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2년 6월 28일 장 자크 루소는 도시국가City State였던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당시 제네바는 잠깐동안 칼빈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칼빈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한 도시였다. 제네바에서 태어난 칼빈은 당시에 철권을 휘둘렀다. 루소의 부친은 시계 제조공으로서 칼빈주의자였다.
1722년 루소의 부친은 빚 문제 때문에 배를 타고 이스탄불로 도망가버렸다. 때문에 루소는 10살의 나이에 고아가 되어버렸다.
1728년 루소는 아낭시Annency로 이주해서 홈home을 운영하는 마담 와렌스Warens를 만났다. 마담 와렌스는 로만캐돌릭교도였다. 그녀의 임무는 칼빈주의자들을 로만캐돌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루소를 자기 홈home으로 데려갔다. 루소는 당시 16살의 미소년이었고 마담 와렌스는 28살이었다. 루소는 엄격한 칼빈교도였으나 마담 와렌스와의 로맨틱한 과정 후에 로만캐돌릭으로 개종하였다. 루소는 자신의 책 <고백>에서 당시의 일들을 자기 풍자irony와 자기 비판으로 소개하였다. <고백>은 그 사실관계를 떠나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의 사후에 발간되었다. <고백>에 따르면 마담 와렌스가 루소를 양육하고 성장시켰다. 루소와 마담 와렌스 사이의 환상적이고 로밴틱한 관계는 저명한 프랑스의 소설가인 스탕달의 <적과 흑>에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 줄리안 소렐Julien Sorel은 장자크 루소였고 마담 레날Renal은 마담 와렌스였다.
1742년 루소는 파리로 이주하였다.
1743년 루소는 베니스 주재 프랑스 대사인 몽테뉴Comte de Montaigue의 비서가 되었다. 그런데 루소는 아마 빚 문제로 추정되는 여러소동에 휘말리면서 베니스를 떠났고 파리로 돌아왔다. 루소는 백과사전과 프랑스 계몽주의로 유명한 디드로를 만나게 되었다. 디드로는 루소에게 백과사전에 넣을 음악에 관한 아티클을 청탁하였다.
1745년 루소는 르바쇠Therese Levasseau를 만났다. 그녀는 루소가 머물고 있던 호텔의 하녀였다. 루소와 르바쇠는 오랫동안 관계를 지속하면서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1768년에 루소는 르바쇠와 결혼하였고 그녀와의 사이에 5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고아원에 버렸다.
1722년 루소의 부친은 빚 문제 때문에 배를 타고 이스탄불로 도망가버렸다. 때문에 루소는 10살의 나이에 고아가 되어버렸다.
1728년 루소는 아낭시Annency로 이주해서 홈home을 운영하는 마담 와렌스Warens를 만났다. 마담 와렌스는 로만캐돌릭교도였다. 그녀의 임무는 칼빈주의자들을 로만캐돌릭으로 개종시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루소를 자기 홈home으로 데려갔다. 루소는 당시 16살의 미소년이었고 마담 와렌스는 28살이었다. 루소는 엄격한 칼빈교도였으나 마담 와렌스와의 로맨틱한 과정 후에 로만캐돌릭으로 개종하였다. 루소는 자신의 책 <고백>에서 당시의 일들을 자기 풍자irony와 자기 비판으로 소개하였다. <고백>은 그 사실관계를 떠나서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의 사후에 발간되었다. <고백>에 따르면 마담 와렌스가 루소를 양육하고 성장시켰다. 루소와 마담 와렌스 사이의 환상적이고 로밴틱한 관계는 저명한 프랑스의 소설가인 스탕달의 <적과 흑>에 적나라하게 묘사되었다. 줄리안 소렐Julien Sorel은 장자크 루소였고 마담 레날Renal은 마담 와렌스였다.
1742년 루소는 파리로 이주하였다.
1743년 루소는 베니스 주재 프랑스 대사인 몽테뉴Comte de Montaigue의 비서가 되었다. 그런데 루소는 아마 빚 문제로 추정되는 여러소동에 휘말리면서 베니스를 떠났고 파리로 돌아왔다. 루소는 백과사전과 프랑스 계몽주의로 유명한 디드로를 만나게 되었다. 디드로는 루소에게 백과사전에 넣을 음악에 관한 아티클을 청탁하였다.
1745년 루소는 르바쇠Therese Levasseau를 만났다. 그녀는 루소가 머물고 있던 호텔의 하녀였다. 루소와 르바쇠는 오랫동안 관계를 지속하면서 인생의 동반자가 되었다.
1768년에 루소는 르바쇠와 결혼하였고 그녀와의 사이에 5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 고아원에 버렸다.
2. 주요작품과 현존하는 유산
장 자크 루소는 철학자이면서 사회학자이고 또 예술가였다.
1752년 루소는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Le Devin du Village>를 작곡하였다. 당시, 루소는 프랑스의 대작곡가, 라모Rameau와 격렬한 논쟁을 하였다. 루소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멜로디가 프랑스 오페라의 멜로디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라모는 루소를 반박하며, 멜로디보다는 하모니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라모는 천재적인 작곡가로서 현대 음악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고있었다. 또 위대한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는 루소를 좋아하였다. 모짜르트의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Bastien und Bastienne>는 루소의 마을의 점쟁이Le devin du Village>의 영감을 받고 쓴 작품이었다.
1761년 루소는 소설 <줄리Joulie>를 발표하였다. <줄리>는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모짜르트는 생애 초기에 이탈리아 성향의 오페라 작품을 지양하면서 독일 오페라를 창조하였다.
1750년 루소는 과학에 관한 책인 <과학과 예술의 제일 논고First Discourse on Science and Arts>를 발표하였다.
1755년 루소는 아주 재미있는 책 <인간불평등 기원론Discourse on the Origins of Inequali>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매우 도발적이었는데 홉스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은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지면 질투심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당신이 새 연인과 열정적으로 깊은 사랑에 빠지면 옛 연인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된다. 결국 당신의 질투가 불평등을 자초하였다. 결국, 루소는 이러한 질투가 불평등의 기원이라고 보았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 본성의 유일한 선(good)이란 욕망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타인이 욕망의 대상을 쟁취하면 질투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욕망의 대상을 획득화고 독점하려고 한다. 따라서 홉스는 인간 욕망이 불평등의 근거라고 하였다.
1762년 루소는 두 대작, <사회계약론Social Contract>과 <Emile에밀>을 발표하였다. 홉스와 로크 그리고 루소는 모두 사회계약에 대한 비범한 아이디어를 전개하였다. 먼저, 최초의 계약주의자, 홉스는 현실적이기는 하였으나 다소 부족한 아이디어를 전개하였다. 홉스에 따르면 사회계약은 개인이 지배자를 상대로 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공포에 의하여 강제되는 것이다. 일단, 사회 계약이 체결되면 그것은 개인들을 영원히 구속한다. 반면에, 로크에 따르면 사회계약은 개인과 연방(Commonwealth)사이의 계약이므로 개인은 스스로 체결한 계약에 구속된다. 이것은 홉스보다 훨씬 좋은 아이디어이다. 예를들어, 당신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결코 미국헌법을 따르겠다는 계약을 체결하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미국정부와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미국에 충성하겠다고 서약했다. 당시에 나는 헌법 조문을 읽기로 되어었지만 자세히 읽지는 못했다. 재미있게도, 나는 그 계약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도 어렴풋이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계약을 체결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은 시민권을 포기하고 북한시민이 될 작정을 하지않는한 여전히 사회계약에 구속되어있다. 이것이 로크가 홉스와 구별되는 포인트이다. 재미있게도, 루소는 개인이 아니라 일반의지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루소의 아이디어이다. 루소에 따르면 일반의지는 개인들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사실, 일반의지는 현실적이고 직관적인 아이디이로서 매우 위험한 아이디어이다. 전체주의 국가들은 자주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를 옹호했었다. 루소는 개인의 자유는 강제된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것은 일반의지 아이디어에서 끌어온 명제이다. 루소는 자유주의자이면서도 계약주의자로서 전체주의의 지평을 열었던 복잡한 사상가였다. 재미있게도, 루소 많은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또 많은 전체주의자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았다. 칼 맑스와 블라디미르 일리히 레닌도 루소를 사랑하였다. 물론, 그 이유는 일반의지 아이디어 때문이었다. 자유주의자인 뒤르껨도 루소를 사랑하였다. 그 이유는 <에밀> 때문이었다. 사실, <에밀>을 능가하는 현대 교육이론은 아직 없다. <에밀>은 현대 교육이론의 기초서이다. 한편, 루소는 미국 헌법과 프랑스 혁명의 큰 발판이 되었다. 루소는 최초로 대중 주권자를 옹호하면서 제 3신분을 폐지하고 대중에 의해 선출된 기구를 설립하자고 하였다. 루소는 양원제(Two Chamber)즉, 귀족을 위한 상원과 대중을 위한 하원를 고집했던 몽테스키외와 심한 갈등을 빚었다. 루소는 보편적 참정권(Universal Suffrage)을 주장하면서도 여성은 예외로 두었다. 따라서 루소는 남성 쇼비니스트(chauvinist)였다. 알다시피,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는 프랑스혁명의 급진 자코뱅파, 레닌주의 공산주의자, 그리고 마오주의자의 교과서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루소의 제자이자 일반의지 신봉자였던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는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갔다. 루소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그것을 알렸다. 루소는 이해 1762년 제네바로 망명을 떠났다. 왜냐하면 <사회계약론>과 <에밀>이 교회로부터 배척받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데이비드 흄은 <사회계약론>과 <에밀> 등 루소의 저작들에 경탄하였고 마침내 루소를 영국으로 초청하였다. 데이비드 흄과 루소는 매우 잘 어울렸다.
