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4일 화요일

8. 니체: 권력, 지식, 그리고 도덕

1. 니체, 프로이트, 베버 그리고 현대성의 문제

논의를 20세기로 옮기자. 우리가 다루게 될 니체와 프로이트 그리고 베버사이에는 많은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뒤르켐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두자. 니체는 1900년에 타계하였지만 심각한 정신병 때문에 마지막 10년간 활동할 수 없었다. 니체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19세기에 출간하였다. 프로이트와 베버도 19세기에 출간을 시작하였다. 이 세 사람은 20세기 사회이론을 향한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였다. 어떤 면에서 이들은 20세기 후반기 특히, 마지막 3, 40년 동안 쏟아진 방대한 양의 이론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니체, 프로이트, 베버의 출발점은 맑스였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 모두 맑스의 경제적 환원주의(economic reductionism)에서 출발하였다. 경제적 환원주의는 경제적 이익을 강조한 이론으로서 맑스뿐만 아니라 애덤 스미스에게도 해당한다. 니체, 프로이트, 베버는 경제적 환원주의에서 출발하였지만 현대성을 경제시스템에서 찾기 보다는 권력과 의식에서 포착하고자 하였다. 현대성의 문제는 한편으로, 억압(repression)에 있다. 현대 생활의 문제점은 우리가 지배에 대한 종속 이유를 스스로 내부화하면서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내부화된 종속(internalized subjugation)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질서(orders)를 따르는가. 왜 우리는 우리자신을 종속시키는가. 이것이 니체, 프로이트 그리고 베버가 직면한 중심문제였다. 독특하게도, 이들은 시민 사회를 선한 사회의 지표(a point of reference)로 가정하였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내부화된 종속 문제를 해결해야하는가. 이것이 그들의 포인트이다. 니체, 프로이트, 베버는 20세기 사회과학이론을 예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은 현대 사회의 억압적 속성을 강조하면서 이것으로부터 초월하려고 시도한다. 예들들어, 니체의 <도덕의 계보Genealogy of Morals>는 매우 도발적이고 충격적이어서 독자들을 당황케한다. 재미있게도, 니체, 프로이트 그리고 베버를 이해하는 한가지 방법은 맑스와 관련시키는 데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들과 맑스의 차이점이란 경제문제로부터 이탈해서 권력과 지배로 옮겨갔다는 데 있다. 그들과 맑스 사이에는 연속성 또한 존재한다. 맑스와 니체와 프로이트는 인간 의식의 비판을 강조하는 비판 이론가들이었다. 우리의 마음에는 무엇이 들어있고 그것은 어떻게 마음 속에 들어갔는가. 즉 그들은 우리의 실존과 관련한 의식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것은 이전의 헤겔과 그후 청년 헤겔파로서의 맑스에 의하여 다루졌던 것이다. 맑스는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에서 인간의 소외 문제를 다루었다. 니체와 프로이트는 맑스의 전철을 밟으면서 인간의 의식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고자 시도하였다. 재미있게도, 니체는 방대한 비판 이론을 전개하였으나 우세한 비판적 관점을 얻지는 못하였다. 헤겔과 맑스를 추종하는 비판 이론가들과 20세기의 비판 이론가들은 선한 사회와 인간실존의 해방에 대한 아이디어을 갖고있었다. 그 비판이론가들은 우세한 비판적 관점을 통하여 사회 현실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달랐다. 사실, 니체는 비판이론가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이었다. 20세기 프랑스 학자, 미쉘 푸코(Michel Foucault)는 니체 위에서 가장 일관성있게 비판이론을 전개하였다. 푸코는 선good의 본질과 의지를 비판함이 없이, 인간의 실존과 의식을 비판하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바로 니체가 시도했던 것과 똑같다. 이것은 다소 우스꽝스럽다. 이를테면, 선한 결과에 대하여 무지하면서, 선한 결과의 원인이 되는 조건들에 대하여 비판할 수 있는가. 또 선한 결과에 대하여 무지하면서, 선한 사회의 개념과 선의 본질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을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니체가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달랐다. 프로이트는 헤겔과 맑스를 능가하는 비판이론가였다. 프로이트는 감각적 경험을 통하여 인간의 의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였다. 프로이트는, 맑스가 그랬듯이, 인간 의식의 문제는 인간의 감각 경험에 관련시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점에서 프로이트는 맑스와 헤겔의 비판 이론과 동일선 상에 있다. 이들의 비판 이론은 단지 의식을 급진화(radicalize)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당신은 오직 감각적 경험 위에서만 당신의 의식과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와 맑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맑스에 따르면 감각 활동(sensuous activity)은 경제적 생산이고 경제적 활동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따르면 감각 활동은 성적 경험(sexual experience)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전(our earlier life)의 억압된 성적 경험 위에서 우리의 의식을 비판해야 한다. 이것이 프로이트 비판이론의 포인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가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이 옳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오류이다. 따라서 당신은 이전의 모든 성생활 경험을 되짚어보는 과정을 통하여, 억압되었던 나쁜 기억들을 찾아내야한다. 그때 비로소 건강한 정신생활을 회복할 수 있다. 한편, 베버의 비판 이론은 이것보다 더 복잡하다.

