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는 한때 자신은 맑시스트가 아니라고 밝혔었다. 이것은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 맑스는 창조적이었고 새로운 주장과 증거에 직면했을 때는 자신의 주장을 바꿀 정도로 열정적인 인간이었다. 또 맑스는 여러 얼굴을 하고있다. 맑스는 헤겔관념론을 기반으로 청년헤겔파로서 소외문제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맑스는 헤겔의 다소 애매한 소외개념에 실망하였다. 맑스는 그 헤겔의 소외alienation를 현실적으로 구체화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환원주의적 오류를 범하였다. 맑스는 자신 고유의 소외개념을 포기하였고 급하게 그리고 다소 별 뜻 없이 유물론자로 전향하였던 것이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역사적 유물론과 관련하여 "문제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라고 하였고 또 "진리는 실제적인 문제(practical question)" 라고도 하였다. 맑스는 그 후 6개월도 안 되어서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 에서는 실증주의 학자가 되어있었다. 맑스는 이론의 전개에 있어서 개인과 개인이 속한 실제적 사회환경에서 이론의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스스로 입증가능한 가설을 제시하였다. 맑스는 어떤면에서 실증주의 사회학자로 남아있다. 맑스는 실제로 자신이 갖고있던 원래의 생각을 바꾸었으므로 일반적인 맑시스트보다 훨씬 덜 독단적이게 되었다. 맑스의 가장 중요한 이론중에 하나가 바로 맑스의 역사론이다. 맑스의 역사론에는 모순과 긴장이 교차되지만 놀랄만큼 탄탄한 명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초기 사회의 형성과 발전댠계와 관련하여 많은 학자들은 특정한 아이이어를 가지고 사회진화의 유형과 과정을 정립하고 해석하였다. 몽테스키외나 애덤 스미스도 그러한 학자들에 속하였지만 맑스는 독특하게도 그들과는 달랐다. 맑스는 자신의 역사론에서 매우 강한 어조로 이전 단계의 사회에서 다음 단계의 사회로 변천하게 하는 기계적 동력, 즉 사회진화를 견인하는 인자(agent)에 대하여 대단히 많은 중점을 두었다. 맑스는 이러한 점에서 진짜로 사회학자들 중의 다윈이라고 할 만하겠다. 맑스는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이루냈던 것을 자신의 역사론을 통해서 이루어 낼 수 있었다. 다른 힌편으로 맑스는 진정한 이론가였다. 진정한 이론가란 원인 기계론(causal mechanism)을 통하여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일관성을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맑스는 일관적인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의 막스 베버는 위대한 사회학자였지만 그런 이론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물론 맑스 역사론의 불리한 점은 역사가 그가 틀렸음을 입증했다는 것이다(history proved him to be wrong). 이것은 맑스의 단점이 아닐 수 없겠다. 이론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실에 입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이란 긴장된 명제들을 담고있고 그러한 명제들은 검증되면서 이론이 전개되는 것이다. 맑스의 이론은 맑스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맑스의 이론은 경험적 실재에 훨씬 잘 들어 맞았다.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와 <그룬트리세Grudrisse>가 그렇다. 그룬트리세란 밑그림(sketch) 또는 개요(outline)란 뜻이다. 이 <그룬트리세>는 1,000 페이지로 되어있고 수작업을 통해서 1857년과 1858년 사이에 매우 급하게 작성되었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와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글이 마무리 되어갈 즈음에 스스로 오류를 발견하게되자 처음부터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10년 가까이 지나서 <자본론Das Kapital>을 쓰게 된다. 그러면 맑스의 <그룬트리세>는 정말로 잘못된 내용이었는가.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한편 영국의 사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um)은 이 <그룬트리세>를 <Pre-Capitalist Economic Formations>이란 제목으로 영역하였다. 에릭 홉스봄은 현재 90세로서 생존해 있고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다.
2. <그룬트리세>의 주요내용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로부터 <그룬트리세>로 옮겨가게 됐던 주된 아이디어는 무엇이었을까. 맑스가 1845년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최초로 도입한 아이디어는 생산양식(modes of production)이었다. 맑스는 인간은 의식과 종교 등에서 동물들과 구별되지만 무엇보다 생산을 시작하면서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세계를 변화시키기 시작하면서 동물들과 구별되기 시작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맑스가 밝힌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이다. 이러한 통찰은 물론 간과될 수도 있겠지만 매우 중요한 명제이다. 인간이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생존해 왔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다. 인간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인간들은 먹기위하여 무엇을 생산해 내었을까. 인간들은 어떤 집에서 살았을까. 인간들은 어떻게 집을 지었을까. 인간들은 어떻게 돌아다녔을까. 인간들은 수레바퀴를 알았을까. 인간들은 불을 지필 수 있었을까, 없었을까. 인간들은 어떻게 사슴을 죽였을까. 인간들은 어떤 무기를 가졌을까. 인간들은 식물을 재배할때 어떤 도구를 사용했을까.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맑스는 이러한 생산양식이 단지 재생산으로서만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분명 생활양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양식은 단지 경제에만 한정될 필요는 없겠다. 사람들은 다양한 생활양식을 갖고있다. 이를테면 당신은 술마시고 밥먹고 누울 집을 찾는다. 당신은 먼저 배를 채우고 안전하게 비를 피한 후에야 비로소 생각다운 생각를 시작한다. 이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합리적인 주장이다. 역사와 관련하여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와 <그룬트리세>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역사라는 것은 증가하는 노동분업에 견인되어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맑스는 그 아이디어를 애덤 스미스로부터 직접 빌려왔다. 사실 애덤 스미스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주장하였다. 반면에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는 역사라는 것은 사소유권을 향한 점진적 운동이라고 보았다. 맑스는 사소유권을 향한 운동이 역사를 견인하면서 끌고나아가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맑스는 인간역사라는 것은 노동하는 주체와 객체적 조건사이의 틈이 점진적으로 벌어지면서 분리해가는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맑스가 <그룬트리세>에서 주장한 노동하는 주체와 노동자의 객체적조건 사이의 점진적 분리라는 아이디어는 맑스 자신이 스스로 잊어왔던 소외의 개념을 다시 불러들인 것에 불과하다.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 소외개념을 사소유권과 관련지었고 소외란 다름아닌 노동하는 주체, 즉 노동자와 노동자의 객체적조건 사이의 점진적 분리로써 재해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또 한가지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와 <그룬트리세Gruntrisse>사이에 큰 차이점이 있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역사는 매우 결정론적(deterministic)이고 일-직선적(uni-linear)인 것으로 보았다. 맑스는 자신의 후반기에 다시 이 견해로 돌아오게 되고 또 맑시스트의 여러 분파들은 이 견해를 추종하게 된다. 일-직선적이라는 것은 모든 사회체는 동일한 출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의 과정을 순서대로 통과하여 진행하게 되고 마침내는 공산주의에 도착한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따라서 모든 사회는 직선적 과정으로서 이러한 각 단계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므로 이전 단계의 사회는 반드시 순서상 다음 단계의 사회로 이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맑스는 이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하아 원인 기계론(causal mechanism)을 이용하여 밝혔다. 반면에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 이와는 다른 식으로 역사발전이론을 전개하였다. 맑스는 인간역사에 대하여 어지럽게 기술하면서 역사는 다-직선적(multi-linear trajectory)이라고 말하였다. 맑스는 직선적 궤도에서 멋지게 다선적 궤도로 옮겨갔고 비록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완전히 망쳐놓았지만 그 당시 잘 들어맞았던 역사발전단계 이론의 명제를 생산해내게 되었다. 역사발전단계 이론은 더 나아가서 나중의 역사진화(historical evolution)에도 훨씬 더 잘 들어맞게 된다.
