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14일 토요일

2. 로크: 평등, 자유, 재산, 그리고 이의권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로크

로크는 정치철학과 사회철학의 창시자이다.존 로크John Locke는

1642년 존 로크John Lock는 서머셋Somerset에서 태어났다. 로크의 부친은 한때 의회군 Parliamentary Amy의 대장이었고 서머셋 법원의 관리였는데, 기사gentry 출신으로서 지주계층의 명예대표이기도 했다.

1652년 로크는 옥스포드 대학에 입학하였다. 로크는 철학과 의학을 수학하였다. 처음에 로크는 게으르고 운나쁘고 내세울만한 게 없었지만 나중에는 공부를 열심히 했던지 대학의 강사가 되었다.

1664년 로크는 대학의 관리로서 연설할 기회가 있었다. 이 연설에서, 젊은 로크는 자신의 견해많이 밝혔다. 젊은 시절, 로크는 전통주의자(traditionalist)였고 매우 권위주의적이었다. 당시 로크의 견해에 따르면 왕들은 선한 데 반하여 신민들은 짐승이었다. 따라서 로크는 당시 홉스주의자였다. 사실, 로크는 자신의 저작인 <통치론 Two Treatise>에서 홉스를 다루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홉스의 영향력이 영국 내에서 지대하였으므로 따로 홉스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1649년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의회가 군주제를 폐지하자 의회 의원이었던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의 호국경(lord protector of England)이 되었다. 크롬웰은 인기가 있었지만 군대와 의회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여 정국은 혼란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러한 혼란한 상황은 홉스가 겪었던 1630년대와 40년대에 다름 없었다. 1658년 올리버 크롬웰이 죽자 그의 아들은 호국경을 승계하지 못하였고 1660년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왕이 되어서 군주제가 복고되었다. 로크 또한 홉스 못지않게 혼란한 시절을 겪었던 것이다. 재미있게도, 미국 뉴 헤븐의 웨일리 스트리트Whalley street와 고퍼 애베뉴Goffe avenue는 당시의 상황과 관련되어있다. 내란 당시 웨일리Edward Whalley와 고퍼William Goffe는 찰스 1세의 재판을 담당한 판사들이었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자 그들은 국왕살해의 명목으로 기소되고 말았다. 1660년 웨일리와 고퍼는 곧 영국을 탈출하여 보스톤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보스턴에서 안정을 찾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보스턴은 왕가의 영향력이 강하였기 때문이다. 1661년 웨일리와 고퍼는 뉴헤븐으로 옮겨갔댜. 그들은 거기서 피난민촌을 건설하였는데, 첫번때 세운 것이 웨스트 록West Rock의 저지스 코브Judges Cove였고, 그 다음이 밀포드Milford의 미카 톰킨스Micah Tompkins였다.

1666년 7월 로크는 애쉴리Anthony Ashely Cooper 경을 만나면서 인생의 전환기를 맞게 되었다. 애쉴리는 상류 귀족이었지만 1644년 반왕당파로서 찰스 1세에 대립했던 의회파 세력이었다. 애쉴리 경은 1653년과 54년 그리고 59년의 공화국 시절에는 국가참사회Council of State의 의원이었음에도 1660년에는 왕정복고를 지지하면서 셰프츠베리Shaftsbury 백작이 되었다. 애쉴리는 1673년까지 수상(Lord of Chancellor)직을 포함하여 여러 직을 수행하였다. 애쉴리는 자신의 간질환을 치료하기 귀하여 1660년 7월에 옥스포드를 방문하게 되면서 로크를 만나게 되었다. 로크는 그의 주치의가 되었고 곧 친구가 되었다.