2. 역사적 맥락에서본 니체

니체의 중심아이디어는 인간의 마음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는 것이지 우세한 비판적 관점(critical vintage point)을 얻는 데 있지않다. 니체의 포인트는 선한 사회의 원칙과 선(good) 자체를비판의 도마에서 비판하자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선과 선한 사회good and good society의 개념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것이 니체의 포인트(project)이다. 또 이것은 니체의 대단한 지적 모험이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시도는 원을 직사각형으로(squaring of the circle) 만들과자 하는 시도였는지 모른다. 알다시피, 니체는 권력 문제를 방대하게 다루면서 매우 도발적으로 전개하였다. 니체는 매우 도발적(provocative)이었다. 니체는 루소와 비슷했지만 루소보다 더더욱 심했다. 니체는 루소보다 훨씬 더 우리를 충격에 빠뜨렸다. 잘알다시피, 니체의 내면은 매우 감성적(sensitive)이고 인간적(humanistic)이었다.

1844년 니체는 독일의 라이프찌히 근처의 작은 마을인 로켄Rocken에서 태어났다. 니체의 부친은 루터파 목사였고 그의 가족은 모두 루터파 성직자였다. 니체는 매우 종교적인 감성 안에서 성장하였다. 여러 면에서 니체의 작품은 그의 부친과 루터파 개신교에 대한 반작용을 담고있다. 이것은 니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하여 심한 감정을 갖고 있는데 니체 또한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을 심하게 공격하였다. 이것은 그의 부친에 대한 반란이라고 볼 수 있다. 니체는 자신의 성장 환경에 대하여 반란을 시도하면서 자신을 찾고자했던 것같다. 따라서 니체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관용을 베풀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당신도 니체처럼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당신도 부모에 대하여 반항하고, 어린시절 지켰던 원칙들에 대하여 반발한다.

1864년 니체는 실제로 루터파 목사가 되기위하여 본 대학(University of Bonn)에 입학하였다. 니체는 신학을 공부했다. 사실, 신학교에 입학하는 많은 학생들은 얼마 지나지않아서 무신론자(atheist)가 된다. 흔히, 신학교는 무신론자를 위한 최고의 훈련 장소라고 말한다. 니체는 1년 후에 휴학하면서 자신이 무신론자가 되어가고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65년 니체는 라이프찌히 대학애서 철학을 수학하였다.

1868년 니체는 생애의 매우 중요한 사건을 접하였다. 니체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리차드 바그너(Richard Wagner)를 만났다. 그들은 한동안 매우 친한 친구가 되었지만 나중에, 서로 증오하는 원수사이가 되었다. 후술하겠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1869년 니체는 학위를 받기 전에 바젤대학교의 고전철학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 했다. 1877년까지 니체는 자신의 생애에 단 8년 만을 가르쳤다. 니체는 교직에서 물러난 후로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실 마리Sils Maria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873년 니체는 독일철학자 폴 레Paul Ree를 만났다. 폴 레는 니체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따.

1882년 니체는 폴 레Ree로부터 루 살로메Rou Salome를 소개받았다. 그후 살로메는 니체의 유일한 열정적 애인이 되었다.

1888년 니체는 정신병이 발발했다. 당시 니체는 이탈리아의 제노아에 있었는데 거리를 걷다가 마부가 말을 세게 채찍질하는 것을 보았다. 니체는 달려가서 말을 부여잡고 울기 시작하였고 그것으로 그의 정신은 나가버렸다. 니체는 깊은 정신병에 빠졌고 더이상 회복하지 못했다. 인간 니체는 인생의 큰 고통에 빠진 것이었다. 니체의 모친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아들을 돌보았다. 그후 운나쁘게도 여동생인 엘리지베스가 니체를 돌보았다.

