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5일 수요일

6.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와 자유


1. 존 스튜어트 밀의 스승인 벤담

공리주의는 근본적으로 매우 중요한 아이디어이다. 공리주의는 현대 경제 이론과 정치사회 이론들이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 아이디어에 따라 굴러가도록 예고하였던 것이다. 공리주의의 출발점은 벤담이다.  여러 면에서 벤담은 공리주의의 창시자라고 볼 수 있지만, 공리주의란 용어를 써본 적은 없었고 단지, 존 스튜어트 밀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부친인 제임스 밀은 식민지 인도의 역사와 인도에서의 영국 역사를 방대한 세권의 책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제임스 밀은 1808년 벤담을 만나면서 공리주의에 매료되었고 자신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의 교육을 부탁하였다. 벤담은 1789년 <도덕과 입법의 원리The Principle of Morals and Legislation>를 출간했었다. 벤담은 <도덕과 입법의 원리>에서 매우 중요한 주장을 하였다. 처음에 그것은 매우 이성적으로 보였으나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았다. 벤담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쾌락을 좇고 고통을 피하도록 설계되어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가능한 고통을 최소화하려고 하고 쾌락을 최대화하려고 시도한다. 이때 바로 최대의 행복(greatest happiness)이루어 진다. 이것이 공리(utility)이다. 공리는 근본적으로 벤담의 아이이디어이다. 따라서 무엇이든 행복으로 이끌어주기만 한다면 어떠한 행동도 올바르다는 결론이 나올수 있다. 실제로 이 행복은 양화(quantified)될 수 있다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쾌락의 합계에서 고통의 합계를 뺀 결과가 증가한다면 그 행동은 올바르고 도덕적으로도 옳다. 이러한 벤담의 주장은 꽤 이성적으로 보인다. 벤담에 따르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면 그 사회 또한 더 행복해지게 된다. 벤담의 포인트는 쾌락과 고통에 있었다. 우리 인간은 자연적으로 두 주권자를 떠받들도록 설계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쾌락과 고통이다. 벤담은 개인의 행동은 공리utility의 원칙에 순응하여야 할뿐만 아니라 공동체 행복의 증가분은 그 감소분보다 훨씬 더 커야한다고 하였다. 벤담의 공리(utility)란 개인이 미래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행복을 증가 또는 감소시키는, 찬성 또는 반대하는 행동원칙이다. 따라서 공리는 이익, 혜택, 쾌락, 선, 행복을 창조하는 속성(property)을 가지고 있다. 이 공리 개념은 오늘날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경제학적 효용개념과 큰 차이가 없다. 재미있게도, 벤담은 행복한 사람들의 수와 불행한 사람들의 수를 계산한 후에 행복의 총합이 불행의 총합을 능가하면 그것은 좋은 사회라고 보았다.


2. 역사적 맥락에서 본 존 스튜어트 밀

1806년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밀은 운좋게도 학교에 다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운은 아니었다. 부친인 제임스 밀과 벤담이 그의 선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세살 때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822년 18세의 어린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 학회Utilitarian Society를 창설하였고 공리주의Utilitarianism란 용어를 처음으로 조어하였다. 그리고나서 밀은 신경실조를 겪었다. 밀은 공리주의와 도구주의를 설파하는 중에 격렬한 논쟁를 벌리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다. 그 후 존 스튜어트 밀은 시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결국 멋진 여성인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를 만나게 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그녀와 절친한 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 해리엇 테일러는 놀랄만한 지식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당시 영국 최초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라고 할 만 하였다. 사실 헤리엇 테일러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작품들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만약 존 스튜어트 밀이 진정한 페미니스트였더라면 아마도 자기 저작들의 공동저자로서 해리엇 테일러의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해리엇 테일러는 유부녀였는데 그녀의 남편을 포함한 셋은 재미있게도 삼각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테일러 부부와 존 스튜어트 밀은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

1851년 존 스튜어트 밀은 헤리엇 테일러의 남편이 사망하자 즉각 그녀와 결혼하였다.
1858년 존 스튜어트 밀의 부인인 헤리엇 테일러가 불행하게도 결혼 후 7년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1873년 존 스튜어트 밀은 Avignon에서 타계하였다. 향년 67세였다.


3. 존 스투어트 밀의 주요작품과 <공리주의>의 주요내용

1859년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On Liberty>를 출간하였고 1861년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출간하였다.
1865년 존 스튜어트 밀은 의회의원이 되었댜. 당시 밀은 영국 최초로 여성참정권을 주장한 사람중에 한 명이었다.
1868년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투표권을 주장하는 바람에 재선거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1869년 밀은 <어성의 종속Subjection of Woman>을 출간하였다. 그 책은 여러 면에서 페니니스트적이었다. 그 책은 당시 남성들이 읽기에는 어려웠다.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시도하였다. 밀은 공리주의가 너무 냉정하다는 것을 발견하고서 감성적인것(sentiments)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침 해리엇 테일러는 밀에게 풍부한 시문학의 감성세계를 소개하였다. 이제 밀은 더 높은 행복(a higher happiness)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낮은 행복과 높은 행복을 구별하였다. 이를테면 좋은 스테이크를 먹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베토벤의 9번 심포니를 듣는 것은 더 큰 행복이다. 당신은 9번 심포니의 마지막 합창을 들을 때 더 높은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당신은 좋은 스테이크를 먹을때 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의 절정 속에서 더 높은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하는 더 높은 수준의 행복(a higher level of happiness)이다. 재미있게도 밀은 공리(utility)는 편의(expediency)보다 훨씬 큰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또 자유는 최종의 가치이면서도 편의라고 강조하였다. 밀에 따르면 편의(expediency)란 최소의 수단을 사용하여 최대의 이익(return)을 얻는 것아다. 존 스튜어트 밀은 말하기를 ''편의는 개인의 자유에 반하는 간섭을 정당화할 수 없다(expediency cannot justify intervention against individual liberty)''고 강조하였다. 여기에 딱 맞는 매우 적절한 예가 있다. 미국의 9/11을 생각해 보라. 당시 많은 사람들이 편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당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가 얼마나 제한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편의는 무시될 수는 없겠지만 개인의 머리 위에 무언가chips가 떨어지면 그것은 개인적 자유(individual liberty)에 해당한다고 말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의 신성을 강조하였다. 어떤 면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 개인주의의 완성자이자  정신적 지주라고 할만 항다.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문제와 관련하여 여성의 법적 지위는 노예의 상황과 유사하지만 사실 노예보다 훨씬 더 열악하다고 주장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은 직업과 공공생활,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 평등권을 가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사실, 존 스튜어트 밀의 이러한 주장은 장 자크 루소와 완전히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들은 결혼을 통하여 남성과 친밀한 유대를 창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해리엇 테일러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헤리엇 테일러는 두 번 결혼하였지만 두 번 모두 성공적이지 못랬다. 그녀는 두 번 결혼했지만 결혼제도를 신뢰하지 않았다.


4. 존 스튜어트 밀의 행복론

오늘날까지도 존 스튜어트 밀의 영향력은 매우 강하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주의의 완성자이다. 어떤 면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가장 일관적이고 명확하게 이론을 전개한 학자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의 이론의 출발점인 아담 스미스에서부터 자신의 스승인 벤담에 이르기까지 가장 논리적으로 공리주의를 완성하였다. 오늘날 존 스튜어트 밀은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이론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많은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를 신보수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로 전향시키면서 그들을 공화당으로 넘어가게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의 이론은 매우 중요한 분할선(dividing line)이었다. 개인의 자유는 어느 정도까지 인정되어야 하는가. 국가는 어는 정도까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가.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포인트였다. 존 스튜어트 밀의 이론은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의 많은 정치적 좌파, 중도좌파, 극좌파들이 차별철폐조치(affirmative action)와 빈곤과의 전쟁 등에 직면했을때 자신들의 노선을 버리게 되었던 분할선이었다. 정말로 민주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배신했는가. 그렇지 않다. 존 스튜어트 밀을 읽어라. 존 스튜어트 밀은 진정한 자유주의가 무엇인지를 선포하였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메세지는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는 많은 조명을 받고있다. 비판가들은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적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바난하면서 정부야말로 일반선(general good)을 위하여 많은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존 스튜어트 밀이 벤담으로부터 출발하여 전개한 공리주의의 주요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또 존 스튜어트 밀이 공리주의 중요한 변수로서 더 높은 행복을 강조했다는 정을 기억해두자. 일반적으로 우리가 갈구하는 것은 양적 행복일 뿐만아니라 질적인 행복이다.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 행복론의 포인트이다. 이 행복론은 이전에 아담스미스가 손대긴 하였으나 적절하게 전개되지 못했던 아이디어였고 벤담 또한 전혀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이 행복 아이디어는 현대경제학인 신고전주의 경제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이 행복 아이디어를 선호(preference)라고 부른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개인은 저마다 선호를 가지고 있으면서.자신의 선호가치에 저마다의 효용(utility)을 부여한다. 이것은 정말로 존 스튜어트 밀의 이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법(legality)과 정의를 구별하면서 합법적(legal)인 것이 반드시 정당한 것은 아니며 정당하다고 하여 반드시 법의 승인을 받은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또 편의와 정의에 관련해서는 편의는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며 정의로운 것은 비용이 들 뿐만아니라 목적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도 아니라고 하였다.

+ 더 높은 행복(the higher happiness)
우리 인간은 동물보다 더 높은 식욕(appetite)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또 동물이 가지고 있지 않은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또 우리는 도덕감정(moral sentiments)를 가지고 있다. 이 도덕감정은 우리를 이끌어서 대상을 선택하도록 할 수 있다. 아담 스미스의 인간공감설(sympathy theory of human)은 존 스튜어트 밀의 더 높은 행복과 맥을 같이 한다. 때문에 존 스튜어 밀은 인간의 식욕(appetite)이 동물의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강조하였다. 벤담은 식욕 하나를 더 추가하면 개인의 식욕이 만족스럽게 증가하고 또 사회가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존 스튜어트 밀은 그렇지 않았다.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제일의 선(good)은 덕(virtue)이었다. 따라서 ''덕스러워라, 그러면 당신은 선해질 것이다.'' 라고 말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이 덕스러우면 개인은 더 행복해 질 것이라고 말한다. 덕virtue은 공리주의의 기본적인 자격요건이다. 대부분의 합리적 선택 이론가들이나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도 이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반-신자유주의자들과 반-공리주의자들은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utilities)는 질적인 차이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 개인은 합리적 행위자이고, 개인은 자기이익을 추구하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안다. 우리 개인은 각자 필요한 상품들의 가치가 행복한 가격으로 매겨져 있는지 어떤지 잘 파악한다. 이것이 오늘날 살아있는 공리주의의 근본적인 아이디어이다. 찬성자와 반대자가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포인트이다. 존 스퓨어트 밀은 더 높은 행복과 관련하여 짐승들의 쾌락(pleasure)은 저질적인 것으로서 폄훼하였다. 우리는 동물적인 만족보다 더 높은 만족을 갖고자 한다. 당신은 적은 양의 음식을 제공받더라도 오성급 레스토랑에 가고자 한다. 거기는 음식이 매우 맛있다. 그곳은 동물적 식욕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음식을 주는 우스터 스트리트Wooster Street의 이탈리안 패밀리 레스토랑과는 다르다. 우리 인간은 더 높은 차원의 만족과 더 높은 차원의 식욕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단지 배를 채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방법으로 식사가 제공되길 바란다. 우리는 지성적이면서 풍부한 상상적 쾌락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미 루소를 통해서 보았다. 당신이 비교문학이나 영문학을 전공하였다면 독일 시인이자 심미주의 이론가인 쉴러를 접했을 것이다. 쉴러는 아름다움(beauty)의 본질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 쾌락의 질(the quality of pleasures)
우리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은 단지 쾌락의 양뿐만 아니라 쾌락의 질에 달려있다. 이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어느 인간도 저급한 동물로 변신하느데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바보들이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만족스럽게 산다고 할지라도 어떤 지성인들도 바보가 되려고하지 않을 것이다. 바보들을 만족시키기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졍말 멋진 말이 있다.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낫다.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포인트이다. 누구도 이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필요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존재자보다 소크라테스처럼 불만족스럽게 살아가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5. 정의와 법, 정의와 편의

+ 정의와 법(justice and legality)
정의와 법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누군가가 타인의 재산을 침해한다면 그것은 법이 규정하고 있듯이 부당한 행위이다. 잘 알다시피, 공산주의 정부는 사람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지만 그것은 합법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위이다. 그것은 법적으로 행하여졌지만 부정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재산을 침해당한 자의 정의감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법률 중에는 마땅히 존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생성되지 못한 법률들이 있다. 그 법률들은 개인 권리를 적절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생성되어 제졍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존 스튜어트 밀의 시대에는 여성의 권리나 노예의 권리를 보호할 법들이 생성되지 못했다. 최근 미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감시기술(surveillance techniques)은 개인의 자유권(individual liberties)로 인하여 미국 시민의 자유권이 적절하게 보호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새 법률이 생성되어서 정부의 민간인 전화 감청을 엄격하게 규제할 필요가 있다. 또 법률은 고문의 개념을 정확히 정의할 법 조항이 필요하다. 개인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률의 개념적 불비는 인권침해를 초래할 수 있다. 실제로 차별철폐조치(affirmative action)는 인간자유(people's freedom)의 불평등을 다소나마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자유는 인간에 따라 각각 다르다. 분명 어떤 사람의 자유는 더 제한되어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제각각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존 스튜어트 밀은 사람들의 자유의 평등을 창조할 새로운 입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포인트이다. 현실에는 마땅히 생성되지 말았어야할 법률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부당한 악법들에 대하여 논박할 것이다. 정부는 살인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형제(death penalty)를 반대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형제를 찬성한다. 사형제는 타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한가. 존 스튜어트 밀은 아마도 사형제를 반대하면서 사형제 폐지를 입법하였을 것이다. 낙태의 자유는 인정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법으로 금지되어야 하는가. 낙태 금지론자들은 태아의 자유와 권리가 보호되어야 하므로 낙태의 자유는 인정될 수 없다고 믿는다. 반면에 낙태 찬성론자는 수태한 여성의 자유(liberty)가 방어되어야 하므로 낙태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오늘날 매우 논란이 되고있는 이슈이다.

+ 정의와 평등
재미있게도 존 스튜어트 밀은 사람들은 실제로 정의를 평등과 관련시키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불평등이 지나치면 그것을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느낀다. 적법하게 목적이 실현되었더라도 그것이 정의롭지 못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평등은 편의라는 이름으로 왜곡되고 정당화된다. 사실 높은 수준의 불평등으로 인하여 이익이 돌아올 수 있다. 예를들어 월 스트리트 금융기업의 CEO를 생각해보라. 그 사장은 직원들의 보너스를 삭감하려고 하고 있다.그러나 사장은 이러한 조치로 인하여 큰 타격을 받을지 모른다. 그 능력있는 브로커 직원들은 사장의 결정에 반발하여 기꺼이 다른 회사의 스카웃 제의에 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장은 브로커 직원들을 계속 고용하기 위해서라도 수백만 달러에 상당하는 높은 수준의보너스를 지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장은 회사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은행을 생각해보라. 미국의 은행들은 수 십억 달러의 부채를 연방정부에 되갚았다. 왜나하면 그 은행들은 부채상환의 혜택으로서 정부의 간섭을 피할 수 있었으므로 과다한 보너스 지불에 대한 법적, 행정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편의이다. 정의로운 사회에서 어떻게 수백만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의아해하면서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월스트리트의 브로커들은 엄청난 보너스를 받고있다. 그 직둰들은 다른 회사로 이적하면 더 많은 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다. 이것은 분명 편의에 따른 것이지 정의에 따른 것이 아니다. 정의의 핵심 포인트는 무엇인가. 정의는 '타인의 자유와 재산을 침해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고 강조한다.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중요 포인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individual liberty)를 매우 강조한다. 재미있게도 존 스튜어트 밀은 '만약 개인의 법적 권리가 침해되었다면 그것은 그 개인에게 속해서는 아니되는 권리일 수 있다.'고 미묘하게 말하였다. 사실 이것은 현대사회에 흔한 일이 아니다. 당시 존 스튜어트 밀이 살던 시대는 여러 봉건적 특권들이 보장되고 있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 봉권적 특권들을 폐지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그 법들은 정의롭지 못하였기(unjust)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은 비록 법으로 보증되지는 않더라도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 또한 대단한 논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복지국가의 국민은 정부릃 향하여 기본적인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라고 주장할 수 있다. 모든 개인는 주거을 제공받고 거주하면서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존 스튜어트 밀과 맥을 같이하는 주장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사람들의 믿음을 깨버리는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하였다. 무언가를 하겠다고 약속하고나서 그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누구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존 스튜어트 밀은 정의는 편파적일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정의는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고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 정의와 편의
존 스튜어트 밀은 편의적인 것이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최소한의 노력을 가지고 어떤 목적을 달성하였다면 그것은 편의적인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편의상 지름길로 간다. 그러나 지름길로 가지 않는것 이 훨씬 나은 이유는 그것은 정의롭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국가와 전인류와도 공감할 수 있다. 이것은 루소의 아모르 프로퍼 아이디어와 비슷하다. 정의와 편의의 관계는 안타깝게도 서로 혼동될 소지가 있다.


