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22일 일요일

5. 애덤 스미스: 보이지 않는 손

1. 역사적 맥락에서 본 애덤 스미스

1723년 애덤 스미스는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 외곽도시인 커칼디kirkcaldy에서 태어났다.

1737년 애덤 스미스는 당시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의 중심지였던 글라스고우 대학에 입학하였다.

1740년 애덤 스미스는 옥스포드의 발리볼 컬리지balliloll College에 입학하였다.

1751년 애덤 스미스는 글라스고우 대학의 논리학 교수가 되었다. 그 얼마 후에는 그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가 되었다. 재미 있게도, 자기이익Self-interest과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을 주장한 애덤 스미스의 첫 직업이 윤리학의 일파인 도덕철학 교수였다.

1759년 애덤 스미스는 윤리학과 관련된 <도덕감정 이론The Theory of Moral Sentiments> 을 발표하였다. 애덤 스미스는 진정한 도덕주의자로서 도덕철학자인가. 아니면, 합리적 선택이론 경제학자로서 도덕감정을 부정했는가. 이것은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었다.

1764년에서 67년까지 애덤 스미스는 유럽을 여행하면서 볼테르와 저명한 경제학자, 케네 등 여러 프랑스 계몽주의자들과 조우하였다. 이 때의 일로 애덤 스미스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사실, 프랑스 게몽주의는 애덤 스미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1776년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을 출간하였다. <도덕감정이론>과 <국부론>사이에는 분명한 긴장관계가 있다. 이 두 책이 정말 같은 저자에 의하여 쓰여졌는가, 또 이 두 책은 정말한 동일한 이론을 소개하고 있는가.가. 이 두 책은 서로 상반되면서 혼동스러운 면이 있다. 한편 커칼디에는 애덤 스미스와 <국부론>을 추모하는 기념관이 세워졌다.

1790년 애덤 스미스는 타계하였다.

아담 스미스는 두 얼굴을 가졌던 것 같다. 오늘날 경제학에서, 애덤 스미스는 두 가지를 대표하고 있다. 먼저, 애덤 스미스는 개인주의자이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개인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자기-규제(self-regulating)하는 시장에서 자기-이익self-interest을 추구한다. 즉 개인은 가능한 최소한의 역할을 하는 정부아래서 가능한 최대로 자기-이익을 좇아간다. 애덤 스미스는 개인의 자기-이익(self-interest)추구는 곧바로 공통선(common good)으로 이어진다고 하였다. 다음,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laissez fair 자본주의자이자,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이론가이다. 오늘날 애덤 스미스는 신고전주의 경제학자, 합리적 선택이론가, 그리고 방법론적 개인주의자의 선구자로서 숭배되고있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 감정이론>에서 인간의 행동을 유발하는 중요한 인자로서 공감Sympathy를 제안하였다. 애덤 스미스가 공감이외의 인간행동 유발인자로서 공공당국의 돕는 손helping hand을 염두해 두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개인과 더불어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을 서술하였다. <국부론>은 <도덕감정 이론>의 연장선상에 있고 이 둘 사이에는 어떤 모순도 없는가. 대다수의 학자들은 이 두 저작 사이의 모순을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 경제학자들은 <도덕감정 이론>에 거의 관심을 두지 않고 있고 오직 <국부론>만을 진정한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토대이고 영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수의 경제학자들과 대다수의 정치철학자들은 애덤 스미스가 진정으로 의도하고 예고했던 것은 신고전주의 경제학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2. <도덕 감정이론>의 주요내용