1900년 니체는 여동생 엘리자베스의 집에서 타계하였다. 여동생 엘리자베스는 니체가 출생한지 2년 후에 태어났는데 1885년 버나드 포스터Bernhard Forster와 결혼하였다. 버나드Bernhard는 원조 나찌(proto-Nazis)로서 열광적인 반-유대주의자(Anti-Semite)였다. 그는 아리안족(Aryan race) 우월주의 아이디어에 매료되면서 실제로 파라과이에 아리안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엘리자베스와 함께 순수 게르만 공동체에서 생활하였다. 아직도 몇몇 공동체가 남아있고 네오나찌들이 방문한다. 현재, 그들은 생김새가 인디안들과 많이 닮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수 아리안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이상 푸른 눈을 갖고 있지않고 블론드 머리도 아니어서 이제는 지역민들과 결혼한다. 어째든 이것이 버나드Bernhard가 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버나드Bernhard는 파라과이의 게르만 공동체에서 자살하였고 엘리자베스는 독일로 돌아왔다. 이전에 니체는 엘리자베스가 버나드와 결혼하자 그녀와의 관계를 끊었다. 니체는 반-유대주의자인 매제와 거리를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니체는 반-유대주의를 대단히 경멸했다. 그리고 이것은 니체가 리차드 바그너와 단절한 이유이기도 하였다. 재미있게도, 엘리자베스는 1894년 니체 아카이브(Nietzsche Archive)를 설립하였다. 그때 니체는 미쳤을 때인데 출간되지 않은 방대한 원고가 있었다. 그녀는 그 원고들을 아카이브에 옮겨놓고 최대한 남용하였다. 그녀는 정치적으로 우익에 가담하였고 히틀러를 추종하는 나찌즘이 등장하자 니찌 아이디어를 니체로부터 조작하기 위하여 니체의 방대한 문서들을 모았다. 그래서 오랜동안 니체는 나찌즘의 이념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1935년 엘리자베스가 타계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그녀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니체의 원래 작품과 엘리자베스가 편집하여 발행한 작품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니체의 원작을 읽은 사람들은 니체와 나찌즘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는데 그것이 정상이다. 어쩼든 그것은 복잡한 이야기이다. 그럼, 루 살로메Lou Salome, 폴 레Paul Ree, 그라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삼각관계를 살펴보자.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졌다. 폴 레는 실제로 매우 유복한 독일 유대인 가문 출신의 철학자였다. 폴레는 매우 좋은 친구였고 니체는 구제불능형의 인간이었다. 니체의 인간혀은 사랑에 빠지고나면 결별하는 스타일이었다. 니체는 애인을 아주 사랑하든지 아니면 아주 증오했든데 그 중간은 없었다. 니체의 주요작품인 <도덕의 계보Genealogy of morality>의 아이디어는 폴 레로부터 빌려온 것이었다. 폴 레는 니체에게 젊고 똑똑한 숙녀인 루 살로메를 소개시켜주었다. 곧 니체와 살로메는 사랑에 빠졌다. 이 때가 1882년이었다. 살로메는 21살이었고 매우 아름답고 영리하였다. 살로메는 프랑스 출신이었는데 상트 페테스부르크St. Petersburg에서 태어났다. 니체는 그녀와 같이 살기를 희망하였지만 결혼아이디어를 반대하였다. 니체가 폴 레에게 보냈던 편지 내용으로 볼 때 니체는 폴 레와 살로메가 서로 연인임을 몰랐던 것 같다. 한동안 이들의 삼각관계는 지속되었다. 그러나 니체는 구제불능형이었고 살로메는 온전한 여성이었다. 살로메는 니체의 비정상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니체는 베를린으로 옮겨갔고 한동안 폴 레와 걑이 지냈다. 재미있게도, 루 살로메 또한 결혼을 반대하였다. 당시 19세기에 결혼과 성에 대하여 대화한다는 것 자체는 매우 급진적인 아이디어였다. 나중에 루 살로메는 언어학자인 안드레아Carl Andreas와 결혼하였다. 한때 루 살로메와 폴 레와 니체는 책 한권을 같이 썼었는데 출간하지는 않았다. 한편 니체는 소년시절부터 음악광이었다. 니체는 바그너의 피아노 스크립트인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and Isolde>를 읽고서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것은 니체가 찾고있었던 음악이었다. 니체는 영웅숭배자다.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니체를 원조-나찌(proto-Nazis)로 보기도 한다. 니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강하고 아름답고 영웅적인 사람들을 좋아하였다. 니체는 이러한 것들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발견하면서 감성주의적인 이탈리아의 로시니Rossini나 고전적이고 냉정하고 가식적인 독일의 베토벤을 거부하였다. 니체는 새로운 음악을 바그너로부터 발견하면서 바그너에게 매료되었다. 사실, 바그너는 자신의 마지막 부인이자 작곡가 리스트Franz Liszt의 딸이기도 한 코시마 리스트Cosima Liszt의 영향력 아래서 점점 반-유대주의자가 되어갔다. 재미있게도, 바그너는 오페라 <파르시팔Parsifal>을 통하여 심미적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는데 니체는 그러한 바그너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니체는 그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갈라섰다. 니체는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와 <파르시팔Parsifal>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파르시팔>은 오라토리움인데 박카스적(Bachian)이면서 신의 희생양(sacrifice of the lamb of God)을 내용으로 하고있다. 즉 <파르시팔>은 에수의 희생과 예수의 피에 대한 집단 숭배를 연출하는 것이었다. 물론, 니체는 이런 류에 관심이 없었다.