1767년 루소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루소는 더 이상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위하여 오랜동안 가명으로 생활하였다.
1768년 마침내 루소는 56세의 나이로 Therese와 결혼하였다. 루소는 그녀와의 사이에 낳은 자녀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내버렸다. 루소는 <고백Confession>을 저술했는데 그의 사후인 1782년에 발행되었다.
루소는 1778년 7월 2일 타계하였다.
3. <사회 계약론Social Contract>의 주요내용
루소는 <사회 계약론> 제 1권Book 1에서, 자연상태로부터 정치적 권리로의 이전해가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제 2권Book 2에서, 주권자는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지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이것은 로크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항이다. 루소는 처음에 선별적 귀족주의를 선호하였지만 점차 보편적 참정권과 합법적 주권자, 헌법 이론에 몰두하게 되었다. 제 3권Book 3에서, 정부에 관하여 장황하게 서술하였다. 제 4권Book 4에서, 고대로마와 시민종교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그럼, <사회계약론>의 주요내용은 무엇인가. <사회계약론>의 포인트는 합법적 지배(Legitimate Rule)에 있다. 루소에 따르면 지배의 합법성은 시민들의 동의에 있다. 또 일반의지는 정의에 선행하므로 정의는 희석될 수 있다. 루소는 개인 의지를 갖고는 보편적 정의에 다다를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일반의지와 공동선은 개인의 정의를 희석할 것이고, 개인 의지는 집단의지, 즉 집단 선good에 따라서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 거슬릴 수도 있지만 확실히 진정성을 담고있다. 또 이것은 매우 위험한 주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는 전체주의 국가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주권자는 개인 각자의 의지를 무시하고 주권자의 의지를 정당한 것으로서 강요한다. 전체주의 국가의 주권자는 집단의지라는 명목으로 개인들을 억지로 해방시키려하고 이해시키려 든다. 역사상, 그러한 주권자는 분명히 일반의지를 오용하였다. 이것이 개인 의지의 희석이 의미하는 것이다. 루소는 대중 주권과 협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개인은 개인적 관심 사항만을 표명하지만 일반의지는 단순히 개인적 의지들의 총합(the sum total)만은 아니다. 루소는 방법론적 집단주의자였다. 루소는 입법자(lawgiver)칭송하면서 입법자는 자신을 위한 이기심과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공공심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지혜롭기 때문에 시민들은 입법자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루소에 따르면 선한 정부는 선거로 선출된 대중적 입법부와 지혜를 가진 귀족적 집행부로 구성된다. 일반적인 통념에 따르면 정부는 지혜로워야한다. 과거, 미국의 몇몇 대통령은 다소 걱정스러웠다. 역대 대통령 모두가 지혜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몇 몇은 바보는 아니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였다.
4. <사회 계약론> 제 1권: 합법적 지배, 희석된 정의, 대중주권
+ 합법적 지배(legitimate rule)
루소에 따르면 합법적 지배는 귀족주의와 같은 자연적 특권(natural title)부터는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지배자는 피지배자들의 동의에 의하여 권력을 행사해야한다. 재미있게도, 루소는 유일한 자연적 사회 집단인 가족조차도 자연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내의 사회 계약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를테면, 당신은 성장하고 나서야 가족이 사회 계약이었음을 알게된다. 자식들 중에는 부모와의 관계가 매우 불편해서 계약을 파기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 십대가 되면 가족적인 자연권을 계약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십대들은 자기-보존을 위해서 부모의 보호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보호가 더 이상 필요없게되면 가족의 자연적 구속은 해제된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로부터 시민 사회로 이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민사회에서 본능적으로 행동하기 보다는 정의를 추구하고 또, 자연 상태에서와는 다르게 도덕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민 사회에서 자연상태에서 누렸던 혜택들을 빼앗길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는 엄청난 헤택을 가져다준다. 인간은 시민 사회(civil society)에서 자신의 능력을 연마하고 발전시키면서 사고를 확장시키고 감성을 풍부하게 살찌울 수 있다. 이것이 루소의 시민사회에 대한 포인트이다. 이것은 엄청난 진보이다.
+ 희석된 정의(diluted justice)
루소에 따르면 인간들 각자의 정의가 인정되기 위해선 개인의 정의가 희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희석이란 개인적 정의가 일반 의지에 의하여 전복되는 것을 말한다. 주권자는 어떤 보증자도 필요없이 개인의 의지를 제한한다. 분명, 이것은 개인의 고통을 덜기위한 조치이다. 개인이 제약을 받는 이유는 일반의지가 우선해야하기 때문이다. 또 사회의 공동선은 개인의 이기주의를 엎어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영국 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는 구별된다.
+ 대중 주권(popular sovereignty)
루소는 대중 주권을 주장하였다. 대중 주권은 루소의 이론 중에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루소에 따르면 대중 주권은 협약convention)에 의하여 주어지고 협약은 다수의 지배에 따르는 것이다. 다수의 지배는 대중으로 구성된 의회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의회가 필요하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대중 주권은 매우 급진적이고 논란이 되었던 아이디어이다. 대중 주권 아이디어는 모든 자원을 공동 재산으로 협약한 공산주의 사상과 거의 같다. 이것은 매우 문제가 될 수 있다. 재미있게도, 루소는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평등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것은 홉스와는 매우 다른 견해이다. 루소는 인간은 협약에 의하여 서로 평등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 협약에 의한 평등이 정말로 전체주의를 향한 문을열었던 것인지 논란이 되고있다. 루소는 소유에 관한 최상의 형태로서 공공소유, 자원의 국가소유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매우 큰 문제로서, 맑시즘과 공산주의사상의 문을 열었다.
5. <사회 계약론> 제 2권: 일반의지(General Will), 법과 입법자
루소에 따르면 개인은 사적인 관심을 표현하고 주권자는 일반의지와 공적 관심을 표현한다. 그럼, 일반의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루소에 따르면 일반의지는 확실히 개개인을 초월한 곳에서 나오고, 연방Commonwealth은 일반의지를 표상한다. 일반의지는 각각의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모든 개인이 관심을 갖고 따르는 의지이다. 방법론적 집단주의자는 일반의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루소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법에 복종할 때만 자유롭다. 즉, 자유는 인간 스스로-부여한 법(self-imposed law)이다. 헤겔에 따르면 개인은 필연을 인식할 때 자유로우므로 개인은 법에 따라가야 한다. 그럼, 일반의지가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 누가 판단하는가. 분명, 공공애(amour-propre)자는 자기애(amour-soi)자와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소에 따르면 사회 계약은 보편적 동의에 따라서 체결해야하고 또 사회 계약은 대중 주권의 행사로서 체결한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물론 로크도 이렇게 주장하였지만, 루소는 민주주의적 대중주권과 보편적 참정권을 매우 발전시키면서 전개하였다. 루소는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로크가 손대지 못했던 보편적 참정권을 짚었다.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는 아주재미있으면서도 혼란스럽지만 진정성이 있는 아이디어이다. 일반의지가 잘 먹히는 예로는 방법론적 집단주의가 있다. 루소는 홉스나 로크, 존 스튜어트 밀, 스미스와는 다르게, 사회와 사회인의 행동에는 모든 개인의 의지를 총합한 이상의 일반의지가 깃들어 있다고 하였다. 일반의지 아이디어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사회이론으로서 발전되었다. 특히 에밀 뒤르꼠이 일반의지를 좋아하였다. 일반의지는 개개인의 이익의 총합을 초월하는 보편선으로서 명백한 진리이다. 건강보험을 생각해보라. 정부는 의료개혁과 관련하여 모든 개인의 건강 보험을 의무화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은 건강보험의 가입 여부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않는다. 일반의지는 개인에게 결정권을 주지않는다. 어떤 대학은 입학조건으로서 필수 예방접종을 요구할 수 있다. 따라서 예방접종없이는 대학 입학이 불가능할 것이다.그 에방접종은 개인에게 결정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게도,이 대학의 결정은 모든 사람이 합리적이거나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가정한 일반의지가 아니다. 따라서 그 결정은 시정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일반의지는 상식적이고 집단선(collective good)이다. 일반의지, 즉 공공선은 강요될 수 있다. 이것이 일반의지의 큰 문제점이다. 그럼, 일반의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일반의지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루소에 따르면 지혜로운 자는 사회의 선과 필요에 관련하여 모든 사람의 일반의지를 알아낼 수 있다. 또 대중이 선출한 의회는 그 일반의지를 법률화하고 통과시킨다. 루소는 그들을 입법자lawgiver라고 하였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혼란스럽다. 루소는 입법자로서 정부의 아이디어가 훨씬 낫다고 하였다. 결국 이 아이디어는 전체주의의 길을 열었다. 사실, 루소는 정부가 아니라 우리, 즉 지혜로운 철학자와 지성인들이 대중의 이익을 훨씬 잘 안다고 주장하였다. 재미있게도 그 지성인 입법자는 개인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당신에게 이익이 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당신의 이익에 관해서는 우리 철학자가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혼란스러운 아이디어이다. 도대체 어떻게 지성인이나 철학자가 당신의 이익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루소의 일반의지는 칼 맑스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그리고 마오쩌뚱에게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은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를 사랑하였다. 중국 공산당과 러시아 공산당의 아이디어는 중국 대중이나 러시아 대중들의 이익을 표상하는 일반의지가 되었다. 즉 개인보다는 중앙의 계획자가 대중의 이익을 훨씬 잘 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의지는 매우 문제가 될 수 있다. 사회의 일반의지와 공공선에 해박한 자가 정말로 있는가. 경제학 전공한 자는 이것을 부정할 것이다.