3.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 있어서 노동분업의 핵심
그러면 잠깐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로 돌아가자. 이 책 <독일 이데올로기>의 핵심 아디디어는 노동분업(division of labor)이다. 맑스는 생산양식을 규정하면서 자신이 관찰하였던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변증법적 상호작용(dialectical interaction)을 기술하였다.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이란 기본적으로 기술, 원료(raw material), 노동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생산관계(relation of production)란 맑스가 조어한 용어로서 재산관계(property relations)라고도 하는데 상호작용이나 노동분업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변증법적 상호작용이란 이미 언급하였듯이 맑스는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떤 사안에 대하여 아직 이해하지 못할때 이것을 '변증법적' 이라고 부른다고 말했었다. 따라서 '변증법적' 이라는 개념은 맑스에게 아주 확실한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변증법적' 이라는 것과는 다르게 '변증법' 은 기본적으로 상호적인 관계(interactive relation)을 말한다. 잘 알다시피 오늘날 사회학적인 용어로 인과 화살(causal arrow)이 양쪽으로 박히는 것을 말한다. 상호적인 관계란 단지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결정한다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발전을 방해할 수 있고 또 생산력이 바뀌면 새로운 생산관계가 그 발전된 생산력에 맞물리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변증법이다. 인과 화살은 이쪽에서 저쪽을 가리키면서 단지 결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다시 돌아오는 고리(feedback loop)안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맑스의 초기 공식에 따르면, 변증법은 분명 재산관계property relations에 이용된 것이 아니라 노동분업과 관련하여 이용되었던 것이다. 잘 알다시피 노동분업이론은 애덤 스미스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들은 각 나라의 생산력의 발전, 노동분업, 그리고 내적 상호작용에 관련되어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회, 즉 수렵채집사회, 목축사회, 농업사회, 상업사회 등 이들 사회는 각각 서로 다른 단계의 노동분업에 대응하고 있다고 하였다. 맑스는 이 노동분업을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처음으로 시도하고자 했다. 또 맑스는 재산관계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재산관계 또한 변화한다. 그러나 이 변화하는 재산관계는 증가한 노동분업의 산물일 뿐이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재산관계는 기본적으로 노동분업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노동분업의 단계을 안다면 재산관계property relations 또한 알게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일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이 노동분업과 재산관계에 관한 이론은 1950년대 맑시스트에 의하여, 특히 소비에트 연방에 살고있던 맑시스트에 의하여 재발견되기에 이르렀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오소프스키Ossowski는 1957년 <독일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를 재해석하였는데 그전까지 맑스이론은 공산주의의 기초가 된 재산관계이론이었다. 따라서 사소유권을 폐지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사람들 사이의 평등 뿐만아니라 역동적인 경제발전 또한 기대할 수 있었다. 잘 알다시피 소비에트 연방은 사소유권을 폐지하였다. 그렇지만 소비에트 연방은 평등한 사회였는가. 그렇지 않았다. 그러면 역동적인 사회였는가. 그렇지도 않았다. 오소프스키Ossowski는 맑스를 재발견하면서 맑스가 강조했던 것은 재산관계가 아니라 그것은 바로 노동분업이라고 역설하였다. 물론 당시 공산주의사회에도 노동분업이 존재하였지만 적절하지 않았고 그것은 오히려 불평등을 초래하였다. 어쨌든 이것은 재미있는 제안이었고 오소프스키는 서방사회학자들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4. 생산양식들(modes of production)
맑스는 댜양한 생산양식을 논하였다.
+ 첫번째 생산양식: 부족제(tribalism)
3.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 있어서 노동분업의 핵심
그러면 잠깐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로 돌아가자. 이 책 <독일 이데올로기>의 핵심 아디디어는 노동분업(division of labor)이다. 맑스는 생산양식을 규정하면서 자신이 관찰하였던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변증법적 상호작용(dialectical interaction)을 기술하였다.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이란 기본적으로 기술, 원료(raw material), 노동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생산관계(relation of production)란 맑스가 조어한 용어로서 재산관계(property relations)라고도 하는데 상호작용이나 노동분업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변증법적 상호작용이란 이미 언급하였듯이 맑스는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떤 사안에 대하여 아직 이해하지 못할때 이것을 '변증법적' 이라고 부른다고 말했었다. 따라서 '변증법적' 이라는 개념은 맑스에게 아주 확실한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변증법적' 이라는 것과는 다르게 '변증법' 은 기본적으로 상호적인 관계(interactive relation)을 말한다. 잘 알다시피 오늘날 사회학적인 용어로 인과 화살(causal arrow)이 양쪽으로 박히는 것을 말한다. 상호적인 관계란 단지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결정한다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발전을 방해할 수 있고 또 생산력이 바뀌면 새로운 생산관계가 그 발전된 생산력에 맞물리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변증법이다. 인과 화살은 이쪽에서 저쪽을 가리키면서 단지 결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다시 돌아오는 고리(feedback loop)안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맑스의 초기 공식에 따르면, 변증법은 분명 재산관계property relations에 이용된 것이 아니라 노동분업과 관련하여 이용되었던 것이다. 잘 알다시피 노동분업이론은 애덤 스미스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들은 각 나라의 생산력의 발전, 노동분업, 그리고 내적 상호작용에 관련되어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회, 즉 수렵채집사회, 목축사회, 농업사회, 상업사회 등 이들 사회는 각각 서로 다른 단계의 노동분업에 대응하고 있다고 하였다. 맑스는 이 노동분업을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처음으로 시도하고자 했다. 또 맑스는 재산관계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재산관계 또한 변화한다. 그러나 이 변화하는 재산관계는 증가한 노동분업의 산물일 뿐이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재산관계는 기본적으로 노동분업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노동분업의 단계을 안다면 재산관계property relations 또한 알게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일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이 노동분업과 재산관계에 관한 이론은 1950년대 맑시스트에 의하여, 특히 소비에트 연방에 살고있던 맑시스트에 의하여 재발견되기에 이르렀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오소프스키Ossowski는 1957년 <독일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를 재해석하였는데 그전까지 맑스이론은 공산주의의 기초가 된 재산관계이론이었다. 따라서 사소유권을 폐지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사람들 사이의 평등 뿐만아니라 역동적인 경제발전 또한 기대할 수 있었다. 잘 알다시피 소비에트 연방은 사소유권을 폐지하였다. 그렇지만 소비에트 연방은 평등한 사회였는가. 그렇지 않았다. 그러면 역동적인 사회였는가. 그렇지도 않았다. 오소프스키Ossowski는 맑스를 재발견하면서 맑스가 강조했던 것은 재산관계가 아니라 그것은 바로 노동분업이라고 역설하였다. 물론 당시 공산주의사회에도 노동분업이 존재하였지만 적절하지 않았고 그것은 오히려 불평등을 초래하였다. 어쨌든 이것은 재미있는 제안이었고 오소프스키는 서방사회학자들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4. 생산양식들(modes of production)
맑스는 댜양한 생산양식을 논하였다.
