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2일 목요일

7-1. 맑스: 소외론

1. 맑스의 초기 생애

1818년 칼 하인리히 맑스Karl Heinrich Marx는 독일의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맑스의 부친인 하인리히 맑스는 성공한 변호사이자 계몽주의자로서 볼테르를 매우 존경했다. 맑스의 할아버지는 트리어의 랍비였던 맑스 레비Marx Levi 였는데 맑스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었고 맑스의 부친 하인리히 맑스는 루터교로 개종하였다. 그래서 맑스는 세속적인 가정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1830년 맑스는 트리어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835년 본 대학University of Bonn에 입학하여 그리스로마 신화와 역사를 수학하면서 학생운동(student politics)에 참가하였다. 맑스는 Bonn에서의 생활이 지루해져가자 1836년 그때 막 활기넘치던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가서 법학을 수학하였다. 당시 맑스는 헤겔의 제자로서 청년헤겔파(young Hegelian)였던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의 강의를 수강하면서 급진적 학생모임에 들어갔다.

1841년 맑스는 예나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 그 당시 베를린 대학에서 학위를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맑스는 법학보다는 철학과 정치에 더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독일의 철학자인 헤겔은 인간의 역사는 인간 의식이 전개되는 것이라고 보았고 또 인간은 주체와 객체가 서로 분리된 소외 상태에 놓여져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헤겔은 자기-의식을 교양하고 통합Totality함으로써 소외를 극복될 수 있다고 하였다. 헤겔이 말하는 소외상태란 낯선 상태를 말한다. 소외로 인하여 인간의 객체는 주체로부터 벗어나서 분리된 채로 독립된 가치가 부여된다. 그 소외상태는 진정한 자기가 아니다. 헤겔은 자기를 찾기위해서는 자기-의식의 교양을 통하여 소외가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한편 헤겔의 제자이자 맑스의 스승이었던 브루노 바우어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강사로서 청년헤겔파(Young Hegelian)였다. 맑스는 바우어의 강의를 수강하였다. 나중에 맑스는 부르노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지만, 부루노 바우어가 없었더라면 맑스뿐만 아니라 맑시즘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맑스는 과격한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성깔있는 학생이었고 아주 멋지거나 열받게 언어를 구사하기도 하였다.

2. 비판적인 비판가(the critical critic)

