 고통을 당했는데 결국에는 자살하여 생를 마쳤다. 그의 구강암은 분명 담배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프로이트는 19세기와 20세기 초의 자인언트 사상가 중의 한 명이다. 보통 일컬어지는 19세기의 자인언트 사상가는 찰스 다윈, 칼 맑스, 그리고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2. 역사적 맥락에서 본 프로이트
1856년 프로이트는 지금의 체코 공화국의 남부인 모라비아의 작은도시인 프라이버그Freiberg에서 태어났다. 프로이트의 부친은 유대인 울(wool) 상인이었다. 그는 이미 20살 연하의 세변째 부인과 혼인 중에 있었는데 성격이 꽤 지배적이었다. 반면에 새 부인은 매우 섬세한 여인이었다. 프로이트는 나이 많고 권위적인 부친과의 트러블 속에서 부드럽고 따뜻한 모친의 보살핌 속에서 자라났다. 나중에 프로이트는 이러한 성장 조건 위에서 인간에 대하여 사유하게 되었다. 프로이트 가문은 프로이트가 태어난 직후에 프라이버그Freiberg를 떠나서 라이프찌히로 이사하였고, 그리고나서 비엔나로 이사하였다. 프로이트는 비엔나에서 교육받았다.
1873년 프로이트는 비엔나 대학교에 입학하여 잠시 법학을 공부하였는데 지루함을 느낀 나머지 의과대학(medical school)으로 전학하였다.
1881년 프로이트는 의학학위를 받고 비엔나 대학교의 병원인 제네럴 병원General Hospital에서 근무하였다.
1885년 프로이트는 파리에 공부하러 갔는데, 매우 중요한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거기서 신경학(neurology)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프로이트는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들이 히스테리hysteria환자를 다루기위하여 이용하고있던 최면(hypnosis) 요법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그후 프로이트는 비엔나로 돌아와서 신경학자가 되었고 최면요법을 쓰면서 히스테리환자를 다루게되었다.
1886년 프로이트는 함부르크 랍비장(chief rabbi)의 손녀인 마르타Martha Bernays와 결혼하였다. 프로이트는 골수 유대인가문 출신이었으나 신앙심은 매우 약하였다.
3. 정신분석(psychoanalysis)과 그외 성공들
프로이트는 정신요법(psychotherapy)을 실습하기 시작하면서 비엔나의 버그슈트라서Bergstrasse 19번지에 사무실을 차렸다.
1886년 프로이트는 심리학자인 브로아어Joseph Breuer와 합동하여 실습하였다. 당시 브로이어는 최면요법을 쓰지않고 대화치료(the talking cure)를 하고있었다. 대화치료란 쉽게말해서, 당신이 보통 하는 것이다. 당신은 마음의 문제가 생기면 친구를 불러서 "나는 뭔가를 말해야겠다."고 한다. 당신은 큰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 누군가가 당신의 얘기를 들어주기를 원한다. 이것이 바로 브로이어가 했던 것이다. 브로이어는 환자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말걸도록 요청하였다. 이 대화요법은 당신도 경험했을지 모르겠으나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좋은 친구는 기꺼이 당신의 묻어둔 얘기를 듣고자하고 좋은 충고도 해준다. 브로이어가 발견했던 것은 상대방의 말을 그냥 듣고, 끄덕이고, 공감하고, 이해하고, 말하도록 하고, 좋은 질문을 하면서도 충고는 하지않는다.
1895년 프로이트와 브로이어는 <히스테리 연구Studies in Hysteria>를 공동집필하였다. 그들은 그 책 <히스테리 연구>에서 실제로 새 요법을 제안하였다. 이를테면, 당신은 상대방을 그냥 자게 내버려두지말고 말하도록하고 자유연상하게한 다음 한 단어를 제시한다. 그러면 상대방은 그 단어를 가지고 이 세계와 연결하여 자유롭게 연상할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상대방의 무의식을 들추어낼 준비를 하는 것이다. 각 개인은 무의식 단계를 갖고있는데 자유연상을 이용하여 무의식을 들춰낼 수 있다. 실제로 프로이트는 환자들을 상대로 자유연상을 실습하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잠재의식에 있는 많은 것들은 실제로 섹스(sexuality)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잠재의식에 억압된 것들은 성취되지 못하고 불만족스러운 성적 욕망이라고 하였다. 프로이트는 자유연상을 이용하여 무의식 속을 파고들면서 성적인 많은 질료(sexual stuff)를 발견하였다.