6. <자유론The Liberty>: 자유와 개인성

벤담은 우리 인간은 단지 쾌락을 좇는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기-개발(self -development)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생애 전반에 걸쳐서 자신들의 능력을 개발하여야 한다. 개인주의와 자유는 자기-개발로부터 시작된다. 자기-개발은 단지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개인의 중심가치이겠다. 자유는 존 스튜어트 밀의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이이다. 또 자유는 가장 존 스튜어트 밀다운 아이디어이다. 우리는 단지 자유를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서 믿어서는 안된다. 존 스튜어트 밀은 말하기를 "지배자가 자신을 대중들(the people) 동일시한다면 그 지배자를 매우 조심하라. 그 지배자는 자유를 보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지배자는 다수에 의한 횡포(the tyranny by majority) 정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개인의 권리와 소수의 권리를 방어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왜냐하면 개인은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해야하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선호(preference) 개념과 더 높은 행복 개념을 강조했던 것이다. 개인은 정부의 선택결정과는 무관하게 개인 스스로 공리(utility)에 따라서는 더 높은 가치를 선택하고 결정한다. 따라서 소수자는 대다수가 선택한 것과는 다른 선호를 갖고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소수자의 선호는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존 스튜어트 밀의 아이디어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에서 가장 선행하는 것은 다름아닌 개인의 자유라는 것을 기억해두자.것이다. 자유의 중심가치는 논리적으로 개인의 선호preference 아이디어와 공리(utilities)간의 질적 차이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최악인 것을 선택하여 결정할 수 있는 유일자는 바로 개인 자신이다. 다른 어느 누구도 개인을 위하여 선택하고 결정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애덤 스미스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 표현의 자유
존 스튜어트 밀은 매우 독특하게도, 완전하고 무제한적인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러한 표현의 자유에 근접해있다. 사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적이고 자유롭고 리버럴한 국가들에서조차도 제한될 수 있다. 실제로 표현의 자유는 여러 방식으로 제한될 수 있다. 독일에서는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부정하면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아이디어에 매우 근접해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였다. 이를테먼 어떤 개인이 자신의 의견(opinion)으로서 타인의 권리를 억압했다고 치자. 이때 절대적 표현의 자유가 없다면 그 개인은 자신의 과오와 진실(truths)을 논변할 표현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발언의 기회가 허용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 진리이다. 자신의 과오를 발언하도록 허용하다면 더 큰 문제를 불러오지는 않을까. 분명 홀로코스트에는 유력한 증거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의 부존재를 주장하는 발언을 허용해야 하는가. 존 스튜어트 밀은 확실히 그 발언을 허용하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과오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논란이 되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동조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양쪽 편에 똑같이 귀기울여라. 그것이 진실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이다.'

+다수에 의한 횡포(tyranny by the majority)
다수에 의한 참주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다수에 의한 횡포는 대중 민주주의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큰 악행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수에 의한 참주지배자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소수 의견을 억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다수의 횡포에 저항하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없다.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포인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인간 본성은 인간의 자기걔발(self development)을 원하는 것이지 인간의 사회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동형주의(conformism)는 도덕적 억압이다. 동형주의는 개인에게 많은 압력을 가하여 다수, 즉 주류에 동참하도록 억압한다.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이것은 악행으로서 우리가 저항해서 고쳐야 한다. 우리는 개인적 자유를 방어해야하고 법적이든 비법적이든 어떤 간섭에도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오늘날 대중매체는 주입과 세뇌를 통하여 개인들을 동형적 개조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격노할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한 라이프스타일, 성적 선호, 기타 가치들은 보호되어야 한다. 재미있게도 아담 스미스도 기본적으로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스미스는 존 스튜어트 밀처럼 확실하고 명백하게 자유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정부의 간섭은 단지 개인의 자유가 침해(injury)되었을때만 허용된다고 하였다. 정부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고 다만 침해되었을때는 예외라는 것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은 동정심(compassion)으로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으로부터는 관용(tolerance)을 기대하라고 하면서 타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타인의 선택을 대신 결정해주지는 말라고 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실제로 동형(conformity)을 매우 싫어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도덕적 기준(moral standards)를 강화해 나가지 않으면 참주 또는 다수에 의한 횡포가 시회를 전복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밀의 주장은 시대에 앞선 것이다. 동형주의(conformism)가 악(evil)이라는 것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대단한 화제가 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것을 이미 18세기 중반에 언급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정부는 오로지 개인의 보호(self-protection)를 위해서 개입할 때만 그 간섭intervetion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홉스의 주장과 같은 선상에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우리는 서로 무관심할 것이 아니라 관용(tolerance)으로서 서로 도와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개인 또는 국가의 의지, 취미 또는 선호를 타인들에게 강요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어린이는 누구나 성년이 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선택하고 결정할 자격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매우 문제가 될 수 있는 주장이다. 마약사용 문제를 생각해 보라. 존 스튜어트 밀 자신이 그러한 실수를 한다면 아마도 그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편을 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존 스튜어트 밀은 아마도 마약사용을 비불법화(decriminalization)할지도 모르겠다.  마약사용 여부는 오로지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마약의 위험성과 생명에 해롭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 사용자들의 문제인 것이다.


7.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 주요 내용

잘 알다시피, 여성들은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물론 영국에서도 평등권을 갖지 못했다. 여성들은 투표할 권리뿐만 아니라 실제로 재산을 소유할 권리조차 갖지 못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의 애인이자 부인이었던 해리엇 태일러는 급진적 페미니스트였다. 그녀는 매우 똑똑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존 스튜어트 밀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사실, 그녀는 결혼제도도 반대하였다. 이 책 <여성의 종속>의 중심 주제와 관련하여 포인트는 결혼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노에상태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노예는 세계 어디서나 존재했고 불운하게도 사실상(de facto) 여전히 세계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존 스튜어늩 밀은 여성의 종속은 노예상태의 한 예이고 그것은 여성의 본성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결혼에서의 법적 평등과 더불어 정치와 교육에서의 여성의 평등을 기술하였다. 마지막으로 우정관계로서의 결혼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결혼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노예상태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결혼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노예상태의 한 예라고 하였다. 사실, 부인들은 재산들 소유할 수 없고  남편들은 성적인 욕망의 대상으로서 부인들을 사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부인들은 노예들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에 놓여있다. 노예는 적어도 주인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부인은 자기의 남편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인들은 노예들보다 최악의 상태에 놓여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남편이 원하는 것은 단지 부인의 복종뿐만 아니라 부인의 사랑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관계 19세기에 흔한 현상이었고 현재 21세기에서 조차도 많은 예가 있다. 남편은 부인에게 사랑표현을 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지만 부인의 사랑표현은 기꺼이 기대한다. 불행운하게도 아직도 이런 남편들이 많다. 어쨌든 <여성의 종속>이 19세기 중반에 쓰여진 것 치고는 매우 도발적이고 중요한 발언이다. 한펀 존 스튜어트  밀은 이러한 노예상태는 여성의 본성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루소는 이러한 존 스튜어트 밀의 주장을 반박할 것이다. 루소는 여성은 남성과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여성은 바느질하기를 좋아하고 종속되기를 원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두가지 점에서그러한 여성의 본성에 대한 편견을 반박(counter argument)한다. 첫째, 보통 여성의 본성이 간과되는 이유는 여성은 자기-개발(self-development)을 위한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여성의 종속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정치적 무능력을 입증해야한다. 만약 여성들의 정치적 능력이 인정된다면 여서의 종속은 여성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겠다. 이것은 깔끔한 논박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의 본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자체는 타당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또 존 스튜어트 밀은 결혼의 평등성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상식이 되었다. 여성의 평등은 정치, 교육, 그리고 직업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바드 대학 총장인 래리 서머스Larry Summers는 여성들은 공학(engineering)을 전공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는 존 스튜어트 밀을 주의깊게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여성의 속성은 남성만큼 공학에 능하지 못한데 있지 않다. 여성의 속성은 매우 다양하다. 여성들은 확실히 정치적 직업에도 적합한 면이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결혼과 우정에 대하여 말하기를 "내가 여전히 결혼을 믿는 이유는 결혼은 파트너와의 평등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논란이 되는 이론가였지만  자기 이론을 가능한 최대로 밀어 부쳤다. 존 스튜어트 밀은  매우 영리한 사람인 것 같다.


8. 질문과 검토

+ 질문 1: 인간본성과 관련하여 홉스는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로크와 루소는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그들을 서로 비교하라.

사람들은 홉스를 읽으면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다고 믿게 된다. 이것은 결코 비이성적인 생각이 아니다. 인간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결국 리바이어탄같은 괴물은 필요없었을 것이다. 한편 로크는 자연상태에서의 인간 합리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루소의 숭고한 야만인(noble savage)아이디어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창조주의 손으로부터 완벽하게 만들어져 나왔지만 사회가 인간을 타락시키고 억압하였다. 여기에는 다소 논쟁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반면에 홉스는 인간은 선호와 공포사이에서 저울질하면서 합리적 결정을 한다고 믿었다. 홉스는 인간의 합리적 선택을 인정했던 것이다. 루소에 따르면 선하게 태어난 우리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야만인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사회에는 야만적인 개인들의 결정을 뒤집어 엎을 만한 일반의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정말로 악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법과 질서가 필요하고, 또 정부의 간섭(intervention)이 필요하다. 그러나 로크나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인간은 결국 윤리적이고 선의지에 따라서 행동한다. 따라서 개인은 중앙의 계획자에게 필요한 것과 해야할 것을 결정해달라고 부탁할 것이 아니라 개인 스스로 선택하고 자유롭게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 질문 2: 홉스는 강력한 주권자 국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로크의 주요 관심사는 집행부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로크는 집행권이 입법권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원했다. 두 이론가를 비교하면서 강한 국가가 필요한지 아니면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 최소 국가가 필요한지 검토하여라.

이에 대하여 홉스는 할 말이 많을 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9/11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강한 정부가 필요하다. 우리는 안보가 필요하다. 우리는 평등에 너무 많은 것을 의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9/11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살펴보라. 개인의 자유는 너무 많이 제한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유와 짝해왔던 미국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쨌든 이 문제와 관련하여 확실히 의견이 나누어질 수 있겠다.

+ 질문 3: 몽테스키외와 루소는 방법론적 집단주의자이다. 반면에 홉스와 로크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자이다.  이 문제를 살펴보고 당신은 어떠한 입장인지 또 왜 그러한지 검토하라.

방법론적 집단주의자들은 개인들의 총합을 넘어서는 질료(stuff)가 있다고 주장한다. 좋은 예로서 몽테스키외는 방법론적으로 법을 강조하였다. 법은 각 개인들을 규율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먼저 선천적인 법이 존재하였고 그 후 개인들 속으로 입력된다. 따라서 집단양심 또한 선행하는 것이고 집단양심은 개인 속으로 들어간다. 반면에 홉스와 로크는 정반대로 주장한다. 그들의 방법론적 출발점은 개인들이다. 홉스와 로크는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개인들의 행동, 욕망, 그리고 의지이고 결국 이것을 가지고 집단(collectivity)의 문제를 살필 수 있다고 하였다.

+ 질문 4: 루소의 일반의지(general will)가 가능한 강력한 예를 들어라. 로크, 몽테스키외, 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을 이용하여 일반의지를 비판하라.

분명 일반의지를 필요로 하는것이 있다. 예를들어서 보편적 건강보험이 그렇다. 개인에게 건강보험에 가입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건강보혐에 가입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적 건강보험에는 일반의지가 필요하다. 한편 로크와 몽테스키외, 존 스튜어늩 밀은 보편적 건강보험을 반박할 수 있다.. 도대체 일반의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일반의지가 나온다면 그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일반의지는 개인의 의식에서도 나올 수 있는가. 정부는 개인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정부는 개인이 필요로서 선택하고 결정한 개인의 선호를 뒤집을 만큼 개인보다 더 잘 알 수 있는가. 이것은 분명 문제이다. 확실히 일반의지는 전체주의의 길을 열었다. 칼 맑스와 레닌은 루소의 일반의지를 매우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앙의 계획자가 일반의지로서 개인들에게 명령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중앙의 계획자는 말하기를 "물론 당신은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잘 알고 있소. 그러나 그것은 단기간의 필요일 뿐이오. 나는 당신이 장기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따라서 내 말에 따라 행동하시오." 라고 한다. 루소는 말하기를 "자유롭기 위해서 강제된다(you have to forced to be free)"고 하였다. "나는 당신을 자유롭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나는 당신의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필요를 잘 알고있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비판받을 만한 발언이다.

+ 질문 5: 애덤 스미스는 자기-이익(self-interest)을 추구하는 것이 곧 공통선(common good)에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루소는 일반의지는 개인의지의 총합(sum total of individual will)을 너머선 그 이상이라고 믿었다. 두 이론가의 공통선을 대조하고 누구의 아론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말하라.

애덤 스미스가 옳은 이유는 개인들이 자기 스스로 무엇이 필요하지 결정하지 않는다면 어느누구도 그를 대신해서 자기-이익을 잘 파악하고 결정할 수 없다는 가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자기규제(self regulating)적인 시장과 완벽한 정보체계를 가정하였다. 불운하게도 그러한 가정은 현실세계에서 실현되기 힘들다. 반면에 루소의 일반의지는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 질문 6: 홉스는 강한 정부를 옹호하였다. 반면에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과 작은 정부를 옹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이론의 강력한 예를 들어보라. 그리고 강한 정부와 작은 정부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은가.

21세기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애덤 스미스를 보이지 않는 손과 작은 정부의 아이콘으로서 생각한다. 로날드 레이건 정부는 작은 정부로서 정말로 문제의 불씨였는가. 자유 민주주의자들은 현재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금융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큰 정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금융위기가 초래된 이유는 정부가 제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또 규제완화를 시행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조지 더블유 부시가 했던 것처럼 규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부시는 납세자의 돈으로 금융기업을 구제(bail-out)하였다. 이것이 포인트이다.

질문 7: 루소와 존 스튜어트 밀은 성차별(gender relation)과 관련하여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하였다. 각각의 가능한 예를 들고 당신의 입장는 어떤지 밝히라.

성(gender)차별과 관련하여 루소를 방어하기란 매우 힘들다. 루소는 진짜로 성차별주의자이다. 재미있게도 루소는 sex와 gender를 최초로 개념화 하였다. 그런 면에서 루소는 섬세힌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루소는 여성은 남성과 같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여성은 똑같이 인간이고 똑같은 인권을 가지고 있지만 남성처럼 옷을 입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루소는 여자들이 여성다움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으로 루소와 뜻을 같이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한편 존 스튜어트 밀은 성(gender)과 관련하여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 질문 8: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자였다.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개인은 합리적으로 자기이익을 추구한다. 그러면 존 스튜어트 밀은 아담 스미스와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어려운 질문이다. 거기에는 그렇게 많은 차이는 없다고 보겠다. 존 스튜어트 밀은 상이한 공리(different utilities)에는 개인의 선호(preference)와 질적 차이(qualitative differences)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애덤 스미스보다 훨씬 더 우아하게 자기-이익 아이디어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 질문 9: 홉스는 안보(security)을 강조하였다. 반면에 로크와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를 강조하였다. 이것들이 가능한 예를 들어보아라.

총기소지와 관련하여 로크와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총기소지가 가능하다고 볼 것이다. 반면에 홉스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총기에 의한 대량 학살을 보면서 총기소지는 미친짓이고 세계 대부분의 나라는 총기소지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홉스는 고문, 감청 등과 관련하여 우리는 위험한 세계에 살고있으므로 CIA에게 그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로크와 밀은 그것을 부정하면서 개인의 자유는 신성하므로 개인은 먼저 고문과 감청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2012년 1월 22일 일요일

5. 애덤 스미스: 보이지 않는 손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애덤 스미스

1723년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외곽도시인 커칼디kirkcaldy에서 태어났다.

1737년 애덤 스미스는 당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중심지였던 글라스고우 대학에 입학하였다.

1740년 애덤 스미스는 옥스포드의 발리볼 컬리지balliloll College에 입학하였다.

1751년 애덤 스미스는 글라스고우 대학의 논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 얼마 후에는 그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가 되었다. 재미 있게도, 자기이익Self-interest과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주장한 애덤 스미스의 첫 직업이 윤리학의 일파인 도덕철학 교수였다.

1759년 애덤 스미스는 윤리학과 관련된 <도덕감정 이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을 발표하였다. 애덤 스미스는 진정한 도덕주의자로서 도덕철학자인가. 아니면, 합리적 선택이론 경제학자로서 도덕감정을 부정했는가. 이것은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1764년에서 67년까지 애덤 스미스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볼테르와 저명한 경제학자, 케네 등 여러 프랑스 계몽주의자들과 조우하였다. 이 때의 일로 애덤 스미스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사실, 프랑스 게몽주의는 애덤 스미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776년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을 출간하였다. <도덕감정이론>과 <국부론>사이에는 분명한 긴장관계가 있다. 이 두 책이 정말 같은 저자에 의하여 쓰여졌는가, 또 이 두 책은 정말한 동일한 이론을 소개하고 있는가.가. 이 두 책은 서로 상반되면서 혼동스러운 면이 있다. 한편 커칼디에는 애덤 스미스와 <국부론>을 추모하는 기념관이 세워졌다.

1790년 애덤 스미스는 타계하였다.

