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1일 화요일

10-2. 베버: 지배이론의 개념적 기초

1. 질문과 검토

+ 1. 맑스의 소외이론과 니체와 프로이트의 도시civilization이론에 관련하여 이 세 저자들 사이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는가.

맑스, 니체, 프로이트는 모두 현대성modernity과 더불어 현대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존재상실감sense of being lost과 통제control에 관심을 가졌다. 현대사회에서 우리들은 너무 많은 통제를 당하고 있다. 그 통제는 우리 밖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점접 증가해가고 있다. 현대성의 문제는 그 통제가 억압적coercive이라는데서 출발한다. 이것이 바로 맑스, 니체, 프로이트가 공유했던 공통된 감정이겠다. 20세기 초의 여러 문학작품들은 이러한 인간의 감정feeling을 표출하고있다. 프란츠 카프가와 알베르트 까뮈는 맑스, 니체, 프로이트가 느꼈던 감정을 공유했다. 맑스, 니체, 프로이트 사이에는 큰 차이점 또한 존재한다. 맑스는 헤겔로부터 떨어져 나오면서 헤겔의 소외이론을 구체화시켰지만 소외개념을 경제적 생산과정으로 환원하였다. 맑스는 사회해방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우리를 해방시킬 역사적 인자historic agent로서 프롤레타리앗을 제시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매우 달랐다.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론은 사회문제에 대한 옳은 답right solution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론은 단지 현대성과 더불어 도덕성, 즉 우리가 매력적이고 숭고하다고 생각하는 유대-그리스도인 도덕성을 보여줄 뿐이었다. 또 니체는 이상의 작업실workshop of ideals에서 제작되는 사회의 이상들과 원칙들이 억압과 고문을 통해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따라서 니체에게는 어떤 선한 사회도 있을 수 없었고 거기에 우리들을 데려다 줄 어떤 인자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사회 문제를 각자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한편 프로이트는 도시civilization는 인간 섹스충동sexual drives의 억압으로부터 창조된다고 하였다. 프로이트는 도시 비판가였지만 동시에 양면적인 자세dual attitude를 취하였다. 프로이트는 도시는 억압된 인간들로부터 창조되는 것이지만 또한 자신들을 승화sublimation시킨 인간들로부터도 창조된다고 보았다. 또 인간사회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들은 에술과 과학으로 승화되면서 창조된 것들이라고 말하였다. 프로이트는 나찌가 출현하는 1930년대에 반-도시anti-civilization성을 밝혀내면서 나찌에 반발하였고 도시문화를 거부하였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어떤 면에서 선한사회good society에 대한 비전vision을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프로이트는 니체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보겠다. 프로이트는 말하기를 "당신은 자신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 의미는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문제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로이트는 사회발전에 대한 맑스와 같은 역사적 인자를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 2. 두번째 질문 또한 쉽지 않다. 그것은 진리에 대한 실제적인 이론과 니체의 계보론학적 방법론에 관한 것이다. 맑스와 니체 사이에는 공통된 지점이 존재하는가.

맑스와 니체는 객관적인 추상적 진리objective abstract truth를 믿지 않았다. 맑스는 어떤 객관적인 추상적 진리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진리는 실습적인 것practical question 이었다. 진리는 사회에서 개인적인 실습을 통하여 성취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니체 또한 객관적인 진리를 믿지 않았다. 니체는 진리를 찾고자 하였다. 니체에 따르면 진리는 상이한 도덕 개념들을 서로의 장점과 단점을 비교하는 중에 발현되는 것이었다. 니체는 허무주의자nihilist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니체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허무주의란 니체에게는 매우 부적절한 용어이다. 니체는 진리가 정말로 없다고 말하지 않았고 진리란 상대적인relative 것이고 자신의 상황을 타인의 상황과 비교하는 중에 비판적인 이해를 통해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맑스와 니체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맑스가 말한 실습적인 진리practical truth란 무엇이었나. 이 진리는 인간활동human activity 이었다. 맑스는  생산시스템를 통한 물리적인 노동physical work을 변화시킴으로써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맑스는 혁명의 역사적 인자를 발견하였고 그것은 다름아닌 프롤레타리앗이라고 말하면서 프롤레타리앗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맑스와 같은 어떤 것도 없었다. 니체는 맑스가 강조한 역사적 인자와 같은 것이 없었고 선한사회에 대한 진리개념도 없었다.

+ 3.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와 <그룬트리세>의 차이점을 비교하라.