1896년 프로이트는 현대사회 사상의 역사상 매우 중요한 이 해에 자신의 작업을 정신분석(Psychoanalysis)이라고 명명하였다. 정신분석의 핵심은 의사가 환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가 스스로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정신분석을 이용하여 잠재의식에 있는 문제를 의식으로 끌어올리고 현실에서 그 문제를 다루게 된다. 결국 당신은 자신이무엇 때문에 고통을 당하였는지 발견하게 된다.
1899년 프로이트는 <꿈의 해석Interpretation of Dream>을 출간하였다. <꿈의 해석>의 많은 분량은 프로이트 자신의 꿈을 분석한 내용이었지만 환자들의 꿈에 대한 분석도 있었다. 프로이트는 부친이 막 타계하자 부친에 대한 대단한 죄의식을 가졌었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오랜동안 부친에 대하여 증오심을 품어왔기 때문이다. 처음엔 증오/사랑 관계였지만 나중엔 증오에 대단히 많이 동기화 되었다. 프로이트는 부친과의 문제를 해결하기위하여 자신에 대한 정신분석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프로이트는 부친과 모친에 관련한 자신의 문제들를 포착하기 시작하였다. <꿈의 해석>은 정신분석을 향한 매우 중요한 발판이었다. 이 책 <꿈의 해석>의 근본적인 아이디어는 꿈은 우연한(accidental)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꿈이란 무의식에 들어앉은 몇몇 질료(stuff)들이 의식으로 올라가려는 입구의 작은 창(this little window of opportunity)이 열리는 시간이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사람들에게 꿈을 기억하도록 당부하였다. 왜냐하면 꿈으로부터 부상하는 물질들은 잠재의식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이기 때문이다.
1905년 프로이트는 또다른 성공을 거두었다. 프로이트는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The pathology of everyday life>출간하였다. 프로이트는 <일상생활의 병리학>에서 '프로이트의 미끄러지기Freudian slippage' 를 언급하였다. 프로이트의 미끄러지기란이를테면, 우연히 자신의 혀를 잘못 굴려서 의도하지 않았던 다른 말이 나왔을 때 이것은 실제로 당신의 잠재의식이 의식으로 밀고 올라오는 것으로서 억압된 질료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따라서 우연한 실수는 실수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실수의 저편에서는 잠재의식이 올라오는 것이다. 또 프로이트는 이 해에 정신분석 이후 가장 중요한 작품인 <성욕에 관한 세편의 에세이Three essay on the theory of sexuality>를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프로이트는 범-섹스주의(pan-sexualist)적으로 인간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프로이트의 섹스이론에 따르면 모든 문제들은 억압된 성적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남자아이는 어린시절 모친을 사랑하게되면서 부친을 시기하고, 여자아이는 그 반대로 부친을 사랑하게되면서 모친을 시기하게된다. 이것은 오늘날 정신분석학자들이 그 진실성에 시비를 걸고있는 오디푸스 컴플렉스(Oedipus complex)이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디푸스 왕은 우연히 자신의 모친과 결혼하게되고 나중에 오디푸스가 그 사실을 알게되자 대비극을 맞게된다. 알다시피, 이것은 근친상간으로서 모든 문명에서 금지되어왔다. 즉, 오디푸스 컴플렉스란 우리는 반대 성(sex)을 가진 부모를 향하여 사랑에 빠지게되고, 같은 성sex을 가진 부모를 향하여 시기질투하게된다는 가설이다. 또 오디푸스 콤플렉스는 모친(부친)과 성적 사랑을 하기위하여 부친(모친)을 살해하려는 욕망을 의미한다. 프로이트는 나중의 작품들에서 메타-심리학(meta-psychology)를 향하여 나아갔다. 즉, 단지 개인의 정신보다는 사회의 기능에 대하여 해명하고자 하였다.