아담 스미스는 두 얼굴을 가졌던 것 같다. 오늘날 경제학에서, 애덤 스미스는 두 가지를 대표하고 있다. 먼저, 애덤 스미스는 개인주의자이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개인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자기-규제(self-regulating)하는 시장에서 자기-이익self-interest을 추구한다. 즉 개인은 가능한 최소한의 역할을 하는 정부아래서 가능한 최대로 자기-이익을 좇아간다. 애덤 스미스는 개인의 자기-이익(self-interest)추구는 곧바로 공통선(common good)으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다음,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laissez fair 자본주의자이자,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이론가이다. 오늘날 애덤 스미스는 신고전주의 경제학자, 합리적 선택이론가, 그리고 방법론적 개인주의자의 선구자로서 숭배되고있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이론>에서 인간의 행동을 유발하는 중요한 인자로서 공감Sympathy를 제안하였다. 애덤 스미스가 공감이외의 인간행동 유발인자로서 공공당국의 돕는 손helping hand을 염두해 두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개인과 더불어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을 서술하였다. <국부론>은 <도덕감정 이론>의 연장선상에 있고 이 둘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없는가.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두 저작 사이의 모순을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 경제학자들은 <도덕감정 이론>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있고 오직 <국부론>만을 진정한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토대이고 영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수의 경제학자들과 대다수의 정치철학자들은 애덤 스미스가 진정으로 의도하고 예고했던 것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2. <도덕 감정이론>의 주요내용

우리는 어떻게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악으로부터 선을 구별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위선을 구별해낼 수 있는가. 이것이 애덤 스미스의 포인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서 많은 현대사회 이론 학자들이 다루었던 문제이다. 니체는 선과 악의 문제를 <도덕의 계보학The Genealogy of Morals>에서 다루었다. 개인의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것이 애덤 스미스의 포인트이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개인은 각자 내부인inner person을 가지고 있다. 이 내부인은 자기와 타인을 판단하는 공정한 심사자이다. 이를테면, 당신 안에는 내부인이 존재한다. 따라서 당신은 기술적으로 두 사람이다. 당신의 내부인은 당신의 행동을 일일이 살피며서 때로는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라고 경고할 수 있다. 종종 내부 심사자는 저지르지 말았어야할 어리석은 짓에 대하여 실수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병든 내부 심사자는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일이 잘못되어갈 때 항상 타인를 비난하려 든다면 그는 분명 도덕적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당신의 내부인이 잘못을 경고하지 않고 또, 당신은 그것을 타인의 잘못으로 전가하려 한다면 당신은 분명 도덕적, 윤리적으로 문제를 갖고있는 것이다. 이것이 애덤 스미스의 포인트이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개인은 정념(passion)에 이끌린다. 이것은 홉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스미스는 홉스와는 다르게 공포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또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개인은 공감sympathy에 이끌린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점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공감이 <도덕감정 이론>과 <국부론>을 동일 선상에서 일치시키는 키 포인트라고 말한다. 그 학자들은 스미스가 공감 인간설sympathetic theory of humans을 주장했다고 강조한다. 개인의 행동을 유발하는 인자는 타인를 향한 공감과 타인으로부터 받는 공감이다. 개인은 타인과 상호작용하면서 다름아닌 공감을 얻으려고 한다. 개인은 타인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고자 노력한다. 개인은 좋은 명성을 얻고 명예롭게 행동하고자 한다. 때문에 개인은 타인의 공감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타인의 인간적 조건과 상황을 이해하면서 공감하려고 한다. 또 당신은 자신의 가치에 댓하여 타인의 공감을 받고자한다. 따라서 개인이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공통선에 이른다는 애담 스미스의 명제는 비일관적인 것이 아니겠다. 왜냐하면 나의 개인적인 이익 추구로 인하여 타인들이 나를 존경하고 가치를 인정해 준다면 그 자기-이익이란 또한 타인을 위해서도 좋은 것good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이런 자기-이익의 개념을 갖고 있다면,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서 '"나는 좋은(good)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그러한 자기-이익의 개념에서 본다면 자기-이익과 공통선은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이 애덤 스미스를 이해하는 포인트이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 이론>에서 처음으로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그 개념이 아니다. 즉,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자유방임적 자유시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의 손이었다. 신은 인간의 일에 개입한다. 개인은 열정과 공감사이에서 신의 의지에 따라 적당한 결정을 내린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이란 개인이 순종하는 신의 의지였다. 사실,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전 작품을 통틀어서 딱 세번 '보이지 않는 손'을 인용하면서 세 번 다 다른 의미로 사용하였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은 <국부론>에 단 한번 나온다. 그것도 외국과의 국제무역에 관한 것이었지 정부의 역할과는 전혀 관게가 없었다. 오늘날 애덤 스미스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을  자유교역과 국제자유무역에 한정한다. 따라서 용어를 발명할 때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일생에 단 한번 쓰더라도 그 화살이 발명자의 의도를 거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3. <국부론>의 주요내용: 자기이익과 공동선self-interest and common good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제1부에서, 노동분업과 더불어 가격결정 요인으로서 노동, 자본,  지대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제 2부에서, 자본의 축장과 고용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스미스는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제 3부에서, 수렵에서 유목, 농업, 상공업으로 이어지는 사회진화를 서술하였다. 스미스는 현대 경제를 상공업 사회로 보았을 것이다. 제 4부에서, 중상주의mercantilism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자유무역과 보이지 않는 손은 여기서 소개된다. 제 5부에서, 정부의 세입과 지출, 세금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스미스는 자기-이익과 공동선에 관련하여 개인은 타인들과 서로 상호작용하는 동안 타인들로부터 은혜를 기대하지말라고 말한다. 다른 누군가가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것이라는 기대를 말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자기이익을 위한 직업선택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사회를 위한 공통선이 된다고 하였다. 또 스미스는 개인들의 이익과 관련하여, 개인의 판단은 국가나 입법자law-giver 보다 훨씬 낫다고 하였다.

+ 자비를 기대하지 말라
사람들은 보통 인용하기를 "우리는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가나, 빵집 주인의 은헤가 아니라 바 그들의 자기-이익으로부터 식사를 준비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식당에 간다. 나는 요리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좋은 식사가 필요하므로 그 요리사가 나를 환영해 주길 기대하면서 나에게 좋은 식사를 제공해주길 바란다. 나는 웨이터에게 팁을 줄 수도 있다. 따라서 웨이터의 자기-이익은 좋은 식사와 서비스를 나에게 제공하는 데 있다. 경우에 따라서, 나는 팁은 커녕 다시는 그 식당을 방문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자기-이익에 호소하는 것이지 상대방의 자비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스미스에 따르면 개인은 타인들의 인간성이나 자기애에 호소해야 하는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기-이익에 호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이슈이다. 이를테면, 나의 아내는 종종 나에게 말하기를 "그 사람은 당신한테 좋은 친구가 아니예요, 그 사람은 꼭 필요할 때만 당신을 부르잖아요." 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스미시안으로서 답하기를 "나는  나와 상호작용하면서 이익을 보지않으려는 어떤 친구나 사람도 원하지 않소. 친구들은 자기-이익을 위하여 나와 관계를 맺는 것이오. 친구들이 항상 나한테 오면서  비용만 들고 이익이 없다면 그것은 나쁜 관계요." 라고 한다. 나는 아이들이 단지 사랑으로만 행동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이들에게 고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이 자기-이익이 되는 아빠로서 봐주기를 원한다. 그것이 좋은 관게이다. 좋은 관계는 항상 자기-이익을 바탕으로 세워진다. 당신은 당신과의 관계에서 즐거움을 얻지 않으려는 애인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애인이 자기-이익을 위하여 행동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미스의 포인트이다. 심지어 스미스는 타인들의 자비를 구하는 거지들조차도 타인들의 자기-이익 가대한다고 하였다. 사실, 거지들은 교묘하게 자비로울만한 사람들을 골라가면서 그들의 자기-이익에 호소한다.

+ 자기-이익을 위한 직업선택은 사회에 이익이 된다.
스미스는 우리는 직업을 선택할때 연봉을 많이 주는 큰 회사를 원한다고 하였다. 만약 경제학을 전공했다면 당신은 학사학위를 갖고 월스트리트Wall Street의 중개회사에 들어가서 연봉 십만달러를 벌고 싶을 것이다. 당신은 왜 십만달러을 벌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고용주는 당신이 대학에서 배운 많은 기술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자기-이익을 추구하면서 최대한 공통선에 이바지했으므로 최대의 연봉을 받는것은 사회 이익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그렇게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가능한 최대의 반대급부를 해주는 직장을 찾을 것이다. 당신은 자질과 기술과 중노동을 회사에 제공하면서 최대한 공통선에 이바지함으로써 가능한 최대의 연봉을 손에 쥐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스미스의 포인트이다.

+ 자기-이익에 관한 판단은 국가나 입법자보다 개인이 훨씬 낫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스미스는 개인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이익을 잘 안다고 하면서 개인은 국가나 법수여자(law giver)보다 자기-이익에 관한한 훨씬 나은 판단자라고 하였다. 스미스에 따르면 개인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야하고 그것을 정부에게 떠맡겨서는 안된다. 예를들어, 건강보험(healthcare insurance)개혁은 큰 논쟁이 되고있다. 건강보험 가입여부는 개인에게 맡겨두는 것이 옳은가. 개인의 생명은 개인 스스로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정부, 정치가,  의회 입법자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하는가. 스미스는 명백히 개인의 자기 감정은 최선의 판단자라고 하였다. .

4. 노동가치설과 보이지 않는 손

스미스는 로크로부터 노동가치설을 빌려왔고 그것을 칼 맑스에게 전해주었다. 칼 맑스는 노동작치설을 급진화하였지만 그 아이디어를 확실히 아담 스미스로부터 빌려온 것이었다. 스미스는 분명 모든 가치의 척도는 노동이라고 말하였다. 스미스는 모든 생산물은 노동에 속한다고 하였다. 맑스는 여기까지 완전히 일치한다. 맑스는 "이윤과 지대는 어디서 오는가."라고 물으면서 스미스와 결별하였다. 맑스는 이윤과 지대는 착취로부터 나온다고 하면서 이익을 얻는자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라고 말하였다. 반면에 스미스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스미스에 따르면 자본을 대여해준 자와 토지를 임대해준 자 또한 그 가치의 일부분인 이윤과 지대를 취할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 노동은 가치의 척도이다.
노동은 가치의 척도라는 명제는 분명 모순일 수 있다. 모든 가치가 노동에서 창조되고 노동자에게 속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본가가 아윤을 취하고 지주가 지대를 취하는가. 이전에 존 로크도 이와 비슷한 논박을 했었다. 로크에 따르면 재화(commodity)의 가치는 재화를 소유한 자에게 속해있다. 또 그 재화가 사용이나 소비가 아니라 교환을 위한 것이라면 그 재화의 가치는 그 재화에 들어가는 노동의 양과 같다. 따라서 로크는 노동은 모든 재화의 교환가치를 가늠하는 진정한 척도라고 하였다. 분명, 재화는 사용가치를 가질 수 있고 대단히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선한 공기를 생각해보라. 공기에는 노동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사실, 신선한 공기를 위해서는 조금의 노동이 필요하긴 하다. 재미있게도, 스미스는 이것이 어떻게 노동에 의한 재화로서 교환될 수 있는가라고 논박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미스의 것이든 맑스의 것이든 노동가치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모든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속한다.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주장이다. 존 로크에 따르면 각 개인의 재산은 자신의 노동이다. 따라서 모든 가치는 개인의 노동에 의하여 창조되므로 그 가치는 노동의 소유자에게 속한다. 재미있게도 스미스는 이것은 자본과 토지가 축적되고 사유화되기 이전의 사회에서 가능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자본의 축적과 토지의 사소유권화가 되기 이전인 고대사회에 해당한다. 놀랍게도, 자본 축적이 없고 토지 사소유권이 없는 경우에, 토지는 공통으로 소유되는 것이 옳다. 또 노동에 의하여 창조된 모든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속하는 것도 옳다. 맑스는 드라마틱하게도 바로 이 스미스로부터 출발하였다..

+ 이윤과 지대는 어디서 오는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단지 착취하기만 하는가. 스미스는 그렇지 않다고 강조하였다. 스미스에 따르면 노동과 자본과 토지에는 소득분배가 있다. 이것이 스미스의 포인트이다. 스미스에 따르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자본을 선대한다. 자본가는 이 선대자본의 위험을 무릎쓰고 노동과정을 감독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는 선대자본으로부터 이윤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그렇지 않다면 자본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자본을 선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토지의 경우에도 똑같다. 지주는 생산 가능한 토지를 임대하고 그 토지에서 지대를 거둘 수 있어야 한다.

+ 보이지 않는 손
보이지 않는 손은 상이한 세가지 개념이 있다. 먼저, 스미스는 <도덕감정이론>에서 그것은 신이라고 말하였다. 신은 우리에게 공감감각(sense of sympathy)을 주었다. 우리는 타인을 존경함과 더불어 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자하는 우리의 열정과 자기억제 사이의 균형자 역할을 한다. 다음,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그것은 자유무역시장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스미스는 <천문학의 역사History of Astronomy>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쥬피터의 손이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무지해서 번개같은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그것을 쥬피터의 의지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일종의 미신이었다. 보다시피,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개념은 각각 달랐다. 그 어느 것도 오늘날 사용되는 보이지 않는 손과 일치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원문번역,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2012년 1월 18일 수요일

4. 루소: 대중주권, 일반의지, 자연상태, 교육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루소

1712년 6월 28일 장 자크 루소는 도시국가City State였던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당시 제네바는 잠깐동안 칼빈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칼빈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한 도시였다. 제네바에서 태어난 칼빈은 당시에 철권을 휘둘렀다. 루소의 부친은 시계 제조공으로서 칼빈주의자였다.

1722년 루소의 부친은 빚 문제 때문에 배를 타고 이스탄불로 도망가버렸다. 때문에 루소는 10살의 나이에 고아가 되어버렸다.

1728년 루소는 아낭시Annency로 이주해서 홈home을 운영하는 마담 와렌스Warens를 만났다. 마담 와렌스는 로만캐돌릭교도였다. 그녀의 임무는 칼빈주의자들을 로만캐돌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루소를 자기 홈home으로 데려갔다. 루소는 당시 16살의 미소년이었고 마담 와렌스는 28살이었다. 루소는 엄격한 칼빈교도였으나 마담 와렌스와의 로맨틱한 과정 후에 로만캐돌릭으로 개종하였다. 루소는 자신의 책 <고백>에서 당시의 일들을 자기 풍자irony와 자기 비판으로 소개하였다. <고백>은 그 사실관계를 떠나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의 사후에 발간되었다. <고백>에 따르면 마담 와렌스가 루소를 양육하고 성장시켰다. 루소와 마담 와렌스 사이의 환상적이고 로밴틱한 관계는 저명한 프랑스의 소설가인 스탕달의 <적과 흑>에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 줄리안 소렐Julien Sorel은 장자크 루소였고 마담 레날Renal은 마담 와렌스였다.

1742년 루소는 파리로 이주하였다.

1743년 루소는 베니스 주재 프랑스 대사인 몽테뉴Comte de Montaigue의 비서가 되었다. 그런데 루소는 아마 빚 문제로 추정되는 여러소동에 휘말리면서 베니스를 떠났고 파리로 돌아왔다. 루소는 백과사전과 프랑스 계몽주의로 유명한 디드로를 만나게 되었다. 디드로는 루소에게 백과사전에 넣을 음악에 관한 아티클을 청탁하였다.

1745년 루소는 르바쇠Therese Levasseau를 만났다. 그녀는 루소가 머물고 있던 호텔의 하녀였다. 루소와 르바쇠는 오랫동안 관계를 지속하면서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1768년에 루소는 르바쇠와 결혼하였고 그녀와의 사이에 5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고아원에 버렸다. 

2. 주요작품과 현존하는 유산

장 자크 루소는 철학자이면서 사회학자이고 또 예술가였다.

1752년 루소는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Le Devin du Village>를 작곡하였다. 당시, 루소는 프랑스의 대작곡가, 라모Rameau와 격렬한 논쟁을 하였다. 루소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멜로디가 프랑스 오페라의 멜로디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라모는 루소를 반박하며, 멜로디보다는 하모니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라모는 천재적인 작곡가로서 현대 음악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고있었다. 또 위대한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는 루소를 좋아하였다. 모짜르트의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Bastien und Bastienne>는 루소의 마을의 점쟁이Le devin du Village>의 영감을 받고 쓴 작품이었다.

1761년 루소는 소설 <줄리Joulie>를 발표하였다. <줄리>는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모짜르트는 생애 초기에 이탈리아 성향의 오페라 작품을 지양하면서 독일 오페라를 창조하였다.

1750년 루소는 과학에 관한 책인 <과학과 예술의 제일 논고First Discourse on Science and Arts>를 발표하였다.

1755년 루소는 아주 재미있는 책 <인간불평등 기원론Discourse on the Origins of Inequali>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매우 도발적이었는데 홉스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은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지면 질투심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당신이 새 연인과 열정적으로 깊은 사랑에 빠지면 옛 연인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된다. 결국 당신의 질투가 불평등을 자초하였다. 결국, 루소는 이러한 질투가 불평등의 기원이라고 보았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 본성의 유일한 선(good)이란 욕망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타인이 욕망의 대상을 쟁취하면 질투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욕망의 대상을 획득화고 독점하려고 한다. 따라서 홉스는 인간 욕망이 불평등의 근거라고 하였다.

1762년 루소는 두 대작, <사회계약론Social Contract>과 <Emile에밀>을 발표하였다. 홉스와 로크 그리고 루소는 모두 사회계약에 대한 비범한 아이디어를 전개하였다. 먼저, 최초의 계약주의자,  홉스는 현실적이기는 하였으나 다소 부족한 아이디어를 전개하였다. 홉스에 따르면 사회계약은 개인이 지배자를 상대로 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공포에 의하여 강제되는 것이다. 일단,  사회 계약이 체결되면 그것은 개인들을 영원히 구속한다. 반면에, 로크에 따르면 사회계약은 개인과 연방(Commonwealth)사이의 계약이므로 개인은 스스로 체결한 계약에 구속된다. 이것은 홉스보다 훨씬 좋은 아이디어이다. 예를들어, 당신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결코 미국헌법을 따르겠다는 계약을 체결하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미국정부와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미국에 충성하겠다고 서약했다. 당시에 나는 헌법 조문을 읽기로 되어었지만 자세히 읽지는 못했다. 재미있게도, 나는 그 계약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도 어렴풋이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계약을 체결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은 시민권을 포기하고 북한시민이 될 작정을 하지않는한 여전히 사회계약에 구속되어있다. 이것이 로크가 홉스와 구별되는 포인트이다. 재미있게도, 루소는 개인이 아니라 일반의지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루소의 아이디어이다. 루소에 따르면 일반의지는 개인들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사실, 일반의지는 현실적이고 직관적인 아이디이로서 매우 위험한 아이디어이다. 전체주의 국가들은 자주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를 옹호했었다. 루소는 개인의 자유는 강제된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것은 일반의지 아이디어에서 끌어온 명제이다. 루소는 자유주의자이면서도 계약주의자로서 전체주의의 지평을 열었던 복잡한 사상가였다. 재미있게도, 루소 많은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또 많은 전체주의자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았다. 칼 맑스와 블라디미르 일리히 레닌도 루소를 사랑하였다. 물론, 그 이유는 일반의지 아이디어 때문이었다. 자유주의자인 뒤르껨도 루소를 사랑하였다. 그 이유는 <에밀> 때문이었다. 사실, <에밀>을 능가하는 현대 교육이론은 아직 없다. <에밀>은 현대 교육이론의 기초서이다. 한편, 루소는 미국 헌법과 프랑스 혁명의 큰 발판이 되었다. 루소는 최초로 대중 주권자를 옹호하면서 제 3신분을 폐지하고 대중에 의해 선출된 기구를 설립하자고 하였다. 루소는 양원제(Two Chamber)즉, 귀족을 위한 상원과 대중을 위한 하원를 고집했던 몽테스키외와 심한 갈등을 빚었다. 루소는 보편적 참정권(Universal Suffrage)을 주장하면서도 여성은 예외로 두었다. 따라서 루소는 남성 쇼비니스트(chauvinist)였다. 알다시피,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는 프랑스혁명의 급진 자코뱅파, 레닌주의 공산주의자, 그리고 마오주의자의 교과서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루소의 제자이자 일반의지 신봉자였던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는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갔다. 루소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그것을 알렸다. 루소는  이해 1762년 제네바로 망명을 떠났다. 왜냐하면 <사회계약론>과 <에밀>이 교회로부터 배척받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데이비드 흄은 <사회계약론>과 <에밀> 등 루소의 저작들에 경탄하였고 마침내 루소를 영국으로 초청하였다. 데이비드 흄과 루소는 매우 잘 어울렸다.