브무노 바우어는 헤겔 좌파였다. 재미있게도, 헤겔 좌파는 헤겔의 방법론을 이용하여 헤겔을 비판한다. 바우어나 포이어바하같은 헤겔좌파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비판적인 비판가라고 말한다. 이 '비판적인 비판가' 는 종종 맑스의 저작에도 등장하는데 아이러닉한 용어이다. 알다시피, 헤겔는 비판철학의 창시자로 불리운다. 비판이론의 핵심은 인간의 의식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는 데 있다. 비판이론가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과 인간의 조건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은 적절하게 우리의 조건을 반성하지 못하므로 우리는 의식을 비판하고 옳은 의식에 도달해야 한다. 그럼, 최초의 비판이론가는 누구인가. 먼저, 독일의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가 거론된다. 재미있게도, 칸트는 즉자Ding an sich(Things in themselves)와 대자Ding fur sich(Thing for themselves)를 구별하였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마음 속에 지닌 모든 아이디어는 대자이다. 그 대자things for themselves는 우리의 세계(world around us)와 대응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계는 무한해서 인간들이 이제까지 개발한 어떠한 개념들도 이 세계와 완전히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인식행위(the act of cognition)를 통하여 의미있는 질료(stuff)를 세계 속에서 골라낸다. 따라서 이 골라낸 아이디어는 바로 대자(things for themselves)인 것이다. 이것이 칸트의 포인트이다. 우리는 인식행위와 학습과정을 통하여 세계 속에서 유용한 것들을 골라내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 의식은 완전하지 않으므로 우리 각자는 인간 의식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비판의 도마에서 인간의 마음은 세계의 무한함과 실재(reality)를 결코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것이 칸트와 비판이론을 이해하는 포인트이다. 또한, 헤겔도 최초의 비판이론가로서 거론된다. 칸트는 불가지론자로서 인간의 세계포착은 개념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헤겔은 철학을 통하여 소외가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청년헤겔파(the young Hegelian)는 자신들을 비판의 비판가라고 부른다. 그들은 헤겔의 방법론으로써 헤겔 이론을 비판하였다. 청년 헤겔파는 헤겔의 시스템 자체를 이용하여 헤겔의 이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고자 한다. 사실, 맑스는 이러한 청년헤겔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맑스는 여러 면에서 비판적인 비판가였다. 또한, 맑스는 청년헤겔파,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포이에르바하는 자연주의(naturalism) 방법론을 이용하였는데 맑스는 한때 이 자연주의를 추종하였다. 알다시피, 맑스는 유물론자로서 알려져있다. 그러나 맑스는 스스로 유물론(materialism)과 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이란 용어 대신에 자연주의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자연주의의 핵심은 정신 의식(the importance of consciousness in spirit)의 중요성을 깨닫고, 인간 의식과 정신 사이의 상호작용과 자연 자체를 강조하는 데 있다. 놀랍게도,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의 본질The Essence of Christianity>에서 신(God)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주장하였다. 바우어와도 이렇게 주장했었지만 포이에르바하는 더 급진적이었다. 포이에르바하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소외의 절박함을 신 이이디어(the idea of God)에 투사하면서 소외를 극복하고 해방하고자 한다. 한편 바우어는 헤겔을 비판하면서도 존재론적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알다시피, 존재론Ontology은 사물의 근원을 다룬다. 바우어에 따르면 정신 세계는 인간의 반성reflection을 통하여 형성된다. 재미있게도, 바우어는 이것을 자연주의라고 부르면서 관념론(idealism)과 차별화하였다. 관념론자는 물질세계는 아이디어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한다. 관념론에 따르면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자신의 의지를 실행하여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했다. 따라서 그 아이디어idea는 인간의 행동양식을 해명할 수 있다. 반면에 유물론자들은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출발하여 아이디어를 얻고자 한다. 포이에르바하에 따르면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그러나 맑스는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당신은 머리 속에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그 아이디어는 당신의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라고 한다. 맑스에 따르면 개인은 사회적 위치에 따라서 자기-이익을 추구하고 사유한다. 이것은 유물론적인 접근법으로서, 맑스는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아이이어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상, 헤겔의 비판이론, 청년헤겔파의 급진적 비판이론, 그리고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살펴보았다. 이것들은 모두 맑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3. 결혼과 초기 경력

1842년 맑스는 콜론으로 이사하고 라인 신문사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편집자가 되었다. 당시 맑스는 자유주의 저널리스트였으므로 아직 급진주의자는 아니었다. 맑스는 부르조아 자유주의자로서 언론의 자유와 시민의 자유에 관한 아티클을 쓰고 있었다. 맑스의 글감들은 존 스튜어트 밀도 반대하지 않을 만한 것들이었다.

1843년 맑스는 7년 간의 연애를 끝내고 제니Jenny von Westphalen와 혼인하였다. 제니는 독일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1843년 맑스는 두 문제작을 내놓았다. 먼저, 맑스는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the State>를 썼다. 다음, 맑스는 바우어를 공격하면서 에세이 <유대인 문제On the Jewish question>를 썼다. 그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때 맑스는 청년헤겔파와 갈라섰다. 그러나 이 에세이 <유대인 문제>는 반독일적인 사회성과 정치성을 담고 있었으므로 맑스는 독일을 탈출하여 프랑스 파리의 38 Rue Vaneau로 피난하였다.