1913년 프로이트는 <토템과 터부Totem and Taboo>를 발간하면서부터 개인의 정신보다는 사회적 기능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토템과 터부>에 따르면 원시사회의 기원인 친족 네트워크는 부족사회로 전환하였다. 최초에 형제들은 부친을 살해함으써 복합사회의 기원이 시작되었다. 부친은 친족관계에서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하면서 근친상간을 하였다. 당시 근친상간에 대한 터부가 없었기때문이다. 그래서 부친은 딸들과도 섹스를 할 수 있었다. 이제 형제들은부친을 살해하고 최초의 도시civilization를 창조하게되자 자신들의 욕망을 억압하면서 권력을 공유하였다. 이것이 <토템과 터부Totem and Taboo>의 내용이다.
1920년 프로이트는 <쾌락원리의 저편Beyond the Pleasure Principle>를 발표하였다.
1923년 프로이트는 <에고와 이드Ego and id>를 출간하였다.
1930년 프로이트는 자시의 모든 작품들을 종결하는 <도시와 불만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를 발표하였다. <도시와 불만>은 곧 절판될 정도로 대성공을 거두면서 중요한 사회 이론으로서 자리잡았다.
1938년 프로이트는 비엔나를 떠나야 했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부친에게 그랬듯이 그리고 우리 모두가 부모에게 그런 것처럼, 비엔나에 증오와 사랑이 교차하였다. 나찌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자 게슈타포는 실제로 프로이트의 딸, 안나Anna를 인터뷰했다. 프로이트는 자신이 유대인이므로 독일의 제 3제국(The Third Reich)을 떠나야한다는 암시를 받았다. 프로이트는 런던으로 떠났고, 1년 후에 자살하였다. 그것은 보조 자살(assisted suicide)였다. 프로이트의 주치의는 그가 오랜동안 다투어왔던 고통을 제거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생전에 프로이트의 아이디어는 과격했으므로 매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02년에 프로이트는 매우 능력있는 젊은이들인, 페렌찌Sandor Ferenczi와 칼 융 그리고 프로이트의 전기를 쓴 존스Ernest Jones 등과 모임을 만들었다. 그들은 매주 수요일 베르그슈트라서Bergstrasse 19번지에서 모였다. 이것이 수요 심리학회Wednesday psychological Circle이다. 1908년 이 모임은 비엔나 심리학회Vienna psychological Society로 바꾸었다. 재미있게도, 프로이트는 서로 잘지내기 매우 힘든 인간형이었다. 프로이트는 기본적으로 모든 동료와 싸웠다. 먼저, 1911년, 그의 초기 동료였던 아들러Adler와 결별했다. 그리고나서 20세기 초 2, 30년을 주름잡았던 심리학자인 융과 결별하였다. 그 후 페렌찌Ferenczi와도 결별하였다. 프로이트는 여기저기서 원수를 만들어 내었다.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 프로이트(1895-1982)는 오랫동안 살면서 정신분석을 전파하였다.