1667년 로크는 런던 스트랜드Strand, 엑스터 하우스Exeter House의 애쉴리의 거처로 주거를 옮겨갔다. 로크는 병치료을 위해 애쉴리의 복부에 튜브를 장치하는 외과수술을 시행하였다. 외과수술이 성공했던지 애쉴리는 많은 회복을 하였다. 로크는 애쉴리의 신임을 받게 되면서 그로부터 정치수업을 받게 되었다. 1667년 로크는 <관용론Essay on Toleration>을 발표하면서 홉스와 단절하였다. 로크는 <관용론>에서 이의권(Right of Dissent)을 옹호하였다. 홉스에 따르면 악한 주권자가 권력을 불성실하게 실행할 경우, 예외적으로 시민들은 선한 새 주권자를 향하여 충성심을 이양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로크는 그것을 뛰어넘어서 이의권Right of Dissent을 개인의 기본적 권리로서 인정하였다.

1668년 로크는 왕립 학회Royal Society의 의원으로 뽑혔다. 왕립 학회Royal Society는 미국의 미국 과학원American Academy of Science과 비슷한 곳으로서 들어가기가 매우 힘들다. 로크는 1679년  <통치론 2부Second Treatise>를 집필하면서 '배척Exclusion' 아이디어를 현실화 하였다. 한편, 당시 찰스 2세는 자식들이 있었지만 모두 혼외정사에 의한 것이었으므로 왕위를 승계할 정당한 후사가 없었다. 따라서 찰스 2세의 동생인 제임스가 왕위를 승계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제임스가 로만 캐돌릭이었다. 홉스의 시대에도 그랬듯이 이것은 큰 문제였다. 셰프츠베리 수상과 의회는 로만 캐톨릭이 복고되어서 영향력이 커지게 되면 자신과 의회의 역할이 줄어들 것에 불안하였다.

1673년 의회는 심사법Test Act을 준비하고 있었다. 심사법은 공직자가 영국국교회 신자인지 아니면 로만캐돌릭 신자인지를 심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로만캐돌릭 공직자인 경우, 추방될 수 있었다. 따라서 심사법은 엄연한 차별법이었다. 그러나 당시 영국의 기득권층의 입장에서 볼 때, 심사법은 바티칸과 교황의 세력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셰프츠베리수상은 로만캐돌릭들을 공직에서 추방하는 심사법Test Act을 지지하였다. 곧 셰프츠베리는 수상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몇 년 후 의회의원들Commons은 배척법안Exclusion Bill을 통과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왕위승계자인 제임스 스튜어트를 거부하고 찰스 2세의 부당한 자식 중에 한명인 몬모스Monmouth공작이자 프로테스탄트였던 같은 이름의 제임스를 왕위승계자로서 지지해버렸다. 그러자 찰스 2세는 의회를 해산해 버렸다. 셰프츠베리는 곧 체포되었고 런던탑(Tower of London)에 갇혔다. 나중에 셰프츠베리는 런던 탑에서 풀려나와서 네델란드로 망명하였다.

1683년 휘그(Whigs)당원 중의 몇몇은 찰스 2세에 대한 역모죄(Rye House Plot)로 기소되었다. 그 중 일부는 처형되었다. 당시 로크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였는지 암스테르담으로 도망가버렸다.

1685년 찰스 2세가 죽자 그의 동생인 제임스 스튜어트가 제임스 2세로서 즉위하였다. 제임스 2세와 의회와의 갈등은 깊어졌고 토리당조차 왕의 종교적 아젠다를 외면하였지만 1687년 '신앙 자유령Declaration of Indulgence'이 선포되었다. 신앙 자유령이 시행되자 영국내 로만캐돌릭을 차별하는 모든 형법의 실행이 중단되었다. 이제 토리당과 휘그당은 연합하여 제임스 2세에 대항하여 군주정을 전복해버렸다. 의회는 찰스 1세의 손자인 윌리암William of Orange을 네델린드에서 초청하여 영국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제 영국은 무혈 혁명을 통하여 윌리암 3세와 그의 부인 매리Mary가 공동통치하는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1690년 로크는 이제 불안감을 씻어버리고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로크의 <통치론 2부The Second Treatise>는 단순히 '배척Exclusion' 투쟁이 아니라 오렌지가로의 변화Change, 즉 절대군주국에서 입현군주국을 향한 혁명의 아이디어를 반영했다는 시각이 있다. 이 <통치론 제 2부>는 1690년에 익명으로 발간되었다.