3. 니체의 주요작품

니체의 최초 작품은 1872년의 <비극의 탄생The Birth of the Tragedy>이었다. 니체는 그리스 문명의 대단한 숭배자였다. 니체는 전인류의 역사는 디오니시안Dionysian 원칙과 아폴로니안Apollonian 원칙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라고 보았다. 알다시피, 디오니시안이란 감성적인 것(sentiments),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 등을 말한다. 그리고 아폴로니안이란 이성를 말한다. 그리고 이 책 <비극의 탄생>은 계몽주의(enlightenment)와도 구별된다. 알다시피, 계몽주의란 이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시안원칙은 아폴로니안원칙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다. 니체는 포스트-모던 성향이었으므로 게몽주의와 과도한 합리주의(excessive rationalism)를 거부하였다. 이것은 실제로 니체가 바그너를 좋아했던 이유이다. 니체는 바그너에게서 다이오니시안 요소과 아폴로니안 요소가 합성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열정과 이성의 통일을 말한다. 바그너는 <비극의 탄생The Birth of Tragedy> 좋아하였다.

1879년 니체는 <인간적인 너우나 인간적인Human, All Too Human>을 썼는데 그것은 볼테르에서부터 시작하는 자유사상가의 물화(reification)아이디어를 내용으로 하고있다. 니체는 자유사상가(free thinker)였는데 낭만주의(Romanticism)와 단절하면서 폴 레를 따라갔다. 한때 니체는 선과 악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아이디어를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아야 할뿐만 아니라 상식적인 선의 개념과 원칙을 비판할 필요가 있다면서 <도덕의 계보(Genealogy of Morality)>를 쓰게 된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니체와 바그너는 서로 충돌하였다. 재미있게도, 니체는 유대-그리스도인 전통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고 있었지만 반면에 바그너는 <파르시팔>을 쓰면서 성배(Holy Grail)를 신으로 받들면서 심미적 그리스도인이 되어갔다. 바그너는 아마도 <도덕의 계보>를 읽지 않았던 것같다. 바그너는 그 책에 관하여 듣고서는 불편해하면서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1881년 니체는 세인트 모리츠St. Moritz 근처의 실 마리Sils-Maria를 방문하고서 이 도시에 푹 빠지게 되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Genealogy of Morals>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작품들을 발병할 때까지 여기서 썼다.