우리는 어떻게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악으로부터 선을 구별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위선을 구별해낼 수 있는가. 이것이 애덤 스미스의 포인트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로서 많은 현대사회 이론 학자들이 다루었던 문제이다. 니체는 선과 악의 문제를 <도덕의 계보학The Genealogy of Morals>에서 다루었다. 개인의 선과 악에 대한 개념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것이 애덤 스미스의 포인트이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개인은 각자 내부인inner person을 가지고 있다. 이 내부인은 자기와 타인을 판단하는 공정한 심사자이다. 이를테면, 당신 안에는 내부인이 존재한다. 따라서 당신은 기술적으로 두 사람이다. 당신의 내부인은 당신의 행동을 일일이 살피며서 때로는 '뭔가 잘못 되어가고 있다. 이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다.' 라고 경고할 수 있다. 종종 내부 심사자는 저지르지 말았어야할 어리석은 짓에 대하여 실수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병든 내부 심사자는 저지른 잘못에 대하여 과오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일이 잘못되어갈 때 항상 타인를 비난하려 든다면 그는 분명 도덕적 문제를 갖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잘못되었을 때 당신의 내부인이 잘못을 경고하지 않고 또, 당신은 그것을 타인의 잘못으로 전가하려 한다면 당신은 분명 도덕적, 윤리적으로 문제를 갖고있는 것이다. 이것이 애덤 스미스의 포인트이다.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개인은 정념(passion)에 이끌린다. 이것은 홉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스미스는 홉스와는 다르게 공포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또 애덤 스미스에 따르면 개인은 공감sympathy에 이끌린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점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공감이 <도덕감정 이론>과 <국부론>을 동일 선상에서 일치시키는 키 포인트라고 말한다. 그 학자들은 스미스가 공감 인간설sympathetic theory of humans을 주장했다고 강조한다. 개인의 행동을 유발하는 인자는 타인를 향한 공감과 타인으로부터 받는 공감이다. 개인은 타인과 상호작용하면서 다름아닌 공감을 얻으려고 한다. 개인은 타인에게 감동과 기쁨을 주고자 노력한다. 개인은 좋은 명성을 얻고 명예롭게 행동하고자 한다. 때문에 개인은 타인의 공감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타인의 인간적 조건과 상황을 이해하면서 공감하려고 한다. 또 당신은 자신의 가치에 댓하여 타인의 공감을 받고자한다. 따라서 개인이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공통선에 이른다는 애담 스미스의 명제는 비일관적인 것이 아니겠다. 왜냐하면 나의 개인적인 이익 추구로 인하여 타인들이 나를 존경하고 가치를 인정해 준다면 그 자기-이익이란 또한 타인을 위해서도 좋은 것good이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이런 자기-이익의 개념을 갖고 있다면, 하루의 일과를 마치면서 '"나는 좋은(good) 사람이야."라고 말할 수도 있다. 사실, 그러한 자기-이익의 개념에서 본다면 자기-이익과 공통선은 거의 다를 바가 없다. 이것이 애덤 스미스를 이해하는 포인트이다.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 이론>에서 처음으로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을 소개하였다. 그러나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그 개념이 아니다. 즉,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자유방임적 자유시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신의 손이었다. 신은 인간의 일에 개입한다. 개인은 열정과 공감사이에서 신의 의지에 따라 적당한 결정을 내린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손이란 개인이 순종하는 신의 의지였다. 사실,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전 작품을 통틀어서 딱 세번 '보이지 않는 손'을 인용하면서 세 번 다 다른 의미로 사용하였다.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보이지 않는 손은 <국부론>에 단 한번 나온다. 그것도 외국과의 국제무역에 관한 것이었지 정부의 역할과는 전혀 관게가 없었다. 오늘날 애덤 스미스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손의 개념을  자유교역과 국제자유무역에 한정한다. 따라서 용어를 발명할 때에는 주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일생에 단 한번 쓰더라도 그 화살이 발명자의 의도를 거스릴 수 있기 때문이다.

3. <국부론>의 주요내용: 자기이익과 공동선self-interest and common good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 제1부에서, 노동분업과 더불어 가격결정 요인으로서 노동, 자본,  지대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제 2부에서, 자본의 축장과 고용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스미스는 자본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제 3부에서, 수렵에서 유목, 농업, 상공업으로 이어지는 사회진화를 서술하였다. 스미스는 현대 경제를 상공업 사회로 보았을 것이다. 제 4부에서, 중상주의mercantilism에 대하여 비판하였다. 자유무역과 보이지 않는 손은 여기서 소개된다. 제 5부에서, 정부의 세입과 지출, 세금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스미스는 자기-이익과 공동선에 관련하여 개인은 타인들과 서로 상호작용하는 동안 타인들로부터 은혜를 기대하지말라고 말한다. 다른 누군가가 당신에게 자비를 베풀것이라는 기대를 말라는 것이다. 스미스는 자기이익을 위한 직업선택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사회를 위한 공통선이 된다고 하였다. 또 스미스는 개인들의 이익과 관련하여, 개인의 판단은 국가나 입법자law-giver 보다 훨씬 낫다고 하였다.