+ 첫번째 생산양식: 부족제(tribalism)
이 부족제 사회에서는 매우 원시적인 생산양식이 가능한데 수렵, 어획, 채집 등으로서 노동분업은 매우 단순하다. 맑스는 성차별주의자sexist처럼 말하면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자연적인 노동분업만 존재하였다고 강조하였다. 여성들은 채집해서 모으고 남성들은 수렵을 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남성은 강하고 여성은 약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자연적(natural)인 것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부족제에서는 자연적 노동분업(natural division of labor)이 이루어졌다. .
+ 두번째 생산양식: 노예제(slavery)
맑스는 여기 노예제에서 생산력이 발전하기 시작한다고 하였다. 부족제 사회에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하여 모두가 밖으로 나가서 채집과 수렵과 어획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였다. 그 기술은 훨씬 더 생산적이었으므로 어떤 사람은 사냥하러 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노예를 고용하였고 노예는 그를 위하여 사냥을 대신하였다. 노예들은 주인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였다. 노예는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물자만 제공받았다. 이를테면 주인은 노예들 덕택으로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철학을 논하면서 드라마를 쓰고 시를 쓸 수 있다. 대신에 노예들은 들판에 나가서 농사를 짓고 주인의 필요를 위하여 잉여물을 생산하였다. 노동분업은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서 증가하게 되는데 그 결과로서 재산관계가 변화한다. 노예와 주인은 공동적 관계(communal relationship)가 아니었고 또한 동일한 공동체 내의 일원이 아니었으므로 주인은 노예를 매우 억압할 수 있었다.
+ 세번째 생산양식: 봉건제(feudalism)
노예제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 노예들은 생산하는 데 절대적으로 무관심하였다. 노예들은 단지 생산을 위하여 육체적으로 강제되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노예들은 생산도구를 사용하는 데 꽤나 게을렀다. 그래서 노예들은 항상 감시 감독될 필요가 있었고 때로는 매를 맞으며 일을 하였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한편 새로운 노예를 얻기위해서는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켜야 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했다. 그래서 농노(serfs)와 농부(peasants)가 등장하였고 그들이 노예를 대체하였다. 이것은 대변화였다. 이제 농부는 자신을 위하여 씨를 뿌리고 경작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일주일에 두 세번만 봉건영주의 장원(large estate of feudal lord)에서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의 땅을 경작하고 자신의 집에 머물렀다. 농노들은 집을 지을 수 있었고 가족을 가질 수 있었다. 농노들은 결혼할 수 있었고 농노들의 자녀들은 더 이상 봉건영주의 소유가 아니게 되었다. 고대 노에제에서 자녀들은 결혼할 수 없었고 집도 없이 초막에서 살았으므로 가족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들면 미국 남부 주의 노예제는 그리스와 로마, 또는 이집트의 고대 노예제와는 달랐지만 많은 유사성이 있었다. 노예주인들은 노예의 아이들에 대하여 많은 권리를 행사하였는데 19세기 미국에서 조차도 법적인 결혼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농노serfs들은 매우 달랐다. 농노들은 가족이 있고 집이 있었다. 농노들은 집과 땅에 대한 권원(title)은 없었지만 집과 땅을 소유(possession)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노들은 이틀이나 사흘 열심히 영주의 토지에서 일하지 않는다면 쫓겨날 수 있다. 이제 농노 자신들은 이전사회의 노예들 보다 좀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이것이 바로봉건제 아이디어이다. 맑스는 유럽의 중세 봉건주의를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노예제와 비교하면서 노동분업이 과연 증가했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는 맑스는 아니라고 답하였다. 맑스는 중세시대에 오히려 노동분업이 감소했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르네상스시대에 발굴되었던 고대유물들(antique)은 중세의 것들보다 훨씬 우월한 것들이었다. 중세시대에 이르러서 로마와 같은 큰 도시는 버려졌을 뿐만아니라 그 영화로웠던 도시는 폐허가 된 채 염소들을 위한 방목지가 되어버렸다. 로마와 그리스인들은 높은 수준의 관개수로 시스템과 산업시설을가지고 있었지만 중세가 들어서자 그것들은 모두 버려졌다. 그러면 중세시대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중세는 역사적으로 퇴행한 단계라고 말한다. 그 당시 중세는 종교재판(inquisition), 암흑기(Dark Middle Ages), 도시의 황폐화 등으로 노동분업의 퇴행적 단계였다. 맑스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당황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맑스는 여기서 원고를 포기하였고 노동분업 이론이 맞지 않는다고 인정하였다. 그럼 중세시대 노동분업의 후퇴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 네번째 생산양식: 자본주의(capitalism)
맑스는 노동분업이론과 결별하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개념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맑스는 봉건주의는 고대 노예제보다 우월하다고 강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봉건주의는 보다 더 발전된 재산양식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말하자면 맑스는 사소유권 개념을 향하여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꾼은 자신이 경작하는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역사의 변화; 생산력과 생산관계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역사의 변화(historical change)에 관한 맑스의 낡은 견해로서 나중에 <그룬트리세>에서 자신의 입장을 바꾸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충격적이고 중요한 이론이다. 맑스는 생산양식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조응한다고 하였다. 맑스는 특정한 단계의 생산력은 특정한 유형의 생산관계를 요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개별자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 특정한 유형의 생산관계를 말한다. 이것은 맑스의 사후 20세기초 사회과학에서 구조주의structuralism라고 불리우게 되는 것이다. 맑스가 강조했던 것은 한마디로 구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발언이었던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은 분석을 하기 위하여 시스템의 서로 다른 요소들의 대응점들을 찾을려고 혈안이 되는데 맑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맑스는 더 나아가서 변화의 동력인 원인기계론causal mechanism을 밝혀내고자 하였다. 맑스는 생산력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말하였다. 현재 맑시스트 롸이트Eric Olin Wright는 생산력의 발전이 떼기 힘들게 딱 달라붙었다sticky down라고 명명하였는데 생산력의 발전은 계속해서 복잡해진다는 의미이다. 생산력이 끈끈이 달라붙었다는 것은 실제로 사실은 아니지만 기억해 둘 필요는 있겠다. 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해나간다. 그러나 기술의 진화는 결국 사회내의 재산관계와 더불어 사회관계 속에서 정면으로 생산관계와 충돌하게 된다. 그 기술은 결국 낡아빠져서 쓸모없게 된다. 노예들은 기술발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농노들은 노에들보다는 관심을 갖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현대사회의 근로자들은 심여를 기울여서 기술을 개발한다. 왜냐하면 기술은 높은 급료를 위한 인센티브가 되기 때문이다. 맑스는 낡은outmoded사회관계는 결국에는 생산력과 충돌하게 되고 마침내 우리는 사회발전을 원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낡은 생산관계와 필요에 따라서 새롭게 등장한 생산력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놓여있다. 이것이 맑스가 정의하는 혁명운동revolutionary movement이다. 맑스는 이때 혁명이 도래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낡은 사회관계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나서 그것을 새로운 사회관계로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회공간에서 더 진보된 생산력의 발전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한편 맑스와 관련된 오해들이 있다. 맑스는 자본주의가 비효율적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와는 반대로 맑스는 자본주의는 인류역사상 가장 생산적인 시스템이라고 하면서 지난 100년 간의 자본주의는 이전의 전 인류역사가 해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진보를 이루어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분명 잘못되었지만 맑스는 자본주의는 영원히 지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다른 생산양식들 처럼 생산관계와 충돌하게 될 것이고 그때 혁명이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 비추어 본다면 맑스의 명제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맑스는 자본주의가 비범하게 위기관리에 대처하는 능력을 간과하였다. 지난 18개월을 본다면 자본주의는 그런대로 잘 굴러갔다. 리만 브라더스Lehman Brothers 사태를 보라. 3월에는 매우 흔들렸지만 그 후 우리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회복하는가를 배우게 되었다. 어쨌든 맑스의 포인트는 자본주의는 엄청난 혁명이고 생산력의 발전을 촉발했다는 것이다.