6. <에밀Emile>의 주요내용
장자크 루소는 소년 에밀의 가정교사였다. 루소는 에밀이 어릴적부터 성장하여 소피Sophie와 혼인할 때까지 그를 교육하였다. 기가 막히게도 루소는 자신의 자식들은 모두 고아원에 버렸다. 그 자식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고아원에서 죽었다. 루소는 <에밀>에서 도시화된 야만인을 양육해야한다고 하였다. 자연 상태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유아기, 소아기, 사춘기를 거치면서 자연상태에서 사회로 이전해간다. 원자화된 개인은 청년이 되면서 사회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루소에 따르면 원자화된 개인이 자연 상태로부터 사회로 이전해가는 것은 자기애amour de soi에서 공공애amour propre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복잡한 아이디어이다. Propre는 영어의 proper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 또한 배려하는 myself를 뜻한다. 반면에 Soi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myself를 뜻한다. 프로이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propre는 ego와 alter를 모두 고려한 myself이다. 루소는 공공애amour propre없이는 시민이 될 수 없다면서 시민과 브르조와의 개념을 명백하게 구별하였다. 루소는 한편으로는 급진적 민주주의자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좌파 급진주의자였다. 루소는 '부르조아' 라는 용어를 경멸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루소는 부르조아를 시민과 확실하게 구분하였다. 부르조아는 공동체에 헌신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돈을 모으는 이기적인 사업가를 말한다. 부르조아는 일반의지에 복종하지않고 이기적이면서 속좁게 경제적 이익만을 밝힌다. 이것이 루소가 말하는 부르조아이다. 이런 면에서 루소는 칼 맑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칼 맑스 또한 인간적으로 부족했다는 루소를 사랑하였다. <에밀>의 주요내용은 자연은 선하고 사회는 부패하다는 데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면서 강력한 명제이다. 이것은 맑스뿐만 아니라 뒤르껨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또, 루소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제들, 철학자들, 그리고 의사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루소가 <에밀>에서 밝히고자했던 목표는 첫째, 부정 교육(negative education)이었다. 둘째, 야만인들을 사회적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자기애amour de soi에서 공공애amour propre적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충격적이게도, 루소는 인간을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연민(pity)이라고 하였다. 그럼, 인간은 부르조아가 됨이없이도 시민이 될 수 있는가. 루소에 따르면 도시(civilization)는 인간의 섹스(sex)가 상상력으로 승화될 때 비로소 창조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루소는 인간을 사회화하는 데는 두가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것은 연민pity과 사랑love이다. 섹스Sex는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섹스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성적인 충동drive이 실제로 현실화된 에로틱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사랑은 세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한다고 하였다. 멋지게도 첫 단게, 당신은 사랑에 빠졌지만 누구와의 사랑인지 아직 모른다. 당신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서, 대상을 찾고있지만 아직 확실하게 구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이것은 확실히 사춘기에 처음으로 일어날 수 있다. 보통, 열세살, 네살 즈음에 로맨틱한 것을 불현듯 알게 되는데, 그 로맨틱한 감정의 대상을 구하지 못한 경우이다. 실제로, 이것은 사랑에 빠지면 항상 일어나는 현상이다. 노인들 또한 예외가 아닌데, 사랑의 감정은 인생의 말년에도 일어난다. 종종, 노인들은 인생에서 유일한 사랑이란 거의 없다고들 말한다. 루소에 따르면 사랑은 차이성의 바턍 위에서 서로 결합하는 것이다. 뒤르켐에 따르면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각자의 차이성 때문이다. 분명, 이것은 루소와 뒤르켐의 유사한 면이다. 루소는 <에밀>에서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것을 충격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었다. 루소는 남성 쇼비니스트로 알져져 있는데, 앞으로 더 복잡한 문제가 남아있다.
7. 자연은 선하다(Nature is good); 사회는 타락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 선하지만 사회에서 타락한다. 홉스와 뒤르켐은 이것과 정반대로 주장하였다. 그럼, 사회에 더 많은 통제를 가해야하는가. 이것은 루소의 근본적인 아이디어에 반한다. 루소에 따르면 원래, 어린이는 악(vice)과 실수를 모르지만 사회를 통하여 악과 실수를 알게된다. 루소는 신학적인 논박을 하면서, 모든 것은 창조주의 손에 맡겨졌을 때 선하지만 인간에게 맡겨졌을 때 타락하고, 인간은 모든 것을 뒤엎어놓고 더 이상 자연이 만든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종종 인간의 자연적 본능을 지양하라는 말을 듣게된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교련된 말처럼 훈련(trained)되어야 한다. 트레이닝Training은 단순히 요령을 터득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종종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운것을 잘 훈련training하여 시험준비를 하지만 시험이 끝난 후에는 다 잊어버린다. 반면에 교육Education은 자기 스스로 사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루소는 너무 많은 훈련을 가르치는 것은 문제라고 하였다. 훈련을 마치 프랑스의 정원처럼 아릅다운 풍경을 위해서 나무의 가지들를 마구 잘라 없앤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비자연적이다. 이어서 루소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연적이지 않다고 하면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였다. 루소는 이런 면에서 홉스와 동조하였는데 사실, 우리는 죽음의 공포에 휘둘리지만 이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개가 죽을 때는 개의 눈에 공포가 깃들어 있다고 한다. 루소의 관찰이 정확했는지,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루소의 죽음에 대한 주장은 진정성이 있다. 물소들buffaloes은 죽을 때가 다가오면 스스로 멀리나가서 드러누운 후에 평화롭게 죽음을 기다린다고 한다. 멋지게도, 루소는 다름아닌 철학자들, 의사들, 그리고 사제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우리 안에 심어놓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대단한 아이디어이다. 루소에 따르면 우리는 지식을 독점하는 자들에 의하여 지배받고 있는데 그 지식의 힘이란 다름아니라 우리 안에 주입된 죽음의 공포이다. 의사들은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치료하겠소."라고 한다. 사제들은 말하기를 "당신은 지옥에서 타 죽을 것이오."라고 한다. 그러나 루소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고통받고 평화롭게 죽을 것인지 선험적으로자연스럽게 알고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젖어있어서 걱정속에서 살아간다. 바로 이것 때문에 부정교육이 필요하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부정교육은 매우 충격적인 아이디어이다. 부정교육 이론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매우 인기있었다. 왜냐하면 이반 일리히의 저작들은 많은 사람들을 강하게 몰아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반-문화 교육이론(counter-cultural educational theory)은 이반 일리히 레닌에 대한 부정교육을 강조한다. 사회가 주입한 여러 어리석은 아이디어들은 마음에서 제거될 필요가 있다. 그럼, 죽음에 대한 부정교육은 무엇인가 루소에 따르면 우리는 먼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배울 것이 아니라 필연을 받아들여야 하고 사회의 타락을 막아야 한다. 루소는 열정적인 교육자들은 언제나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 아이들이 진실로 배우고 싶어하는 것을 묻고 답해줘야한다고 하였다. 교육은 자기의 마음을 사용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지 독단에 물들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제일의 교육은 순수한 부정이어야 한다. 교육은 덕과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기가슴를 지키고 실수에 대하여 자기마음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육에 관한 루소의 포인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교육의 목표는 훈련이 아니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교육은 아이들이 두뇌를 충분히 작동시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때 아이들은 실수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자신의 실수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된다. 교육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아이들의 질문에 대하여는 어떠한 옳은 답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중요한 질문들은 서로 유력한 답들이 충돌한다. 루소에 따르면 교육의 목표는 어떤 증거에 대하여 찬성과 반대 또는 장점과 단점을 생각케하고 실수를 피하기위해서는 어떤 명제를 이용하여 판단할 것인지 돕는 것이다. 이것이 루소의 교육에 관한 모든 것이다. 다음은 명령에 관한 것이다. 루소는 명령은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루소는 복종과 명령이란 단어는 사전적 의미일 뿐이라고 하였다. 심지어 의무와 명령이란 단어 또한 그렇다고 하였다. 이 또한 매우 도발적인 아이디어이다. 루소에 따르면 교육을 통하여 마땅히 생성되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 힘(strength)이다. 교육은 필연(necessity)을 강조하고 또 교육은 불능(impotence)을 강조한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인간 한계 너머의 것들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나 교육은 현실적인 제약들을 강조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교육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말하기를 "이것이 당신이 해야할 의무이다.' 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법이다. 교육자는 사람들 안에 있는 죄성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죄책감(guilt feelings)을 오용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그럼, 죄책감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나중에 니체를 다루면서 검토하게 될 것이다. 루소는 죄를 만들어낼 궁리를 하지말고 대신에 무엇이 필연인가를 인식하라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교육자는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으면서도 "그렇게까지는 하지말았으면 좋겠다." 등의 경고도 잊지 말아야한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8. 야만인을 사회적 존재로 탈바꿈 시키기
루소에 따르면 야만인을 사회적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자기애amour de soi적 인간을 공공애amour de propre적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자기애를 자기-이익self-interest라고 부르면서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어린이들은 자기애를 갖고 태어난다. 예를들어, 장난감을 어린아이에게서 떨어트려 놓으면 그 아이는 말하기를 "그건 내꺼야."라고 외친다. 그것을 보고 있던 다른 아이는 말하기를 "아니야, 그건 내꺼야."라고 외친다. 이것이 바로 아모르 드 수와(자기애)다. 프로이트의 언어로 하자면 '나는 엄마 젖이 먹고싶다. 이 젖은 나만 먹을 수 있다. 이 젖은 나꺼다.' 이것이 아모르 드 수와(자기애)이다. 반면에 우리는 타인들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인간 관계를 넓혀가야 한다. 아모르 프로퍼(공공애)는 타인들 또한 아모르 드 수와(자기애)에 이끌리고 있고 어떻게하면 그들과 공존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사회성, 즉 아모르 프로퍼(공공얘)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모르 프로퍼(공공애)에는 세가지 금언이 있다.