+ 자비를 기대하지 말라
사람들은 보통 인용하기를 "우리는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가나, 빵집 주인의 은헤가 아니라 바 그들의 자기-이익으로부터 식사를 준비할 수 있다." 이를테면, 나는 식당에 간다. 나는 요리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좋은 식사가 필요하므로 그 요리사가 나를 환영해 주길 기대하면서 나에게 좋은 식사를 제공해주길 바란다. 나는 웨이터에게 팁을 줄 수도 있다. 따라서 웨이터의 자기-이익은 좋은 식사와 서비스를 나에게 제공하는 데 있다. 경우에 따라서, 나는 팁은 커녕 다시는 그 식당을 방문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상대방의 자기-이익에 호소하는 것이지 상대방의 자비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스미스에 따르면 개인은 타인들의 인간성이나 자기애에 호소해야 하는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기-이익에 호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이슈이다. 이를테면, 나의 아내는 종종 나에게 말하기를 "그 사람은 당신한테 좋은 친구가 아니예요, 그 사람은 꼭 필요할 때만 당신을 부르잖아요." 라고 한다. 그러면 나는 스미시안으로서 답하기를 "나는  나와 상호작용하면서 이익을 보지않으려는 어떤 친구나 사람도 원하지 않소. 친구들은 자기-이익을 위하여 나와 관계를 맺는 것이오. 친구들이 항상 나한테 오면서  비용만 들고 이익이 없다면 그것은 나쁜 관계요." 라고 한다. 나는 아이들이 단지 사랑으로만 행동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이들에게 고통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이 자기-이익이 되는 아빠로서 봐주기를 원한다. 그것이 좋은 관게이다. 좋은 관계는 항상 자기-이익을 바탕으로 세워진다. 당신은 당신과의 관계에서 즐거움을 얻지 않으려는 애인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애인이 자기-이익을 위하여 행동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스미스의 포인트이다. 심지어 스미스는 타인들의 자비를 구하는 거지들조차도 타인들의 자기-이익 가대한다고 하였다. 사실, 거지들은 교묘하게 자비로울만한 사람들을 골라가면서 그들의 자기-이익에 호소한다.

+ 자기-이익을 위한 직업선택은 사회에 이익이 된다.
스미스는 우리는 직업을 선택할때 연봉을 많이 주는 큰 회사를 원한다고 하였다. 만약 경제학을 전공했다면 당신은 학사학위를 갖고 월스트리트Wall Street의 중개회사에 들어가서 연봉 십만달러를 벌고 싶을 것이다. 당신은 왜 십만달러을 벌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고용주는 당신이 대학에서 배운 많은 기술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자기-이익을 추구하면서 최대한 공통선에 이바지했으므로 최대의 연봉을 받는것은 사회 이익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은 그렇게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가능한 최대의 반대급부를 해주는 직장을 찾을 것이다. 당신은 자질과 기술과 중노동을 회사에 제공하면서 최대한 공통선에 이바지함으로써 가능한 최대의 연봉을 손에 쥐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스미스의 포인트이다.

+ 자기-이익에 관한 판단은 국가나 입법자보다 개인이 훨씬 낫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스미스는 개인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기-이익을 잘 안다고 하면서 개인은 국가나 법수여자(law giver)보다 자기-이익에 관한한 훨씬 나은 판단자라고 하였다. 스미스에 따르면 개인은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판단해야하고 그것을 정부에게 떠맡겨서는 안된다. 예를들어, 건강보험(healthcare insurance)개혁은 큰 논쟁이 되고있다. 건강보험 가입여부는 개인에게 맡겨두는 것이 옳은가. 개인의 생명은 개인 스스로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정부, 정치가,  의회 입법자에 의하여 보호되어야 하는가. 스미스는 명백히 개인의 자기 감정은 최선의 판단자라고 하였다. .