1883년에서 85년까지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썼다. 니체는 이 책에서 유대-그리스도인 전통을 공격하였다. 니체는 그 전통의 억압적인 요소들을 제기하고자 하였다. 니체가 숭배하는 영웅은 짜라투스트라였다. 짜라투스트라는 페르시아 예언자인 조로아스터를 말한다. 니체는 그들 두고 최초의 비도덕주의자(immoralist)라고 추켜세우면서 우리는 감히 비도덕주의자가 되어야한다고 일갈하였다. 니체는 억압적인 유대-그리스도 도덕과 허무주의 사이에서 중도(middle way)를 찾고자했던 것이었지 그 모든 것을 버리고자 하지는않았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초인(Ubermensch)아이디어를 개발하여 전개하였다. 초인이란 기본적으로 자기융합적이면서 자기지양적인 인간을 말한다Ubermensch is basically the person who brings his life under his own control. 이것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초인과는 다르다. 초인에 관한 고정관념(stereotypes)은 블론드 머리의 독일인 슈퍼맨을 말하는데 이것은 나찌 아이디어였다. 이제 니체는 초인 철학을 갖추게 되었다. 초인은 자기-주인성(self-mastery)을 성취한 인간으로서 생활 속에서 자기자신을 통제하면서도 소외된 인간이다. 실제로,초인은 억압적인 문화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자신을 진정으로(authentically) 표현한다. 이것이 초인이다. 어떤 면에서 초인은 부처(Buddha)와 같다. 초인은 부처 아이디어였지만 수동적인 부처는 아니었다. 니체는 유대-그리스도인 전통 만큼이나 불교를 싫어했다. 니체가 볼 때 불교는 너무 수동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니체는 능동적인 불교를 원했다. 니체에 따르면 자기 삶의 주인성을 이룩한 초인들은 행동을 통하여 자신의 느낌과 심지어 관능적(sensual) 본질도 표출하여야 한다. 그 초인은 영원회귀(the eternal return)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초인은 맑스가 말하는 물화된 의식(reified consciousness)의 강철법(iron law)를 깨트릴 수 있다. 즉, 법이라는 형식으로 물화된 언어(reified words)는 깨질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지배도 있을 수 없다. 이를테면, 초인은 세계에서 자신을 실현(realize)하면서 외부세계의 지배를 받지않을 것이다.

+ <도덕의 계보Genealogy of Morals>에 관하여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폴 레로부터 빌려왔던 계보학적 방법론을 재구성하여 도덕의 기원을 밝혀내었다. 선과 악은 다른 것인가. 선과 악은 어디서 오는가. 이것이 니체의 포인트이다. 니체에 따르면 게보학적 방법론의 본질은 선과 악을 이분법(dichotomy)적으로 비교하면서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구별하고 그것들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캐묻는 데 있다. 니체는 우세한 비판적 관점을 필요로 하지않았다. 선과 악의 개념은 선악 구별의 관점에서 비판될 수 있다. 이것이 계보학적 방법론의 핵심이다. 재미있게도, 푸코는 말하기를 "나에게 선에 대한 개념을 말해보라. 나는 그 선이 과거에 악이었다는 것을 밝혀주겠다. 또 당신이 생각하는 악을 말헤보라. 나는 그 악이 옛날에 윤리적이었다는 것을 밝혀주겠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계보학적 방법론의 핵심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도덕성이 어떻게 건축되었는지, 한쪽의 관점에서 다른쪽을 비판하고 또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이 다른쪽 관점으로도 똑같이 비판하는 것이 계보학적 방법론이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악(evil)개념의 기원을 노예성과 한(slave morality and ressetnment)를 통하여 기술하였다. 또 가장 논란이 되는 이슈중에 하나인 블론드 짐승(the blonde beast)과 먹이감(birds of prey), 우상의 기원(origins of ideals)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마지막으로 초인 아이디어, 처벌, 악한 의식, 그리고 죄(guilt)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니체는 이것들을 통하여 계보학적 방법론을 재창조하였다.