매우 간단하다. 맑스는 1848년 처음으로 생산양식에 대한 개념을 개발하였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생산양식mode of production의 본성을 주로 노동분업과 동일시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왜냐하면 노동분업division of labour은 결국 혁명을 몰고오게 될 계급간의 갈등적 관계를 포착해내는데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맑스는 그 노동분업 이론을 포기하였고 <독일 이데올로기>를 완성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맑스는 이 책 <독일 이데올로기>의 마지막 부분을 쓰면서 운좋게도 생산양식의 두가지 요소인 기술, 즉 생샨력과 더불어 생산관계아이디어를 발견해내었다. 생산양식은 <독일 이데올로기>의 대부분에서 노동분업으로서 다루어졌었다. 그러나 이제 맑스는 생산양식은 노동분업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였고 그것은 다름아닌 재산관계라고 못을 박았다. 재산관계란 재산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관계를 말한다. 또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매우 결정적인 역사관을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맑스는 모든 사회는 동일한 생산양식을 순서대로 통과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족제 생산양식, 노에제 생산양식, 봉건제 생산양식,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가리킨다. 반면에 <그룬트리세>에서는 두 가지  대변혁이 있었다. 먼저 맑스는 이제 중심과제를 재산관계property relations로 이동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절정기에 생산자는 생산수단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었다. 다음 맑스는 이전의 결정적인 역사관으로부터 단절하였고 다선적 역사발전관multi-linear development of history으로 전향하였다. 따라서 모든 사회가 노예제와 봉건제를 순서대로 통과한는 것은 아니게 되었으므로 준-공동사회quasi-communal society인 아시아적 사회는 직통으로 자본주의로 이행할 수 있게 되었다.

+ 4. 다음은 네번째 질문이다. 역사적 유물론자로서의 맑스와 프로이트를 비교하라.

유르겐 하버마스는 맑스가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이론의 출발점을 감각적인 인간활동sensuous human activity에서 찾은 것은 옳다고 하였다. 하버마스는 그 당시 여전히 유물론자였지만 그 후 전향하였고 아마도 이제 더 이상 유물론자가 아니다. 하버마스는 "유물론의 출발점은 아이디어로부터가 아니라 감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다. 그렇게 말하면서 하버마스는 맑스의 실수를 꼬집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맑스는 감각적인 인간 활동을 경제와 생산으로 환원시키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하버마스는 오히려 프로이트가 더 재미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프로이트는 상이한 감각적 인간활동을 주장하였는데 프로이트가 말하는 감각적 인간활동이란 사람들 상호간의 섹스관계를 말한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그 감각적 인간활동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프로이트는 인간의 의식을 이해하기 위하여 감각적 인간활동을 이론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말하자면 프로이트는 감각적 인간활동을 경제가 아닌 섹스로 환원하였던 것이다. 따러서 프로이트의 인간 감각활동이론은 역사에 대한 범-에로틱pan-erotic한 분석이 되고 말았다. 어쨌든 맑스와 프로이트는 인간의 아이디어와 인간의 의식의 본성과 관련하여 먼저 감각적 인간활동으로부터 자신들의 이론을 출발시켰던 것이다. 따라서 맑스와 프로이트는 물질적인 감각 경험material sensuous experience으로부터 아이디어를 뽑아냈다. 맑스와 프로이트는 유물론자들이었지만 자신들의 관심을 각각 경제와 섹스에 환원했던 것이다.

+ 5. 다음은 계급문제이다. 맑스의 계급이론을 설명하라.

잘 알다시피 맑스는 계급문제를 재산관계로서 분류하고 정리하였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계급을 두가지로 즉, 브르조와지와 프롤레타리앗으로 분류하였다. 그러면 이 계급문제는 아직도 사회이슈가 되고 있는가. 미국사회에서는 여전히 재산관계가 적대적인 계급갈등 문제를 초래하고 있는가.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중간계급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앞으로 중간계급middle class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다. 맑스는 중간계급은 부르조와도 프를레타리아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한편 대부분의 미국시민들은 자신들이 중간계급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우리들중 대부분은 중간계급인가.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맑스는 중간계급이 사라질 것이라고 보았지만 사실 현대사회에 비추어불때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오류임에 틀림없다. 맑스가 살아있다면 아마도 "아, 나는 이론을 망쳐놓았다. 나는 실수를 했다. 이제 거대한 중간계급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겠다."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하여정말로 맑스를 싫어할 이유는 없겠다. 잘 알다시피 중간계급은 존재한다. 맑스는 확실히 실수를 했다. 물론 당신은 과연 누가 중간계급이냐고 물을 수 있다. 우리는 정말로 모두 중간계급인가. 또 거대한 부르조와지 세력에 대하여 얘기하는 것이 합당sensible한 일인가. 현재 거대한 브루조와지 세력은 더 이상 없다. 지금 우리는 대중 자본주의people's capitalism 사회에 살고 있다.