4. 노동가치설과 보이지 않는 손

스미스는 로크로부터 노동가치설을 빌려왔고 그것을 칼 맑스에게 전해주었다. 칼 맑스는 노동작치설을 급진화하였지만 그 아이디어를 확실히 아담 스미스로부터 빌려온 것이었다. 스미스는 분명 모든 가치의 척도는 노동이라고 말하였다. 스미스는 모든 생산물은 노동에 속한다고 하였다. 맑스는 여기까지 완전히 일치한다. 맑스는 "이윤과 지대는 어디서 오는가."라고 물으면서 스미스와 결별하였다. 맑스는 이윤과 지대는 착취로부터 나온다고 하면서 이익을 얻는자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자라고 말하였다. 반면에 스미스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스미스에 따르면 자본을 대여해준 자와 토지를 임대해준 자 또한 그 가치의 일부분인 이윤과 지대를 취할 자격이 있다고 하였다.

+ 노동은 가치의 척도이다.
노동은 가치의 척도라는 명제는 분명 모순일 수 있다. 모든 가치가 노동에서 창조되고 노동자에게 속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본가가 아윤을 취하고 지주가 지대를 취하는가. 이전에 존 로크도 이와 비슷한 논박을 했었다. 로크에 따르면 재화(commodity)의 가치는 재화를 소유한 자에게 속해있다. 또 그 재화가 사용이나 소비가 아니라 교환을 위한 것이라면 그 재화의 가치는 그 재화에 들어가는 노동의 양과 같다. 따라서 로크는 노동은 모든 재화의 교환가치를 가늠하는 진정한 척도라고 하였다. 분명, 재화는 사용가치를 가질 수 있고 대단히 유용하게 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신선한 공기를 생각해보라. 공기에는 노동이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사실, 신선한 공기를 위해서는 조금의 노동이 필요하긴 하다. 재미있게도, 스미스는 이것이 어떻게 노동에 의한 재화로서 교환될 수 있는가라고 논박하였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미스의 것이든 맑스의 것이든 노동가치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 모든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속한다.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주장이다. 존 로크에 따르면 각 개인의 재산은 자신의 노동이다. 따라서 모든 가치는 개인의 노동에 의하여 창조되므로 그 가치는 노동의 소유자에게 속한다. 재미있게도 스미스는 이것은 자본과 토지가 축적되고 사유화되기 이전의 사회에서 가능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자본의 축적과 토지의 사소유권화가 되기 이전인 고대사회에 해당한다. 놀랍게도, 자본 축적이 없고 토지 사소유권이 없는 경우에, 토지는 공통으로 소유되는 것이 옳다. 또 노동에 의하여 창조된 모든 생산물은 노동자에게 속하는 것도 옳다. 맑스는 드라마틱하게도 바로 이 스미스로부터 출발하였다..

+ 이윤과 지대는 어디서 오는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단지 착취하기만 하는가. 스미스는 그렇지 않다고 강조하였다. 스미스에 따르면 노동과 자본과 토지에는 소득분배가 있다. 이것이 스미스의 포인트이다. 스미스에 따르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자본을 선대한다. 자본가는 이 선대자본의 위험을 무릎쓰고 노동과정을 감독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는 선대자본으로부터 이윤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그렇지 않다면 자본가는 바보가 아닌 이상, 자본을 선대하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토지의 경우에도 똑같다. 지주는 생산 가능한 토지를 임대하고 그 토지에서 지대를 거둘 수 있어야 한다.

+ 보이지 않는 손
보이지 않는 손은 상이한 세가지 개념이 있다. 먼저, 스미스는 <도덕감정이론>에서 그것은 신이라고 말하였다. 신은 우리에게 공감감각(sense of sympathy)을 주었다. 우리는 타인을 존경함과 더불어 타인들로부터 존경을 받고자하는 우리의 열정과 자기억제 사이의 균형자 역할을 한다. 다음,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그것은 자유무역시장이라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스미스는 <천문학의 역사History of Astronomy>에서 보이지 않는 손은 쥬피터의 손이라고 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무지해서 번개같은 현상을 설명할 수 없었으므로 그것을 쥬피터의 의지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일종의 미신이었다. 보다시피,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에 대한 개념은 각각 달랐다. 그 어느 것도 오늘날 사용되는 보이지 않는 손과 일치하지 않는다.






<참고문헌>

원문번역,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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