4. 자아(Ego)와 이드(Id)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섹스에는 잠재의식 또는 무의식과 의식이 지리잡고 있다. 프로이트는 이제 그것들을 다루게될 개념적 장치가 필요하였다. 먼저, 프로이트는 우리의 지각 시스템은 세 가지 속성을 가지고있다고 하였다. 첫째, 자아(Ego) 둘째, 무의식적 이드(Id) 셋째, 초자아(Superego)이다. 우리는 이 세가지 전부를 다루게 될 것이다. 자아와 무의식적 이드와 초자아사이의 상호작용은 매우 재미있다. <도시와 불만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은 이것들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프로이트는 인생을 안내하는 두 계급two class, 즉 의식과 무의식의 본능에 대하여풀이하면서 최초로 의식과 무의식을 나누었다. 재미있게도, 무의식 아이디어는 억압이론(theory of repression)에서 추론되어 나왔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기억 못하는 몇몇 경험들 때문에 무의식을 갖게된다. 예를들어, 역사상 금기시되어온 모친을 향한 섹스 욕망은 우리의 잠재의식에 밀려들어갔다. 또 망각하고싶은 생활의 불쾌한 경험들도 잠재의식에 들어갔다. 이것이 바로 억압이다. 보통, 우리는 바람직하지않은 경험들을 억압한다. 무의식은 잠재적이면서도 동시에 의식으로 올라오려는 속성이 있댜. 정신분석가는 개인의 억압되어있는 무의식을 의식화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프로이트는 모든 억압된 것은 무의식이라고 말하였다. 그것은 정말 사실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나쁜 기억을 잊고자 노력하고 또 무의식화하고자 한다. 재미있게도, 프로이트에 따르면 모든 무의식이 반드시 다 억압되어있는 것은 아니다. 즉, 의식화되기를 준비하는 억압된 질료와는 관계없는 질료(stuff)가 존재한다. 나중에 프로이트는 그 무의식의 질료들은 역동적이 아닌 단지 기술적으로(descriptively) 억압되어있다고 말을 바꾸었다. 분명, 프로이트는 그 무의식에 들어있는 질료들은 단지 기술적이라고 하면서, 이것을 전-의식(pre-consciousness) 이라고 불렀다. 전-의식은 이전에 결코 의식에 존재하지 않았었다. 전-의식은 당신의 깊은 내면에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역동적인 억압에 한정하여 사용하였다. 이제 두가지 무의식, 즉 억압된 무의식과 전-의식은 모두 함께 이드Id를 구성하게 된다. 그럼, 의식과 전의식 그리고 무의식은 서로 어떤 관계를 갖고있나.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ego란 각 개인이 갖고있는 정신과정의 질서 조직(coherent organization of mental process)이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자아이다. 인간의 의식은 이 자아에 부착된다. 우리 안에 있는 의식이라는 것은 바로 자아이다. 자아는 또한 개인의 사유(thinking)를 감독하고 구성하는 정신 인자(mental agent)로서 자아는 잠들지만 동시에 꿈조차도 통제한다. 이것이 자아의 정체이다. 또 자아는 억압 인자이다. 따라서 자아는 자기자아를 의식화하고자하는 질료(stuff)를 억압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 놓여있는 억압된 것들을 자아로 가져오는 것이 정신요법의 목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무의식에는 억압되지 않은 질료들도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매우 중요한 충동(drive)인 이드(Id)이다. 이드란 당신 내면에 깊이 박힌 욕망으로서 언제라도 의식화할 준비가 된 충동이다. 사실, 이 무의식적 이드는 억압되어 본 적이 없다. 이드는 각 개인에게 고유한 것으로서 본성적인 것이다. 예를들어, 성적 충동은 이드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는 전-의식 시스템으로부터 출발하여 전-의식에 따라서 작동하는 실체(entity)이다. 이 자아는 스스로 확장하여 무의식적 마음으로도 활동한다. 이것이 이드Id이다. 이드는 무의식적이지만 억압된 질료는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드는 억압된 것과 전의식의 조합일 수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는 이드로부터 매우 날카롭게 분리되었고, 자아 아래에 놓여있는 것은 이드이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포인트이다. 재미있게도, 프로이트는 자아를 말 등에 탄 사람으로 비유하였다. 즉, 말 등에 탄 자는 말이 가고자하는 곳으로 말을 안내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드는 이 말이다. 따라서 자아ego는 말 위에 있고 말은 이드Id이다. 말horse은 때때로 당신을 따르고 싶어하지 않고 제멋대로 가고자 한다. 당신은 말을 통제해보려고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제시한 매우 중요한 아이디어이다.