+ 공공애의 첫번째 금언
루소에 따르면 자신보다 더 행복한 자의 위치를 욕망하는 것은 원래 인간의 마음이 아니었다. 단 불쌍한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다. 이것은 아이러니하다. 이것은 편견ad hominem 에 비견할 만하다. 매우 솔직하게 말해서, 당신은 자신보다 훨씬 더 성공한 사람을 알게되었을 때 그를 사랑하기가 매우 힘든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당신은 자신보다 덜 성공한 사람이 알게되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긴다. 당신은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고 책임감을 느끼면서 돕고자 할 것이다.
+ 공공애의 두번째 금언
루소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 또한 예외일 수 없는 그런 환자들로부터 연민을 느낀다. 우리는 경험의 한계를 벗어난 불행들을 보게 될 때조차 연민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도똑같은 상황에 놓여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 불쌍한 자들에 대한 사랑을 시작한다.
+ 공공애의 세번째 금언
루소에 따르면 우리 연민의 정도는 타인의 불행의 양에 따라서가 아니라 불행한 타인에게 품을 수 있는 우리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측량된다. 이것은 훌륭한 아이디어이다.
루소는 동정과 연민에 관련하여 말을 이어가면서 인간은 두번 태어나는데, 첫번째는 존재하기 위해서이고 두번째는 생존, 즉 종의 번성을 위하여 태어난다고 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젊은이들은 센스sense를 알기도 전에 센시티브sensitive하다. 따라서 진정으로 태어났을 때 젊은이들은 인생(life)과 타인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또 개인은 자신의 강점이 아니라 약점에 의하여 사회화된다. 따라서 개인이 존엄한 인간성(humanity)에 열정과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정말 공통의 불행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루소의 사회적 인간에 대한 포인트 이다. 이것은 정말 아이러니하면서 매우 깊은 아이디어이다. 분명, 이 주장은 명백한 진정성을 담고있으므로 찾아보기 바란다. 루소는 연민은 달콤하다고 하였다. 정말로, 타인에 대한 연민은 그렇게도 달콤하다. 당신은 타인에게 '정말 미안하다(I'm really sorry)' 라고 말할 때 당신의 가슴은 사랑으로 넘쳐흐른다. 루소는 시민과 부르조아에 관한 한 일화를 소개하였다. 스파르타의 페다레투스Pedaretus는 300인회(council of 300)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여 대표로 선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페다레투스는 기쁨 속에서 기꺼이 집으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페다레투스는 스파르타 공동체에서 자신보다 더 가치있는 300인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루소는 바로 이 페다레투스가 진정한 시민이라고 강조한다. 예를들어, 당신은 B 마이너스의 학점을 갖고있다. 이제, 당신은 A 학점을 받은 다른 30명의 동료를 발견한다. 당신은 자신보다 훨씬 나은 30명의 동료를 보면서 행복감을 느끼면서 클라스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다. 당신이 정말 그렇다면, 당신은 루소가 말하는 시민이다. 당신은 공공애(아모르 프로퍼)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일화가 하나 더 있다. 한 스파르타 여인은 5명의 자녀를 군대에 보냈다. 그녀는 이제 전투에 나간 자식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한 군병이 떨면서 그녀 앞에 도착하였다. 그녀는 그에게 전황을 물었다. 그 군병은 말하기를 "당신의 다섯 자녀가 모두 전사하였습니다."라고 전하였다. 그러자 그 여인은 대노하면서 말하기를 "이 저질 노예야, 내가 언제 그것을 물었느냐. 우리는 승리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 여인은 성전으로 달려가서 신들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이 여인이 바로 일반의지와 관련한 여성 시민의 전형이다. 루소에 따르면 사회질서 안에 있는 자가 자연상태의 감정을 좇아간다면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직 모르는 상태이다. 그가 하는 일은 항상 자기자신과 모순된다. 그는 인간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다. 그는 부르조아이고 무(nothing)이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9. 남자와 여자, 섹스와 사랑
루소에 따르면 도시(civilization)는 문화(culture)를 생성. 그 이유는 도시인의 섹스가 승화되고 육체적 욕망이 상상력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이 루소의 아이디어는 프로이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루소는 사회는 두가지 메카니즘에 따라 형성된다고 하였다. 그 두가지 메카니즘이란 연민(동정)과 사랑이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아이디어로서 후일, 포스트 모더니즘을 예고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계몽(Enlightenment)은 세계를 탈신화(demythologized)하면서 도시를 냉정하고 합리적인 시장의 세계로 만들었고, 개인은 이 도시에서 경쟁적이면서 원자화되었다. 계몽이 생산한 것은 바로 현대 세계(modern world)이다. 따라서 세계는 더 이상 에로틱(unerotic)하거나 시적(unpoetic)일 수 없게되었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이 루소의 아이디어는 막스 베버의 유명한 탈마법(disenchantment)아이디어나 마르쿠제의 '에로스로부터 도시(civilization)로'의 아이디어에 영향을 주었다. 루소는 에로틱한 사랑erotic을 원래 상태로 복구하고자 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에로틱erotic은 섹스가 아니라 에로틱한 경험이다. 또 인간의 에로틱은 세 단계에 걸쳐서 발전한다. 첫째, 당신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 아직 모른다. 열서너 살 때를 생각해보라. 둘째, 당신은 사랑할 누군가를 찾기시작한다. 셋째, 당신은 그 사랑의 대상을 발견한다. 당신은 말하기를 "됐다. 그(녀)가 바로 내가 사랑에 빠졌던 연인이다." 라고 한다. <에밀>에서 에밀은 이런 식으로 소피를 찾았다. 루소에 따르면 에밀과 소피를 결합시킨 것은 다름아니 그들의 차이점이다. 그들은 상대의 차이점를 보면서 자신이 차이점을 보완해 나갔다. 뒤르켐도 결합인자와 관련하여 루소와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재미있게도, 루소는 사랑에 빠졌다면 서둘지 말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섹스가 아니라 에로스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랑을 찾았으면 황급히 침대로 돌진할 것이 아니라 여행을 떠나라. 여행 중에 당신은 마음속에 있는 연인을 생각하면서 이상화(idealize)할 것이다. 그때 바로 당신은 에로틱한 경험을 하게되는 것이다. 그후에 그(녀)와사랑을 불태워도 늦지않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이것은 정말로 훌륭한 아이디어이다. 그럼, 루소는 성차별gender relation를 어떻게 보았을까. 루소의 견해는 문제점이 있다. 루소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은 엄연히 다르므로 서로 다르게 가르쳐야 한다. 만약, 여성을 남성처럼 키우고자 한다면 남성들은 기쁘게 동의할 것이다. 많은 여성들은 남성을 닮고자 할 것이고 몇몇 여성들은 남성을 지배할 것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지배자는 남성이 될 것이다. 이것이 루소의 성차별에 대한 포인트이다. 이것은 꽤나 섹시스트sexist적인 관찰일 수 있겠다. 루소에 따르면 교육의 임무는 남자의 자질을 여성에 양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자질을 여성의 자질과 구별하여 양성하면서 서로 다르게 키우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을 기쁘게 하기위하여 특별히 창조되었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의존하지만, 그 의존은 서로 평등하지 않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남성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여자에 의존한다. 그리고 여성은 자신의 욕망과 더불어 필요한 것들 때문에 남자에 의존한다. 남성은 여성없이도 쉽게 생존을 이어갈 수 있으나 여성은 남성없이는 생존이 힘들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아이디어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노인들 중에는 여자없이 홀아비로 사는 것이 남자없이 사는 여자보다 얼마나 힘든것인지 고백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루소에 따르면 대부분의 어린 소녀들은 읽고 쓰는 것을 마지못해 배우지만 바느질은 항상 기쁘게 배운다. 바느질하기, 자수하기, 레이스놓기는 여자들로부터 왔다. 오늘날 탈-페미니즘 페미니스트post-feminist feminist들은 이렇게 남성과 여성은 달라야 한다면서 루소를 편들고 있다. 루소에 따르면 소피Sophie는 당연히 여자가 되어야하고 에밀Emile은 분명히 남성이다. 더 나아가서 섹스sex와 관련되지 않는한 여자는 남자이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어떤 면에서 루소는 성(gender) 아이디어를 공식화하고 있다. 루소는 성평등(gender equality)과 성적 차이(sexual difference)와 관련하여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너무 성적(sex-wise)으로 과시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가 공통으로 인간 종(species)이지만 성(sex)으로서 구별된다. 따라서 성의 연합은 공통된 목적에 똑같이 기여하지만 그 방식은 다르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루소가 성차별자가 아니었다고 보기는 힘들겠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1752년 루소는 오페라 <마을의 점쟁이Le Devin du Village>를 작곡하였다. 당시, 루소는 프랑스의 대작곡가, 라모Rameau와 격렬한 논쟁을 하였다. 루소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멜로디가 프랑스 오페라의 멜로디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라모는 루소를 반박하며, 멜로디보다는 하모니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라모는 천재적인 작곡가로서 현대 음악의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고있었다. 또 위대한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는 루소를 좋아하였다. 모짜르트의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Bastien und Bastienne>는 루소의 마을의 점쟁이Le devin du Village>의 영감을 받고 쓴 작품이었다.