1844년 맑스는 파리에서 <파리 원고The Paris Manuscript of 1844>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또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전문A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Law, An Introduction>을 완성하였다. 맑스는 이때부터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맑스는 당시 24세 되던 1844년 여름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를 완성하였다. 이어서, 맑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처음 만났는데 그 후 평생동안 엥겔스와 우정관계를 유지하였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동으로 <신성가족The Holy Family>,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 <독일 이데올로기The German Ideology>  저술하였다. 사실, 엥겔스는 맑스보다 훨씬 더 명료한 분석력과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맑스는 다소 추상적이었으나 대단히 천재적이었다.

1845년 맑스와 엥겔스는 파리에서 추방당하였고 브뤼셀로 이사했다. 1845년 4월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Theses On Feuerbach>를 발표하면서 인식론적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맑스는 이 책에서 역사적 유물론이란 용어를 조어하였고 유물론자의 길로 들어섰다..

1846년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를 쓰면서 헤겔관념론자에서 역사적 유물론자로 완전하게 돌아섰다.

1848년 2월 22일- 24일 파리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맑스와 엥겔스는 팜플렛 <공산당 선언The Manifesto of Communist Party>을 출간하였다. 맑스는 이해 브뤼셀에서 추방당하였고 3월 5일 혁명도시 파리로 옮겨갔다. 3월 13일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3월 15일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전 유럽으로 확산될 조짐이었다. 3월 18일에는 베를린에서 혁명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맑스가 혁명을 예견하고있었는데 정말로 일어났던 것이다. 4월 맑스와 엥겔스는 독일의 혁명을 지지하기 위하여 독일로 돌아왔다. 그러나 10월 오스트리아에서는 반혁명(counter revolution)이 일어났다. 11월 8일에는 프러시아에서 반혁명 쿠데타가 일어났다. 12월에는 프랑스에서 반혁명은 아니었지만 루이 보나파르테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루이 보나파르테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조카였는데 그의 부친은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네델란드의 왕이 되었었다. 루이 보나파르테 나폴레옹은 스위스에서 망명객의 신분으로서 살고있었다. 루이 보나파르테는 그렇게 지혜로운 편이 아니어서 여러 소동에 휘말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3세로서 황제로 등극한다.

1849년 5월 맑스는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혁명의 불씨를 기대하면서 파리로 돌아왔는데 곧 오스트리아로 추방되고 말았다. 그러자 맑스는 런던으로 이사했고 거기서 나머지 생애를 보냈다.

1858년 맑스는 <그룬트리세Grudrisse>를 완성하였다. 이 책은 맑스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책이다.

1867년 맑스는 <자본론Das kapital>을 썼다.

4. 파리꼬뮨과 그후

1871년 파리에서는 자신들을 꼬윈Commune이라 부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났다. 그 혁명의 근거이자 교과서는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이었다. 맑스 1864년에 이미 정치조직인 국제 노동자 조합International Worker's Organization, 즉 후일의 제 1인터내셔날The First International을 러시아 무정부주의자인 바쿠닌Bakunin과 함께 창설하였었다. 한편 이 파리 꼬뮌Paris Commune은 1871년 5월 28일 단 2주만에 전복되고 말았다. 이 꼬뮌Commune이 실패로 돌아가자 맑스와 바쿠닌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제 1인터내션날은 해체되었다. 바쿠닌은 밑에서 올라가려는Bottom-up성향의 무정부주의자로서 국가를 해체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 파리꼬뮨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재판없이 처형되었다. 그 꼬뮌이 지나가자 유럽은 보수주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독일에서는 철의 재상인 비스마르크가 등장하였다. 영국에서는 빅토리아여왕이 등장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카이저 프란츠 조셉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혁명적인 맑스주의는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1883년 맑스는 타계하였고 자신보다 18개월 먼저 타계한 부인 제니Jenny와 함께 런던의 하이게ㅐ디트 묘지Highgate Cemetery에 묻혔다.