+ 초자아(superego)
프로이트에 따르면 자아는 단지 이드의 일부분이 아니다. 자아는 등급을 갖고있다. 그것이 초자아 또는 자아-이상(ego-ideal)이다. 자아의 그 부분은 확실히 의식과 연결되어있다. 초자아는 이전에 이드가 대상 선택으로서 남겨둔 잔여물이지만 초자아는 이드의 선택에 역동적으로 반발하는 형식이다. 이를테면, 초자아는 당신에게 존재(what you are)가 아니라 당위(what you should be)를 호소한다. 반면에, 자아는 당신에게 현실을 속삭인다. 당신의 자아는 현실(reality)의 세계의 현실적 조건들을 따진다. 그러나 초자아superego는 실제로 당신이 마땅히 되어야 할 것(what you should be)을 말해주는 의식의 부분이다. 이미 보았다시피,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 이론>에서 당신 안에 존재하는 내부자가 당신을 감시하면서 옳은지, 그른지 판단한다고 하였다. 초자아 아이디어는 애덤 스미스의 내부자 아이디어와 매우 유사하다. 종종, 사람들은 정신분석이 인간생활의 더 높은 가치들을 무시하면서 섹스같은 것이나 들먹인다면서 비판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것은 잘못된 행태라고 말하면서, 우리 인간은 초자아의 존재를 매우 잘 알고있다고 말하였다. 자아와 이드와 초자아 사이에는 복합적인 상호작용이 있다. 자아는 본질적으로 억압적이고 당신의 외부적 현실세계을 표상한다. 반면에, 초자아는 비록 이룰 수는 없을지라도 당신이 바라는 고유의 내부세계를 표상한다. 당신의 자아는 더러운 당신의 충동이 이루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실제로 정신생활의 가장 낮은 부분에 속한 것은 이 억눌린 질료(stuff) 이다. 이 억눌린 질료는 인간 마음의 가장 높은 부분인 초자아로 전이할 수 있다. 한편 프로이트는 본능에는 두 계급이 존재한다고 하였다. 프로이트의 초기 작품에는 리비도(libido)본능이 나온다. . 리비도란 섹스욕망과 생존욕망 그리고 자기-보존(self-preservation)욕망을 말한다. 그리고 또 다른 본능이 존재한다. 프로이트가 생애의 후반기에 발견했던 본능은 타나토스(Thanatos)이다. 타나토스는 죽음 본능이다. 따라서 인간의 본능에는 에로스욕망이 있고 타나토스욕망이 있는 것이다. 그 하나는 우리를 생존케하고 다른 하나는 파괴적이고 죽음을 가져온다. 따라서 인간 생활과 인간 역사는 에로스와 타나토스사이의 투쟁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타나토스의 좋은 예로서 가학주의(sadism)을 들었다.
5. <도시와 불만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
이 책 <도시와 불만>의 주요주제는 자아발전, 종교, 생활의 목적, 도시에서 억압되는 섹스생활이다.
+ 자아개발
프로이트는 자아는 결국 개인 안에서 진화한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자아는 개인에게 그냥 주어진 것아 아니기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뚜렷하게 차별화될 수 있다. 예를들어, 나는 말하기를 ''이 사람은 매우 강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자아는 차별화되는 것이다. 당신은 자신의 자아를 강하게 표출하지만 정작, 당신의 이드는 내면에 숨어있다. 고프만Erving Goffman은 '이드는 백 스테이지(back stage)에 있다.' 는 표현을 쓴다. 이를테면, 당신은 자신의 이드를 보이지 않으면서 자신의 자아를 표출하고자 한다. 자아는 인간 발전과정에 따라서 점진적으로 진화한다. 당신의 자아는 어린시절부터 점차적으로 발전해가면서 형성되었다. 재미있게도,한가지 중요한 것은 당신은 쾌락 원칙으로부터 떠나서 점차 현실 원칙(reality principle)에 따라서 변화해 간다는 것이다.