+ 6. 노동가치설과 관련하여 애덤 스미스와 맑스를 비교하라..

잘 알다시피 애덤 스미스는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하여 창조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부의 분배distributing wealth 또는 소득 분배와 관련하여 노동, 자본, 토지로 분화하여 나아갔다. 반면에 맑스는 가치가 노동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은 모순이라고 말하였다. 맑스는 모든 가치가 노동에 의하여 창조된다면 모든 가치는 노동에 귀속되어야 마땅하다고 강조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가치는 노동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노동은 결국 착취문제와 관련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진보인가 아니면 오해인가. 이것은 분명 오해일 수 있다. 왜냐하면 애덤 스미스의 주장이 옳기 때문이다. 애덤 스미스는 분명 모든 가치는 노동에서 창조된다고 하였다. 애덤 스미스는 자본이 축적되어있지 않고 토지가 사소유화되어있지 않은 사회에서는 모든 가치가 노동에서 창조된다고 하였다. 이것은 분명 일관성이 있는 주장이다. 그러나 맑스를 두둔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사회에는 엄연히 착취가 존재하고 또 착취관계가 역사를 견인하고 이끌어 왔기 때문에 맑스가 더 설득력이 있다고 말한다.

+ 7. 일곱번째 질문은 지배와 생산양식에 관한 것이다. <프로테스탄트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나타난 베버는 관념론자였는가. 베버는 자본주의를 창조한 것은 칼빈주의라고 주장했다는데 그것이 사실인가. 정말 베버는 그렇게 주장했는가.

베버는 맑스에 대하여 매우 비판적이었다. 베버가 생각한 맑스는 그저 유물론적 분석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일 뿐이었다. 맑스는 인간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실존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반대가 절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베버는 맑스가 강조한 것과는 정반대로 주장했는가. 그리고 베버는 현재 우리의 실존, 즉 자본주의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 의식이라고 주장하였는가. 베버는 인간의 윤리 의식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를 결정한 아이디어라고 주장하였다. 베버는 재미있게도 선택적 친화elective affinity를 주장하였다. 선택적 친화란 바로 아이디어와 경제 사이에는 정말로 인과적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분석을 시도한 이론이다. 반면에 맑스는 현대의 사회이론가들과 많이 닮아있다. 왜냐하면 맑스는 인과적인 해명causal explanation을 시도하기 때문이다. 맑스의 인과적 해명론은 오늘날 우리가 정치학과 경제학에서 배우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참된 사회과학은 인과적인 해명을 도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베버는 인과적 해명을 외면하였지만 맑스는 인과적 분석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맑스는 단순한 경제 결정주의자economic determinist였는가. 맑스는 정말로 인간 의식을 결정하는 것은 실존이라고 주장했는가. 맑스는 이보다 더 복잡한 견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는가. 그리고 맑스는 스스로 모순적이지는 않았은가. 맑스는 역사를 만들어 가는 것은 실습praxis철학이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주장은 적절한 분석인가. 맑스는 스스로 모순적인가 아니면 일관적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는가. 베버는 관념론자인가, 아닌가. 베버가 선택적 친화이론을 가지고 의도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우리는 앞으로 이것들에 대하여 살펴보게 될 것이다. 한편 베버는 자본주의를 창조한 동력으로서 인간의 탈마법화, 합리화, 그리고 칼빈주의의 예정론을 거론하였다.

+ 8. 마지막 질문은 재미있지만 쉽지않다. 맑스는 인간본성에 관한 확실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는가.

맑스가 주장한 인간본성 이론은 루소의 것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특히 맑스의 소외이론은 매우 급진적이다. 루소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원래 선하지만 사회가 우리를 소외시켰다. 그러나 맑스는 루소를 조금 더 능가한다. 맑스는 자연상태에서조차 우리 인간은 사회적이라고 하였다. 맑스는 사회적인 것은 우리 인간 본성안에 새겨져있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루소는 인간의 본성이 사회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루소는 숭고한 야만인noble savage 아이디어에서 밝혔듯이 우리 인간은 시민사회체 내에서 사회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맑스는 이러한 자연상태에 대한 아이디어는 추상abstraction에 불과하다고 믿었다. 맑스는 우리 인간은 모두 사회 안에서 태어났고 또 인간본성은 사회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자본주의만이 우리를 경쟁적 부르조와로 만들면서 또 비사회적이고 이기적으로 만든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면 베버는 루소나 맑스와는 다른 인간본성 이론을 가지고 있었는가. 이것은 조금 더 어려운 문제이겠다. 만약 베버가 그런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도 그것은 홉스의 이론과 가까웠을 것이다. 왜냐하면 베버는 인류의 역사는 권력을 위한 투쟁struggle for power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인간본성은 권력을 향한 끊임없는 투쟁이다. 베버는 인간역사를 권력투쟁으로서 설명하였다.