1889년 엥겔스는 제 2인터내션날을 창설하였다. 오늘날 제 2안터내션날은 사회 민주당원social democrats로서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민주당은 JFK가 있을 당시 자유주의적 정당이었는데 제 2인터내션날 회의에 옵저버를 보내기도 했다. 바비 케네디Bobby kennedy는 제2인터내션날에 매우 공감하였고 미국 민주당이 사회민주주의 국제운동Social Democratic International Movement에 참가하지말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공샨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1919년 공산주의자들은 제 2인터네션날의 역할에 회의적이었으므로 제 3인터내션날을 창설하였다. 이 공산주의 인터내션날은 2차대전까지 존속하였다. 그때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을 침공하기 위하여 미국의 원조가 필요했는데 미국은 원조를 조건으로 공산주의 인터내션날을 해체하도록 권고하였다. 참고로, 레온 트로츠키의 제 4인터내션날도 있었다.

6. <피리 원고The Paris Manuscript>와 소외론

맑스 소외론(the theory of alienation)의 출발점은 헤겔이다.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에서 자신의 소외론을 전개하였다. 헤겔은 <법철학>에서 공무원(civil servants)이 보편적 계급(universal class)이라고 말했다. 헤겔은 프랑스 혁명과 부르조와 사회를 비판하였다. 헤겔에 따르면 노동자와 자본가는 각기 다른 특별한 이익(interests)를 대표하는 반면에 공무원은 질서와 명령을 내릴 수 할 수 있고 정부는 보편적 이익을 표상한다.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그러한 헤겔의 관점을 비판하였다. 이어서 맑스는 <유대인 문제On the Jewish question>을 저술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국가 관료(bureaucrats)는 보편적이 아니므로 보편적 관점과 보편적 해방(emancipation)의 담지자가 필요하다. 그럼, 보편적 이익과 해방을 수행할 인자는 누구인가.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전문Introduction,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law>에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라고 말하였다. 왜 프롤레타리아가 보편적 계급이 되어야 하는가. 맑스는 그 이유를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에서 밝혔다. 맑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는 어는 누구보다 완전히 소외되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소외 해방에 대단한 관심을 갖는다.

+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 1844>
재미있게도, 첫번째 원고는 27페이지로 되어있는데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 뿐만아니라 사소유권과 소외에 대하여 서술하고있다. 특히 제 5장이 매우 중요하다. 두번째와 세번째원고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어쨌든 이 책 <파리원고>는 헤겔을 재해석한 것이다. 맑스에 따르면 소외는 아이디어idea에서 오는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인 물질적 조건에서 나온다. 당시 맑스는 자본주의 개념을 갖고있지 않았지만 상품을 생산하는 상업사회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소외의 출발점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상품 생산사회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소외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맑스는 소외의 4가지 특질을 정의하였다. 첫째, 소외는 생산의 객체로부터 나온다. 둘째, 소외는 생산행위로부터 나온다. 셋째, 소외는 종(species being)로부터 나온다.종이란 인간의 본질에 관한 것이므로 동물과 구별되는 개념이다. 넷째, 소외는 동료들로부터 나온다. 맑스는 사유 속에서 소외를 극복하고자 했던 헤겔을 재해석했던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소외는 의식상태의 문제였다. 그러나 맑스는 그 헤겔의 소외론을 물질적 현실로 끌어내렸던 것이다. 그럼, 소외는 언제 나타나는가. 맑스에 따르면 소외는 노동이 상품화되고 이윤이 경제원칙이 될때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사소유권이 등장하는 지점이다. 맑스는 애덤 스미스가 밝힌 상품 생산 상업사회를 탐구하면서 진정한 사회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 1. 생산 객체로부터의 소외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capitalist mode of production이란 용어를 조어하였다. 맑스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따르면 노동자는 노동을 통하여 생산물,즉 객체를 생산하지만 그 생산물은 노동자로부터 소외되었다. 따라서 생산물은 노동자와 대립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노동자가 노동을 한다는 것은 소외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색한 상품생산과는 대조적으로, 장인들은 자신의 생산물에 대하여 소외되지 않는다. 장인은 자기가 생산한 생산물과 일체이다. 구두공은 멋진 구두를 생산하고 난 후, 자기가 만든 구두를 자랑스러워한다. 그 구두공은 일요일 교회에서 예쁜 아가씨가 자기가 만든 구두를 신고 다니는 걸 보면, 저 구두는 '나의 것' 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 구두공은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량생산업체의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그렇지 않다. 예를들어, 도요타 캠리Toyota Camry에서 작업하는 근로자는 실제로 자신이 무엇을 생산하는지 모른다. 그 근로자는 상품에서 소외된 것이다. 노동자는 생산물을 위하여 노동을 가하지만 노동자는 그 상품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노동이 다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나 학자를 보라.  그들은 자신의 일과 일체이고 자신의 생산물에서 저작권을 갖는다. 그러나 평범한 근로자는 저작권을 갖고있지 않다. 근로자는 자신이 생산한 일에 대하여 라이센스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일로부터 소외된 것이다.