+ 인간 생활의 목적
인간 생활에는 목적이 있는가. 프로이트는 오직 종교만이 인간생활의 목적에 해담을 줄 수 있다고 말하였다. 프로이트가 생각한 인간생활에 대한 목적은 공리주의 아이디어와 매우 가깝다. 존 스튜어트 밀은 행복과 관련하여, 우리 모두는 행복해지고자 매우 노력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사실, 운나쁘게도 행복해지기 보다는 불행해지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우리는 일생동안 여러 어려운 문제들과 직면하기 때문에 사실, 행복보다는 불행이 훨씬 더 우리의 운명(fate)에 가까울지 모르겠다. 따라서 우리의 쾌락 원칙은 현실 원칙으로 전환해간다. 우리는 때때로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이다."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런 현실로부터 탈출하고자 한다. 우리는 자신의 불행을 통어하기 위하여 현실 원칙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고통속에서 생존하기위하여 현실감각(sense of reality)을 갖출 필요가 있는 것이다.
+ 자아 길들이기, 본능의 승화
자아는 어떻게 길들여지는가. 이제, 프로이트는 니체와 매우 근접해졌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 본능의 승화(sublimation of instincts)는 도시의 형성과 직결되어있다. 재미있게도, 행복감이란 길들여지지 않은 자아(untamed ego)가 난폭한 지적 충동(wild intellectual impulses)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블론드 짐승(blonde beast)은 진정한 쾌락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다. 그러나 블론드 짐승은 길들여져야 한다. 이 니체의 아이디어는 프로이트의 아이디어와 매우 유사하다. 당신은 자아을 길들이고자 하지만 끝내는 실패하게 될때 당신은 마니아(maniac)가 되거나 또는 중독이 된다. 이를테면, 당신은 현실을 마주할 수 없어서 술을 마시게된다. 당신은 술집에 가서 더블스카치를 주문한다. 그리고 편안히 휴식을 취한다. 중독(intoxication)이란 현실을 외면하는 방법이다. 많은 사람들은 일부러 술에 취한다. 그것은 나쁜 아이디어이다. 왜냐하면 실제로 그것은 사태를 더 악화시키기 때문이다. 당신은 몇분간 행복을 느끼지만 불행은 더 악화될 것이다. 자아를 길들이는 방법은 본능을 억제하고, 되도록 멋지게 본능을 승화하는 것이다. 이제, 당신은 억압된 욕망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환상계(sphere of fantasies)로 이동하여 억압된 상상을 그려내게 된다. 당신은 이 환상기계론을 통하여 예술과 과학을 창조하게 된다. 사실, 가장 숭고한 인간 활동은 승화된 불만족한 욕망(sublimated unsatisfied desires)이라고 할 수 있다. 잘 알다시피, 그 욕망이 기원지는 자아이고 또 이드이다. 자아는 현실과 대면하고나서 그 욕망을 억누르고 그리고 그 욕망을 높은 단계로 승화시킨다.
+ 괴테의 과학, 예술, 종교
프로이트는 괴테의 발간되지 않은 한 시로부터 따오면서 인용하기를 "과학과 예술을 가진자들은 또한 종교를 가진자들이다. 과학도 예술도 갖고있지 않은 자들은 종교를 가져야 한다." 라고 하였다.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아이디어이다. 과학과 예술은 종교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신이 실제로 과학자나 예술가라면 자신의 종교를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종교적일 필요는 없겠다. 그러나 당신이 과학자도 예술가도 아니라면, 생활을 의미있게 하기위해서라도 종교가 필요하다. 이것은 놀라운 것이 아니다. 어쨌든 이 괴테의 시는 발간되지 않았다.