2. 사회적 행동의 네가지 유형

베버의 행동이론은 홉스의 자발적 행동이론theory of voluntaristic action과 유사한 면이 있다. 우리는 베버의 합리성 개념을 다루게 될 것이다. 권력과 지배의 구별 및 정당성 이론에 대해서도 다룰것이다. 이것들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것들은 특히 정치이론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개념들 중에 하나이고 경제이론과 사회이론에 있어서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배 유형에 대하여 다루게 될 것이다. 그러면 사회적 행동의 네가지 유형을 살펴보자.

+ 1. 도구적으로 합리적인 행동instrumentally rational action
우리는 사회에서 어떻게 서로에 대하여 마주하기 시작하는가. 무엇이 우리를 타인들과 상호작용하도록 동기화 하는가. 베버는 우리는 서로에 대하여 도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  2. 가치-합리적인 행동value-rational action
우리는 가치를 위하여 합리적으로 행동한다

+  3. 감정적인 행동affectual orientation
우리는 서로 감정에 이끌려서 상호작용하게 된다. 베버는 이것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감정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은 반드시 비합리적인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물론 감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비합리적일 때가 있다.

+  4. 전통적인 행동traditional orientation
우리는 서로 전통에 이끌려서 상호작용할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동일한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때로는 도구적으로 때로는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다. 때때로 우리는 누군가를 목표로 하여 행동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깊은 감정, 즉 사랑과 증오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경우에 따라서 우리는 도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군가를 얻기 위하여 다른 누군가를 이용한다. 이를테면 내가 당신으로부터 20달러를 빌릴 수 있을까. 바로 이것은 도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또 우리는 증오와 사랑으로 인하여 행동한다. 이러한 것들은 베버의 방법론의 근거가 되었다. 베버는 사회에 대한 자신의 접근법을 '해석가능한 사회학interpretative sociology' 이라고 불렀다. 이 용어는 독일어에서 번역된 것인데 그것은 이해understanding를 의미하는 Verstehen에서 나왔다. 베버가 가장 중점을 두었던 것은 사회학자는 동시에 경제학자 그리고 정치학자, 역사학자, 인류학자가 되어야 하고 단지 사람과 사물들에 대한 가치판단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행동으로 이끄는 인자를 이해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버는 타인들이 자신들과 다르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들이 어리석고 악하고 비합리적이라고 가정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댜. 이것은 특히 경제학자들과의 논쟁에서 볼 수 있었다. 경제학자들은 보통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행동 유형이 있다고 강력하게 가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베버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행동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유형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또 베버는 개인의 직업은 개인의 행동이 합리적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고 하면서 다만 개인의 직업은 타인이 왜 그러한 위치에서 그러한 행동을 해야했고 어떻게 그러한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기준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해석가능한 사회학interpretative sociology이자 베버가 말하는 이해understanding, verstehen가 의미하는 바이다. 이를테면 나는 감정적으로 나자신을 당신의 상황에 위치시키고 "이것이 정말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이라면 그와 동일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인지 어떤지를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이해는 왜 당신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베버는 단지 개인이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지 않다는 것뿐만이 아니라 왜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사회적 행동의 내가지 유형 재검토