4. 계보학적 방법론의 재-구성

니체는 의미심장게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자신들에게 무지하다. 우리는 선한 이성을 갖추고서도 결코 우리자신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We are unknown to ourselves. We knowers; and with good reason. We have never looked at ourselves."라고 하였다. 이것이 니체 비판이론의 포인트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홉스, 로크, 루소, 니체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당신은 자신을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따라서 니체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의식을 비판하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당신은 윤리적이라고 믿어지는 개념들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을 필요가 있다. 이 윤리 개념들은 어디서 나오는가. 니체의 핵심 포인트는 선악good and evil 개념의 기원과 선악의 위상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이 실제로 어떻게 건축되었는지 포착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도덕적 가치에 대하여 비판해야한다. 이것은 정말 멋진 아이디어이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니체에 따르면 이러한 가치에 대한 가치는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아서는 안된다. 따라서 무한퇴핻적으로 그 가치의 가치에 대한 비판, 그 가치의 가치의 가치에 대한 등등의 비판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니체는 궁극적인 가치가 없는 비판을 제안했던 것이다. 니체는 최종적인 가치, 이를테면, 옳음에 대한 본질가치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허무주의적으로 "어떤 것도 괜찮다(anything goes)" 라고도 제시하지 않는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의 비참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면서 흥분(upset)할 수 있다. 니체는 채찍질당하는 말을 보면서 너무 흥분한 나머지 달려나가서 그 말을 부여잡았다. 니체는 우리 인간이 동정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론은 푸코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 좋음/나쁨 그리고 선/악의 다른 기원
우리는 종종 좋은것(good)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이기적(egoistic)이 아닌 것으로서 생각한다. 그러나 니체는 그렇지않다고 말하였다. 니체에 따르면 좋은것(good)이란 그 기원으로 볼 때 비-이기적(non-egoistic)인 것과 관련이 없다. 좋은것은 나중에서야 비-이기적인 것으로서 건축될 수 있었다. 이것이 좋은것good에 대한 니체의 포인트이다. 그럼, 좋은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니체에 따르면 좋은것은 지배 종족(master race)로부터 나온다. 지배종족은 자신들을 좋은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지배종족은 어두운 피부색을 갖고있는 토종들을 나쁜것으로서 간주하고 종석시키고자 한다. 보다시피, 좋은것(good)과 나쁜것(bad)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제들의 경우는 다르다. 알다시피, 니체는 성직자가 되려고 공부하고 있었지만 사제를 정말 싫어하게 되었다. 사제(priests)들은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다닌다. 그들은 스스로 떳떳한 그리스의 신이나 반-신(semi-god) 같은 기사 귀족계급이 아니다. 니체에 따르면 기사 귀족(knight aristocratic)신분은 매우 아름다운 몸매를 갖추고있다. 고대 그리스의 남성들과 여성들은 자신들을 좋은것(good)으로 간주하였고 자신들 이외의 좋지않은 사람들을 불구자(crippled)로서 나쁜것(bad)으로 간주하였다. 니체는사제들이 권력을 잃어버리게 되자 이 권력상실을 증오로 대체하였다고 말한다. 즉, 사제들은 권력자들에 대하여 증오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그 권력상실자들은 권력자들을 단순히 나쁜것(bad)으로서가 아니라 악(evil)으로서 투사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제, 문제는 좋은것과 나쁜것 사이의 대조가 아니라 선(good0과 악(evil)사이의 대조에 있다. 그리고 선과 악으로서 드러난 것은 권력관계이다.

+ 노예성과 한(slave morality and ressentiment)
니체에 따르면 사제국가(the nation of priests)는 유대인 집단이었고, 그리스도교가 등장하면서 사제국가는 전복되었다. 유대인들은 고통받는 자와 가난하고 힘없는 자만이 선하고, 반면에 부자와 권력자는 악하다고 말한다. 니체는 노예들이 최초로 도덕적 반란을 일으켰던 때는 유대인 반란이라고 하였다. 유대인 반란은 이 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유대인 반란은 승리를 하였고 우리시대의 지배적 도덕성으로 자리잡았다. 니체는 유대-그리스도인 도덕, 특히 그리스도인 도덕을 비판하면서 역설적으로 그 도덕을 십자가에 달린 신(God on the cross) 이라고 일갈하였다.  그 도덕은 죄없는 자로 하여금 인류의 죄를 짊어지게 하는 것, 즉 인류구원을 위한 신의 자기-정죄(self-crucifixion)이다. 이것이 한(ressentiment)이다. 이제 그 적(enemy)은 단순히 나쁜것이 아니라 악(evil)이 되었다.

+ 블론드 짐승(blond beast)
니체에 따르면 모든 숭고한 종족들의 중심에는 먹잇감을 찾는 짐승들이 존재한다. 그 대단한 블론드 짐승들은 망가뜨리고 승리하기 위하여 으르렁댄다. 니체는 영웅숭배자였다. 그럼, 그 짐승은 독일인 블론드인가. 니체는 유럽은 오랜 세기동안 블론드 게르만 짐승의 독무대였다고 말하였다. 니체는 옛날 게르만 민족과 오늘의 게르만 민족사이에는 공통된 아이디어가 없다고 하면서 혈연관계는 제쳐두자고 하였다. 이것은 나찌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니체에 따르면, 권력을 갖는다(being powerful)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 소원을 현실화시키는(realizing yourself)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니체는 현재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평준화(levelling)라고 한탄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어떤 것도 얻지 못하면서 점점 졸아들고 있는데, 우리의 육체는 그리스인 만큼 강하지 못하고, 기질은 더 온순해졌고, 이성은 더 영악해졌고, 생활은 더 편안한 것을 선호하게 되면서 죽도 밥도 아닌 나쁜 냄새(bad air)가 난다고 일갈하였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현대성인가. 우리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 뜨뜻해졌고  모두 똑같이 되어버렸으므로 우리자신을 살찌울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것이 현대성에 대한 니체의 포인트이다.