1761년 루소는 소설 <줄리Joulie>를 발표하였다. <줄리>는 파장을 일으켰다. 당시, 모짜르트는 생애 초기에 이탈리아 성향의 오페라 작품을 지양하면서 독일 오페라를 창조하였다.
1750년 루소는 과학에 관한 책인 <과학과 예술의 제일 논고First Discourse on Science and Arts>를 발표하였다.
1755년 루소는 아주 재미있는 책 <인간불평등 기원론Discourse on the Origins of Inequali>를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매우 도발적이었는데 홉스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루소는 <인간불평등 기원론>에서 인간은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지면 질투심이 생긴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당신이 새 연인과 열정적으로 깊은 사랑에 빠지면 옛 연인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된다. 결국 당신의 질투가 불평등을 자초하였다. 결국, 루소는 이러한 질투가 불평등의 기원이라고 보았다. 홉스에 따르면 인간 본성의 유일한 선(good)이란 욕망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타인이 욕망의 대상을 쟁취하면 질투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욕망의 대상을 획득화고 독점하려고 한다. 따라서 홉스는 인간 욕망이 불평등의 근거라고 하였다.
1762년 루소는 두 대작, <사회계약론Social Contract>과 <Emile에밀>을 발표하였다. 홉스와 로크 그리고 루소는 모두 사회계약에 대한 비범한 아이디어를 전개하였다. 먼저, 최초의 계약주의자, 홉스는 현실적이기는 하였으나 다소 부족한 아이디어를 전개하였다. 홉스에 따르면 사회계약은 개인이 지배자를 상대로 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 공포에 의하여 강제되는 것이다. 일단, 사회 계약이 체결되면 그것은 개인들을 영원히 구속한다. 반면에, 로크에 따르면 사회계약은 개인과 연방(Commonwealth)사이의 계약이므로 개인은 스스로 체결한 계약에 구속된다. 이것은 홉스보다 훨씬 좋은 아이디어이다. 예를들어, 당신은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결코 미국헌법을 따르겠다는 계약을 체결하지는 않았다. 사실, 나는 미국 시민권자이므로 미국정부와 계약을 체결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미국에 충성하겠다고 서약했다. 당시에 나는 헌법 조문을 읽기로 되어었지만 자세히 읽지는 못했다. 재미있게도, 나는 그 계약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면서도 어렴풋이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계약을 체결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인은 시민권을 포기하고 북한시민이 될 작정을 하지않는한 여전히 사회계약에 구속되어있다. 이것이 로크가 홉스와 구별되는 포인트이다. 재미있게도, 루소는 개인이 아니라 일반의지를 강조하였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루소의 아이디어이다. 루소에 따르면 일반의지는 개인들을 초월하여 존재한다. 사실, 일반의지는 현실적이고 직관적인 아이디이로서 매우 위험한 아이디어이다. 전체주의 국가들은 자주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를 옹호했었다. 루소는 개인의 자유는 강제된 것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것은 일반의지 아이디어에서 끌어온 명제이다. 루소는 자유주의자이면서도 계약주의자로서 전체주의의 지평을 열었던 복잡한 사상가였다. 재미있게도, 루소 많은 자유주의자들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또 많은 전체주의자들로부터도 사랑을 받았다. 칼 맑스와 블라디미르 일리히 레닌도 루소를 사랑하였다. 물론, 그 이유는 일반의지 아이디어 때문이었다. 자유주의자인 뒤르껨도 루소를 사랑하였다. 그 이유는 <에밀> 때문이었다. 사실, <에밀>을 능가하는 현대 교육이론은 아직 없다. <에밀>은 현대 교육이론의 기초서이다. 한편, 루소는 미국 헌법과 프랑스 혁명의 큰 발판이 되었다. 루소는 최초로 대중 주권자를 옹호하면서 제 3신분을 폐지하고 대중에 의해 선출된 기구를 설립하자고 하였다. 루소는 양원제(Two Chamber)즉, 귀족을 위한 상원과 대중을 위한 하원를 고집했던 몽테스키외와 심한 갈등을 빚었다. 루소는 보편적 참정권(Universal Suffrage)을 주장하면서도 여성은 예외로 두었다. 따라서 루소는 남성 쇼비니스트(chauvinist)였다. 알다시피,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는 프랑스혁명의 급진 자코뱅파, 레닌주의 공산주의자, 그리고 마오주의자의 교과서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루소의 제자이자 일반의지 신봉자였던 자코뱅의 로베스피에르는 단두대에서 목이 날아갔다. 루소는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그것을 알렸다. 루소는 이해 1762년 제네바로 망명을 떠났다. 왜냐하면 <사회계약론>과 <에밀>이 교회로부터 배척받았기 때문이다. 영국의 데이비드 흄은 <사회계약론>과 <에밀> 등 루소의 저작들에 경탄하였고 마침내 루소를 영국으로 초청하였다. 데이비드 흄과 루소는 매우 잘 어울렸다.
1767년 루소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루소는 더 이상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위하여 오랜동안 가명으로 생활하였다.
1768년 마침내 루소는 56세의 나이로 Therese와 결혼하였다. 루소는 그녀와의 사이에 낳은 자녀들을 모두 고아원에 보내버렸다. 루소는 <고백Confession>을 저술했는데 그의 사후인 1782년에 발행되었다.
루소는 1778년 7월 2일 타계하였다.
3. <사회 계약론Social Contract>의 주요내용
루소는 <사회 계약론> 제 1권Book 1에서, 자연상태로부터 정치적 권리로의 이전해가는 과정을 서술하였다. 제 2권Book 2에서, 주권자는 어떻게 세워져야 하는지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이것은 로크가 관심을 두지 않았던 사항이다. 루소는 처음에 선별적 귀족주의를 선호하였지만 점차 보편적 참정권과 합법적 주권자, 헌법 이론에 몰두하게 되었다. 제 3권Book 3에서, 정부에 관하여 장황하게 서술하였다. 제 4권Book 4에서, 고대로마와 시민종교에 관하여 서술하였다. 그럼, <사회계약론>의 주요내용은 무엇인가. <사회계약론>의 포인트는 합법적 지배(Legitimate Rule)에 있다. 루소에 따르면 지배의 합법성은 시민들의 동의에 있다. 또 일반의지는 정의에 선행하므로 정의는 희석될 수 있다. 루소는 개인 의지를 갖고는 보편적 정의에 다다를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일반의지와 공동선은 개인의 정의를 희석할 것이고, 개인 의지는 집단의지, 즉 집단 선good에 따라서 제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경우에 따라서 거슬릴 수도 있지만 확실히 진정성을 담고있다. 또 이것은 매우 위험한 주장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는 전체주의 국가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전체주의의 주권자는 개인 각자의 의지를 무시하고 주권자의 의지를 정당한 것으로서 강요한다. 전체주의 국가의 주권자는 집단의지라는 명목으로 개인들을 억지로 해방시키려하고 이해시키려 든다. 역사상, 그러한 주권자는 분명히 일반의지를 오용하였다. 이것이 개인 의지의 희석이 의미하는 것이다. 루소는 대중 주권과 협약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개인은 개인적 관심 사항만을 표명하지만 일반의지는 단순히 개인적 의지들의 총합(the sum total)만은 아니다. 루소는 방법론적 집단주의자였다. 루소는 입법자(lawgiver)칭송하면서 입법자는 자신을 위한 이기심과 국가와 공동체를 위한 공공심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로 지혜롭기 때문에 시민들은 입법자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루소에 따르면 선한 정부는 선거로 선출된 대중적 입법부와 지혜를 가진 귀족적 집행부로 구성된다. 일반적인 통념에 따르면 정부는 지혜로워야한다. 과거, 미국의 몇몇 대통령은 다소 걱정스러웠다. 역대 대통령 모두가 지혜로웠던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몇 몇은 바보는 아니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지 못하였다.