+ 1. 도구적으로 합리적인 행동
이것은 대부분의 경제학자들, 특히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이 소위 합리적 경제행동rational economic action이라고 부르는 것과 가장 근접한 것이다. 베버는 이것을 도구적으로 합리적인 행동Zweckrationalitat이라고 불렀는데 목적과 수단ends and means이 모두 함께 충실하게 고려된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다소 공리 최대화utility maximization처럼 들리는 면이 있다. 공리주의자들은 도구적 합리성을 행동에 관련하여 합리적 방법이라고 정의한다. 당신은 행복을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공리utility를 최대화하려고 시도한다. 당신은 비용을 최소화하고 또 소득을 얻을 수 있는 한 최대화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렇다고 도구적 합리성이라고 하여 목적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베버는 실제로 존 스튜어트 밀이 강조했듯이 우리 인간은 선호preference를 가지고 행동하면서 어떤 목적은 다른 목적보다 더 큰 가치있다고 생각했다. 베버가 말한 도구적 합리성이란 우리가 목적을 성취하는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면 아마도 최선보다는 차선의 선호를 택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를테면 나는 누군가와 데이트하고 싶다. 나는 정말로 그 사람과 데이트를 하고싶다. 그러나 성공적인 데이트를 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사성급이나 오성급호텔 레스토랑으로 데려가야 한다. 그 식사비용은 200 달러이다. 그리고 나는  데이트하고 싶은 또다른 사람이 있다. 나는 이 차-선호second- preference를 위해서 오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50 달러를 쓸 수 있다. 나는 양쪽 데이트에 대한 선호를 저울질하면서 200 달러를 지불하는 것이 나은지 어떤지 숙고하게 된다. 사실 50 달러를 지불해도 되는 차-선호는 실제로 꽤 괜찮다. 따라서 나는 50 달러 식사를 선택한다. 보다시피 당신은 목적과 수단 양쪽을 모두 다 합리적으로 저울질하면서 결론을 얻는다. 잘 알다시피 이것은 홉스와 그렇게 다른 것이 아니다. 홉스의 아이디어는 우리는 한편으로 이러한 선호, 즉 충동 또는 식욕을 가지고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 공포fear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양자 사이에서 결국 의지a will에 도달하개 된다. 이것이 바로 도구적 합리성이다.

+ 2. 가치-합리적 행동
베버는 우리 인간은 가치 합리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누군가가 가치합리적으로 행동한다면 그 사람은 비합리적인 사람이 아니다. 누군가가 "이 가치는 나에게 너무 소중하므로 값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 말했다면 이 내용은 가치 합리적인 것이다. 간단한 예를들면 당신은 인간 생명은 특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당신 또는 당신의 파트너는 아기를 기대하고 있으므로 이제 결정하여야 한다. 아기를 낳을 것인가, 아니면 낙태를 할 것인가. 이것은 가치 합리성의 문제이다. 태아의 생명은 최우선적인 가치이므로 비록 이 어려운 상황에서 지금 아기를 갖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를 갖기로 결심한다. 왜냐하면 나는 가치-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한 결정이 도구적으로 비합리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아기를 양육하기 위하여 학교를 중단하고 돈을 벌텐데 그것은 나의 인생을 망칠 수도 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그렇게 강한 가치 헌신value commitment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행동은 비합리적인 행동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합리적인 행동이다. 왜냐하면 나는 궁극적 가치에 자극을 받았고 때때로 이 궁극적 가치는 너무 귀해서 경제적 이익을 포기하기도 하고 심지어 자신의 생명을 희생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숭고한 원인noble causes때문에 죽기까지 한다. 그것은 인간이 합리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당신은 상황을 저울질해보고 당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된다. 그러나 이 숭고한 원인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서도 행동한다면 어느 누구도 당신이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가치-합리적인 행동이다.

+ 3. 감정적 행동affectual orientation
감정적 행동이란 감정에 이끌리는 것을 말한다. 베버는 감정적 행동은 경계선에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감정적 행동은 그 상황에서 단순히 억제되지 않은 반작용uncontrolled reaction에 의하여 나왔다면 그것은 비합리적 행동이라고 하였다. 이를테면 당신이 단순히 격노에 이끌려서 행동한다면 그것은 비합리적이겠다. 당신은 파티에서 취한 상태로 당신의 파트너애게 헤어지자고 말을 했고 실제로 서로 헤어져버렸다. 그러나 당신의 본래 의도는 그것이 아니었다. 다음날 아침 당신은 일어나서 "이런, 내가 그런 말을 했다니. 내가 어리석었다. 나는 비합리적이었다. 나는 감정에 이끌린 나머지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했다." 고 말한다. 이 경우에 당신의 감정은 비합리적이다. 그것은 외부자극에 대한 억제되지 않은 반작용uncontrolled reaction이었다. 그러나 당신이 그것과는 다르게 사랑으로 행동하고 사랑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다. 사실 우리는 보통 그렇게 사랑으로 행동한다. 당신의 부모는 그렇게 당신을 사랑한다. 잘 알다시피 부모님은 되돌려 받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의 예일대학 학위를 위하여 200,000 달러를 지불한다. 부모님은 아마 당신으로부터 사랑을 되돌려 받고싶어할 지도 모르겠다. 종종 어떤사람들은 사랑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보고서 미쳤다고 말한다. "왜 당신은 아이들에게 그렇게 많은 투자를 하는가. 자식들은 당신을 양로원에 보낼지도 모르지 않는가."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이들이 최대한 잘되기를 바라오." 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비햡리적인 행동이 아닌것으로서 잘 정당화justified되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감정적 행동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 4. 전통적 행동traditional orientation
전통적 행동이란 전통에 따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중매결혼arranged marriage을 믿는다. 당신이 무슬림이나 정통파 유대인이라면 아마도 당신의 파트너를 중매결혼을 통해서 얻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당신이 랍비를 찾아가면 랍비는 당신을 위해서 중매를 설 것이다. 이것은 비합리적인가. 그렇지 않다. 절대 비합리적이지 않다. 실제로 낭만적인 사랑이란 그렇게 합리적이지 못하다. 누군가가 사랑에 빠져서 그 다음날 프로포즈를 한다면 그것은 바보같은 짓이겠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을 잘 알고 있고 당신의 부모와 파트너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랍비를 찾아가는 것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포인트는 전통은 당신의 행동을 안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완전히 생각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면 그것은 비합리적이다. 당신은 자의식self-conscious적으로 행동할때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나는 재생한reborn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고 말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이러한 방식을 따른다면 당신은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고 비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3. 베버의 합리성 개념