로크는 1704년에 타계하였다.

2. <통치론 제 1논고>

로크의 통치론 제 1논고와 제2 논고의 저작시기에 관하여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로크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인 피터 라슬렛Peter Laslett은 제 2논고가 먼저 쓰여졌고 '배쳑법안Exclusion Bill'의 아이디어를 정당화하기 위해 쓰여졌다면서 그 시기는 1679년이라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리차드 애쉬크라프트Richard Ashcraft는 제2 논고는 1683년에 쓰여졌다면서 로크는 홉스의 이론과 결별하면서 입헌군주주의와 주권 이론을 최초로 형식화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제 1논고는 1680년에 쓰여졌고 1689년에 익명으로 발행되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사실, 제 1논고는 제 2논고에 비하여 비중이 낮다. 왜냐하면 학자들은 제 2논고의 내용을 훨씬 많이 인용하기 때문이다. 로크는 1680년에 로버트 필머Robert Pilmer가 발간한 <패트리아카Patriacha>를 반박하기위하여 제 1논고를 썼다. 필머는 절대군주주의자로서 셰프츠베리와 배척주의자Exclusionist에 대항하며서 군주정을 옹호하였다. 필머는 인간의 불평등성을 인정하면서 신은 어떤 인간은 다른 인간들 보다 우위에 놓았는데, 남자는 여자보다 우위에 있고, 연장자는 청년보다 우위에 있고, 왕은 최고로 우위에 있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권력의 불평등은 신에게서 유래한다고 주장하였다. 더 나아가, 신은 아담을 상속자로하여 이 지구의 땅을 아담에게 주었고 그의 후손들은 땅의 분깃을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왕들의 계보는 아담에게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필머에 따르면 신은 부계권과 땅을 아담에게 수여하였고 왕의 절대권력은 이런식으로 당당하게 왕의 후손에게 상속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로크는 필머와 여러 단게의 논쟁을 하였다. 로크는 필머가 주장한 아담이 신으로부터 땅을 상속받은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논박하였다. 로크에 따르면 신으로부터 땅을 상속받은자는 아담이 아니라 인류였다. 로크는 한 인간이 신으로부터 땅과 권위를 상속받았다 할지라도 어떻게 왕이 그 후손임을 입증할 수 있으며 또 정당화 될 수 있겠는가라며 반박하였다  또 로크는 이런식으로 찰스 2세의 왕위가 정당화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로크에 따르면 이런 식의 정당화는 바보같은 짓이다. 재미있게도, 그 조상이 주권자가 아니고 바보라면 어떻게 되는가. 그렇다면 이제 사람들은 정당한 주권자를 찾아나서야 할 판이다. 당시 이러한 로크의 논박은 매우 용감한 주장이었다.

3. <통치론 제 2논고>의 주요내용

홉스와 마찬가지로 로크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자유롭다는 데에서 출발하였지만 결과는 홉스와 많이 달랐다. 로크와 홉스는 전쟁 상태를 피하기위해서 우월한 주권자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서로 일치하였다. 하지만, 로크는 재산과 관련하여 놀랄만한 이론을 전개하였다. 로크에 따르면 우월한 자가 아니라 다수의 지배(rule of majority)가 주권자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로크는 무엇이 다수의 지배인지에 관하여는 설명이 매우 부족하였다. 어쨌든 다수의 지배라는 아이디어는 존 로크에 의하여 처음으로 형식화되었다. 로크는 사람들은 오직 동의를 통해서만 권위체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하였다. 로크의 이론은 홉스가 손대지 못했던 권력 분립의 이론과 견제와 균형의 이론을 꽃피우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다.