+ 집단 망상으로서의 종교
프로이트는 너무 멀리 나갔다. 프로이트는 반종교적이었고 종교를 집단 망상(mass delusion)이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종교는 인상(impression)을 창출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종교인은 실제로 인상을 가지고 실재reality를 주조할 수 있다. 왜냐하면 종교인은 생활의 목적이 생겼고 아마도 이 땅에서가 아니라 저 너머에서 그것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프로이트는 이것을 집단 망상이라고 불렀다. 이를테면, 당신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 당신은 자신의 현실 원칙을 충분히 개발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유치하다(infantile)고 하였다. 이를테면, 당신은 아버지 신으로써 신의 형상를 창조한다. 재미있게도, 이것은 어린 유아들이 위험에 대처할 때 바로 그 반작용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어린 유아들은 현실에서 아버지로부터 보호를 받기위하여 아버지의 형상을 창조한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프로이트의 포인트이다. 당신은 이 때 신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 불행과 고통의 근원: 도시에서의 불만족
가장 먼저, 자연은 불행의 근원이다. 특히, 우리 자신의 육체가 그렇다. 프로이트는 병들고 늙게되자 자신의 육체에서 얼마나 많은 불행이 나오는가를 보면서 고마워하였다. 당신도 50년만 더 기다려 보라. 실제로, 가장 큰 불행은 인간관계로부터 나온다. 이것은 맑스와 니체의 아이디어와 비슷하다. 기억하겠지만, 청년 맑스는 인간은 동료로부터 소외될 때 최악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니체는 모든 문제는 인간 관계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럼, 인긴 관계의 문제는 어떻게 풀 수 있는가. 우리는 인간 관계의 큰 문제들 때문에 도시 문화(civilization)를 비난하기 시작한다. 니체도 도시문화를 비난하였다. 재미있게도, 프로이트는 현대 사회에 살고있는 사람들보다 이전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훨씬 더 행복했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또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숭고한 야만인(noble savage)이었다. 프로이트는 루소의 주장은 비합리적이 아니라고 하였다.
+ 도시개발
도시는 어떻게 개발되는가. 프로이트에 따르면, 개인은 점점 더 외부세계를 통제하면서 또 공동체와 인구의 확장으로 인하여 점차 타인들을 통제하려들게된다. 도시라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과 자연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기술이다. 프로이트는 모든 문화와 도시는 억압으로부터 나온다고 하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통찰이면서도 니체의 도덕 비판과 매우 유사하다.
+ 도시는 섹스생활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도시는 섹스생활을 억제한다. 도시의 목적은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사회에 데려다 놓는 것이다. 또 도시는 역사상 금기시된 섹스를 막는다. 프로이트는 섹스생활의 억제는 서유럽 문명에서 그 정점에 다다랐다고 하였다. 이것은 니체의 아이디어와 유사하다. 섹스 대상의 선택은 반대 성(sex)에 한하고 혼외정사는 변태(perversion)로서 금지된다. 심지어 이성간의 섹스도 억제될 때가 있다. 서양 문명에서는 오직 한 남성과 한 여성 사이의 고독한 섹스 관계만이 용인되었지만 다른 문명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재미있게도, 서양 문명은 가장 억압적인 섹스 시스템이었다. 그리고 섹스의 억압보다 더 심한 것은 다른 모든 종류의 충동들을 억압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웃과 심지어 자신의 원수까지도 사랑하게되었다. 이것은 프로이트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소의 공격성을 통제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이기Homo homini lupus 때문이다. 이것은 홉스적인 인간 본성 이론이다. 사실, 우리들은 실제로 마음 깊은 곳에서 그렇다.
+ 맑스에 대한 비판
알다시피, 실제로 맑스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위한 손쉬운 해결책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사소유권이 제거되고나면 호모 호미니 루푸스Homo homini lupus가 해결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맑스의 주장을 나이브하다고 일갈하였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것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프로이트는 도시의 억압적인 본성을 보여주고자 하였지만, 모순되게도 나찌를 반-도시(anti-civilization)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프로이트는 스스로 초자아가 불필요하다고 제안하지 않았다. 물론, 초자아는 필요하지만 초자아가 잔인해(tyrannical)질까 걱정스럽다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나이브하지 않은 중도(middle way)를 찾아야한다. 그 중도란 이드는 나쁜 충동들을 의식화하므로 초자아는 이드를 통어하지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초자아는 너무 멀리 그리고 너무 많이 나아갈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이것이 맑스와 니체사이의 좁은 길을 가는 중도이겠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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