합리성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매우 복합적인 개념이다. 함리성이란 어떤 상황에 대처하면서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즉 사려없는 즉각적인 반작용spontaneous reaction이 아니라 신중한 적응deliberate adaptation을 말한다. 이를테면 당신은 자신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의식conscious하고 있다면 당신은 실제로 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이고 적어도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다. 베버는 합리적인 것과 비합리적인 것을 구별하였다. 합리적인 것이란 많은 생각에 공을 들이는 것이고 비합리적인 것은 여전히 반성을 필요로 하는 것을 말한다. 베버를 연구하는 학자인 슐르흐터Schluchter는 수단과 목적에 관련하여 도구적 합리성이야마로 궁극적 합리성이라고 말하였다. 그 이유는 사람들은 수단과 목적, 양쪽 모두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 슐르흐터는 가치-합리성은 낮은 단계의 합리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왜냐하면 가치-합리성은 수단에 대하여는 더 이상 고려하지 않고 목적만을 고려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사실적인 합리성에 대하여는 상위의 한계유형marginal types이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하버마스는 합리성과 관련하여 '베버가 강조했던 것은 개인의 반성력 수준level of reflexivity이다.' 라고 주장하였다. 당신은 정말로 자신이 무엇을 하고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하는가.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 어느 만큼 타인과 교통할 수 있는가. 당신이 스스로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당신은 매우 높은 반성력reflexivity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또 그런 행동을 하게된 동기motivation는 무엇이었는지 타인에게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합리성 아이디어이다. 그렇다면 이 합리성 아이디어는 최고 단계의 합리성이겠다. 왜냐하면 당신은 실제로 반성력을 통하여 자신의 가치를 매우 잘 설명할 수 있게되기 때문이다. 한편 도구적 합리성에는 논의할 만한 것이 많지 않다. 이를테면 "나는 이런 식으로 더 많은 돈을 벌고 있다."  이러한 발언이 내포하는 것은 교통communication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이다. 비록 당신이 스스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결론은 베버의 합리성은 당신은 스스로 하고 있는 일에 대하여 얼마나 의식적이고 또 일의 결과에 대하여 얼마나 의식적일 수 있느냐와 관련되어있다. 당신이 행위의 결과에 대하여 스스로 의식적이지 못하다면 그것은 비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4. 권력과 지배

베버는 권력macht, power과 지배domination를 근본적으로 구별하였다. 베버는 권력이란 "한 행위자actor가 사회관계 내에서 타인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자신의 의지를 타인들에게 실행시킬 수 있는 개연성probability이다." 라고 말하였다. 권력을 가진자는 사람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사람들에게 강제할 수 있다. 베버는 실제로 이러하 권력관계는 시회적 상황에 따라서 매우 드물게 발생한다고 하였다. 전형적으로 사회적 상황을 규정하는 것은 지배herrschaft, domination관계이다. 베버에 따르면 지배는 행위자의 명령대로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는 개연성probability이다. 지배와 권력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지배는 권력과 정당성legitimacy을 합쳐 놓은 것 이외의 어떤것도 아니다. 권력을 거머쥔 자는 자신이 수행하는 일을 정당화하려고 시도한다. 잘 알지모르겠지만 나는 처음 20분 동안 이 강의실에서 지배를 시도하였다. ''봐라, 알다시피 어렵게 느껴졌던 질문들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것들은 어렵지 않았고 재미있었다." 나는 그때 나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있었다. ''질문에 답하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다. 당신은 사회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단지 권력을 행사했다기 보다는 과정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9시 까지 강의실에 도착하지 못하면 당신은 F학점을 받게 될 것이고 당신은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학위를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당신들에게 합법성를 시도했던 것이 아니라 오늘 오후에 하게 될 일을 정당화하고자 시도하였던 것이다. 내가 이것을 합법성으로서 말했던 것은 당신들이 그렇게 하는 것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신들은 그렇게 하므로써 혜택을 받게된다. 나는 당신들이 수강해야하는 것을 7시와 9시 사이에 당신들 의식에 내부화하였다. 다행히 당신들은 그렇게 7시와 9시 사이에 하는 것이 좋겠다고 믿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나는 가르치면서도 또한 배우고 있다. 나는 지식이 쌓여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자기-개발self-development이다. 나는 권력을 지배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것이 정당성이다. 내가 7시에 당신들에게 하라고 했던 것은 칵테일 타임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었다. 7시에 컴퓨터 앞에 않아서 작문하는 것은 당신을 위해서 좋은 것이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스스로 내부화하면서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라고 생각했다면 나는 만족스럽게 지배를 성취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권력이라기보다는 지배이겠다. 지배란 권력에 덧붙여서 정당성이 합하여진 것이다.