4. 모든 사람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났다.

로크는 세가지 정치 권력을 정의하였다. 첫째, 법을 제정할 권리. 둘째, 법을 집행할 권리. 셋쨰, 외적으로부터 연방(Commonwealth)을 방어할 권리가 그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정치의 세가지 기능이었다. 정치 권력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 권력의 기원을 이해하여야 한다. 왜 인간들은 자연상태의 자유와 평등을 버리고 시민사회를 구성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평등의 근거는 무엇일까. 이것이 로크의 포인트이다. 매우 반-홉스적이게도, 로크에 따르면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신의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 신학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타인의 기쁨을 위해서 피조된 신의 재산이 아니므로 원칙적으로 타인에 우월하는 어떤 인간도 있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이 피조물로서 서로애 대하여 자유롭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로크는 자유주의자이다. 반면에 홉스는 보수주의자였다. 여기서 우리는 철학의 운동을 보게되는데, 당시 아이디어는 보수주의에서 자유주의로 이전해가고 있었다. 잘 알다시피, 자유주의 아이디어는 특히 자유를 제일의 가치로서 강조한다. 로크에 따르면 자연상태에서 우리 인간은 이성의 지배를 받게된다. 우리는 모두 이성적으로 또 합리적인 능력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 인간은 서로에 대하여 해를 끼쳐서는 안된다는 이해력을 갖고 태어났다. 이것은 우리가 홉스에게서 보았던 것과는 매우 다른 논박이다. 홉스에 따르면 우리는 서로 같은 대상을 욕망하면서 교류하고 서로의 갈등과 투쟁을 통해서 도덕성(morality)을 배우게 된다. 홉스애 따르면 이 도덕성은 우리의 합리성rationality을 통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로크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선천적으로 이성적이고 선하고 합리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경험적으로 서로 존경하지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선천적으로 알고있다. 로크와 홉스는 전쟁의 위험과 관련해서 우리는 전쟁 상태를 피하기위하여 우리자신들을 지배자에게 종속시키면서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점에서 수렴한다. 그러나 로크는 확실히 홉스와는 다르게 자연 상태가 반드시 전쟁 상태는 아니라고 보았다. 로크는 자연 상태를 전쟁 상태와 구별해야한다고 보았다. 로크에 따르면 우리는 자연 상태에서 이성적이고 선하고 합리적이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전쟁상태가 돌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시민사회(civil society)를 구성하고 우리자신을 위하여 그 권위체를 받들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로크의 포인트이다.

5. 동의를 통한 우월자 세우기

우리는 우리자신을 타자의 지배에 종속시킨다. 로크에 따르면 이것은 동의에 의하지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주권자를 받드는 자들은 누구든지 동의의 과정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자신을 지배에 종속시켜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매우 중요하게도, 로크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는 그 사회의 모든 구성원에 공통되는 현존하는 규율(standing rules)로서 정립되어야 한다. 로크는 인간의 자유는 동의를 통해서 수립된 의회의 입법권를 통해서만 규율되고 제정되어야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입법권이란 주권자의 근거가 되는 것으로서 그 입법의 권리는 합법적이어야 한다. 이것은 홉스에게는 전혀 문제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크는 재미있는 반박을 하였다. 우리는 주권을 왕에게 수여하였다.그런데 권력의 근거이자 입법권의 주체인 주권자 왕이 어찌하여 제 법률을 통과시키기위하여 자신 이외의 법률적 근거가 필요한 것인가. 이것이 로크의 포인트이다. 어쨌든 로크는 홉스와는 다르게 자유의 개념을 확실하게 현존하는 규율로서 보장하고자 하였다. 로크에게 있어서, 자유는 단순한 생존 이상의 의미였다. 홉스는 자유의 개념을 혼란스럽게 정리하였지만 로크는 자유를 확실하게 이슈화 하였다.