+ 2. 생산 행위로부터의 소외
맑스에 따르면 노동은 노동자의 외적인 것이다. 노동은 노동자의 본질적인 속성이 아니다. 따라서 노동자는 작업장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개발하는 것을 긍정하기보다 부정한다. 이를테면, 노동자는 말하기를 "이제 5시 50분이다. 10분만 기다리면 퇴근이다." 라고 한다. 노동자의 인생은 일이 끝나면서 시작한다. 따라서 근로자는 자신의 일인 생산 행위에서 소외되었다. 그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된 것이다. 만약, 당신이 굶주려 있다면 당신은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당신의 노동은 경제적으로 강제되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자기의 노동은 타인에게 속한다고 말하였다. 이를테면, 사장은 직원에게 명령하고 직원은 명령에 따라 작업을 수행한다. 따라서 직원은 생산 행위로부터 소외된 것이다.

+ 3. 종으로부터의 소외
맑스에 따르면 노동자는 다른 인간으로부터 소외된다.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인간은 동물과 다른가. 독일의 시인 쉴러는 무대극(play)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고 하였다. 맑스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일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머리 속에서 계획한 필요한물품을 물질세계에 창조한다. 맑스는 이러한 노동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고 했던 것이다. 예를들어, 벌은 일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벌은 계획을 갖고 일하지는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아이디어를 준비한 후에 자기 집을 건축한다. 인간은 자신이 구상한 아이디어대로 집을 완성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이다. 이것이 맑스의 포인트이다. 맑스에 따르면 우리는 상품생산사회에서 우리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인간다움을 소외시켰다. 맑스는 이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하였다. 다른 종으로부터의 소외는 맑스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

+ 4. 동료로부터의 소외
맑스는 동료로부터의 소외가 가장 충격적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상품생산사회에서 서로를 대상으로 취급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윤 극대화, 자기-이익의 추구, 공리의 최대화, 세계에 대한 도구적 사고방식 등을 통하여 최소 비용으로 목적에 도달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때 마다 서로를 도구로서 취급한다. 맑스는 이것을 최악의 소외라고 말하였다. 재미있게도, 이 소외는 헤겔이 구상했던  인류의 일반적 조건과는 거리가 멀다. 이 소외는 현대사회(modernity)로부터 출현하여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스며들었다. 동료로부터의 소외는 현대성과 현대 산업사회 그리고 도시생활의 특질이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대상으로서 취급한다. 개인은 타인을 성적 대상으로 취급한다. 때때로 에로틱한 관계는 잔인한 성행위로 전락하기도 한다. 개인은 타인을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대상으로 취급한다. 개인은 목적을 위해서 필요할 때만 타인을 부른다. 우리는 동정심이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다. 또 우리는 공감이 부족하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The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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