1767년 루소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루소는 더 이상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위하여 오랜동안 가명으로 생활하였다.

1768년 마침내 루소는 56세의 나이로 Therese와 결혼하였다. 루소는 그녀와의 사이에 낳은 자녀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내버렸다. 루소는 <고백Confession>을 저술했는데 그의 사후인 1782년에 발행되었다.

루소는 1778년 7월 2일 타계하였다.

3. <사회 계약론Social Contract>의 주요내용

루소는 <사회 계약론> 제 1권Book 1에서, 자연상태로부터 정치적 권리로의 이전해가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제 2권Book 2에서, 주권자는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지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이것은 로크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항이다. 루소는 처음에 선별적 귀족주의를 선호하였지만 점차 보편적 참정권과 합법적 주권자, 헌법 이론에 몰두하게 되었다. 제 3권Book 3에서, 정부에 관하여 장황하게 서술하였다. 제 4권Book 4에서, 고대로마와 시민종교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그럼, <사회계약론>의 주요내용은 무엇인가. <사회계약론>의 포인트는 합법적 지배(Legitimate Rule)에 있다. 루소에 따르면 지배의 합법성은 시민들의 동의에 있다. 또 일반의지는 정의에 선행하므로 정의는 희석될 수 있다. 루소는 개인 의지를 갖고는 보편적 정의에 다다를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일반의지와 공동선은 개인의 정의를 희석할 것이고, 개인 의지는 집단의지, 즉 집단 선good에 따라서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 거슬릴 수도 있지만 확실히 진정성을 담고있다. 또 이것은 매우 위험한 주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는 전체주의 국가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주권자는 개인 각자의 의지를 무시하고 주권자의 의지를 정당한 것으로서 강요한다. 전체주의 국가의 주권자는 집단의지라는 명목으로 개인들을 억지로 해방시키려하고 이해시키려 든다. 역사상, 그러한 주권자는 분명히 일반의지를 오용하였다. 이것이 개인 의지의 희석이 의미하는 것이다. 루소는 대중 주권과 협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개인은 개인적 관심 사항만을 표명하지만 일반의지는 단순히 개인적 의지들의 총합(the sum total)만은 아니다. 루소는 방법론적 집단주의자였다. 루소는 입법자(lawgiver)칭송하면서 입법자는 자신을 위한 이기심과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공공심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지혜롭기 때문에 시민들은 입법자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루소에 따르면 선한 정부는 선거로 선출된 대중적 입법부와 지혜를 가진 귀족적 집행부로 구성된다.  일반적인 통념에 따르면 정부는 지혜로워야한다. 과거, 미국의 몇몇 대통령은 다소 걱정스러웠다. 역대 대통령 모두가 지혜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몇 몇은 바보는 아니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였다.

4. <사회 계약론> 제 1권: 합법적 지배, 희석된 정의, 대중주권

+ 합법적 지배(legitimate rule)
루소에 따르면 합법적 지배는 귀족주의와 같은 자연적 특권(natural title)부터는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지배자는 피지배자들의 동의에 의하여 권력을 행사해야한다. 재미있게도, 루소는 유일한 자연적 사회 집단인 가족조차도 자연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내의 사회 계약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를테면, 당신은 성장하고 나서야 가족이 사회 계약이었음을 알게된다. 자식들 중에는 부모와의 관계가 매우 불편해서 계약을 파기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 십대가 되면 가족적인 자연권을 계약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십대들은 자기-보존을 위해서 부모의 보호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보호가 더 이상 필요없게되면 가족의 자연적 구속은 해제된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로부터 시민 사회로 이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민사회에서 본능적으로 행동하기 보다는 정의를 추구하고 또, 자연 상태에서와는 다르게 도덕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민 사회에서 자연상태에서 누렸던 혜택들을 빼앗길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는 엄청난 헤택을 가져다준다. 인간은 시민 사회(civil society)에서 자신의 능력을 연마하고 발전시키면서 사고를 확장시키고 감성을 풍부하게 살찌울 수 있다. 이것이 루소의 시민사회에 대한 포인트이다. 이것은 엄청난 진보이다.

+ 희석된 정의(diluted justice)
루소에 따르면 인간들 각자의 정의가 인정되기 위해선 개인의 정의가 희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희석이란 개인적 정의가 일반 의지에 의하여 전복되는 것을 말한다. 주권자는 어떤 보증자도 필요없이 개인의 의지를 제한한다. 분명, 이것은 개인의 고통을 덜기위한 조치이다. 개인이 제약을 받는 이유는 일반의지가 우선해야하기 때문이다. 또 사회의 공동선은 개인의 이기주의를 엎어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영국 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는 구별된다.

+ 대중 주권(popular sovereignty)
루소는 대중 주권을 주장하였다. 대중 주권은 루소의 이론 중에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루소에 따르면 대중 주권은 협약convention)에 의하여 주어지고 협약은 다수의 지배에 따르는 것이다. 다수의 지배는 대중으로 구성된 의회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의회가 필요하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대중 주권은 매우 급진적이고 논란이 되었던 아이디어이다. 대중 주권 아이디어는 모든 자원을 공동 재산으로 협약한 공산주의 사상과 거의 같다. 이것은 매우 문제가 될 수 있다. 재미있게도, 루소는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평등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것은 홉스와는 매우 다른 견해이다. 루소는 인간은 협약에 의하여 서로 평등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 협약에 의한 평등이 정말로 전체주의를 향한 문을열었던 것인지 논란이 되고있다. 루소는 소유에 관한 최상의 형태로서 공공소유, 자원의 국가소유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매우 큰 문제로서, 맑시즘과 공산주의사상의 문을 열었다.

5. <사회 계약론> 제 2권: 일반의지(General Will), 법과 입법자

루소에 따르면 개인은 사적인 관심을 표현하고 주권자는 일반의지와 공적 관심을 표현한다. 그럼, 일반의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루소에 따르면 일반의지는 확실히 개개인을 초월한 곳에서 나오고, 연방Commonwealth은 일반의지를 표상한다. 일반의지는 각각의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모든 개인이 관심을 갖고 따르는 의지이다. 방법론적 집단주의자는 일반의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루소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법에 복종할 때만 자유롭다. 즉, 자유는 인간 스스로-부여한 법(self-imposed law)이다. 헤겔에 따르면 개인은 필연을 인식할 때 자유로우므로 개인은 법에 따라가야 한다. 그럼, 일반의지가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 누가 판단하는가. 분명, 공공애(amour-propre)자는 자기애(amour-soi)자와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소에 따르면 사회 계약은 보편적 동의에 따라서 체결해야하고 또 사회 계약은 대중 주권의 행사로서 체결한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물론 로크도 이렇게 주장하였지만, 루소는 민주주의적 대중주권과 보편적 참정권을 매우 발전시키면서 전개하였다. 루소는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로크가 손대지 못했던 보편적 참정권을 짚었다.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는 아주재미있으면서도 혼란스럽지만 진정성이 있는 아이디어이다. 일반의지가 잘 먹히는 예로는 방법론적 집단주의가 있다. 루소는 홉스나 로크, 존 스튜어트 밀, 스미스와는 다르게, 사회와 사회인의 행동에는 모든 개인의 의지를 총합한 이상의 일반의지가 깃들어 있다고 하였다. 일반의지 아이디어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사회이론으로서 발전되었다. 특히 에밀 뒤르꼠이 일반의지를 좋아하였다. 일반의지는 개개인의 이익의 총합을 초월하는 보편선으로서 명백한 진리이다. 건강보험을 생각해보라. 정부는 의료개혁과 관련하여 모든 개인의 건강 보험을 의무화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은 건강보험의 가입 여부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않는다. 일반의지는 개인에게 결정권을 주지않는다. 어떤 대학은 입학조건으로서  필수 예방접종을 요구할 수 있다. 따라서 예방접종없이는  대학 입학이 불가능할 것이다.그 에방접종은 개인에게 결정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게도,이 대학의 결정은 모든 사람이 합리적이거나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가정한 일반의지가 아니다. 따라서 그 결정은 시정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일반의지는 상식적이고 집단선(collective good)이다. 일반의지, 즉 공공선은 강요될 수 있다. 이것이 일반의지의 큰 문제점이다. 그럼, 일반의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일반의지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루소에 따르면 지혜로운 자는 사회의 선과 필요에 관련하여 모든 사람의 일반의지를 알아낼 수 있다. 또 대중이 선출한 의회는 그 일반의지를 법률화하고 통과시킨다. 루소는 그들을 입법자lawgiver라고 하였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혼란스럽다. 루소는 입법자로서 정부의 아이디어가 훨씬 낫다고 하였다. 결국 이 아이디어는 전체주의의 길을 열었다. 사실, 루소는 정부가 아니라 우리, 즉 지혜로운 철학자와 지성인들이 대중의 이익을 훨씬 잘 안다고 주장하였다. 재미있게도 그 지성인 입법자는 개인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당신에게 이익이 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당신의 이익에 관해서는 우리 철학자가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혼란스러운 아이디어이다. 도대체 어떻게 지성인이나 철학자가 당신의 이익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루소의 일반의지는 칼 맑스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그리고 마오쩌뚱에게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은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를 사랑하였다. 중국 공산당과 러시아 공산당의 아이디어는 중국 대중이나 러시아 대중들의 이익을 표상하는 일반의지가 되었다. 즉 개인보다는 중앙의 계획자가 대중의 이익을 훨씬 잘 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의지는 매우 문제가 될 수 있다. 사회의 일반의지와 공공선에 해박한 자가 정말로 있는가. 경제학 전공한 자는 이것을 부정할 것이다.

6. <에밀Emile>의 주요내용

장자크 루소는 소년 에밀의 가정교사였다. 루소는 에밀이 어릴적부터 성장하여 소피Sophie와 혼인할 때까지 그를 교육하였다. 기가 막히게도 루소는 자신의 자식들은 모두 고아원에 버렸다. 그 자식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고아원에서 죽었다. 루소는 <에밀>에서 도시화된 야만인을 양육해야한다고 하였다. 자연 상태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유아기, 소아기, 사춘기를 거치면서 자연상태에서 사회로 이전해간다. 원자화된 개인은 청년이 되면서 사회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루소에 따르면 원자화된 개인이 자연 상태로부터 사회로 이전해가는 것은 자기애amour de soi에서 공공애amour propre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복잡한 아이디어이다. Propre는 영어의 proper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 또한 배려하는 myself를 뜻한다. 반면에 Soi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myself를 뜻한다. 프로이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propre는 ego와 alter를 모두 고려한 myself이다. 루소는 공공애amour propre없이는 시민이 될 수 없다면서 시민과 브르조와의 개념을 명백하게 구별하였다. 루소는 한편으로는 급진적 민주주의자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좌파 급진주의자였다. 루소는  '부르조아' 라는 용어를 경멸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루소는 부르조아를 시민과 확실하게 구분하였다. 부르조아는 공동체에 헌신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돈을 모으는 이기적인 사업가를 말한다. 부르조아는 일반의지에 복종하지않고 이기적이면서 속좁게 경제적 이익만을 밝힌다. 이것이 루소가 말하는 부르조아이다. 이런 면에서 루소는 칼 맑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칼 맑스 또한 인간적으로 부족했다는 루소를 사랑하였다. <에밀>의 주요내용은 자연은 선하고 사회는 부패하다는 데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면서 강력한 명제이다. 이것은 맑스뿐만 아니라 뒤르껨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또, 루소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제들, 철학자들, 그리고 의사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루소가 <에밀>에서 밝히고자했던 목표는 첫째, 부정 교육(negative education)이었다. 둘째, 야만인들을 사회적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자기애amour de soi에서 공공애amour propre적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충격적이게도, 루소는 인간을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연민(pity)이라고 하였다. 그럼, 인간은 부르조아가 됨이없이도 시민이 될 수 있는가. 루소에 따르면 도시(civilization)는 인간의 섹스(sex)가 상상력으로 승화될 때 비로소 창조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루소는 인간을 사회화하는 데는 두가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것은 연민pity과 사랑love이다. 섹스Sex는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섹스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성적인 충동drive이 실제로 현실화된 에로틱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사랑은 세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한다고 하였다. 멋지게도 첫 단게, 당신은 사랑에 빠졌지만 누구와의 사랑인지 아직 모른다. 당신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서, 대상을 찾고있지만 아직 확실하게 구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이것은 확실히 사춘기에 처음으로 일어날 수 있다. 보통, 열세살, 네살 즈음에 로맨틱한 것을 불현듯 알게 되는데, 그 로맨틱한 감정의 대상을 구하지 못한 경우이다. 실제로, 이것은 사랑에 빠지면 항상 일어나는 현상이다. 노인들 또한 예외가 아닌데, 사랑의 감정은 인생의 말년에도 일어난다. 종종, 노인들은 인생에서 유일한 사랑이란 거의 없다고들 말한다. 루소에 따르면 사랑은 차이성의 바턍 위에서 서로 결합하는 것이다. 뒤르켐에 따르면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각자의 차이성 때문이다. 분명, 이것은 루소와 뒤르켐의 유사한 면이다. 루소는 <에밀>에서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것을 충격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었다. 루소는 남성 쇼비니스트로 알져져 있는데, 앞으로 더 복잡한 문제가 남아있다.

7. 자연은 선하다(Nature is good); 사회는 타락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 선하지만 사회에서 타락한다. 홉스와 뒤르켐은 이것과 정반대로 주장하였다. 그럼, 사회에 더 많은 통제를 가해야하는가. 이것은 루소의 근본적인 아이디어에 반한다. 루소에 따르면 원래, 어린이는 악(vice)과 실수를 모르지만 사회를 통하여 악과 실수를 알게된다. 루소는 신학적인 논박을 하면서, 모든 것은 창조주의 손에 맡겨졌을 때 선하지만 인간에게 맡겨졌을 때 타락하고, 인간은 모든 것을 뒤엎어놓고 더 이상 자연이 만든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종종 인간의 자연적 본능을 지양하라는 말을 듣게된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교련된 말처럼 훈련(trained)되어야 한다. 트레이닝Training은 단순히 요령을 터득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종종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운것을 잘 훈련training하여 시험준비를 하지만 시험이 끝난 후에는 다 잊어버린다. 반면에 교육Education은 자기 스스로 사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루소는 너무 많은 훈련을 가르치는 것은 문제라고 하였다. 훈련을 마치 프랑스의 정원처럼 아릅다운 풍경을 위해서 나무의 가지들를 마구 잘라 없앤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비자연적이다. 이어서 루소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연적이지 않다고 하면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였다. 루소는 이런 면에서 홉스와 동조하였는데 사실, 우리는 죽음의 공포에 휘둘리지만 이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개가 죽을 때는 개의 눈에 공포가 깃들어 있다고 한다. 루소의 관찰이 정확했는지,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루소의 죽음에 대한 주장은 진정성이 있다. 물소들buffaloes은 죽을 때가 다가오면 스스로 멀리나가서 드러누운 후에 평화롭게 죽음을 기다린다고 한다. 멋지게도, 루소는 다름아닌 철학자들, 의사들, 그리고 사제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우리 안에 심어놓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대단한 아이디어이다. 루소에 따르면 우리는 지식을 독점하는 자들에 의하여 지배받고 있는데 그 지식의 힘이란 다름아니라 우리 안에 주입된 죽음의 공포이다. 의사들은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치료하겠소."라고 한다. 사제들은 말하기를 "당신은 지옥에서 타 죽을 것이오."라고 한다. 그러나 루소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고통받고 평화롭게 죽을 것인지 선험적으로자연스럽게 알고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젖어있어서 걱정속에서 살아간다. 바로 이것 때문에 부정교육이 필요하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부정교육은 매우 충격적인 아이디어이다. 부정교육 이론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매우 인기있었다. 왜냐하면 이반 일리히의 저작들은 많은 사람들을 강하게 몰아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반-문화 교육이론(counter-cultural educational theory)은 이반 일리히 레닌에 대한 부정교육을 강조한다. 사회가 주입한 여러 어리석은 아이디어들은 마음에서 제거될 필요가 있다. 그럼, 죽음에 대한 부정교육은 무엇인가  루소에 따르면 우리는 먼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배울 것이 아니라 필연을 받아들여야 하고 사회의 타락을 막아야 한다. 루소는 열정적인 교육자들은 언제나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 아이들이 진실로 배우고 싶어하는 것을 묻고 답해줘야한다고 하였다. 교육은 자기의 마음을 사용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지 독단에 물들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제일의 교육은 순수한 부정이어야 한다. 교육은 덕과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기가슴를 지키고 실수에 대하여 자기마음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육에 관한 루소의 포인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교육의 목표는 훈련이 아니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교육은 아이들이 두뇌를 충분히 작동시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때 아이들은 실수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자신의 실수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된다. 교육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아이들의 질문에 대하여는 어떠한 옳은 답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중요한 질문들은 서로 유력한 답들이 충돌한다. 루소에 따르면 교육의 목표는 어떤 증거에 대하여 찬성과 반대 또는 장점과 단점을 생각케하고 실수를 피하기위해서는 어떤 명제를 이용하여 판단할 것인지 돕는 것이다. 이것이 루소의 교육에 관한 모든 것이다. 다음은 명령에 관한 것이다. 루소는 명령은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루소는 복종과 명령이란 단어는 사전적 의미일 뿐이라고 하였다. 심지어 의무와 명령이란 단어 또한 그렇다고 하였다. 이 또한 매우 도발적인 아이디어이다. 루소에 따르면 교육을 통하여 마땅히 생성되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 힘(strength)이다. 교육은 필연(necessity)을 강조하고 또 교육은 불능(impotence)을 강조한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인간 한계 너머의 것들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나 교육은 현실적인 제약들을 강조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교육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말하기를 "이것이 당신이 해야할 의무이다.' 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법이다. 교육자는 사람들 안에 있는 죄성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죄책감(guilt feelings)을 오용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그럼, 죄책감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나중에 니체를 다루면서 검토하게 될 것이다. 루소는 죄를 만들어낼 궁리를 하지말고 대신에 무엇이 필연인가를 인식하라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교육자는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으면서도 "그렇게까지는 하지말았으면 좋겠다." 등의 경고도 잊지 말아야한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8. 야만인을 사회적 존재로 탈바꿈 시키기

루소에 따르면 야만인을 사회적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자기애amour de soi적 인간을 공공애amour de propre적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자기애를 자기-이익self-interest라고 부르면서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어린이들은 자기애를 갖고 태어난다. 예를들어, 장난감을 어린아이에게서 떨어트려 놓으면 그 아이는 말하기를 "그건 내꺼야."라고 외친다. 그것을 보고 있던 다른 아이는 말하기를 "아니야, 그건 내꺼야."라고 외친다. 이것이 바로 아모르 드 수와(자기애)다. 프로이트의 언어로 하자면 '나는 엄마 젖이 먹고싶다. 이 젖은 나만 먹을 수 있다. 이 젖은 나꺼다.' 이것이 아모르 드 수와(자기애)이다. 반면에 우리는 타인들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인간 관계를 넓혀가야 한다. 아모르 프로퍼(공공애)는  타인들 또한 아모르 드 수와(자기애)에 이끌리고 있고 어떻게하면 그들과 공존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사회성, 즉 아모르 프로퍼(공공얘)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모르 프로퍼(공공애)에는 세가지 금언이 있다.