6. 사유재산의 기원과 제한

왜 우리는 우리자신을 지배자에 복종시키고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지배자에게 보호를 요청하는가.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의 재산을 보호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지배자의 역할은 재산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러한 가정은 매우 현실적이면서 중요하다. 로크와 칼 맑스가 공통적으로 할만하 질문은 아마도 '정부의 역할은 무엇인가' 일 것이다. 정부의 역할은 사유재산의 신성함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럼, 재산(property)이란 무엇인가. 재산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이것은 중요한 문제로서 애덤 스미스와 칼 맑스를 예고한다. 로크는 어떤 재산 아이디어를 갖고있는가. 로크에 따르면 신은 인간에게 공통으로 이 세계를 주었다. 따라서 모든 지상의 과일은 사회의 각 구성원에 속해 있다. 재미있게도, 이것은 거의 사회주의 이념에 가까운 아이디어이다. 재미있게도,로크는 모든 사람은 자기자신을 재산으로서 소유한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당신이 스스로 노동을 통해서 생산한 것은 당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노동가치설(Labor theory of value)이다. 나중에 애덤 스미스와 칼 맑스는 로크의 노동가치설을 빌려간다. 로크에 따르면 노동은 노동자에게 속해 있다. 왜냐하면 노동은 노동자가 갖고있는 저마다의 재산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노동자는 육체를 갖고있고 노동은 의심할 여지없이 노동자의 재산(property)이다. 이것이 로크의 포인트이다. 존 로크는 말하기를 "비록 우물에 물이 넘칠지라도 바가지를 가진자만이 그 물을 길을 수 있다."고 하면서 이렇듯 노동은 확실히 가치를 창조한다고 하였다. 존 로크의 노동가치설은 애덤 스미스와 칼 맑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로크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이 경작하는 만큼 수확물을 소유할 수 있다. 신은 우리에게 충분히 향유할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하게 모든 것을 주었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몫 이상을 소유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몫이 아니라 타인에게 속해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급진적인 로크의 아이디어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오직 당신이 소유한 것 내에서만 그것을 즐길 수 있다. 따라서 당신이 축적해 놓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그것을 향유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로크는 이후 이 급진적인 이론을 후퇴시켰다. 로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토지였다. 로크에 따르면 토지는경작할 수 있는 사람이 소유해야한다. 그리고 한 인간이 토지를 경작하여 곡물을 심고, 재배하고, 수확물을 사용하는한 그 토지는 경작자의 재산이다. 분명, 이것은 토지의 사적 소유권에 관한 것이 아니라 토지의 경작권에 관한 것이었다. 로크의 논박 핵심은 풍족에 있었다. 로크는 우리가 욕망하고자 하는 것들을 풍족하게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하였다. 이것은 홉스와는 정반대의 아이디어였다. 홉스에 따르면 우리는 끊임없이 싸운다. 왜냐햐면 우리가 욕망하는 대상이 희소하기 때문인데, 그 대상을 원하는 사람이 많다면 타인들을 죽여서라도 그것을 쟁취하려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 홉스는 대상의 희소성을 가정하였고 로크는 대상의 풍족함을 내세워 가설을 세웠던 것이다. 당신은 이제 누구의 이론의 더 설득력이 있는지를 자문할 때가 되었다. 이제, 로크는 자신이 너무 많이 일탈하였다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로크는 신은 인간에게 공통으로 이 세계를 주었다고 말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신은 근면한 자들을 편들었다. 더 열심히 일하는 자는 그렇지 않은 자 보다 당연히 더 많은 것을 얻어갔다. 노동은 가치를 창조한다는 노동가치설에 따라서 로크는 인간 생활에 유용한 토지의 산출물은 거의 대부분 노동을 통한 산출물이라고 보았다. 또 화폐의 발명과 재산의 축적과 관련해서, 로크는 부(Wealth)는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도 축장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자유주의 이론이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개인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또 타인을 해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고 법을 위반하면 정부가 개입한다. 따라서 권력은 공동체, 즉 시민사회(civil society)로 이전되고 또 시민들이 그 권력을 공통으로 떠받들지 않는한 개인의 재산은 보전될 수 없다. 또한 그 권력은 현존하는 규율(standing rules)로서 보증되고,  성문화되고, 동의에 따라야하고, 영구한 법률로서 제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것이 로크의 포인트이다. 따라서 모든 개인들은 그 권력을 떠받드는한 재산과 관련한 예측가능한 미래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로크는 권력은 농노와 귀족을 위한 법을 각각 따로 두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일한 법을 제정하여야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시민사회에 존재하는 입법권과 집행권의 기원이다.