5. 정당성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매우 난해한 질문이다. 당신들은 내가 갖고있는 고유한 견해에 대하여 증거를 들이대면서 반박할지도 모르겠다. 베버는 모든 진정한 형태의 지배란 최소한의 자발적 순종minimum of voluntary compliance과 더불어 복종으로 인한 이익an interest in obedience을 내포한다고 말하였다. 만약 내가 이 강의를 포기하고 시험을 치르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면 당신들은 이것과 관련하여 일종의 자발적인 순종과 더불어가장 중요한 복종에 따른 이익이 필요하겠다. 그러나 당신이 이 강의를 통해서 뭔가를 배우겠다고 생각했다면 나로서는 지배를 성취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지배라고 하겠다. 이제 매우 중요한 주장이 되겠는데 모든 특권화된 그룹, 즉 권력의 위치에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우월성 신화를 개발하고 있다. 권력자들은 그러한 신화를 통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 유용한 것이라고 믿게끔 만든다. 따라서 정당성의 핵심은 권력자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권력의 정당성을 어느정도 믿게끔 하는데 있을 뿐만아니라 이것은 신화를 통해서 가능하다는데 있다. 이 정당성의 핵심적인 것은 니체에 매우 근접해있다. 니체가 들고 올라온 것은 신화학이다. 신화는 실제적 사실이 아니다. 당신은 단지 지배체제에 대하여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순종submission을 자신 안에 내부화하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우리는 그러한 순종을 우리 안에 내부화하여 왔다. 따라서 이러한 순종을 통한 내부화는 우리가 보통 말하는 정당성과는 매우 다르다고 보겠다. 현대의 정치적 정당성의 흐름에서 본다면 아프가니스탄의 새 대통령인 카자이Karzai는 합법적legitmate이지 못하다. 왜냐하면 카자이는 선거를 조작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를 통하여 선출된 자는 합법적인 지배자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베버는 이것과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베버에 따르면 지배자를 합법적으로 만드는 것은 보편적 참정권과 공정하고 자유로운 선거가 아니다. 베버는 지배자를 합법적이게 만드는 것은 사람들이 주어진 명령에 훨씬 잘 복종하도록 정당화하기 위한 신화 개발에 있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 어느 정도 자기이익self interest을 위해 좋은 것이고 실제로 지배자가 원하는 데로 따르는 것이 나쁜것이 아니라는 데에는 어느정도의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믿음을 위아여 신화가 필요한 것이다.

6, 지배의 유형

베버의 지배유형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이 지배유형이 바로 베버와 맑스가 충돌하는 지점이다. 이미 보았던 것처럼 맑스는 경제제도로부터 사회유형을 개발해냈다. 맑스에 따르면 경제는 역사를 견인한다 economy drives history. 반면에 베버는 홉스주의자이거나 또는 니체주의자이다. 베버는 역사를 견인하는 것은 권력 또는 권력을 위한 투쟁이라고 하였다. 베버에 따르면 권력의 본성은 권력이 어떻게 세워지는가에 있었다. 또 프로이트식으로 말하자면 권력이 어떻게 지배로 승화되는지에 달려있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사회의 작동방식과 동일하다. 따라서 역사의 진화는 생산양식의 진보에 따라서 기술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진화는 지배유형types of domination에 따라서 기술된다. 베버는 실제로 세가지 유형의 합법적 지배를 거론하였다. 역사를 통틀어서 지배자가 자신의 지배를 합법화한 데는 세가지 길이 있어왔다. 그 것은 법-합리적 지배, 간단히 말해서 자유주의적liberal 지배, 전통적 지배, 그리고 카리스마적지배이다.