4. <사회 계약론> 제 1권: 합법적 지배, 희석된 정의, 대중주권
+ 합법적 지배(legitimate rule)
루소에 따르면 합법적 지배는 귀족주의와 같은 자연적 특권(natural title)부터는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지배자는 피지배자들의 동의에 의하여 권력을 행사해야한다. 재미있게도, 루소는 유일한 자연적 사회 집단인 가족조차도 자연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내의 사회 계약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를테면, 당신은 성장하고 나서야 가족이 사회 계약이었음을 알게된다. 자식들 중에는 부모와의 관계가 매우 불편해서 계약을 파기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 십대가 되면 가족적인 자연권을 계약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십대들은 자기-보존을 위해서 부모의 보호가 필요하다. 그런데 그런 보호가 더 이상 필요없게되면 가족의 자연적 구속은 해제된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로부터 시민 사회로 이전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시민사회에서 본능적으로 행동하기 보다는 정의를 추구하고 또, 자연 상태에서와는 다르게 도덕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시민 사회에서 자연상태에서 누렸던 혜택들을 빼앗길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는 엄청난 헤택을 가져다준다. 인간은 시민 사회(civil society)에서 자신의 능력을 연마하고 발전시키면서 사고를 확장시키고 감성을 풍부하게 살찌울 수 있다. 이것이 루소의 시민사회에 대한 포인트이다. 이것은 엄청난 진보이다.
+ 희석된 정의(diluted justice)
루소에 따르면 인간들 각자의 정의가 인정되기 위해선 개인의 정의가 희석되지 않으면 안된다. 희석이란 개인적 정의가 일반 의지에 의하여 전복되는 것을 말한다. 주권자는 어떤 보증자도 필요없이 개인의 의지를 제한한다. 분명, 이것은 개인의 고통을 덜기위한 조치이다. 개인이 제약을 받는 이유는 일반의지가 우선해야하기 때문이다. 또 사회의 공동선은 개인의 이기주의를 엎어야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영국 자유주의자들의 주장과는 구별된다.
+ 대중 주권(popular sovereignty)
루소는 대중 주권을 주장하였다. 대중 주권은 루소의 이론 중에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루소에 따르면 대중 주권은 협약convention)에 의하여 주어지고 협약은 다수의 지배에 따르는 것이다. 다수의 지배는 대중으로 구성된 의회에서 가능하다. 따라서 의회가 필요하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대중 주권은 매우 급진적이고 논란이 되었던 아이디어이다. 대중 주권 아이디어는 모든 자원을 공동 재산으로 협약한 공산주의 사상과 거의 같다. 이것은 매우 문제가 될 수 있다. 재미있게도, 루소는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평등하지 않다고 하였다. 이것은 홉스와는 매우 다른 견해이다. 루소는 인간은 협약에 의하여 서로 평등해진다고 주장하였다. 이 협약에 의한 평등이 정말로 전체주의를 향한 문을열었던 것인지 논란이 되고있다. 루소는 소유에 관한 최상의 형태로서 공공소유, 자원의 국가소유를 주장하였다. 이것은 매우 큰 문제로서, 맑시즘과 공산주의사상의 문을 열었다.
5. <사회 계약론> 제 2권: 일반의지(General Will), 법과 입법자
루소에 따르면 개인은 사적인 관심을 표현하고 주권자는 일반의지와 공적 관심을 표현한다. 그럼, 일반의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루소에 따르면 일반의지는 확실히 개개인을 초월한 곳에서 나오고, 연방Commonwealth은 일반의지를 표상한다. 일반의지는 각각의 개인의 의지가 아니라 모든 개인이 관심을 갖고 따르는 의지이다. 방법론적 집단주의자는 일반의지를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루소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법에 복종할 때만 자유롭다. 즉, 자유는 인간 스스로-부여한 법(self-imposed law)이다. 헤겔에 따르면 개인은 필연을 인식할 때 자유로우므로 개인은 법에 따라가야 한다. 그럼, 일반의지가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 누가 판단하는가. 분명, 공공애(amour-propre)자는 자기애(amour-soi)자와 구별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루소에 따르면 사회 계약은 보편적 동의에 따라서 체결해야하고 또 사회 계약은 대중 주권의 행사로서 체결한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물론 로크도 이렇게 주장하였지만, 루소는 민주주의적 대중주권과 보편적 참정권을 매우 발전시키면서 전개하였다. 루소는 여성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로크가 손대지 못했던 보편적 참정권을 짚었다.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는 아주재미있으면서도 혼란스럽지만 진정성이 있는 아이디어이다. 일반의지가 잘 먹히는 예로는 방법론적 집단주의가 있다. 루소는 홉스나 로크, 존 스튜어트 밀, 스미스와는 다르게, 사회와 사회인의 행동에는 모든 개인의 의지를 총합한 이상의 일반의지가 깃들어 있다고 하였다. 일반의지 아이디어는 많은 학자들에 의해 사회이론으로서 발전되었다. 특히 에밀 뒤르꼠이 일반의지를 좋아하였다. 일반의지는 개개인의 이익의 총합을 초월하는 보편선으로서 명백한 진리이다. 건강보험을 생각해보라. 정부는 의료개혁과 관련하여 모든 개인의 건강 보험을 의무화할 수 있다. 따라서 개인은 건강보험의 가입 여부에 대한 어떤 책임도 지지않는다. 일반의지는 개인에게 결정권을 주지않는다. 어떤 대학은 입학조건으로서 필수 예방접종을 요구할 수 있다. 따라서 예방접종없이는 대학 입학이 불가능할 것이다.그 에방접종은 개인에게 결정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재미있게도,이 대학의 결정은 모든 사람이 합리적이거나 어리석지 않다는 것을 가정한 일반의지가 아니다. 따라서 그 결정은 시정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일반의지는 상식적이고 집단선(collective good)이다. 일반의지, 즉 공공선은 강요될 수 있다. 이것이 일반의지의 큰 문제점이다. 그럼, 일반의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일반의지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루소에 따르면 지혜로운 자는 사회의 선과 필요에 관련하여 모든 사람의 일반의지를 알아낼 수 있다. 또 대중이 선출한 의회는 그 일반의지를 법률화하고 통과시킨다. 루소는 그들을 입법자lawgiver라고 하였다. 사실, 이 아이디어는 혼란스럽다. 루소는 입법자로서 정부의 아이디어가 훨씬 낫다고 하였다. 결국 이 아이디어는 전체주의의 길을 열었다. 사실, 루소는 정부가 아니라 우리, 즉 지혜로운 철학자와 지성인들이 대중의 이익을 훨씬 잘 안다고 주장하였다. 재미있게도 그 지성인 입법자는 개인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당신에게 이익이 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당신의 이익에 관해서는 우리 철학자가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혼란스러운 아이디어이다. 도대체 어떻게 지성인이나 철학자가 당신의 이익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루소의 일반의지는 칼 맑스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그리고 마오쩌뚱에게 대단한 것이었다. 그들은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를 사랑하였다. 중국 공산당과 러시아 공산당의 아이디어는 중국 대중이나 러시아 대중들의 이익을 표상하는 일반의지가 되었다. 즉 개인보다는 중앙의 계획자가 대중의 이익을 훨씬 잘 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일반의지는 매우 문제가 될 수 있다. 사회의 일반의지와 공공선에 해박한 자가 정말로 있는가. 경제학 전공한 자는 이것을 부정할 것이다.