7. 시민사회civil society가 절대군주제와 다른점

절대군주제는 입헌군주제와 다르다. 로크에 따르면 개인은 절대군주제에서 타인의 폭력과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법에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은 왕과의 분쟁과 왕의 폭력 행사를 해결하기위하여 법에 호소할 수는 없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시민들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할 수 없다. 스탈린이 통치하던 러시아에서도 자기 이웃이 물건을 훔쳐가면 그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부가 개인의 물건을 훔쳐가면 개인은 소비에트 정부를 상대로 소송할 수 없었다. 민주주의 제도에서, 개인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할 수 있다. 물론, 미국에서도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재미있게도, 로크는 자기 주위의 고양이나 개가 자기를 해칠까 염려한 나머지 사자, 즉 왕 또는 지배자가 자기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간과할 정도로 인간은 바보같을 수 있다고 하였다. 로크는 이웃을 상대로 소송할 법을 구하기 보다는 지배자 또는  권력자로부터 자기를 보호해줄 법을 구하라고 말하였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시민사회는 있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미 언긊했다시피, 로크는 다수의 지배를 원칙적으로 옹호하였다. 다수의 지배을 위해서는 공동체 각 개인들의 동의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동의를 통하여야만 정당한 법을 창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 내에서 동의가 이루어졌을 때 그 동의는 모든 사람을 구속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오직 동의에 의해서만 자신을 지배자에게 종속시킬 수 있게 된다. 로크에 따르면 이 동의는 반드시 현시적일 필요는 없고 묵시적이어도 상관없다. 이를테면, 당신이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당시 미국헌법을 승인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당신은 미국헌법에 복종해야한다. 복종하지않아도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당신이 아프가니스탄으로 이주한다면 미국헌법을 따르지 않아도 될 것이다. 당신은 이슬람법을 따라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8. 권력 분립(Separation of Powers)

로크가 정치사에 남긴 공헌 중에 하나는 권력 분립이다.로크는 권력을 분리하여 세가지 종류로 나누었다. 그것은 입법권, 집행권 그리고 연방권이었다. 이것은 몽테스키외와 미국헌법의 입법권, 집행권, 사법권과 다르다. 로크의 연방권이란 외부의 적에 대한 방어권이었다. 로크는 입법권과 집행권은 분리되어야한다고 하였다. 동일한 사람 또는 지배자가 법률을 통과시키고 그 법률을 집행한다면 그것은 절대주의와 다름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입법권과 집행권은 분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연방권과 관련하여 로크는 그것은 반드시 집행권과 분리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미국에서는 누가 연방권을 갖고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미국 의회는 법적으로 전쟁을 선포할 수 있다. 알다시피, 미국은 여러차례 대규모 군사행동 (military actions)에 연루되었지만 전쟁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상,. 그것을 선포하고 실행한 것은 집행부(executive branch)였다. 이러한 군사행동은 때때로 하원(House)과 상원(Senate)의 의지에 반하여 동의없이 이루어졌다. 이것은 복잡한 문제이다. 어쨌든 로크가 주장한 집행권과 연방권이 동일하다는 것은 옳다고 보겠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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