5. <그룬트리세>의 업적
맑스는 무엇보다 생산양식의 진화는 재산관계(property relations)의 변화로부터 나온다고 하였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를 끝내는 지점이다.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생산양식의 진화의 출발점을 노동분업으로서 전개하였지만 맑스는 자신의 잘못된 노동분업의 오류를 인정하였다. 이제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는 생산양식의 진화동력을 재산관계라고 주장하였다. 맑스는 사소유권을 새롭게 정의하였다. 맑스는 사소유권은 노동주체가 객체적 노동조건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때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맑스가 소외의 본질은 상품관계에 있다고 주장한 <파리원고Paris manuscripts>로부터 나온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제 소외의 본질은 상품관계(commodity relationships)에 있는것이 아니다. 맑스는 사소유권의 본성 안에 있는 소외의 본질을 포착하였는데 그것에 대하여는 후술할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발전은 다름아닌 노동자와 노동조건의 분리이다. 맑스는 그것을 매우 강조하였다. 이 개념은 우리를 황홀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아이디어일 뿐만 아니라 또 막스 베버를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이다. 현재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큰 진보는 노동자는 양의적으로(in the double sense)말하자면 전통사회 또는 봉건사회에서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자유롭다는데 있다. 이를테면 나는 노예였다. 그러나 내전이 일어난 후에 나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닌 것으로 선포되었고, 나는 법적으로 자유롭다. 그러나 맑스는 말한다. 자본주의는 당신에게 법적 자유와 법적 평등을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는 당신을 토지로부터 격리시키고 도시로 몰아내었다. 이제 당신은 도시에서 노동을 팔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으므로 역설적으로 당신은 밭일도구(possessions)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다. 말하자면 당신은 이전에 농부로서 가졌던 수단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 농부는 이제 생계수단(means of subsistence)을 상실하였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생계수단을 갖고있지 않기를 요구한다. 이를테면 당신은 계란을 사기 위하여 수퍼마켓에 가야한다. 이 자본주의 시스템은 당신이 정원에서 필요한 것들을 모두 기르고 재배한다면 잘 작동할 수가 없다. 당신이 그런 일을 해야하는 인센티브는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운좋게도 우리는 필요한 야채를 재배할 수 없다. 우리는 직장이든 어디든 차를 몰고 가고 또 그것을 위해서는 가솔린을 사야한다. 우리는 스스로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아니되도록 강제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free)의 양의적 의미(in the dual sense of term)이다. 다시말해서 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은 법적으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생계수단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물론 자유의 개념은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맑스는 다-선적인 것(multi-linealiy)과 관련하여 사회가 부족제로부터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맑스는 고대사회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아시아적 양식(Asiatic mode)을 덧붙였다. 또 생산양식의 변종된 형식으로서 슬라브 형식(Slavic form)과 독일 형식에 대하여도 언급하였다.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 사회 형성(social formation) 또는 경제 형성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이것은 재미있는 변화였다. 이것은 단지 용어의 변화 뿐만 아니라 이론의 변화였다. 맑스는 생산양식의 진화 또는 변화하는 재산관계와 관련하여 낡은 전-자본주의 구조(old pre-capitalist formations)에서 노동은 자연적 조건들을 전유(appropriation)하였고 또 자연적 도구인 토지를 전유하였는데 개인들은 이 객관적인 조건들을 자기자신의 것으로 여긴다고 말하였다. 실제로 전-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는 객관적인 조건들과 어떤 분리도 없었다. 노예제가 명백한 예가 되겠는데 그리스인들은 노에를 가리켜 일하는 짐승(working animal)이라고 하였다. 노예들은 주체로서 여겨진 것이 아니라 객체로서 다루어졌는데 노예들은 개인적 주체로서의 권라가 없었다. 고대노예제 사회는 노예를 위한 어떤 개인적 자유가 없었을 때였다. 그러다가 중세사회의 농노들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실제로 소유권(ownership)은 없었지만 생산수단을 소유(possession)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농노들은 법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또는 주체로서 대우받지는 못하였다. 초야권을 생각해보라. 봉건영주는 결혼식이 열리는 경우 농노의 딸인 신부와 첫날밤을 보낼 권리가 있었다. 모짜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the marriage of Figaro>을 보라. 피가로는 수잔나와 깊은 사랑에 빠지고 그녀에게 구혼하였다. 그러나 피가로는 봉건영주가 신부와의 초야권을 주장하자 충격에 빠졌다. 피가로는 영주가 자기신부와 첫날 밤에 동침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18세기 이야기이다. 어쨌든 농노는 아직 주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노동자 또는 자유 노동자는 주체자이다. 맑스는 사소유권과 관련하여 자본주의에서 일work, 즉 객체는 완전히 노동자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이중분리(double separation)를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법적으로 자유롭게 분리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실존수단(means of existence)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시장경제로의 이전(transition)이란 사람들이 토지에서 쫒겨나고 도시로 밀려날 때 발생한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팔아서 임금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하게 되는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6. <그룬트리세>의 다면성