+ 공공애의 첫번째 금언
루소에 따르면 자신보다 더 행복한 자의 위치를 욕망하는 것은 원래 인간의 마음이 아니었다. 단 불쌍한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다. 이것은 아이러니하다. 이것은 편견ad hominem 에 비견할 만하다. 매우 솔직하게 말해서, 당신은 자신보다 훨씬 더 성공한 사람을 알게되었을 때 그를 사랑하기가 매우 힘든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당신은 자신보다 덜 성공한 사람이 알게되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긴다. 당신은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고 책임감을 느끼면서 돕고자 할 것이다.

+ 공공애의 두번째 금언
루소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 또한 예외일 수 없는 그런 환자들로부터 연민을 느낀다. 우리는 경험의 한계를 벗어난 불행들을 보게 될 때조차 연민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도똑같은 상황에 놓여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 불쌍한 자들에 대한 사랑을 시작한다.

+ 공공애의 세번째 금언
루소에 따르면 우리 연민의 정도는 타인의 불행의 양에 따라서가 아니라 불행한 타인에게 품을 수 있는 우리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측량된다. 이것은 훌륭한 아이디어이다.

루소는 동정과 연민에 관련하여 말을 이어가면서 인간은 두번 태어나는데, 첫번째는 존재하기 위해서이고 두번째는 생존, 즉 종의 번성을 위하여 태어난다고 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젊은이들은 센스sense를 알기도 전에 센시티브sensitive하다. 따라서 진정으로 태어났을 때 젊은이들은 인생(life)과 타인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또 개인은 자신의 강점이 아니라 약점에 의하여 사회화된다. 따라서 개인이 존엄한 인간성(humanity)에 열정과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정말 공통의 불행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루소의 사회적 인간에 대한 포인트 이다. 이것은 정말 아이러니하면서 매우 깊은 아이디어이다. 분명, 이 주장은 명백한 진정성을 담고있으므로 찾아보기 바란다. 루소는 연민은 달콤하다고 하였다. 정말로, 타인에 대한 연민은 그렇게도 달콤하다. 당신은 타인에게 '정말 미안하다(I'm really sorry)' 라고 말할 때 당신의 가슴은 사랑으로 넘쳐흐른다. 루소는 시민과 부르조아에 관한 한 일화를 소개하였다. 스파르타의 페다레투스Pedaretus는 300인회(council of 300)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여 대표로 선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페다레투스는 기쁨 속에서 기꺼이 집으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페다레투스는 스파르타 공동체에서 자신보다 더 가치있는 300인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루소는 바로 이 페다레투스가 진정한 시민이라고 강조한다. 예를들어, 당신은 B 마이너스의 학점을 갖고있다. 이제, 당신은 A 학점을 받은 다른 30명의 동료를 발견한다. 당신은 자신보다 훨씬 나은 30명의 동료를 보면서 행복감을 느끼면서 클라스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다. 당신이 정말 그렇다면, 당신은 루소가 말하는 시민이다. 당신은 공공애(아모르 프로퍼)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일화가 하나 더 있다. 한 스파르타 여인은 5명의 자녀를 군대에 보냈다. 그녀는 이제 전투에 나간 자식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한 군병이 떨면서 그녀 앞에 도착하였다. 그녀는 그에게 전황을 물었다. 그 군병은 말하기를 "당신의 다섯 자녀가 모두 전사하였습니다."라고 전하였다. 그러자 그 여인은 대노하면서 말하기를 "이 저질 노예야, 내가 언제 그것을 물었느냐. 우리는 승리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 여인은 성전으로 달려가서 신들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이 여인이 바로 일반의지와 관련한 여성 시민의 전형이다. 루소에 따르면 사회질서 안에 있는 자가 자연상태의 감정을 좇아간다면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직 모르는 상태이다. 그가 하는 일은 항상 자기자신과 모순된다. 그는 인간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다. 그는 부르조아이고 무(nothing)이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9. 남자와 여자, 섹스와 사랑

루소에 따르면 도시(civilization)는 문화(culture)를 생성. 그 이유는 도시인의 섹스가 승화되고 육체적 욕망이 상상력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이 루소의 아이디어는 프로이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루소는 사회는 두가지 메카니즘에 따라 형성된다고 하였다. 그 두가지 메카니즘이란 연민(동정)과 사랑이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아이디어로서 후일, 포스트 모더니즘을 예고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계몽(Enlightenment)은 세계를 탈신화(demythologized)하면서 도시를 냉정하고 합리적인 시장의 세계로 만들었고, 개인은 이 도시에서 경쟁적이면서 원자화되었다. 계몽이 생산한 것은 바로 현대 세계(modern world)이다. 따라서 세계는 더 이상 에로틱(unerotic)하거나 시적(unpoetic)일 수 없게되었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이 루소의 아이디어는 막스 베버의 유명한 탈마법(disenchantment)아이디어나 마르쿠제의 '에로스로부터 도시(civilization)로'의 아이디어에 영향을 주었다. 루소는 에로틱한 사랑erotic을 원래 상태로 복구하고자 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에로틱erotic은 섹스가 아니라 에로틱한 경험이다. 또 인간의 에로틱은 세 단계에 걸쳐서 발전한다. 첫째, 당신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 아직 모른다. 열서너 살 때를 생각해보라. 둘째, 당신은 사랑할 누군가를 찾기시작한다. 셋째, 당신은 그 사랑의 대상을 발견한다. 당신은 말하기를 "됐다. 그(녀)가 바로 내가 사랑에 빠졌던 연인이다." 라고 한다. <에밀>에서 에밀은 이런 식으로 소피를 찾았다. 루소에 따르면 에밀과 소피를 결합시킨 것은 다름아니 그들의 차이점이다. 그들은 상대의 차이점를 보면서 자신이 차이점을 보완해 나갔다. 뒤르켐도 결합인자와 관련하여 루소와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재미있게도, 루소는 사랑에 빠졌다면 서둘지 말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섹스가 아니라 에로스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랑을 찾았으면 황급히 침대로 돌진할 것이 아니라 여행을 떠나라. 여행 중에 당신은 마음속에 있는 연인을 생각하면서 이상화(idealize)할 것이다. 그때 바로 당신은 에로틱한 경험을 하게되는 것이다. 그후에 그(녀)와사랑을 불태워도 늦지않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이것은 정말로 훌륭한 아이디어이다. 그럼, 루소는 성차별gender relation를 어떻게 보았을까. 루소의 견해는 문제점이 있다. 루소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은 엄연히 다르므로 서로 다르게 가르쳐야 한다. 만약, 여성을 남성처럼 키우고자 한다면 남성들은 기쁘게 동의할 것이다. 많은 여성들은 남성을 닮고자 할 것이고 몇몇 여성들은 남성을 지배할 것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지배자는 남성이 될 것이다. 이것이 루소의 성차별에 대한 포인트이다. 이것은 꽤나 섹시스트sexist적인 관찰일 수 있겠다. 루소에 따르면 교육의 임무는 남자의 자질을 여성에 양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자질을 여성의 자질과 구별하여 양성하면서 서로 다르게 키우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을 기쁘게 하기위하여 특별히 창조되었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의존하지만, 그 의존은 서로 평등하지 않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남성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여자에 의존한다. 그리고 여성은 자신의 욕망과 더불어 필요한 것들 때문에 남자에 의존한다. 남성은 여성없이도 쉽게 생존을 이어갈 수 있으나 여성은 남성없이는 생존이 힘들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아이디어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노인들 중에는 여자없이 홀아비로 사는 것이 남자없이 사는 여자보다 얼마나 힘든것인지 고백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루소에 따르면 대부분의 어린 소녀들은 읽고 쓰는 것을 마지못해 배우지만 바느질은 항상 기쁘게 배운다. 바느질하기, 자수하기, 레이스놓기는 여자들로부터 왔다. 오늘날 탈-페미니즘 페미니스트post-feminist feminist들은 이렇게 남성과 여성은 달라야 한다면서 루소를 편들고 있다. 루소에 따르면 소피Sophie는 당연히 여자가 되어야하고 에밀Emile은 분명히 남성이다. 더 나아가서 섹스sex와 관련되지 않는한 여자는 남자이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어떤 면에서 루소는 성(gender) 아이디어를 공식화하고 있다. 루소는 성평등(gender equality)과 성적 차이(sexual difference)와 관련하여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너무 성적(sex-wise)으로 과시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가 공통으로 인간 종(species)이지만 성(sex)으로서 구별된다. 따라서 성의 연합은 공통된 목적에 똑같이 기여하지만 그 방식은 다르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루소가 성차별자가 아니었다고 보기는 힘들겠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2012년 1월 16일 월요일

3. 몽테스키외: 권력의 분립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몽테스키외

1689년 몽테스키외는 보르도 근처에서 태어났다. 찰스 루이스Charles-Louis de Secondat, Baron de La Brede는 몽테스키외의 본명이었다. 찰스 루이스는 귀족가문 출신이었지만 장남이 아니었으므로 용병이 되어 전쟁에 나갈 수 있었다. 찰스 루이스는 헝가리에서 터키군에 대항하여 참전한 바가 있었다. 찰스 루이스는 보르도Bordeaux대학교에서 법학학위를 받았다.

1715년 몽테스키외는 여느 귀족들이 그러한 것처럼 상당한 재력의 가문인 라티거Jeanne de Latigue와 결혼하였다. 이어서 몽테스키외는 삼촌인 몽테스키외 백작Baron de Montesquieu이 타계하자 삼촌을 승계하여 보르도 의회 의장Presidency of parliament Bordeaux이되었다. 당시 그 관직은 매력적이거나 영향력이 대단하지는 못했다. 그때 당시는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절대주의자였던 태양왕 루이 14세(1647-1715)가 그 유명한  '나는 국가다.' 라고 선언하던 시절이었다. 다소 과장되게도 사실, 태양왕은 자신의  권력을 실제보다 더 과시하려고 들었다. 재미있게도, 프랑스 절대주의는 루이 14세 하에서 균열되기 시작하면서 부르조아들이 막강하게 등장하게 되는 길을 열어 주었다. 알다시피, 루이 14세는 그 아름다운 베르사이 궁을 건설해서 자신의 영광을 과시하였다. 재미있게도 프랑스인들은 영광이란 단어를 지극히 좋아한다. 드골 대통렫도 '프랑스의 영광' 을 언급한 적이 있었다. 몽테스키외가 살았던 18세기는 계몽주의 시대였다. 계몽이란 다름아닌 빛(Lumiere)을 말한다. 데카르트의 합리주의는 문화뿐만 아니라 사회와 정치관계를 변화시켜 나가면서 1789년의 부르조와 혁명을 낳았고 마침내는 집행권을 입법권으로부터 분리하는데 성공하였다. 프랑스 계몽주의의 주요한 업적으로는 디드로와 달랑베르가 1751년에서 1772년 사이에 편찬한 백과사전이 있다. 이 백과사전은 영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보다 앞서있다. 디드로와 달량베르는 합리주의 학자였다.

1715년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타계하자 그의 다섯 살 짜리 증손자가 루이 15세(1715-1774)로서 즉위하여 매우 오랫동안 통치하였다. 그 시기는 데카당스와 성적 허용이 오랜동안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루이 15세는 통치보다는 아름다운 여인들에게 더 관심을 가졌으므로 왕권은 계속 약화되어갔다. 실제로 루이 15세는 젊은시절 아름다운 용모를 갖추고 있었는데 마담 뽕삐두는 가장 유명했던 그의 연인이었다. 몽테스키외 또한 성적 허용과 데카당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담 뽕삐두는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지식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당대의 문제아였던 볼테르를 잘 알고 있었고 왕족들 몰래 백과사전을 편집하고 있던 디드로를 지원하기도 했다. 한편 삐에르 라끌로는 프랑스 혁명 전의 성적 문란과 데카당스를 소설 <위험한 정사>(1781)에서 그려내었다. 이것은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두 가지 버전이 있다. 로저 바딤Roger Vadim은 <위험한 정사>를 1950년대 프랑스사회로 각색하여 1960년에 제작하였다. 또 스테판 프레어스Stephan Frears는 1988년에 <위험한 정사> 원작을 필름으로 제작하였다.

1728년 몽테스키외는 삼촌으로부터 물려받은 관직을 팔아버리고 포도주사업을 시작하였다. 재미있게도, 몽테스키외는 그 사업을 부인에게 맡겨두고 4년 동안 유럽과 영국을 여행해버렸다.

1731년 몽테스키외는 여행에서 돌아와서 파리에 정착하였고 본격적으로 저술활동을 시작하였다. 몽테스키외는 1721년 <페르시안 편지Persian Letter>를 발표했었다 그 내용은 가상의 페르시안 방문객을 통하여 프랑스와 파리 사회를 풍자한 것이었다. 1728년에 그는 프랑스 과학원French Academy of Science의 회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것은 그의 나이를 고려할 때 대댠한 성과이기도 했다.

1748년 몽테스키외는 자신의 대표작인 <법의 정신The Spirit of the Laws>을 발표하였다. <법의 정신>은 읽기에 쉽지 않지만 매우 중요한 책이다. 한때, 몽테스키외는 디드로로부터 백과사전의 민주주의에 관한 아티클을 써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렇지만 몽테스키외는 민주주의 대신에 취미에 관한 아티클을 써주고 말았다.

1755년 몽테스키외는 파리에서 타계하였다.


2. <법의 정신The Spirit of the Laws>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 제 1부에서, 법 일반과 통치 방식들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이것은 별로 특이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제 2부에서, 법과 정치 그리고 권력의 분립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몽테스키외는 로크의 이론을 기초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는데 그것은 장족의 발전이었다. 제 3부에서, 법과 기후(climate)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그의 가장 빛나는 업적은 여기에 들어있다. 재미있게도, 그의 이론 전개 형식은 매우 순진하였다. 21세기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회는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법률로 구성되었는가. 이것은 무엇보다 환경과 기후조건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재미있게도, 몽테스키외는 사회 조직과 인간 윤리, 사회 관습, 이념 사이의 상호작용을 이해했던 최초의 생태주의자이자 환경주의자이다. 제 4부에서, 법과 상업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제 5부에서, 법과 종교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제 6부에서, 법과 역사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정부를 분류하면서 권력을 분리하였고 환경, 법, 그리고 사회구조를 이슈화하였다.

+ 정부의 분류(classification of governments)
몽테스키외 이전의 학자들의 주로 군주주의, 귀족주의, 민주주의 등 지배 주체에 관심을 가졌다. 즉, 누가 주권자인가의 문제였다. 몽테스크외는 이러한 진행 코스를 바꾸었다. 지배자들은 어떤 정부 방식(manner)으로 통치하는가. 이것이 몽테스키외의 포인트였다. 정부는 온정적인가 아니면 독재적인가. 왕 또는 대통령, 수상 등의 권력은 본질상 정부와 분리되는가, 아니면 분리되지 않는가. 왜 사람들은 복종해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들은 이전의 홉스와 로크도 이슈화하였지만 정교하게 전개되지는 못했다. 선한 통치자이든 공포 독재자이든 간에 명령에 대한 복종은 정당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후일, 막스 베버는 정당성과 관하여 장황하게 서술하였다. 그럼,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 그것은 일인 독재자이거나 어떤 기구가 될 수도 있다. 몽테스키외는 정부의 본성과 관련하여 매우 재미있고 풍부한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다. 몽테스키외는 개인적으로 왕 또는 여왕이 지배하는 입헌군주정을 지지하였다.

+ 권력의 분리(Separation of Powers)
이전에, 로크는 권력을 입법권, 집행권, 연방권 등 세가지로 구별하였다. 이제, 몽테스키외는 권력을 입법권, 집행권, 사법권으로 구별하였다. 미국은 전쟁과 관련하여 연방권의 행사 주체가 누구인지에 관하여 아직도 논란이 되고있다. 즉 연방권은 입법부에 의하여 행사되는가, 아니면 행정부에 의하여 행사되는가. 몽테스키외는 이 세가지 권력, 즉 입법권, 집행권, 사법권이 분리되어야 햔다면서 입법권은 선출된 대표기구에 의하여 행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홉스나 로크와는 차별화된 아이디어였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소수의 의견이 존중되지 않으면 안된다. 몽테스키외가 의도했던 것이 보편적 투표권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렇게 해석해도 별 무리가 없다. 또, 입법권은 군주에 의하여 행사될 수 없고 행사되어서도 안된다. 입법권은 입법에 의하여 제한되어야 하고 입법부는 집행부에 의하여 견제되어야 한다. 집행부는 견제와 균형을 통하여 입법부를 통제해야 하지만 그 반대로, 입법부가 집행부를 통제할 수는 없다. 이것이 몽테스키외의 포인트이다. 오늘날 미국 정부는 어떤 기능을 하고있는가. 재미있게도 그것은 몽테스키외가 18세기 중반에 설계한 궤도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 환경과 법/사회적 구조(Environment and Law/Social Structure)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사회적 조건들은 물리적 환경과 기후에 따라서 형성된다. 몽테스티외는환경과 기후와 더불어 일반 정신(general spirit)을 강조하였다. 일반정신이란 개인들의 의식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일반 의식을 말한다. 일반 정신은 매우 프랑스적인 개념이다. 몽테스키외는 사회에는 개인을 통해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데 개인들에 선행하는 일반 정신이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몽테스키외의 포인트이다. 후일 뒤르껨은 그것을 집단양심(collective conscience)이라고 불렀다. 루소는 그것을 일반 의지라고 불렀다. 재미있게도, 개인의 의식을 초월한 일반의식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프랑스적이다. 그러나 당시 이러한 논리 형식은 대단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3. 정부의 세가지 형태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정부는 세가지 형태로 분류된다. 몽테스키외는 공화제 정부에는 민주주의와 귀족주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하였다. 민주주의는 일반 사람들이 지배하는 형태로서 주권자 권력은 사람들에게 있다. 반면에 귀족주의는 일부 사람들의 집합이 지배하는 형태로서 주권자 권력은 법에 따라서 사람들 집합에 있게된다. 몽테스키외가 민주주의를 바람직한 정부 형태로 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분명, 몽테스키외는 귀족주의적인 것을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알다시피, 군주 정부는 일인이 법에 근거하여 지배를 하는 정부형태이다. 왕은 모든 권력의 근거가 되면서도 스스로 법률의 제한을 받게된다. 반면에 전제 정부는 근본법을 갖추지 못한 정부 형태이다. 전제 정부에서 독재자는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독일의 히틀러와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이 그러하였다. 당시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은 적법한 법의 지배를 바탕으로하는 정부형태가 아니었다.