6. <에밀Emile>의 주요내용
장자크 루소는 소년 에밀의 가정교사였다. 루소는 에밀이 어릴적부터 성장하여 소피Sophie와 혼인할 때까지 그를 교육하였다. 기가 막히게도 루소는 자신의 자식들은 모두 고아원에 버렸다. 그 자식들은 모두 어린 나이에 고아원에서 죽었다. 루소는 <에밀>에서 도시화된 야만인을 양육해야한다고 하였다. 자연 상태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유아기, 소아기, 사춘기를 거치면서 자연상태에서 사회로 이전해간다. 원자화된 개인은 청년이 되면서 사회화되지 않으면 안된다. 루소에 따르면 원자화된 개인이 자연 상태로부터 사회로 이전해가는 것은 자기애amour de soi에서 공공애amour propre로 이동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복잡한 아이디어이다. Propre는 영어의 proper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 또한 배려하는 myself를 뜻한다. 반면에 Soi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myself를 뜻한다. 프로이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propre는 ego와 alter를 모두 고려한 myself이다. 루소는 공공애amour propre없이는 시민이 될 수 없다면서 시민과 브르조와의 개념을 명백하게 구별하였다. 루소는 한편으로는 급진적 민주주의자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좌파 급진주의자였다. 루소는 '부르조아' 라는 용어를 경멸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루소는 부르조아를 시민과 확실하게 구분하였다. 부르조아는 공동체에 헌신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고 돈을 모으는 이기적인 사업가를 말한다. 부르조아는 일반의지에 복종하지않고 이기적이면서 속좁게 경제적 이익만을 밝힌다. 이것이 루소가 말하는 부르조아이다. 이런 면에서 루소는 칼 맑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칼 맑스 또한 인간적으로 부족했다는 루소를 사랑하였다. <에밀>의 주요내용은 자연은 선하고 사회는 부패하다는 데 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면서 강력한 명제이다. 이것은 맑스뿐만 아니라 뒤르껨에게도 많은 영감을 주었다. 또, 루소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죽음에 대한 공포는 사제들, 철학자들, 그리고 의사들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루소가 <에밀>에서 밝히고자했던 목표는 첫째, 부정 교육(negative education)이었다. 둘째, 야만인들을 사회적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즉, 자기애amour de soi에서 공공애amour propre적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충격적이게도, 루소는 인간을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연민(pity)이라고 하였다. 그럼, 인간은 부르조아가 됨이없이도 시민이 될 수 있는가. 루소에 따르면 도시(civilization)는 인간의 섹스(sex)가 상상력으로 승화될 때 비로소 창조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루소는 인간을 사회화하는 데는 두가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것은 연민pity과 사랑love이다. 섹스Sex는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섹스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성적인 충동drive이 실제로 현실화된 에로틱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루소는 사랑은 세 단계를 거치면서 발전한다고 하였다. 멋지게도 첫 단게, 당신은 사랑에 빠졌지만 누구와의 사랑인지 아직 모른다. 당신은 사랑할 준비가 되어서, 대상을 찾고있지만 아직 확실하게 구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이것은 확실히 사춘기에 처음으로 일어날 수 있다. 보통, 열세살, 네살 즈음에 로맨틱한 것을 불현듯 알게 되는데, 그 로맨틱한 감정의 대상을 구하지 못한 경우이다. 실제로, 이것은 사랑에 빠지면 항상 일어나는 현상이다. 노인들 또한 예외가 아닌데, 사랑의 감정은 인생의 말년에도 일어난다. 종종, 노인들은 인생에서 유일한 사랑이란 거의 없다고들 말한다. 루소에 따르면 사랑은 차이성의 바턍 위에서 서로 결합하는 것이다. 뒤르켐에 따르면 사람들을 결합시키는 것은 각자의 차이성 때문이다. 분명, 이것은 루소와 뒤르켐의 유사한 면이다. 루소는 <에밀>에서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는 것을 충격적인 방법으로 보여주었다. 루소는 남성 쇼비니스트로 알져져 있는데, 앞으로 더 복잡한 문제가 남아있다.
7. 자연은 선하다(Nature is good); 사회는 타락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에 선하지만 사회에서 타락한다. 홉스와 뒤르켐은 이것과 정반대로 주장하였다. 그럼, 사회에 더 많은 통제를 가해야하는가. 이것은 루소의 근본적인 아이디어에 반한다. 루소에 따르면 원래, 어린이는 악(vice)과 실수를 모르지만 사회를 통하여 악과 실수를 알게된다. 루소는 신학적인 논박을 하면서, 모든 것은 창조주의 손에 맡겨졌을 때 선하지만 인간에게 맡겨졌을 때 타락하고, 인간은 모든 것을 뒤엎어놓고 더 이상 자연이 만든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종종 인간의 자연적 본능을 지양하라는 말을 듣게된다. 루소에 따르면 인간은 교련된 말처럼 훈련(trained)되어야 한다. 트레이닝Training은 단순히 요령을 터득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종종 학생들은 학교에서 배운것을 잘 훈련training하여 시험준비를 하지만 시험이 끝난 후에는 다 잊어버린다. 반면에 교육Education은 자기 스스로 사유할 수 있도록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루소는 너무 많은 훈련을 가르치는 것은 문제라고 하였다. 훈련을 마치 프랑스의 정원처럼 아릅다운 풍경을 위해서 나무의 가지들를 마구 잘라 없앤다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비자연적이다. 이어서 루소는 죽음에 대한 공포는 자연적이지 않다고 하면서 인간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였다. 루소는 이런 면에서 홉스와 동조하였는데 사실, 우리는 죽음의 공포에 휘둘리지만 이것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동물들은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개가 죽을 때는 개의 눈에 공포가 깃들어 있다고 한다. 루소의 관찰이 정확했는지, 어땠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루소의 죽음에 대한 주장은 진정성이 있다. 물소들buffaloes은 죽을 때가 다가오면 스스로 멀리나가서 드러누운 후에 평화롭게 죽음을 기다린다고 한다. 멋지게도, 루소는 다름아닌 철학자들, 의사들, 그리고 사제들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우리 안에 심어놓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대단한 아이디어이다. 루소에 따르면 우리는 지식을 독점하는 자들에 의하여 지배받고 있는데 그 지식의 힘이란 다름아니라 우리 안에 주입된 죽음의 공포이다. 의사들은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치료하겠소."라고 한다. 사제들은 말하기를 "당신은 지옥에서 타 죽을 것이오."라고 한다. 그러나 루소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어떻게 고통받고 평화롭게 죽을 것인지 선험적으로자연스럽게 알고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죽음에 대한 공포에 젖어있어서 걱정속에서 살아간다. 바로 이것 때문에 부정교육이 필요하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부정교육은 매우 충격적인 아이디어이다. 부정교육 이론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매우 인기있었다. 왜냐하면 이반 일리히의 저작들은 많은 사람들을 강하게 몰아세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반-문화 교육이론(counter-cultural educational theory)은 이반 일리히 레닌에 대한 부정교육을 강조한다. 사회가 주입한 여러 어리석은 아이디어들은 마음에서 제거될 필요가 있다. 그럼, 죽음에 대한 부정교육은 무엇인가 루소에 따르면 우리는 먼저 죽음에 대한 공포를 배울 것이 아니라 필연을 받아들여야 하고 사회의 타락을 막아야 한다. 루소는 열정적인 교육자들은 언제나 아이들을 가르치기보다 아이들이 진실로 배우고 싶어하는 것을 묻고 답해줘야한다고 하였다. 교육은 자기의 마음을 사용하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지 독단에 물들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제일의 교육은 순수한 부정이어야 한다. 교육은 덕과 진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악으로부터 자기가슴를 지키고 실수에 대하여 자기마음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육에 관한 루소의 포인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교육의 목표는 훈련이 아니고 진리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교육은 아이들이 두뇌를 충분히 작동시킬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그때 아이들은 실수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고 자신의 실수를 발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된다. 교육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아이들의 질문에 대하여는 어떠한 옳은 답도 있을 수 없다. 모든 중요한 질문들은 서로 유력한 답들이 충돌한다. 루소에 따르면 교육의 목표는 어떤 증거에 대하여 찬성과 반대 또는 장점과 단점을 생각케하고 실수를 피하기위해서는 어떤 명제를 이용하여 판단할 것인지 돕는 것이다. 이것이 루소의 교육에 관한 모든 것이다. 다음은 명령에 관한 것이다. 루소는 명령은 있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루소는 복종과 명령이란 단어는 사전적 의미일 뿐이라고 하였다. 심지어 의무와 명령이란 단어 또한 그렇다고 하였다. 이 또한 매우 도발적인 아이디어이다. 루소에 따르면 교육을 통하여 마땅히 생성되어야 할 것은 무엇보다 힘(strength)이다. 교육은 필연(necessity)을 강조하고 또 교육은 불능(impotence)을 강조한다.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인간 한계 너머의 것들을 파악하고자 한다. 그러나 교육은 현실적인 제약들을 강조한다. 이것이 진정으로 교육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말하기를 "이것이 당신이 해야할 의무이다.' 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접근법이다. 교육자는 사람들 안에 있는 죄성를 이용하여 사람들이 죄책감(guilt feelings)을 오용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그럼, 죄책감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것은 나중에 니체를 다루면서 검토하게 될 것이다. 루소는 죄를 만들어낼 궁리를 하지말고 대신에 무엇이 필연인가를 인식하라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한계를 인정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볼 수 있어야 한다. 교육자는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으면서도 "그렇게까지는 하지말았으면 좋겠다." 등의 경고도 잊지 말아야한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8. 야만인을 사회적 존재로 탈바꿈 시키기
루소에 따르면 야만인을 사회적 존재로 탈바꿈시키는 것은 자기애amour de soi적 인간을 공공애amour de propre적 인간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자기애를 자기-이익self-interest라고 부르면서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하였다. 어린이들은 자기애를 갖고 태어난다. 예를들어, 장난감을 어린아이에게서 떨어트려 놓으면 그 아이는 말하기를 "그건 내꺼야."라고 외친다. 그것을 보고 있던 다른 아이는 말하기를 "아니야, 그건 내꺼야."라고 외친다. 이것이 바로 아모르 드 수와(자기애)다. 프로이트의 언어로 하자면 '나는 엄마 젖이 먹고싶다. 이 젖은 나만 먹을 수 있다. 이 젖은 나꺼다.' 이것이 아모르 드 수와(자기애)이다. 반면에 우리는 타인들과 상호작용을 하면서 인간 관계를 넓혀가야 한다. 아모르 프로퍼(공공애)는 타인들 또한 아모르 드 수와(자기애)에 이끌리고 있고 어떻게하면 그들과 공존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사회성, 즉 아모르 프로퍼(공공얘)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아모르 프로퍼(공공애)에는 세가지 금언이 있다.