맑스의 초기 아이디어는 단-선적(uni-linear)적 이었다. 부족제 사회는 노예제 사회에 의하여 견인되었고 그 후 노예제 사회는 봉건제 사회에 의하여 견인되었다. 그 후 봉건제 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하여 견인되었다. 맑스는 변증법과 관련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는 혁명을 초래하고 이전 단계의 사회에서 다음단계의 사회로 넘어가게 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변증법적인 상호작용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이전의 낡은 옛시스템을 던져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매우 다른 견해를 보게 될 것이다. 맑스는 다양한 개인 소유권의 형태들을 제시하면서 독특한 게르만 형식(germanic form), 즉 게르만 부족제가 개인소유(individual possession)을 이끌어 내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정말로 역사책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처럼 게르만 부족의 독특한 특징이다. 게르만족은 각 계절이 시작되기 전에 추첨(lottery)을 통해서 토지의 분깃을 나누었고 분깃을 할당받은 가족은 그 할당된 토지를 경작하였다. 그들은 그 토지에 대한 개인적인 재산권(property rights)을 갖고있지는 않았지만 할당된 토지를 소유(possession)할 수는 있었다. 그것은 공통 토지(common land)가 개인 또는 가족에게 분양(divided up)된 것이다. 이것이 게르만 부족의 독특한 토지소유 형태이다.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 다-선적 발전(multi-trajectory development)과 관련하여 모든 부족제 사회가 고대노예제 사회로 진입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대영도서관에서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미친듯이 책을 읽었다. 맑스는 마침내 아시아에서는 보편화된 노예제가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중국에는 노예들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노예(family slave)형태였고 이집트나 고대로마에서 행해졌던 것처럼 노예들에 의하여 경작되는 대토지(great plantation)는 없었다. 맑스는 그리스, 로마, 이집트사회를 노예생산양식의 개념으로서 지나치게 일반화한 면이 없지않다. 이 사회들은 독특한 고대사회였다. 맑스는 아시아와 콜롬부스 이전의 미국대륙(Pre-Columbian America)에서는 보편화된 노예제가 없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아사아적 형식(asiatic form)이라고 명명하였다. 맑스는 콜럼부스 이전의 미대륙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아시아적 형태의 독특성은 수경사회(hydraulic society)에 있다고 하였다. 맑스는 아시아의 나라들은 모두 수리관개(irrigation)와 홍수대비를 위한 방제 작업를 통하여 대제국을 이룩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리관개와 홍수방지 작업을 위해서는 대제국이 필수적이라고 하였다. 또 중국의 대 황제들은 수리시설과 방조제 망(networks)을 건설할 수 있을 정도의 세금이 거두어질때까지 마을 공동체를 내버려 두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 마을 공동체는 공동체 자체로서 남겨졌으므로 그 주민들은 농노나 노예로서 전환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중국은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이 겪었던 고전적인 봉건제를 결코 경험해보지 못하였다. 봉건제는 중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시아적 형태인 것이었다. 아시아적 형태란 다름아니라 중앙집권화된 황제권력과 물로 인한 문제 때문에 초래된 수리경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맑스는 개인소유와 관련하여 가족소유의 게르만 헝식이 있다고 하였다. 한편 맑스는 봉건제는 어디서 오는가라고 물었다. 맑스의 초기이론에 따르면 내부적 계급투쟁(internal class struggle)은 이전의 생산양식에서 다음 단계의 생산양식으로 이전하게 되는 중요한 동력이었다. 따라서 노예제에서 노예들은 노예제가 무너지고 봉건제가 들어서기를 기대해야 했다. 맑스에 따르면 노예들은 봉기해야 했고 주인들을 목메달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해야 했다. 이것에 대하여 맑스는 자신이 바보였다고 시인하면서 사실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맑스는 로마가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라고 말하면서 로마는 게르만 부족에 침략당하면서 망했다고 하였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게르만 부족은 실제로 군사기술 및 일반적인 기술에 있어서 로마제국보다 훨씬 덜 진보한 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월한 사회관계제도를 갗추고 있었다. 게르만 부족은 로마보다 훨씬 더 발전된 사소유권 아이디어를 갖고있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게르만 부족의 침략을 받고 무너졌고 게르만 부족은 로마제국을 봉건사회로 전환시켰다. 게르만 부족은 노예를 농노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맑스는 또 소유와 관련하여 슬라브형식(Slavic form)이 있다고 하였다. 러시아의 옵시나(Obshchina)는 봉건제와 같은 것인데 봉건영주는 실제로 옵시나, 즉 마을 공동체를 한 단위(unit)로 취급한다. 사실 지대를 거두는 것은 러시아의 중앙권력이 아니라 봉건영주였다. 그러나 봉건영주는 옵시나를 공동체 방식으로 운영하기위하여 많은 재량을 옵시나 즉 마을공동체에 남겨둔 것이었다. 맑스는 이같은 게르만 형식과 아시아 형식 그리고 슬라브 형식를 전개하면서 자신이 이전에 갖고 있던 사회변화의 동력으로서 계급투쟁설을 포기하였다. 맑스는 혁명을 이끄는 것은 내부적 계급투쟁이 아니라 다름아닌 바로 외부적 힘(external force)이 사회를 다른 형태의 생산양식으로 변화을 이끈다고 역설하였다. 또 맑스는 봉건제가 부재했던 아시아적 형식이 스스로 자본주의에 도달하기 전에 봉건제 단계를 통과할 것인가를 물었다. 맑스는그것에 대하여 아니라고 답하면서 중국은 봉건제를 창조하지 않았지만 이미 자본주의를 향하여 운동하는 몇가지 흔적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맑스는 마오쩌둥이 등장하여 "그러면 우리 중국인은 먼저 자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라고 물을 줄 몰랐다. 마오쩌둥은 자신은 자본주의를 싫어한다고 말하면서 중국은 아시아적 형식에서 바로 공산주의를 창조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그것을 바로 시도하였다. 마오쩌둥는 아시아적 형식에서 바로 공산주의로 변화시켰다. 이것은 분명 맑스가 예상했던 것은 아니다. 그럼 맑스의 생산양식 이론은 중국의 경우에 잘 맞아 떨어졌는가. 아니다. 중요한 점은 중국의 공산주의는 맑스가 말한 마지막 단계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이전단계라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성공적으로 아시아적 형식에서 공산주의로 전환시켰지만 그것은 자본주의로 옮겨가기 위한 전 단계라고 보는것이 낫겠다. 이것은 맑스가 고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룬트리세>제안했던 분석유형과 비교하여 완전한 일관성을 가지고있다. 맑스는 마지막으로 슬라브 형태와 관련하여 러시아 무정부주의자인 베라 자술리치Vera Zasulich로 부터 편지 한장을 받았다. 베라 자술리치는 맑스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그녀는 포퓰리스트 무정부주의 좌파였다. 그녀는 맑스에게 묻기를 "정말로 우리는 이 아름다운 러시아의 옵시나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마을 공동체에서 형제 자매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이런 가증스런 자본주의를 창출해야 하는가, 우리는 바로 공산주의로 옯겨갈 수는 없는가. 옵시나는 공산체 형식(communistic form)이다." 라고 하였다. 맑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답하였다. 이것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스탈린이 행하였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러사아의 옵시나를 집단농장인 콜호즈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오쩌둥의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진보된 사회형태를 향한 길은 아닌것으로 판명되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자본주의를 향한 갓길(side way)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면 그러한 갓길은 필요한 것인가. 그 갓길은 자본주의를 향한 가장 효과적인 길인가. 그 갓길로부터 나온 자본주의는 최고로 가능한 형식의 자본주의인가.