+ 공화제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공화 정부는 두가지 형태, 즉 민주주의와 귀족주의로 분류된다. 민주주의는 추첨을 통하여 정부의 직위를 수여한다. 하지만 몽테스키외의 포인트는 선거가 아니라 추첨(lottery)에 있었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 민주주의에서는 추첨으로 공직자를 뽑았고 주요 관직을 나누어주었다. 반면에 귀족주의는 선택(choice)을 통하여 최선의 인물을 뽑았다. 선택된 자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최상의 자질을 발휘해야 했다. 재미있게도, 몽테스키외는 모든 사람이 투표할 수 있으나 그렇다고 하여 모든 사람이 공직자로서 준비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따라서 몽테스키외는 귀족주의를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몽테스키외는 공화 정부의 정당성은 미덕(virtue)에 기초한다고 보았다. 공직에 임명된 자는 덕스러워야 했다. 따라서 임명된 공직자의 덕성은 지배의 정당성과 관련된 문제인 것이다. 빌 클린턴을 생각해보라. 그의 덕성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한다.

+ 군주제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군주가 주권자 권력을 갖는다면 그것은 군주정부이다. 군주는 법에 근거하여 권력을 행사하여야 한다. 법이 제정되면 군주는 그 법을 따르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몽테스키외가 의도한 군주제의 포인트이다. 군주제는 군주의 명예(honor)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복종을 이끌어낸다. 명성은 군주제에서 필수조건이다. 따라서 군주제 정당성의 근거는 명예이다.

+ 전제제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전제정부는 일인이 자의와 변덕으로 홀로 지배한다. 지배자는 법을 뛰어넘어서 무엇이든지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할 수 있다. 전제주의의 원칙은 공포이다. 독재자는 공포를 통하여 사람들로부터 복종을 이끌어낸다. 따라서 전제제 정당성의 근거는 공포이다.


4. 권력 분립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정부는 입법권, 집행권, 사법권을 갖고있다. 입법권과 집행권은 국가 사안을 규율하고, 사법권은 시민 권리들에 관한 사안들을 규율한다. 몽테스키외는 입법권은 왕 또는 치안판사에 의해 행사된다고 하였는데 선출된 기구에 의해서 행사될 수도 있겠다. 몽테스키외는 집행권은 주로 군주에 의하여 행사된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몽테스키외는 입법권과 집행권 이외에 사법권도 분리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이 권력 분립은 완벽하지는 않다. 알다시피,  미국에서 집행권은 집행명령으로 행사된다. 왜냐하면 의회에서 법률이 통과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리기 때문이다. 이 집행명령은 법률과 규칙들을 대체한 것이다. 사실, 현대 미국에서조차도 권력 분립은 상대적이다. 지난 두 행정부는 입법부에게 입법을 하도록 권고하기 보다는 많은 행정명령을 발동하였다, 이것이 헌법학자들이 염려하는 것이다. 한편,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당시 유럽의 군주제가 상당히 온정적이었던 이유는, 군주가 입법권과 집행권을 행사하였지만 사법권은 신하들에게 위탁하였기 때문이었다. 몽테스키외는 18세기 이탈리아 공화국들을 예로 들면서 그들의 권력은 통일되었지만 군주국보다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였다.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점이 아닐 수 없다. 또 몽테스키외는 선출된 대표기구가 입법권을 행사하면서 법률을 통과시키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몽테스키외는 보편적 참정권의 이념에 근접하고 있다. 알다시피, 보편적 참정권이란 모든 시민들이 대표기구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투표할 권리를 갖는 것이다. 다만 투표권은 재산의 다소에 따라서 제한될 수 있다. 이 재산으로 인한 자격제한은 20세기 이전의 미국에서도 매우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재미있게도, 몽테스키외는 시민들이 대표를 선택할 때를 제외하고는 정부에 관여할 수 없도록 하였다. 그 이유는 집행부는 능력있는 자들을 요구하였 때문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정부를 잘 이끌만한 적임자를 알 수 있지만 그 적임자가 바로 당신은 아니기 때문이다. 몽테스키외의 근본적인 아이디어는 대표기구, 즉 입법부는 집행부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럼, 몽테스키외의 소수의 권리 아이디어를 살펴보자. 당시 소수의 권리는 매우 신선한 아이디어였지만 봉건 귀족주의처럼 매우 보수적으로 전개된 면이 없지않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항력있는 원칙으로 자리잡았다. 우리는 어떻게 다수의 전제주의에 대항하여 소수의 권리를 방어할 것인가. 다수 51퍼센트의 득표는 소수 49퍼센트의 표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49퍼센트의 권리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1퍼센트의 소수 권리도 어떤 식으로든 보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포인트였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귀족들은 더 많은 권리를 갖고 있으므로 목소리도 더 커야한다. 그리하여 몽테스키외는 양원제chamber를 제안하였다. 따라서 귀족들을 위한 상원(Upper House)과 모든사람들의 선거로 선출된 의원들을 위한 하원(Lower House)이 필요하였다. 현재, 미국은 귀족주의는 아니지만 각 주는 인구 수에 상관없이 두 명의 의원senator을 상원에 보내고있다. 미국의 소수 주(small states)들과 농업 주들은 상대적으로 인구 수가 적음에도 권리가 보호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몽테스키외가 의도했던 봉건적인 방식이 아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몽테스키외의 소수 권리 아이디어는 오늘날 현실 정치에 여전히 살아있다고 보겠다. 다음, 집행권을 살펴보자. 몽테스키외는 집행권은 안정적이어야하므로 군주가 집행권을 행사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정부는 즉각적인 집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의회는 언제나 토론을 하면서 널려놓기만 하므로 집행권을 행사하기에 적절하지 못 하다고 보았다. 정부는 즉각적으로 행동해야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집행권의 주체가 되어야한다고 보았다. 몽테스키외는 입법권의 제한들에 관하여도 소상하게 밝혔다. 그러한 입법권의 제한은 미국과 서유럽 민주주의에서 여전히 살아있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입법부는 규칙적인 회기(regular session)에 따라서 소집되어야 한다. 이것은 현재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 해당하는 명백한 사실이다. 입법부는 매우 자주 그리고 규칙적으로 소집된다. 다음, 입법부는 중단없이 회기가 계속되어서는 안된다. 현재 미국 의회는 거의 중단없이 회기가 진행된다. 반면에 대륙의 유럽 의회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유럽의 의회 의원직은 의원들의 유일한 직업이거나 유일한 소득원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럽에서는 입법부가 중단없이 계속 진행하는 회기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입법부는 스스로 회기를 소집할 권리가 없다. 미국 의회는 스스로 회기를 소집하고 또 집행부의 요청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여왕이 의회를 해산하고 의회의 회기를 요청한다. 물론 영국 여왕에게 많은 권력이 주어져 있지는 않지만 몽테스키외의 아이디어는 서유럽 민주주의에 많이 남아있다.

+ 입법부는 규칙적인 회기에 소집되어야 한다.
만약, 집행부가 의회에 회기를 요청할 권리를 갖는다면 집행부는 신법이 필요함에도 오히려 회기 요청을 묵과할 수 있다. 그것은 전제주의를 의미할 수 있다. 때문에 입법부는 규칙적인 회기에 따라 소집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중단없는 회기는 있어서는 안된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입법부의 회기가 중단없이 게속된다면 집행부 또한 너무 힘들게 된다.

+.입법부는 스스로 회기를 소집해서는 안된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입법부는 스스로 소집될 수 없다. 오늘날 입법부가 자진 해산할 권리를 갖는지에 관해서, 정설은 입법부는 결코 스스로 자진 해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몽테스키외의 아이디어는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시행되고 있다. .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집행부는 입법부를 견제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집행권의 행사는 입법부의 대 정부행동으로 인해서 마비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집행부가 입법부를 견제하는 주요 방법은 비토(veto)권에 있다. 미국 헌법도 비토권을 인정한다. 미국 대통령은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안을 비토하여 의회로 되돌려 보낼 수 있다. 의회는 대통령의 비토한 법률안을 다시 뒤엎을 수 있다. 비토권은 명백히 집행부가 입법부에 대항하는 견제 도구이다. 또 집행부는 법률안에 관하여 입법부에 시정을 권고하면서 법률안의 통과를 저지할 수 있다. 그럼, 입법부는 집행부에 대항하여 견제와 균형을 할 수 있는가. 몽테스키외는 입법부의 견제권에 대하여 매우 보수적이었다. 몽테스키외는 집행부만이 비토권을 통해서 입법부에 관여할 수 있다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오늘날 집행부는 입법부의 동의에 의해서만 공공펀드를 모을 수 있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중요한 지배 원칙이다. 또 집행부의 예산은 입법부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 최근, 캘리포니아 주의 입법부는 편성된 예산을 주지사에게 주지 않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민주주의 원칙이 아닐 수 없다.


5. 환경과 법 그리고 사회구조.

몽테스키외는 인간의 정신과 열정은 기후에 따라서 매우 다를 수 있다고 하면서 법률은 인간의 열정에 따라서 다르게 제정될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추운 기후에서 인간혈액은 심장을 향하여 강하게 밀려들기 때문에 추운기후의 사람들은 강건하고 용기있고 훨씬 지성적이다. 영국과 프랑스 같은 추운 기후의 사람들은 더 용기있고 활동적이고 더 영리하다. 반면에 더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노인처럼 소심하다. 이것이 몽테스키외의 포인트이다. 다소 인종차별적이게도, 몽테스키외는 인도에서 태어난 유럽인들의 자식들은 유럽의 기후가 만들어낼 수 있는 용기를 잃어버렸다고 하였다. 이 주장은 인종차별적이라기 보다는 생태적(ecological)이다. 몽테스키외의 이러한 직관은 통찰력이 있다. 왜냐하면 그 후 200년 동안 어느 누구도 몽테스키외처럼 환경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지 못 했기 때문이다. 단, 에밀 뒤르켕은 예외이다. 재미있게도, 뒤르켐은 몽테스키외와 루소의 일반 정신과 일반의지를 신처럼 신봉했다. 몽테스키외에 따르면 기후, 종교, 법, 정부의 규율, 사회적 관습, 예의 등 많은 사회적 조건들은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일반정신은 이러한 사회적 조건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일반정신(general spirit)은 우리들 각 개인의 의식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아이디어이다.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그 아이디어를 배우면서 각자 내부화하지만 그 아이디어는 개인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그 아이디어는 교육 과정을 통하여 개인들에게 주입되는 것이다. 이것이 몽테스키외의 포인트이다. 몽테스키외와 루소 그리고 뒤르켐은 모두 사회의 아이디어 또는 집단의식은 개인들 각자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아이디어로부터 습득될 수 있고 또 그렇게 습득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사회과학, 즉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인류학의 뜨거운 화두이다. 어떤 학자들은 방법론적 집단주의자이고 다른 학자들은 방법론적 개인주의자이다. 보통, 합리적 선택 이론가들은 방법론적 개인주의자이고 문화 분석가들은 방법론적 집단주의자이다. 실제로 이러한 구별은 모든면에 적용될 수 있다. 경제학계의 도구주의자(institutionalist)들은 방법론적 집단주의와 방법론적 개인주의자 사이에 놓여있다. 한편, 몽테스키외는 도시(civilization)가 발전함에 따라서 일반정신의 중요성이 증가하는 반면에 기후의 영향은 줄어든다고 하였다. 분명, 도시, 환경, 기후, 일반정신 사이에는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보겠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2012년 1월 14일 토요일

2. 로크: 평등, 자유, 재산, 그리고 이의권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로크

로크는 정치철학과 사회철학의 창시자이다.존 로크John Locke는

1642년 존 로크John Lock는 서머셋Somerset에서 태어났다. 로크의 부친은 한때 의회군 Parliamentary Amy의 대장이었고 서머셋 법원의 관리였는데, 기사gentry 출신으로서 지주계층의 명예대표이기도 했다.

1652년 로크는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하였다. 로크는 철학과 의학을 수학하였다. 처음에 로크는 게으르고 운나쁘고 내세울만한 게 없었지만 나중에는 공부를 열심히 했던지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1664년 로크는 대학의 관리로서 연설할 기회가 있었다. 이 연설에서, 젊은 로크는 자신의 견해많이 밝혔다. 젊은 시절, 로크는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였고 매우 권위주의적이었다. 당시 로크의 견해에 따르면 왕들은 선한 데 반하여 신민들은 짐승이었다. 따라서 로크는 당시 홉스주의자였다. 사실, 로크는 자신의 저작인 <통치론 Two Treatise>에서 홉스를 다루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홉스의 영향력이 영국 내에서 지대하였으므로 따로 홉스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의회가 군주제를 폐지하자 의회 의원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의 호국경(lord protector of England)이 되었다. 크롬웰은 인기가 있었지만 군대와 의회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여 정국은 혼란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은 홉스가 겪었던 1630년대와 40년대에 다름 없었다. 1658년 올리버 크롬웰이 죽자 그의 아들은 호국경을 승계하지 못하였고 1660년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왕이 되어서 군주제가 복고되었다. 로크 또한 홉스 못지않게 혼란한 시절을 겪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미국 뉴 헤븐의 웨일리 스트리트Whalley street와 고퍼 애베뉴Goffe avenue는 당시의 상황과 관련되어있다. 내란 당시 웨일리Edward Whalley와 고퍼William Goffe는 찰스 1세의 재판을 담당한 판사들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자 그들은 국왕살해의 명목으로 기소되고 말았다. 1660년 웨일리와 고퍼는 곧 영국을 탈출하여 보스톤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보스턴에서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보스턴은 왕가의 영향력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1661년 웨일리와 고퍼는 뉴헤븐으로 옮겨갔댜. 그들은 거기서 피난민촌을 건설하였는데, 첫번때 세운 것이 웨스트 록West Rock의 저지스 코브Judges Cove였고, 그 다음이 밀포드Milford의 미카 톰킨스Micah Tompkins였다.

1666년 7월 로크는 애쉴리Anthony Ashely Cooper 경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애쉴리는 상류 귀족이었지만 1644년 반왕당파로서 찰스 1세에 대립했던 의회파 세력이었다. 애쉴리 경은 1653년과 54년 그리고 59년의 공화국 시절에는 국가참사회Council of State의 의원이었음에도 1660년에는 왕정복고를 지지하면서 셰프츠베리Shaftsbury 백작이 되었다. 애쉴리는 1673년까지 수상(Lord of Chancellor)직을 포함하여 여러 직을 수행하였다. 애쉴리는 자신의 간질환을 치료하기 귀하여 1660년 7월에 옥스포드를 방문하게 되면서 로크를 만나게 되었다. 로크는 그의 주치의가 되었고 곧 친구가 되었다.

1667년 로크는 런던 스트랜드Strand, 엑스터 하우스Exeter House의 애쉴리의 거처로 주거를 옮겨갔다. 로크는 병치료을 위해 애쉴리의 복부에 튜브를 장치하는 외과수술을 시행하였다. 외과수술이 성공했던지 애쉴리는 많은 회복을 하였다. 로크는 애쉴리의 신임을 받게 되면서 그로부터 정치수업을 받게 되었다. 1667년 로크는 <관용론Essay on Toleration>을 발표하면서 홉스와 단절하였다. 로크는 <관용론>에서 이의권(Right of Dissent)을 옹호하였다. 홉스에 따르면 악한 주권자가 권력을 불성실하게 실행할 경우, 예외적으로 시민들은 선한 새 주권자를 향하여 충성심을 이양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로크는 그것을 뛰어넘어서 이의권Right of Dissent을 개인의 기본적 권리로서 인정하였다.

1668년 로크는 왕립 학회Royal Society의 의원으로 뽑혔다. 왕립 학회Royal Society는 미국의 미국 과학원American Academy of Science과 비슷한 곳으로서 들어가기가 매우 힘들다. 로크는 1679년  <통치론 2부Second Treatise>를 집필하면서 '배척Exclusion' 아이디어를 현실화 하였다. 한편, 당시 찰스 2세는 자식들이 있었지만 모두 혼외정사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왕위를 승계할 정당한 후사가 없었다. 따라서 찰스 2세의 동생인 제임스가 왕위를 승계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제임스가 로만 캐돌릭이었다. 홉스의 시대에도 그랬듯이 이것은 큰 문제였다. 셰프츠베리 수상과 의회는 로만 캐톨릭이 복고되어서 영향력이 커지게 되면 자신과 의회의 역할이 줄어들 것에 불안하였다.

1673년 의회는 심사법Test Act을 준비하고 있었다. 심사법은 공직자가 영국국교회 신자인지 아니면 로만캐돌릭 신자인지를 심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로만캐돌릭 공직자인 경우, 추방될 수 있었다. 따라서 심사법은 엄연한 차별법이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기득권층의 입장에서 볼 때, 심사법은 바티칸과 교황의 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셰프츠베리수상은 로만캐돌릭들을 공직에서 추방하는 심사법Test Act을 지지하였다. 곧 셰프츠베리는 수상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몇 년 후 의회의원들Commons은 배척법안Exclusion Bill을 통과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왕위승계자인 제임스 스튜어트를 거부하고 찰스 2세의 부당한 자식 중에 한명인 몬모스Monmouth공작이자 프로테스탄트였던 같은 이름의 제임스를 왕위승계자로서 지지해버렸다. 그러자 찰스 2세는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셰프츠베리는 곧 체포되었고 런던탑(Tower of London)에 갇혔다. 나중에 셰프츠베리는 런던 탑에서 풀려나와서 네델란드로 망명하였다.

1683년 휘그(Whigs)당원 중의 몇몇은 찰스 2세에 대한 역모죄(Rye House Plot)로 기소되었다. 그 중 일부는 처형되었다. 당시 로크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였는지 암스테르담으로 도망가버렸다.