+ 먹이 새(birds of prey)
니체는 양(lamb) 무리들이 먹이 새 무리들을 향하여 원한을 품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또 먹이 새 무리가 어린 양을 집어간다고하여 먹이새 무리를 비난할 이유도 없다고 하였다. 양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먹이 새들은 악(evil)하다. 어떤 것도 먹이 새 같지 않거나 양과 같다면 선(good)하다. 지배하는 자는 나쁜 자이고 고통받는자는 좋은 자이다."라고 한다. 반면에 먹이 새들은 반박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이 선한 양들에 대하여 어떤 악감정도 품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부드러운 양고기 맛보다 나은 것은 없기때문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다소 혼동스럽다. 니체의 포인트는 개인의 자기 충족(self-fulfilment)이었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우리 자신을 알차게 채울 수가 없다.

+ 이상이 조작되는 작업실(The workshop where ideals are fabricated)
니체에 따르면 모자람은 이상이 조작되는 작업실에서 완전으로 바뀐다. 또 보복하지 못하는 불능(impotence)은 선(goodness)으로 위장된다. 이를테면, 당신은 불임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그 불능을 선이라고 내세운다. 사실, 당신은 선하지 않고 선에 대한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에게 굴복하면서도 당신은 그것을 복종이라고 부른다. 재미있게도, 당신은 그의 우월성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가 두렵기 때문에 복종한다. 더우기 당신은 좋은 개념까지 고안해내는데 '복종은 좋은 것이다' 라고 정의내리게 된다. 이것이 이상의 작업실에 대한 니체의 포인트이다.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면서도 원수를 증오한다. 이것은 진짜 거짓말이다.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배알이 찢어지게 원수를 싫어한다. 이것이 니체의 포인트이다. 분명, 이상이 창조되는 작업실이 존재한다. 이곳이 바로 정의의 승리(triumph of justice)가 존재하는 곳이다. 사실, 당신은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다. 절대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당신은 원수가 아니라 불의를 미워한다. 재미있게도, 당신은 원수를 부당하고 불공정한 것으로서 투사하면서 그 원수가 자기보다 낫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않는다. 니체에 따르면 사회의 이상ideals은 이상의 작업실에서 창조되고 그 이상은 전부 다 악한 거짓말로 조작되었다. 니체는 사회의 이상은 진실되어야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니체의 포인트이다.

+ 초인
니체는 좋은것과 나쁜것, 선과 악은 서로 다투어 왔는데 이제 선과 악이 우리를 지배하게되었다고 하였다. 르네쌍스는 찬란했다. 그것은 우리의 고전아이디어를 재건축하는 것이었다. 재미있게도, 니체는 르네쌍스로 인하여 유대주의가 다시 승리들 거두게 되었다고 하였다. 분명, 그것은 반-유대주의가 아니었다. 사실, 반-유대주의는 유대인들보다 루터파를 더 적대시했다. 니체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독일의 프롤레타리아와 영국의 원한운동(English Ressentiment Movement) 덕분에 종교개혁(Reformation)이 가능했다. 이 종교개혁이 바로 니체의 진정한 원수였다.

+ 처벌의 기원, 기억의 문제
우리는 망각해야 한다. 망각이란 나빴던 기억을 억압하는 것이다. 억압하기위해서는 망각 기술nmemo-techniques이 필요하다. 망각해야 할 것을 망각하는데는 고통이 가장 유용한 방법이다. 그러나 니체는 독일인들은 끔직한 방법으로, 즉 돌로 치고 바퀴를 부수고 양쪽으로 찢고 야생마를 밟아 죽이면서까지 기억을 남기고자 한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니체는 급진적인 비판 이론가였다. 잘못된 아이디어와 거짓에 대한 비판은 궁극적 가치(ultimate value)를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진리를 얻어라. 이상(ideal)은 다름아니라 세계 내에서 진리자체를 얻고 세계를 정복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것이 니체의 포인트이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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