<참고문헌>
원문번역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 두번째 생산양식: 노예제(slavery)
맑스는 여기 노예제에서 생산력이 발전하기 시작한다고 하였다. 부족제 사회에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하여 모두가 밖으로 나가서 채집과 수렵과 어획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였다. 그 기술은 훨씬 더 생산적이었으므로 어떤 사람은 사냥하러 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노예를 고용하였고 노예는 그를 위하여 사냥을 대신하였다. 노예들은 주인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였다. 노예는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물자만 제공받았다. 이를테면 주인은 노예들 덕택으로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철학을 논하면서 드라마를 쓰고 시를 쓸 수 있다. 대신에 노예들은 들판에 나가서 농사를 짓고 주인의 필요를 위하여 잉여물을 생산하였다. 노동분업은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서 증가하게 되는데 그 결과로서 재산관계가 변화한다. 노예와 주인은 공동적 관계(communal relationship)가 아니었고 또한 동일한 공동체 내의 일원이 아니었으므로 주인은 노예를 매우 억압할 수 있었다.
+ 세번째 생산양식: 봉건제(feudalism)
노예제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 노예들은 생산하는 데 절대적으로 무관심하였다. 노예들은 단지 생산을 위하여 육체적으로 강제되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노예들은 생산도구를 사용하는 데 꽤나 게을렀다. 그래서 노예들은 항상 감시 감독될 필요가 있었고 때로는 매를 맞으며 일을 하였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한편 새로운 노예를 얻기위해서는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켜야 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했다. 그래서 농노(serfs)와 농부(peasants)가 등장하였고 그들이 노예를 대체하였다. 이것은 대변화였다. 이제 농부는 자신을 위하여 씨를 뿌리고 경작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일주일에 두 세번만 봉건영주의 장원(large estate of feudal lord)에서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의 땅을 경작하고 자신의 집에 머물렀다. 농노들은 집을 지을 수 있었고 가족을 가질 수 있었다. 농노들은 결혼할 수 있었고 농노들의 자녀들은 더 이상 봉건영주의 소유가 아니게 되었다. 고대 노에제에서 자녀들은 결혼할 수 없었고 집도 없이 초막에서 살았으므로 가족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들면 미국 남부 주의 노예제는 그리스와 로마, 또는 이집트의 고대 노예제와는 달랐지만 많은 유사성이 있었다. 노예주인들은 노예의 아이들에 대하여 많은 권리를 행사하였는데 19세기 미국에서 조차도 법적인 결혼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농노serfs들은 매우 달랐다. 농노들은 가족이 있고 집이 있었다. 농노들은 집과 땅에 대한 권원(title)은 없었지만 집과 땅을 소유(possession)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노들은 이틀이나 사흘 열심히 영주의 토지에서 일하지 않는다면 쫓겨날 수 있다. 이제 농노 자신들은 이전사회의 노예들 보다 좀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이것이 바로봉건제 아이디어이다. 맑스는 유럽의 중세 봉건주의를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노예제와 비교하면서 노동분업이 과연 증가했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는 맑스는 아니라고 답하였다. 맑스는 중세시대에 오히려 노동분업이 감소했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르네상스시대에 발굴되었던 고대유물들(antique)은 중세의 것들보다 훨씬 우월한 것들이었다. 중세시대에 이르러서 로마와 같은 큰 도시는 버려졌을 뿐만아니라 그 영화로웠던 도시는 폐허가 된 채 염소들을 위한 방목지가 되어버렸다. 로마와 그리스인들은 높은 수준의 관개수로 시스템과 산업시설을가지고 있었지만 중세가 들어서자 그것들은 모두 버려졌다. 그러면 중세시대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중세는 역사적으로 퇴행한 단계라고 말한다. 그 당시 중세는 종교재판(inquisition), 암흑기(Dark Middle Ages), 도시의 황폐화 등으로 노동분업의 퇴행적 단계였다. 맑스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당황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맑스는 여기서 원고를 포기하였고 노동분업 이론이 맞지 않는다고 인정하였다. 그럼 중세시대 노동분업의 후퇴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 네번째 생산양식: 자본주의(capitalism)
맑스는 노동분업이론과 결별하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개념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맑스는 봉건주의는 고대 노예제보다 우월하다고 강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봉건주의는 보다 더 발전된 재산양식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말하자면 맑스는 사소유권 개념을 향하여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꾼은 자신이 경작하는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역사의 변화; 생산력과 생산관계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역사의 변화(historical change)에 관한 맑스의 낡은 견해로서 나중에 <그룬트리세>에서 자신의 입장을 바꾸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충격적이고 중요한 이론이다. 맑스는 생산양식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조응한다고 하였다. 맑스는 특정한 단계의 생산력은 특정한 유형의 생산관계를 요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개별자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 특정한 유형의 생산관계를 말한다. 이것은 맑스의 사후 20세기초 사회과학에서 구조주의structuralism라고 불리우게 되는 것이다. 맑스가 강조했던 것은 한마디로 구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발언이었던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은 분석을 하기 위하여 시스템의 서로 다른 요소들의 대응점들을 찾을려고 혈안이 되는데 맑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맑스는 더 나아가서 변화의 동력인 원인기계론causal mechanism을 밝혀내고자 하였다. 맑스는 생산력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말하였다. 현재 맑시스트 롸이트Eric Olin Wright는 생산력의 발전이 떼기 힘들게 딱 달라붙었다sticky down라고 명명하였는데 생산력의 발전은 계속해서 복잡해진다는 의미이다. 생산력이 끈끈이 달라붙었다는 것은 실제로 사실은 아니지만 기억해 둘 필요는 있겠다. 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해나간다. 그러나 기술의 진화는 결국 사회내의 재산관계와 더불어 사회관계 속에서 정면으로 생산관계와 충돌하게 된다. 그 기술은 결국 낡아빠져서 쓸모없게 된다. 노예들은 기술발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농노들은 노에들보다는 관심을 갖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현대사회의 근로자들은 심여를 기울여서 기술을 개발한다. 왜냐하면 기술은 높은 급료를 위한 인센티브가 되기 때문이다. 맑스는 낡은outmoded사회관계는 결국에는 생산력과 충돌하게 되고 마침내 우리는 사회발전을 원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낡은 생산관계와 필요에 따라서 새롭게 등장한 생산력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놓여있다. 이것이 맑스가 정의하는 혁명운동revolutionary movement이다. 맑스는 이때 혁명이 도래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낡은 사회관계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나서 그것을 새로운 사회관계로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회공간에서 더 진보된 생산력의 발전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한편 맑스와 관련된 오해들이 있다. 맑스는 자본주의가 비효율적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와는 반대로 맑스는 자본주의는 인류역사상 가장 생산적인 시스템이라고 하면서 지난 100년 간의 자본주의는 이전의 전 인류역사가 해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진보를 이루어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분명 잘못되었지만 맑스는 자본주의는 영원히 지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다른 생산양식들 처럼 생산관계와 충돌하게 될 것이고 그때 혁명이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 비추어 본다면 맑스의 명제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맑스는 자본주의가 비범하게 위기관리에 대처하는 능력을 간과하였다. 지난 18개월을 본다면 자본주의는 그런대로 잘 굴러갔다. 리만 브라더스Lehman Brothers 사태를 보라. 3월에는 매우 흔들렸지만 그 후 우리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회복하는가를 배우게 되었다. 어쨌든 맑스의 포인트는 자본주의는 엄청난 혁명이고 생산력의 발전을 촉발했다는 것이다.