1685년 찰스 2세가 죽자 그의 동생인 제임스 스튜어트가 제임스 2세로서 즉위하였다. 제임스 2세와 의회와의 갈등은 깊어졌고 토리당조차 왕의 종교적 아젠다를 외면하였지만 1687년 '신앙 자유령Declaration of Indulgence'이 선포되었다. 신앙 자유령이 시행되자 영국내 로만캐돌릭을 차별하는 모든 형법의 실행이 중단되었다. 이제 토리당과 휘그당은 연합하여 제임스 2세에 대항하여 군주정을 전복해버렸다. 의회는 찰스 1세의 손자인 윌리암William of Orange을 네델린드에서 초청하여 영국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제 영국은 무혈 혁명을 통하여 윌리암 3세와 그의 부인 매리Mary가 공동통치하는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1690년 로크는 이제 불안감을 씻어버리고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로크의 <통치론 2부The Second Treatise>는 단순히 '배척Exclusion' 투쟁이 아니라 오렌지가로의 변화Change, 즉 절대군주국에서 입현군주국을 향한 혁명의 아이디어를 반영했다는 시각이 있다. 이 <통치론 제 2부>는 1690년에 익명으로 발간되었다.

로크는 1704년에 타계하였다.

2. <통치론 제 1논고>

로크의 통치론 제 1논고와 제2 논고의 저작시기에 관하여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로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인 피터 라슬렛Peter Laslett은 제 2논고가 먼저 쓰여졌고 '배쳑법안Exclusion Bill'의 아이디어를 정당화하기 위해 쓰여졌다면서 그 시기는 1679년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리차드 애쉬크라프트Richard Ashcraft는 제2 논고는 1683년에 쓰여졌다면서 로크는 홉스의 이론과 결별하면서 입헌군주주의와 주권 이론을 최초로 형식화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제 1논고는 1680년에 쓰여졌고 1689년에 익명으로 발행되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사실, 제 1논고는 제 2논고에 비하여 비중이 낮다. 왜냐하면 학자들은 제 2논고의 내용을 훨씬 많이 인용하기 때문이다. 로크는 1680년에 로버트 필머Robert Pilmer가 발간한 <패트리아카Patriacha>를 반박하기위하여 제 1논고를 썼다. 필머는 절대군주주의자로서 셰프츠베리와 배척주의자Exclusionist에 대항하며서 군주정을 옹호하였다. 필머는 인간의 불평등성을 인정하면서 신은 어떤 인간은 다른 인간들 보다 우위에 놓았는데, 남자는 여자보다 우위에 있고, 연장자는 청년보다 우위에 있고, 왕은 최고로 우위에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권력의 불평등은 신에게서 유래한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신은 아담을 상속자로하여 이 지구의 땅을 아담에게 주었고 그의 후손들은 땅의 분깃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왕들의 계보는 아담에게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필머에 따르면 신은 부계권과 땅을 아담에게 수여하였고 왕의 절대권력은 이런식으로 당당하게 왕의 후손에게 상속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로크는 필머와 여러 단게의 논쟁을 하였다. 로크는 필머가 주장한 아담이 신으로부터 땅을 상속받은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논박하였다. 로크에 따르면 신으로부터 땅을 상속받은자는 아담이 아니라 인류였다. 로크는 한 인간이 신으로부터 땅과 권위를 상속받았다 할지라도 어떻게 왕이 그 후손임을 입증할 수 있으며 또 정당화 될 수 있겠는가라며 반박하였다  또 로크는 이런식으로 찰스 2세의 왕위가 정당화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로크에 따르면 이런 식의 정당화는 바보같은 짓이다. 재미있게도, 그 조상이 주권자가 아니고 바보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이제 사람들은 정당한 주권자를 찾아나서야 할 판이다. 당시 이러한 로크의 논박은 매우 용감한 주장이었다.

3. <통치론 제 2논고>의 주요내용

홉스와 마찬가지로 로크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자유롭다는 데에서 출발하였지만 결과는 홉스와 많이 달랐다. 로크와 홉스는 전쟁 상태를 피하기위해서 우월한 주권자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서로 일치하였다. 하지만, 로크는 재산과 관련하여 놀랄만한 이론을 전개하였다. 로크에 따르면 우월한 자가 아니라 다수의 지배(rule of majority)가 주권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로크는 무엇이 다수의 지배인지에 관하여는 설명이 매우 부족하였다. 어쨌든 다수의 지배라는 아이디어는 존 로크에 의하여 처음으로 형식화되었다. 로크는 사람들은 오직 동의를 통해서만 권위체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로크의 이론은 홉스가 손대지 못했던 권력 분립의 이론과 견제와 균형의 이론을 꽃피우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4.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로크는 세가지 정치 권력을 정의하였다. 첫째, 법을 제정할 권리. 둘째, 법을 집행할 권리. 셋쨰, 외적으로부터 연방(Commonwealth)을 방어할 권리가 그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정치의 세가지 기능이었다. 정치 권력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 권력의 기원을 이해하여야 한다. 왜 인간들은 자연상태의 자유와 평등을 버리고 시민사회를 구성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평등의 근거는 무엇일까. 이것이 로크의 포인트이다. 매우 반-홉스적이게도, 로크에 따르면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의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타인의 기쁨을 위해서 피조된 신의 재산이 아니므로 원칙적으로 타인에 우월하는 어떤 인간도 있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이 피조물로서 서로애 대하여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로크는 자유주의자이다. 반면에 홉스는 보수주의자였다. 여기서 우리는 철학의 운동을 보게되는데, 당시 아이디어는 보수주의에서 자유주의로 이전해가고 있었다. 잘 알다시피, 자유주의 아이디어는 특히 자유를 제일의 가치로서 강조한다. 로크에 따르면 자연상태에서 우리 인간은 이성의 지배를 받게된다. 우리는 모두 이성적으로 또 합리적인 능력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인간은 서로에 대하여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이해력을 갖고 태어났다. 이것은 우리가 홉스에게서 보았던 것과는 매우 다른 논박이다. 홉스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 같은 대상을 욕망하면서 교류하고 서로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서 도덕성(morality)을 배우게 된다. 홉스애 따르면 이 도덕성은 우리의 합리성rationality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로크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선천적으로 이성적이고 선하고 합리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적으로 서로 존경하지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선천적으로 알고있다. 로크와 홉스는 전쟁의 위험과 관련해서 우리는 전쟁 상태를 피하기위하여 우리자신들을 지배자에게 종속시키면서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수렴한다. 그러나 로크는 확실히 홉스와는 다르게 자연 상태가 반드시 전쟁 상태는 아니라고 보았다. 로크는 자연 상태를 전쟁 상태와 구별해야한다고 보았다. 로크에 따르면 우리는 자연 상태에서 이성적이고 선하고 합리적이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전쟁상태가 돌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민사회(civil society)를 구성하고 우리자신을 위하여 그 권위체를 받들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로크의 포인트이다.

5. 동의를 통한 우월자 세우기

우리는 우리자신을 타자의 지배에 종속시킨다. 로크에 따르면 이것은 동의에 의하지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주권자를 받드는 자들은 누구든지 동의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자신을 지배에 종속시켜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매우 중요하게도, 로크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는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 공통되는 현존하는 규율(standing rules)로서 정립되어야 한다. 로크는 인간의 자유는 동의를 통해서 수립된 의회의 입법권를 통해서만 규율되고 제정되어야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입법권이란 주권자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서 그 입법의 권리는 합법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홉스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크는 재미있는 반박을 하였다. 우리는 주권을 왕에게 수여하였다.그런데 권력의 근거이자 입법권의 주체인 주권자 왕이 어찌하여 제 법률을 통과시키기위하여 자신 이외의 법률적 근거가 필요한 것인가. 이것이 로크의 포인트이다. 어쨌든 로크는 홉스와는 다르게 자유의 개념을 확실하게 현존하는 규율로서 보장하고자 하였다. 로크에게 있어서, 자유는 단순한 생존 이상의 의미였다. 홉스는 자유의 개념을 혼란스럽게 정리하였지만 로크는 자유를 확실하게 이슈화 하였다.

6. 사유재산의 기원과 제한

왜 우리는 우리자신을 지배자에 복종시키고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지배자에게 보호를 요청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재산을 보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지배자의 역할은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매우 현실적이면서 중요하다. 로크와 칼 맑스가 공통적으로 할만하 질문은 아마도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일 것이다. 정부의 역할은 사유재산의 신성함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럼, 재산(property)이란 무엇인가. 재산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이것은 중요한 문제로서 애덤 스미스와 칼 맑스를 예고한다. 로크는 어떤 재산 아이디어를 갖고있는가. 로크에 따르면 신은 인간에게 공통으로 이 세계를 주었다. 따라서 모든 지상의 과일은 사회의 각 구성원에 속해 있다. 재미있게도, 이것은 거의 사회주의 이념에 가까운 아이디어이다. 재미있게도,로크는 모든 사람은 자기자신을 재산으로서 소유한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당신이 스스로 노동을 통해서 생산한 것은 당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노동가치설(Labor theory of value)이다. 나중에 애덤 스미스와 칼 맑스는 로크의 노동가치설을 빌려간다. 로크에 따르면 노동은 노동자에게 속해 있다. 왜냐하면 노동은 노동자가 갖고있는 저마다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노동자는 육체를 갖고있고 노동은 의심할 여지없이 노동자의 재산(property)이다. 이것이 로크의 포인트이다. 존 로크는 말하기를 "비록 우물에 물이 넘칠지라도 바가지를 가진자만이 그 물을 길을 수 있다."고 하면서 이렇듯 노동은 확실히 가치를 창조한다고 하였다. 존 로크의 노동가치설은 애덤 스미스와 칼 맑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로크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경작하는 만큼 수확물을 소유할 수 있다. 신은 우리에게 충분히 향유할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하게 모든 것을 주었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몫 이상을 소유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 타인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급진적인 로크의 아이디어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오직 당신이 소유한 것 내에서만 그것을 즐길 수 있다. 따라서 당신이 축적해 놓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향유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로크는 이후 이 급진적인 이론을 후퇴시켰다. 로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였다. 로크에 따르면 토지는경작할 수 있는 사람이 소유해야한다. 그리고 한 인간이 토지를 경작하여 곡물을 심고, 재배하고, 수확물을 사용하는한 그 토지는 경작자의 재산이다. 분명, 이것은 토지의 사적 소유권에 관한 것이 아니라 토지의 경작권에 관한 것이었다. 로크의 논박 핵심은 풍족에 있었다. 로크는 우리가 욕망하고자 하는 것들을 풍족하게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하였다. 이것은 홉스와는 정반대의 아이디어였다. 홉스에 따르면 우리는 끊임없이 싸운다. 왜냐햐면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이 희소하기 때문인데, 그 대상을 원하는 사람이 많다면 타인들을 죽여서라도 그것을 쟁취하려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 홉스는 대상의 희소성을 가정하였고 로크는 대상의 풍족함을 내세워 가설을 세웠던 것이다. 당신은 이제 누구의 이론의 더 설득력이 있는지를 자문할 때가 되었다. 이제, 로크는 자신이 너무 많이 일탈하였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로크는 신은 인간에게 공통으로 이 세계를 주었다고 말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신은 근면한 자들을 편들었다. 더 열심히 일하는 자는 그렇지 않은 자 보다 당연히 더 많은 것을 얻어갔다. 노동은 가치를 창조한다는 노동가치설에 따라서 로크는 인간 생활에 유용한 토지의 산출물은 거의 대부분 노동을 통한 산출물이라고 보았다. 또 화폐의 발명과 재산의 축적과 관련해서, 로크는 부(Wealth)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축장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자유주의 이론이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개인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또 타인을 해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고 법을 위반하면 정부가 개입한다. 따라서 권력은 공동체, 즉 시민사회(civil society)로 이전되고 또 시민들이 그 권력을 공통으로 떠받들지 않는한 개인의 재산은 보전될 수 없다. 또한 그 권력은 현존하는 규율(standing rules)로서 보증되고,  성문화되고, 동의에 따라야하고, 영구한 법률로서 제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로크의 포인트이다. 따라서 모든 개인들은 그 권력을 떠받드는한 재산과 관련한 예측가능한 미래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로크는 권력은 농노와 귀족을 위한 법을 각각 따로 두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일한 법을 제정하여야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시민사회에 존재하는 입법권과 집행권의 기원이다.

7. 시민사회civil society가 절대군주제와 다른점

절대군주제는 입헌군주제와 다르다. 로크에 따르면 개인은 절대군주제에서 타인의 폭력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법에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은 왕과의 분쟁과 왕의 폭력 행사를 해결하기위하여 법에 호소할 수는 없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할 수 없다. 스탈린이 통치하던 러시아에서도 자기 이웃이 물건을 훔쳐가면 그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부가 개인의 물건을 훔쳐가면 개인은 소비에트 정부를 상대로 소송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 제도에서, 개인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다. 물론, 미국에서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재미있게도, 로크는 자기 주위의 고양이나 개가 자기를 해칠까 염려한 나머지 사자, 즉 왕 또는 지배자가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간과할 정도로 인간은 바보같을 수 있다고 하였다. 로크는 이웃을 상대로 소송할 법을 구하기 보다는 지배자 또는  권력자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줄 법을 구하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시민사회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미 언긊했다시피, 로크는 다수의 지배를 원칙적으로 옹호하였다. 다수의 지배을 위해서는 공동체 각 개인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동의를 통하여야만 정당한 법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내에서 동의가 이루어졌을 때 그 동의는 모든 사람을 구속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오직 동의에 의해서만 자신을 지배자에게 종속시킬 수 있게 된다. 로크에 따르면 이 동의는 반드시 현시적일 필요는 없고 묵시적이어도 상관없다. 이를테면, 당신이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당시 미국헌법을 승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당신은 미국헌법에 복종해야한다. 복종하지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당신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이주한다면 미국헌법을 따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당신은 이슬람법을 따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8. 권력 분립(Separation of Powers)

로크가 정치사에 남긴 공헌 중에 하나는 권력 분립이다.로크는 권력을 분리하여 세가지 종류로 나누었다. 그것은 입법권, 집행권 그리고 연방권이었다. 이것은 몽테스키외와 미국헌법의 입법권, 집행권, 사법권과 다르다. 로크의 연방권이란 외부의 적에 대한 방어권이었다. 로크는 입법권과 집행권은 분리되어야한다고 하였다. 동일한 사람 또는 지배자가 법률을 통과시키고 그 법률을 집행한다면 그것은 절대주의와 다름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입법권과 집행권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방권과 관련하여 로크는 그것은 반드시 집행권과 분리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미국에서는 누가 연방권을 갖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미국 의회는 법적으로 전쟁을 선포할 수 있다. 알다시피, 미국은 여러차례 대규모 군사행동 (military actions)에 연루되었지만 전쟁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상,. 그것을 선포하고 실행한 것은 집행부(executive branch)였다. 이러한 군사행동은 때때로 하원(House)과 상원(Senate)의 의지에 반하여 동의없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복잡한 문제이다. 어쨌든 로크가 주장한 집행권과 연방권이 동일하다는 것은 옳다고 보겠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2012년 1월 11일 수요일

1. 홉스: 권위, 인권, 그리고 사회질서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홉스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슈이다.

1588년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영국의 웨스트포트Westport에서 태어났다. 홉스의 부친은 교구목사였는데 한 성직자와 주먹질하면서 싸웠다. 그 당시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홉스의 부친은 그 일로 인해서 도망을 쳤고 그 후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가족을 버린 것이다. 당시, 엘리자베스 1세 때, 홉스의 삼촌은 부유한 장갑제조인이었다. 그 삼촌이 홉스를 길렀다.

1602년 홉스는 옥스포드의 막달린 홀Magdalene Hall에 들어갔고 1608년에 졸업하였다. 졸업후에 홉스는 데본셔Devonshire의 백작이었던 코벤디쉬William Cavendish 2세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1610년 홉스는 제자를 데리고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갈릴레오의 현대과학을 접하게 되었다. 토마스 홉스는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베이컨Bacon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부정하면서 진리는 오직 감각적 관찰에서 출발하는 귀납법에 의해서만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귀납법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연역법과는 정반대의 방법론이었다.

1635년과 36년 홉스는 프랑스에서 생활하면서 갈릴레오와 데카르트의 저작들에서 '자연과학의 원리' 를 탐구하였다. 홉스는 갈릴레오로부터 분해-합성법resolutive-compositive method을 배웠다. 그것은 데카르트가 그랬듯이 연역법으로 추론을 시작한 후에 베이컨처럼 귀납법을 이용하여 시작점으로 돌아가는 방법론이었다. 한편 데카르트Renee Descartes(1596-1650)는 이원론자였다. 이원론이란 육체와 정신을 분리함으로써 실체 본질의 일원성을 부정한 사상이었다. 홉스Hobbes는 데카르트의 그러한 이원론(dualism)을 부정하였다.

1640년 홉스는 광학(optics)에 관한 원고를 마무리하였다. 그것이 홉스의 첫 학문적 저작이었다. 홉스는 데키르트의 정신과 육체의 이원론을 거절하면서 마음(mind)이 대상(object)인한, 마음은 대상(object)의 운동에 의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홉스는 삼부작(Trilogy), 즉 육체에 관하여(1655), 인간에 관하여(1658), 시민권에 관하여(1642)을 완성하면서 생물학과 개인 그리고 사회를 분해하면서 합성하였다.

2. 왕당파로서의 홉스

1626년 홉스는 왕당파(royalist)로서 정치에 입문하였다. 홉스는 윌리암 코벤디쉬가 데본셔의 백작이 되면서 정치에 입문하자 자신도 정치에 관심을 갖게되었다.