+ 공공애의 첫번째 금언
루소에 따르면 자신보다 더 행복한 자의 위치를 욕망하는 것은 원래 인간의 마음이 아니었다. 단 불쌍한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다. 이것은 아이러니하다. 이것은 편견ad hominem 에 비견할 만하다. 매우 솔직하게 말해서, 당신은 자신보다 훨씬 더 성공한 사람을 알게되었을 때 그를 사랑하기가 매우 힘든 것은 사실이다. 반면에 당신은 자신보다 덜 성공한 사람이 알게되었을 때 그를 불쌍히 여긴다. 당신은 갑자기 가슴이 뜨거워지고 책임감을 느끼면서 돕고자 할 것이다.
+ 공공애의 두번째 금언
루소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 자신 또한 예외일 수 없는 그런 환자들로부터 연민을 느낀다. 우리는 경험의 한계를 벗어난 불행들을 보게 될 때조차 연민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우리도똑같은 상황에 놓여질 수 있다고 생각할 때 그 불쌍한 자들에 대한 사랑을 시작한다.
+ 공공애의 세번째 금언
루소에 따르면 우리 연민의 정도는 타인의 불행의 양에 따라서가 아니라 불행한 타인에게 품을 수 있는 우리의 감정 상태에 따라서 측량된다. 이것은 훌륭한 아이디어이다.
루소는 동정과 연민에 관련하여 말을 이어가면서 인간은 두번 태어나는데, 첫번째는 존재하기 위해서이고 두번째는 생존, 즉 종의 번성을 위하여 태어난다고 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젊은이들은 센스sense를 알기도 전에 센시티브sensitive하다. 따라서 진정으로 태어났을 때 젊은이들은 인생(life)과 타인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또 개인은 자신의 강점이 아니라 약점에 의하여 사회화된다. 따라서 개인이 존엄한 인간성(humanity)에 열정과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것은 정말 공통의 불행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루소의 사회적 인간에 대한 포인트 이다. 이것은 정말 아이러니하면서 매우 깊은 아이디어이다. 분명, 이 주장은 명백한 진정성을 담고있으므로 찾아보기 바란다. 루소는 연민은 달콤하다고 하였다. 정말로, 타인에 대한 연민은 그렇게도 달콤하다. 당신은 타인에게 '정말 미안하다(I'm really sorry)' 라고 말할 때 당신의 가슴은 사랑으로 넘쳐흐른다. 루소는 시민과 부르조아에 관한 한 일화를 소개하였다. 스파르타의 페다레투스Pedaretus는 300인회(council of 300)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여 대표로 선출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페다레투스는 기쁨 속에서 기꺼이 집으로 돌아갔다. 왜냐하면 페다레투스는 스파르타 공동체에서 자신보다 더 가치있는 300인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루소는 바로 이 페다레투스가 진정한 시민이라고 강조한다. 예를들어, 당신은 B 마이너스의 학점을 갖고있다. 이제, 당신은 A 학점을 받은 다른 30명의 동료를 발견한다. 당신은 자신보다 훨씬 나은 30명의 동료를 보면서 행복감을 느끼면서 클라스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다. 당신이 정말 그렇다면, 당신은 루소가 말하는 시민이다. 당신은 공공애(아모르 프로퍼)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일화가 하나 더 있다. 한 스파르타 여인은 5명의 자녀를 군대에 보냈다. 그녀는 이제 전투에 나간 자식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한 군병이 떨면서 그녀 앞에 도착하였다. 그녀는 그에게 전황을 물었다. 그 군병은 말하기를 "당신의 다섯 자녀가 모두 전사하였습니다."라고 전하였다. 그러자 그 여인은 대노하면서 말하기를 "이 저질 노예야, 내가 언제 그것을 물었느냐. 우리는 승리하였다." 라고 하였다. 그 여인은 성전으로 달려가서 신들에게 감사를 표하였다. 이 여인이 바로 일반의지와 관련한 여성 시민의 전형이다. 루소에 따르면 사회질서 안에 있는 자가 자연상태의 감정을 좇아간다면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아직 모르는 상태이다. 그가 하는 일은 항상 자기자신과 모순된다. 그는 인간도 아니고 시민도 아니다. 그는 부르조아이고 무(nothing)이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9. 남자와 여자, 섹스와 사랑
루소에 따르면 도시(civilization)는 문화(culture)를 생성. 그 이유는 도시인의 섹스가 승화되고 육체적 욕망이 상상력으로 전환되기 때문이다. 이 루소의 아이디어는 프로이트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다. 루소는 사회는 두가지 메카니즘에 따라 형성된다고 하였다. 그 두가지 메카니즘이란 연민(동정)과 사랑이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아이디어로서 후일, 포스트 모더니즘을 예고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계몽(Enlightenment)은 세계를 탈신화(demythologized)하면서 도시를 냉정하고 합리적인 시장의 세계로 만들었고, 개인은 이 도시에서 경쟁적이면서 원자화되었다. 계몽이 생산한 것은 바로 현대 세계(modern world)이다. 따라서 세계는 더 이상 에로틱(unerotic)하거나 시적(unpoetic)일 수 없게되었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이 루소의 아이디어는 막스 베버의 유명한 탈마법(disenchantment)아이디어나 마르쿠제의 '에로스로부터 도시(civilization)로'의 아이디어에 영향을 주었다. 루소는 에로틱한 사랑erotic을 원래 상태로 복구하고자 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에로틱erotic은 섹스가 아니라 에로틱한 경험이다. 또 인간의 에로틱은 세 단계에 걸쳐서 발전한다. 첫째, 당신은 사랑에 빠졌다. 그러나 누구와 사랑에 빠졌는지 아직 모른다. 열서너 살 때를 생각해보라. 둘째, 당신은 사랑할 누군가를 찾기시작한다. 셋째, 당신은 그 사랑의 대상을 발견한다. 당신은 말하기를 "됐다. 그(녀)가 바로 내가 사랑에 빠졌던 연인이다." 라고 한다. <에밀>에서 에밀은 이런 식으로 소피를 찾았다. 루소에 따르면 에밀과 소피를 결합시킨 것은 다름아니 그들의 차이점이다. 그들은 상대의 차이점를 보면서 자신이 차이점을 보완해 나갔다. 뒤르켐도 결합인자와 관련하여 루소와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재미있게도, 루소는 사랑에 빠졌다면 서둘지 말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섹스가 아니라 에로스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사랑을 찾았으면 황급히 침대로 돌진할 것이 아니라 여행을 떠나라. 여행 중에 당신은 마음속에 있는 연인을 생각하면서 이상화(idealize)할 것이다. 그때 바로 당신은 에로틱한 경험을 하게되는 것이다. 그후에 그(녀)와사랑을 불태워도 늦지않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이것은 정말로 훌륭한 아이디어이다. 그럼, 루소는 성차별gender relation를 어떻게 보았을까. 루소의 견해는 문제점이 있다. 루소에 따르면 남성과 여성은 엄연히 다르므로 서로 다르게 가르쳐야 한다. 만약, 여성을 남성처럼 키우고자 한다면 남성들은 기쁘게 동의할 것이다. 많은 여성들은 남성을 닮고자 할 것이고 몇몇 여성들은 남성을 지배할 것이다. 그렇지만 진정한 지배자는 남성이 될 것이다. 이것이 루소의 성차별에 대한 포인트이다. 이것은 꽤나 섹시스트sexist적인 관찰일 수 있겠다. 루소에 따르면 교육의 임무는 남자의 자질을 여성에 양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자질을 여성의 자질과 구별하여 양성하면서 서로 다르게 키우는 것이다. 여성은 남성을 기쁘게 하기위하여 특별히 창조되었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의존하지만, 그 의존은 서로 평등하지 않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남성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여자에 의존한다. 그리고 여성은 자신의 욕망과 더불어 필요한 것들 때문에 남자에 의존한다. 남성은 여성없이도 쉽게 생존을 이어갈 수 있으나 여성은 남성없이는 생존이 힘들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이것은 어리석은 아이디어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노인들 중에는 여자없이 홀아비로 사는 것이 남자없이 사는 여자보다 얼마나 힘든것인지 고백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루소에 따르면 대부분의 어린 소녀들은 읽고 쓰는 것을 마지못해 배우지만 바느질은 항상 기쁘게 배운다. 바느질하기, 자수하기, 레이스놓기는 여자들로부터 왔다. 오늘날 탈-페미니즘 페미니스트post-feminist feminist들은 이렇게 남성과 여성은 달라야 한다면서 루소를 편들고 있다. 루소에 따르면 소피Sophie는 당연히 여자가 되어야하고 에밀Emile은 분명히 남성이다. 더 나아가서 섹스sex와 관련되지 않는한 여자는 남자이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어떤 면에서 루소는 성(gender) 아이디어를 공식화하고 있다. 루소는 성평등(gender equality)과 성적 차이(sexual difference)와 관련하여 여성들은 남성들처럼 너무 성적(sex-wise)으로 과시하는 데 문제가 있다고 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남자와 여자가 공통으로 인간 종(species)이지만 성(sex)으로서 구별된다. 따라서 성의 연합은 공통된 목적에 똑같이 기여하지만 그 방식은 다르다. 이것이 루소의 포인트이다. 루소가 성차별자가 아니었다고 보기는 힘들겠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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