5. <그룬트리세>의 업적
맑스는 무엇보다 생산양식의 진화는 재산관계(property relations)의 변화로부터 나온다고 하였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를 끝내는 지점이다.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생산양식의 진화의 출발점을 노동분업으로서 전개하였지만 맑스는 자신의 잘못된 노동분업의 오류를 인정하였다. 이제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는 생산양식의 진화동력을 재산관계라고 주장하였다. 맑스는 사소유권을 새롭게 정의하였다. 맑스는 사소유권은 노동주체가 객체적 노동조건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때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맑스가 소외의 본질은 상품관계에 있다고 주장한 <파리원고Paris manuscripts>로부터 나온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제 소외의 본질은 상품관계(commodity relationships)에 있는것이 아니다. 맑스는 사소유권의 본성 안에 있는 소외의 본질을 포착하였는데 그것에 대하여는 후술할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발전은 다름아닌 노동자와 노동조건의 분리이다. 맑스는 그것을 매우 강조하였다. 이 개념은 우리를 황홀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아이디어일 뿐만 아니라 또 막스 베버를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이다. 현재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큰 진보는 노동자는 양의적으로(in the double sense)말하자면 전통사회 또는 봉건사회에서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자유롭다는데 있다. 이를테면 나는 노예였다. 그러나 내전이 일어난 후에 나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닌 것으로 선포되었고, 나는 법적으로 자유롭다. 그러나 맑스는 말한다. 자본주의는 당신에게 법적 자유와 법적 평등을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는 당신을 토지로부터 격리시키고 도시로 몰아내었다. 이제 당신은 도시에서 노동을 팔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으므로 역설적으로 당신은 밭일도구(possessions)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다. 말하자면 당신은 이전에 농부로서 가졌던 수단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 농부는 이제 생계수단(means of subsistence)을 상실하였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생계수단을 갖고있지 않기를 요구한다. 이를테면 당신은 계란을 사기 위하여 수퍼마켓에 가야한다. 이 자본주의 시스템은 당신이 정원에서 필요한 것들을 모두 기르고 재배한다면 잘 작동할 수가 없다. 당신이 그런 일을 해야하는 인센티브는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운좋게도 우리는 필요한 야채를 재배할 수 없다. 우리는 직장이든 어디든 차를 몰고 가고 또 그것을 위해서는 가솔린을 사야한다. 우리는 스스로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아니되도록 강제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free)의 양의적 의미(in the dual sense of term)이다. 다시말해서 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은 법적으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생계수단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물론 자유의 개념은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맑스는 다-선적인 것(multi-linealiy)과 관련하여 사회가 부족제로부터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맑스는 고대사회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아시아적 양식(Asiatic mode)을 덧붙였다. 또 생산양식의 변종된 형식으로서 슬라브 형식(Slavic form)과 독일 형식에 대하여도 언급하였다.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 사회 형성(social formation) 또는 경제 형성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이것은 재미있는 변화였다. 이것은 단지 용어의 변화 뿐만 아니라 이론의 변화였다. 맑스는 생산양식의 진화 또는 변화하는 재산관계와 관련하여 낡은 전-자본주의 구조(old pre-capitalist formations)에서 노동은 자연적 조건들을 전유(appropriation)하였고 또 자연적 도구인 토지를 전유하였는데 개인들은 이 객관적인 조건들을 자기자신의 것으로 여긴다고 말하였다. 실제로 전-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는 객관적인 조건들과 어떤 분리도 없었다. 노예제가 명백한 예가 되겠는데 그리스인들은 노에를 가리켜 일하는 짐승(working animal)이라고 하였다. 노예들은 주체로서 여겨진 것이 아니라 객체로서 다루어졌는데 노예들은 개인적 주체로서의 권라가 없었다. 고대노예제 사회는 노예를 위한 어떤 개인적 자유가 없었을 때였다. 그러다가 중세사회의 농노들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실제로 소유권(ownership)은 없었지만 생산수단을 소유(possession)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농노들은 법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또는 주체로서 대우받지는 못하였다. 초야권을 생각해보라. 봉건영주는 결혼식이 열리는 경우 농노의 딸인 신부와 첫날밤을 보낼 권리가 있었다. 모짜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the marriage of Figaro>을 보라. 피가로는 수잔나와 깊은 사랑에 빠지고 그녀에게 구혼하였다. 그러나 피가로는 봉건영주가 신부와의 초야권을 주장하자 충격에 빠졌다. 피가로는 영주가 자기신부와 첫날 밤에 동침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18세기 이야기이다. 어쨌든 농노는 아직 주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노동자 또는 자유 노동자는 주체자이다. 맑스는 사소유권과 관련하여 자본주의에서 일work, 즉 객체는 완전히 노동자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이중분리(double separation)를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법적으로 자유롭게 분리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실존수단(means of existence)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시장경제로의 이전(transition)이란 사람들이 토지에서 쫒겨나고 도시로 밀려날 때 발생한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팔아서 임금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하게 되는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6. <그룬트리세>의 다면성