+ 법-합리적 지배
베버에 따르면 법-합리적 지배는 제정된 규칙의 적법성the legality of enacted rules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세워진다. 실제로 명령을 발하는 자들은 스스로 그러한 규칙들에 묶여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법의 지배를 말하는 것이다. 베버는 이것을 법-합리적 지배라고 명명하였다. 이 법-합리적 지배는 관료적 방식bureaucratic manner에 따라서 관리되는 법의 지배를 말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인격적인 주인을 갖지 않는다. 사람들은 인격체에게 복종하지 않고 단지 게임의 룰rules of game에 복종한다. 이 게임의 룰은 미리 규정되어prescribed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행동하기 이전에 이미 게임의 룰을 알고있다. 규칙은 이미 세워졌고 사람들은 그 규칙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이것이 법-합리적 지배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법-합리적 지배는 민주적일 수 있거나 또는 권위주의적일 수 있다. 또 그것은 실제로 입현군주주의일 수도 있다. 입헌군주정에서는 이미 분리된 입법체가 여러 법률안을 통과시키는데 그 입법체는 민주적이거나 또는 민주적이지 않게 선출된다. 18세기와 19세기초 영국 입헌군주정에서 모든 사람은 누가 게임의 룰을 지배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당시 의회는 민주적으로 선출되어 구성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입헌군주정에서 법률은 존재했고 군주는 그 법률을 따랐다. 이것이 법-합리적 지배이다.

+ 전통적 지배
베버는 전통적 지배는 태고적 전통의 신성sanctity of immemorial traditions과 더불어 그 전통적 지배자의 정당성에 기초하여 세워진다고 하였다. 어떤 면에서 당신이 부친에게 복종하는 것은 전통적 지배에서 행동하는 것이다. 부친의 지배는 전통에 의하여 부친에게 주어진 것이다. 잘알다시피 부친은 합법적으로 "12시 전까지 집에 돌아오라."고 말할 권리를 가지고있다. 아들은 이 말을 듣고 그렇게 행복해하지는 않는다. 잘 알겠지만 보통 16세가 되면 이런 말에 반발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들은 보통 부친이나 모친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된다. 또 부친은 아들에게 "너는 이러이러한 것을 했으므로 이번 주말에는 집밖으로 나갈 수가 없다."라고 말한다. 따라서 부친은 전통적 지배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다. 그 지배는 전통에 의하여 부친에게 주어진 것이다.

+ 카리스마적 지배
베버는 카리스마적 지배의 지도자는 명령을 발할 권리를 합법화하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베버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비범한 자질character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비범하면서 평범하지않다unusual.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들은 예외적으로 특별하게 초자연적이거나 초인superhuman으로 비춰진다는 점이다. 베버가 강조한 카리스마적 지배는 실제로 지도자 개인의 특질characteristics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러한 특질을 그 개인에게 부여하여 그러한 비범한 특질을 갖추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가장 최근의 미국역사를 돌아보자. 지난 대통령선거운동에서 바락 오바마Barack Obama는 매력적인 인간성과 함께 비범한 연설기술을 가지고서 자기주위에 일종의 카리스마적 후광aura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 잘 알다시피 사람들은 오바마를 보면서 마치 록 스타를 보는 것처럼 흥분했다. 게다가 오바마는 자신을 합법화하고자 시도하면서 자신의 모든 주장과 관련하여 매우 카리스마적 용어들을 사용하였다. 예를들자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Hope you can believe in." 이 명제는 매우 전형적인 카리스마적 호소이다. "당신들은 나를 믿어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희망이 없는 상황에서 당신들에게 희망을 안겨다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카리스마적 지배가 창조하는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이 얼마나 많은 전통적 지배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지는 문제이지만 오바마 후보자가 정말로 카리스마적 지도자인지도 문제일 수 있다. 베버는 기본적으로 카리스마적 지도자를 세계의 위대한 종교의 창시자들과 동일시하여 정의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카리스마적 지도자였다. 어떤 면에서 현대정치인들을 카리스마적 자도자로서 거론하는 것은 다소 오류slippery일 수 있겠다. 그러나 희망과 소명hope and call을 강조하면서 "나를 믿어라, 왜냐하면 나는 당신들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라든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오바마가 "예,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라고 말했을때 그것은 정말로 카리스마적 호소였다. 그것은 그렇게 이성적인 발언은 아니었다. 바락 오바마가 튀어 나와서 "당신들은 어떤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다. 당신은 희망할 수 있다." 라고 했을때 이것은 매우 카리스마적인 호소였다. 이것이 카리스마적 지배에 관한 모든 것이다.






<참고문헌>

원문번역,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