1628년에 홉스는 투키디데스thucydides를 번역하였다.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민주주의를 방어하긴 하였지만 민주주의가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를 보면서 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품게되었고, 강력한 중앙권력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홉스는 당시, 찰스1세와 의회 사이의 갈등의 골이 갚어져가는 상황에서 자신은 왕당파의 위치로서 선동정치가들과 군중지도자들에 대항하였다. 당시 영국은 종교적 갈등으로 인하여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이전에 헨리 8세(1509-1547)는 그 유명한 결혼 문제를 초래했었다. 헨리 8세의 첫번째 부인, 캐더린 아비뇽Catherine Avignon은 딸 메리Mary를 낳았다. 그러나 아들을 바라고 있던 헨리 8세는 바티칸에 결혼무효를 청원하였지만 바티칸은 그의 청원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영국내의 프로테스탄트들은 반발하였고 부화뇌동한 헨리 8세는 앤 볼린Ann Boleyn과 결혼하여 딸 엘리자베스를 낳아버렸다. 나중에 헨리 8세는 앤 볼린이 사이모Jane Seymour와 혼인하게되자 그녀을 처형해버렸다. 헨리 8세는 아들을 얻기 위하여 세번 결혼하였고 두번 이혼하였다. 이 틈에 영국은 로마 캐돌릭과 단절하면서 프로테스탄트국가가 되고말았다. 헨리 8세가 타계하자, 헨리 8세와 캐더린과의 사이에 낳은 딸, 메리가 즉위하여 메리 1세가 되었다. 실제로, 메리 1세는 캐돌릭을 복구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지만 실패하였고 끝내 왕위를 막내 여동생인 엘리자베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처녀 여왕 엘리자베스(1558-1603)는 재위동안 걸림돌이 되었던 전직 여왕 메리를 1587년에 처형해버렸다. 이것을 빌미로 영국의 로만캐돌릭은 엘리자베스여왕에 대하여 음모를 꾸미기시작하였지만 청교도들 또한 여왕으로 하여금 로만캐돌릭을 숙정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다. 당시 영국의 농민들은 영주에 대항하여 세력을 키워나갔고 의회 또한 군주에 대항하여 세력을 키워나갔다. 엘리자베스 1세가 재위하는 동안 청교도들은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에서도 로만 캐돌릭을 숙정하기시작하였다. 재이있게도, 당시 미국의 뉴 헤븐New Heaven은 청교도와 긴밀히 연결되었다. 영국의 목사, 존 데븐포트John Devenport는 1638년 청교도들을 인솔하여 뉴 헤븐에 정착하였던 것이었다. 당시 엘리자베스 여왕은 처녀여왕이라고 불리웠지만 진짜 처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고 그녀 주위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녀는 유능하고 똑똑한 여왕이었으나 결혼하지않았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상속자 없이 타계하자 왕위는 영국인들이 불신하는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Stuart가로 넘어가게되었다. 이것은 대재난의 시작이었다. 영국 의회는 새 왕인 제임스 1세James 1(1603-1625)와 충돌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찰스 1세가 즉위하였다.

1640년 홉스는 정치학의 기본서라고 할 수 있는 <법, 자연, 정치의 원리Elements of Law, Natural and Politics>를 완성하였다. 실제로 홉스는 군주를 지지하면서 의회에 대립하였다. 홉스는 왕당파였으므로 매우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변란이 임박하자 홉스는 목숨이 위태로웠고 영국을 떠나지 않을 수 없게되었다. 홉스는 영국을 떠나서 프랑스 파리에 정착하었고 10여넌 후인 1651년까지 살았다. 홉스는 프랑스에서 체류하는 동안 왕당파 망병객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1642년 당시 찰스 1세Charles1의 군주정에서 내란Civil War이 일어났다.

1649년 찰스 1세는 처형되었고 군주제가 폐지되었다. 올리버 크롬웰은 권력을 거머쥐었다.

1651년 홉스는 프랑스에서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완성하였다. 재미있게도, <리바이어던>은 찰스 1세를 지지하는 왕당파 망명객들을 당황하게 만드는 구실이 되었다. 왜냐하면 홉스는 <리바이어덩>에서 새 주권자는 합법적(legitimate)일 수도 있다고 제안하였던 것이 마치 올리버 크롬웰의 합법성을 인정해주는 꼴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이제 홉스는 왕당파 망명객의 미움을 받으면서 프랑스를 떠나서 영국으로 돌아갔다. <리바이어던>은 대단한 문제작이었다. 특히, 19세기에 뜨거운 이슈가 되었고, 삼 사십년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 많은 경제학자들과 정치학자들은 홉스의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이론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즉, 홉스는 최초의 합리적 선택 이론가였다. 홉스는 방정식을 이용하여 많은 명제들를 다루었다. 경제학자들이 원했던 것은 과학적 방정식을 통한 진리값이었다. 홉스는 그것에 걸맞게 명확한 이성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3. <리바이어탄Leviathan>의 구조와 주요 내용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본래 악하다. 따라서 만인이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를 피하기위해서는 아주 강력한 주권자(sovereign)가 필요하다. 이것이 홉스의 포인트이다. 원래, 리바이어던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바다 괴물이다. 홉스는 질서를 부여하는 국가 또는 주권자를 리바이어던으로 표상하였다.

1651년에서 1660년까지 홉스는 주로 대학구조를 비판하는 저작들을 발간하였다.

1660년 영국은 군주제로 복귀하였다. 이제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왕이 되자, 홉스는 법복을 입으면서 왕당파로서 명성을 누렸다. 하지만

1666년 런던에 대화재가 발생하였고 전염병이 퍼졌다. 사람들은 이 화재가 죄 많은 런던에 대한 신의 복수라고 믿었다. 곧 이어서 무신론에 대한 정죄령이 내려졌고 사람들은 속죄양을 찾기시작하였다. 속죄양은 다름아닌 홉스였댜. 홉스는 유물론자였고 그의 저작은 무신론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홉스의 책들은 불살라 태워져야했다. 운좋게도, 홉스 자신과 그의 책들은 화형을 면했다.

1679년 홉스는 타계하였다. 홉스는 해외에서 대단한 존경의 대상이 되었지만, 영국에서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리바이어탄>은 두 권으로 되어 있다. 각 권은 500페이지 분량이다. 제 1부Part 1는 인간에 관한 것이다. 제 1장에서 5장 까지, 인간의 작동에 관한 여러 기게론을 다루었다. 홉스는 갈릴레오의 운동 이론에 빠져있었다. 홉스가 말하는 감각, 상상력, 화술, 이성 등은 생물학적인 운동이었다. 제 6장은 재미있게도 충동, 선호, 욕망과, 혐오, 공포에 대한 것이었다. 홉스에 따르면 모든 자발적 행동은 선호와 혐오간의 숙고의 결과로부터 나온다. 제 7장에서 11장까지, 사람들 간의 행동습관에 대한 것이었다. 제 12장에서 16장까지, 자연 상태, 자연법, 인간 본성에 관한 것이었다.  제 2부Part 2는 코먼웰스Commonwealth에 관한 정치이론이었다. 그것은 정부와 주권자와 신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하여 다루고 있다. 제 3부Part 3는 그리스도인들의 연방국에 대한 것이었다. 제 4부Part 4는 어둠의 왕국에 관한 것이었다. 다음, <리바이어탄>의 주요 내용은 첫째,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둘째, 자연과 계약의 관계는 무엇인가. 알다시피, 홉스는 최초의 계약론자였다. 홉스에 따르면 사회를 통합하는 수단은 사회계약이므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계약을 이해하여야 한다. 셋째, 주권자의 정당성은 어디서 나오는가. 홉스는 자신이 경험했던 혼란한 시기를 통하여 정당한(identifiable)주권자를 찾고자하는 욕망이 있었다. 주권은 왕이 가져야 하는가, 아니면 지주가 가져야 하는가, 아니면 농민이 가져야 하는가, 아니면 의회가 주권자인가. 도대체 누가 주권자인가. 홉스는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정당한 주권자를 찾고자 하였다. 그럼,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홉스는 인간은 선호와 혐오사이에서 숙고한 결과로써 자발적으로 행동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놀랄만한 이슈이다.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 이것이 홉스의 포인트이다. 홉스는 자유의지로부터 자발적 행동(voluntary act) 개념을 개발하였다. 홉스에 따르면 자발적 행동이란 절대적 자유의지와 완전한 결정주의 사이의 중도(halfway)이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선호와 욕망에 이끌리면서 자발적으로 행동한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그렇듯이, 선호와 욕망은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도록 드라이브를 건다. 홉스는 이 드라이브 충동을 따르는 것을 선호라고 불렀다. 홉스는 혐오와 공포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이를테면,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이 여기 있다. 그런데 당신은 그것을 손에 넣을 수가 없어서 두렵다. 이때 당신은 선호 또는 욕망과 저편의 혐오 또는 공포와의 사이에서 스스로 협상하여야 한다. 이 협상의 결과로서 나오는 것이 자발적 행동이다. 당신은 선택을 통하여 행동할 수 있다. 당신은 어떤 값의 행동을 할 것인지 저울질힌 후에 그 행동이 충분한 가치가 있는지 결정한다. 예를들어, 여기 나에게 딱 어울릴지 모르는 파트너가 있다. 나는 그녀에게 접근하여 "차 한잔 할까요?"라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위험한 행동일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로부터 "꺼져" 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녀로 부터 차이고 싶지않다. 때문에 나는 그녀로부터 거절당하지 않을까 공포스러운 것이다. 따라서 나는 어떤 합리적 선택을 할 것인지를 저울질하기시작한다. 만약, 당신이 "꺼져"라는 말을 듣게되리라는 숙고를 한다면 결코 "차 한잔 할까요?"라는 말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고 그녀를 포기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본성인 공포가 선호를 뒤엎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발적 행동이다. 자발적 행동은 자유이다. 물론, 인간 본성인 선호를 충족하기위하여 한번 더 그녀에게 시도하는 결정 또한 자유이다.

4. 인간의 본성

+ 인간의 본성은 권력 추구이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 본성의 본질은 권력 투쟁이다. 이것은 중요한 이슈이다. 인간은 타인을 지배하고자 한다. 한 인간이 생존하고자 한다면 그는 마땅히 전능한 주권자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전능한 주권자가 필요하다. 홉스는 인간의 자발적 행동(voluntary act)에는 두가지 운동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첫째, 생명적 운동(vital motion)이다. 이것은 혈액, 맥박, 영양, 음식 등을 말한다. 둘째, 동물적 운동(animal motion)이다. 이것은 자발적 운동이라고도 하는데 선호, 욕망, 혐오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필요를 만족시키기위하여 비용을 지불한다. 우리는 먼저 그것이 우리를 만족시킬 만큼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본다. 따라서 우리는 어느 정도의 자유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든 전부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할만한 물질적 자금과 정신적 여유가 없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많은 것을 할 수 있지만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무엇을 더 많이 해야 하는지도 알아보아야 한다. 홉스의 이 합리적 선택 이론은 후일의 공리주의(utilitarianism)와 매우 상통하고, 애덤 스미스의 경제이론과도 매우 가깝다. 오늘날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라든가 합리적 선택이론 경제학자 그리고 정치학자와 몇몇 사회학자들은 홉스로부터 이 합리적 선택(rationanl choice) 아이디어를 빌려온 것이다. 홉스가 주장한 숙고와 의지에 관련해서, 우리는 선호 또는 혐오의 감정 있을 때 비로소 무엇이 가치있는 것인지 숙고하게된다. 이를테면, 당신의 선호, 욕망, 혐오의 총합은 당신이 바라는 대상이 성취되거나 또는 아예 불가능하게될 때까지 계속된다. 이 계속된 과정이 바로 숙고이다. 당신은 이 숙고의 과정을 통하여 마지막 단계의 선호 또는 혐오를 남겨두게된다. 이것은 바로 의지이디. 이것이 합리적 선택에 관한 홉스의 포인트이다. 예를들어, 나는 결정했다. 그녀와 차 한잔을 해야겠다. 아니다,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과들이 바로 의지이다. 재미있게도, 자발적 행동은 이성에 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자벌적 행동은 의지로부터 출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인간 본성으로서 권력에 대한 욕망은 끝이 없다.
홉스에 따르면 모든 인간의 일반적인 습성은 끊임없이 또 쉼없이 권력에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즉, 인간은 타인에 대하여 영향을 끼치고자 욕망한다. 그 욕망은 죽어서야 끝난다. 이것이 홉스의 포인트이다. 홉스는 권력에 대한 욕망은 악이 아니라 그것은 필요하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존하고자 한다면 계속해서 타인들에게 영향을 끼치지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권력을 그토록 추구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홉스의 아이디어로서 나중에 니체와 막스 베버도 공유한다.

+ 인간 본성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홉스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고 주창한 최초의 철학자 중의 한명이다. 따라서 1651년에 귀족, 농노, 노예 그리고 노예 보유자는 모두 평등하게 태어났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역설적으로, 가장 빈약한 인간도 가장 강한 인간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심지어 다윗도 골리앗을 죽일 수 있었다. 또한 우리 인간은 육체적으로보다 지성적으로 더 평등할 수 있다. 정말 아름다운 말인지도 모르겠다. 재미있게도, 홉스는 이러한 평등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끊임없는 싸움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모두 서로 같아지고자 욕망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욕망하는 대상은 희소하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욕망을 충족하기위해서 서로 싸우면서 쟁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싸울 수 없다. 왜냐하면 재미있게도, 우리 인간은 서로 평등하기 때문이다. 역설적으로, 우리 인간이 평등한 이유는 인간은 서로 죽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홉스의 이러한 논증은 평법하지않다. 홉스는 매우 아이러닉한 인간이었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 평등은 사회 갈등의 해결책이 아니라 사회갈등의 불씨일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재미있고 아이러닉한 문제이다.

+ 인간의 본성은 만인이 만인에 대한 전쟁상태이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은 전쟁 상태에 놓여있다. 한 개인과 상대방은 자신들의 이성의 한게 내에서 행동한다. 따라서 재미있게도, 그 개인은 상대방의 육체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도 있게 된다. 재미있게도, 상대방 또한 그와 똑같이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다.

5. 사회계약

과연, 진정한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많은 논란이 되어왔다. 모든 구속이 제거된 자연 상태에서는 어떠한 도시 문화(civilization)도 이루어질 수 없다. 알다시피, 모든 인간은 자기이익(self-interest)를 추구한다. 홉스는 두가지 기본적 자연법을 주장했다. 첫째, 제1자연법은, 자기 자신에게 해로운 것은 금지된다는 것이다. 홉스의 합리적 선택이론에 따르면 개인은 자기이익을 추구한다. 또 개인은 자기보존을 위한 자연권을 가지고 있다. 둘째, 제 2자연법은 남이 당신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들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계약을 필요로한다. 개인들은 권력을 주권자로 이전(the transfer of rights)할 수 있다. 홉스의 자연법은 아주 중요한 윤리이론으로서 다음 세기의 임마누엘 칸트의 정언명령과도 일치한다. 재미있게도,홉스에 따르면 자연 상태를 제한하기위한 억압이 필요하다. 이것은 프로이트의 아이디어와도 일맥상통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도시문화(civilization)는 인간 충동drive의 만족을 통해서가 아니라 충동drive의 억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따라서 개인들의 충동이 충족되었다면 도시는 완성되지않았을 것이다. 도시문화(civilization)는 개인들의 고통을 통해서 또 억압된 충동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당신은 성적 욕망과 같은 충동의 억압을 통하여 위대한 에술작품을 남길 수 있고, 위대한 과학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제 2자연법에 따르면 각자의 권리는 모아서 타자에게 넘겨질 수 있다다. 이러한 권력 이전은 상호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몇몇 권리를 포기하는대신에 보호와 안전 등을 타자와 교환할 수 있다. 사회계약은 우리가 이러한 권리들을 타자에게 이전(transfer)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사회계약론의 공식(formulation)이다. 홉스의 사회계약론은 로크나 루소의 사회계약론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공포에 의하여 계약하였을 때 그것은 구속(obligatory)적이다. 우리가 두려움속에서 강제로 계약을 체결했더라도 우리는 그 계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것은 현상유지status quo와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홉스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홉스는 최초의 계약은 이후의 모든 계약을 무효화한다고 하였다. 이런식으로 해석하면, 어떤 이혼도 있을 수 없다. 한번 결혼 서약를 했으면 죽을 때까지 살아야하는 것이다. 최초의 계약을 무효화하는 어떤 새로운 계약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6. 주권자의 권력

정당화된 주권자의 권력(power of the sovereign justified)은 시민의 안전을 보장하는 데에 그 목표가 있다. 권력은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한다. 시민들은 단지 주권자가 안전을 보장하는 범위까지만 복종의 의무가 있다. 혼란한 시절을 경험했던 홉스는 묻는다. 도대체 누가 주권자인가. 첫째, 주권자는 한 인간 즉, 군주일 수 있다. 둘째, 주권자는 인간 집합체인 의회일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홉스는 절대주의에 매우 호의적이었지만 주권자는 올바르게 구성된 의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홉스는 올바른 의회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그후 로크와 루소는 주권자의 정체에 대하여 확실히 밝혔다. 또 미국 헌법은 아주 명확하게 주권자의 정체를 밝혔다. 미국 헌법은 "우리들은We the people" 이라고 시작하는데, 바로 그들이 주권자이다. 재미있게도, 홉스는 군주가 주권자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보았다. 홉스에 따르면 주권자는 의무를 갖고있다. 주권자는 시민의 안전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 그 의무는 단순한 안전 보장을 넘어선 생존 이상의 의미이다. 따라서 시민들은 주권자에게 이런 것을 배달하도록 기대할 수 있다. 만약 군주가 안전보장과 생존보장을 배달하는 데 실패했다면 시민들은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철회할 수 있다.  홉스는 절대주의 이론가였지만 악한 군주에 대한 충성심을 철회하고 선한 군주인 새 주권자에게 충성심을 이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않았다. 그럼, 선한 법이란 무엇인가. 보통, 사람들은 선한 법은 주권자를 위한 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선한 법이란 주권자를 위하여 만들어진 법이 아니라 시민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법이다.

7. 홉스의 강점과 약점

홉스는  평화와 질서에 역점을 두면서도 주권자가 권력을 남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였다. 이것은 나중에 로크에 의하여 비판을 받게된다. 로크는 주권자가 충분히 권력을 남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홉스는 권력 견제에 대한 어떤 이론도 개발하지 못했다. 홉스는 견제와 균형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지 못했다. 미국 헌법은 홉스가 아니라 로크와 몽테스키외의 이론에서 나왔다. 몽테스키외의 견제와 균형 이론은 미국 헌법에 자리잡았다. 홉스는 단순한 절대주의 이론가라기 보다는 계몽 절대주의 이론가였다. 홉스는 진짜 괴물과 대항했으므로 군주와의 사이가 멀어졌다. 홉스가 군주 권력에 너무 많은 제약을 가한 것도 그 이유였다. 재미있게도, 홉스는 당시 막 등장한 부르조아 계급에게도 냉대받았다. 부르조아들이 보기에 홉스는 군주제에 너무 많은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도 홉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하여 오늘날 홉스의 목소리에 귀를 틀어막을 일도 아니겠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