맑스의 초기 아이디어는 단-선적(uni-linear)적 이었다. 부족제 사회는 노예제 사회에 의하여 견인되었고 그 후 노예제 사회는 봉건제 사회에 의하여 견인되었다. 그 후 봉건제 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하여 견인되었다. 맑스는 변증법과 관련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는 혁명을 초래하고 이전 단계의 사회에서 다음단계의 사회로 넘어가게 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변증법적인 상호작용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이전의 낡은 옛시스템을 던져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매우 다른 견해를 보게 될 것이다. 맑스는 다양한 개인 소유권의 형태들을 제시하면서 독특한 게르만 형식(germanic form), 즉 게르만 부족제가 개인소유(individual possession)을 이끌어 내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정말로 역사책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처럼 게르만 부족의 독특한 특징이다. 게르만족은 각 계절이 시작되기 전에 추첨(lottery)을 통해서 토지의 분깃을 나누었고 분깃을 할당받은 가족은 그 할당된 토지를 경작하였다. 그들은 그 토지에 대한 개인적인 재산권(property rights)을 갖고있지는 않았지만 할당된 토지를 소유(possession)할 수는 있었다. 그것은 공통 토지(common land)가 개인 또는 가족에게 분양(divided up)된 것이다. 이것이 게르만 부족의 독특한 토지소유 형태이다.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 다-선적 발전(multi-trajectory development)과 관련하여 모든 부족제 사회가 고대노예제 사회로 진입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대영도서관에서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미친듯이 책을 읽었다. 맑스는 마침내 아시아에서는 보편화된 노예제가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중국에는 노예들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노예(family slave)형태였고 이집트나 고대로마에서 행해졌던 것처럼 노예들에 의하여 경작되는 대토지(great plantation)는 없었다. 맑스는 그리스, 로마, 이집트사회를 노예생산양식의 개념으로서 지나치게 일반화한 면이 없지않다. 이 사회들은 독특한 고대사회였다. 맑스는 아시아와 콜롬부스 이전의 미국대륙(Pre-Columbian America)에서는 보편화된 노예제가 없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아사아적 형식(asiatic form)이라고 명명하였다. 맑스는 콜럼부스 이전의 미대륙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아시아적 형태의 독특성은 수경사회(hydraulic society)에 있다고 하였다. 맑스는 아시아의 나라들은 모두 수리관개(irrigation)와 홍수대비를 위한 방제 작업를 통하여 대제국을 이룩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리관개와 홍수방지 작업을 위해서는 대제국이 필수적이라고 하였다. 또 중국의 대 황제들은 수리시설과 방조제 망(networks)을 건설할 수 있을 정도의 세금이 거두어질때까지 마을 공동체를 내버려 두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 마을 공동체는 공동체 자체로서 남겨졌으므로 그 주민들은 농노나 노예로서 전환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중국은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이 겪었던 고전적인 봉건제를 결코 경험해보지 못하였다. 봉건제는 중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시아적 형태인 것이었다. 아시아적 형태란 다름아니라 중앙집권화된 황제권력과 물로 인한 문제 때문에 초래된 수리경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맑스는 개인소유와 관련하여 가족소유의 게르만 헝식이 있다고 하였다. 한편 맑스는 봉건제는 어디서 오는가라고 물었다. 맑스의 초기이론에 따르면 내부적 계급투쟁(internal class struggle)은 이전의 생산양식에서 다음 단계의 생산양식으로 이전하게 되는 중요한 동력이었다. 따라서 노예제에서 노예들은 노예제가 무너지고 봉건제가 들어서기를 기대해야 했다. 맑스에 따르면 노예들은 봉기해야 했고 주인들을 목메달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해야 했다. 이것에 대하여 맑스는 자신이 바보였다고 시인하면서 사실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맑스는 로마가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라고 말하면서 로마는 게르만 부족에 침략당하면서 망했다고 하였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게르만 부족은 실제로 군사기술 및 일반적인 기술에 있어서 로마제국보다 훨씬 덜 진보한 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월한 사회관계제도를 갗추고 있었다. 게르만 부족은 로마보다 훨씬 더 발전된 사소유권 아이디어를 갖고있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게르만 부족의 침략을 받고 무너졌고 게르만 부족은 로마제국을 봉건사회로 전환시켰다. 게르만 부족은 노예를 농노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맑스는 또 소유와 관련하여 슬라브형식(Slavic form)이 있다고 하였다. 러시아의 옵시나(Obshchina)는 봉건제와 같은 것인데 봉건영주는 실제로 옵시나, 즉 마을 공동체를 한 단위(unit)로 취급한다. 사실 지대를 거두는 것은 러시아의 중앙권력이 아니라 봉건영주였다. 그러나 봉건영주는 옵시나를 공동체 방식으로 운영하기위하여 많은 재량을 옵시나 즉 마을공동체에 남겨둔 것이었다. 맑스는 이같은 게르만 형식과 아시아 형식 그리고 슬라브 형식를 전개하면서 자신이 이전에 갖고 있던 사회변화의 동력으로서 계급투쟁설을 포기하였다. 맑스는 혁명을 이끄는 것은 내부적 계급투쟁이 아니라 다름아닌 바로 외부적 힘(external force)이 사회를 다른 형태의 생산양식으로 변화을 이끈다고 역설하였다. 또 맑스는 봉건제가 부재했던 아시아적 형식이 스스로 자본주의에 도달하기 전에 봉건제 단계를 통과할 것인가를 물었다. 맑스는그것에 대하여 아니라고 답하면서 중국은 봉건제를 창조하지 않았지만 이미 자본주의를 향하여 운동하는 몇가지 흔적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맑스는 마오쩌둥이 등장하여 "그러면 우리 중국인은 먼저 자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라고 물을 줄 몰랐다. 마오쩌둥은 자신은 자본주의를 싫어한다고 말하면서 중국은 아시아적 형식에서 바로 공산주의를 창조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그것을 바로 시도하였다. 마오쩌둥는 아시아적 형식에서 바로 공산주의로 변화시켰다. 이것은 분명 맑스가 예상했던 것은 아니다. 그럼 맑스의 생산양식 이론은 중국의 경우에 잘 맞아 떨어졌는가. 아니다. 중요한 점은 중국의 공산주의는 맑스가 말한 마지막 단계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이전단계라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성공적으로 아시아적 형식에서 공산주의로 전환시켰지만 그것은 자본주의로 옮겨가기 위한 전 단계라고 보는것이 낫겠다. 이것은 맑스가 고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룬트리세>제안했던 분석유형과 비교하여 완전한 일관성을 가지고있다. 맑스는 마지막으로 슬라브 형태와 관련하여 러시아 무정부주의자인 베라 자술리치Vera Zasulich로 부터 편지 한장을 받았다. 베라 자술리치는 맑스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그녀는 포퓰리스트 무정부주의 좌파였다. 그녀는 맑스에게 묻기를 "정말로 우리는 이 아름다운 러시아의 옵시나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마을 공동체에서 형제 자매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이런 가증스런 자본주의를 창출해야 하는가, 우리는 바로 공산주의로 옯겨갈 수는 없는가. 옵시나는 공산체 형식(communistic form)이다." 라고 하였다. 맑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답하였다. 이것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스탈린이 행하였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러사아의 옵시나를 집단농장인 콜호즈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오쩌둥의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진보된 사회형태를 향한 길은 아닌것으로 판명되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자본주의를 향한 갓길(side way)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면 그러한 갓길은 필요한 것인가. 그 갓길은 자본주의를 향한 가장 효과적인 길인가. 그 갓길로부터 나온 자본주의는 최고로 가능한 형식의 자본주의인가.
<참고문헌>
원문번역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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