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1일 토요일

7-4. 맑스: 계급이론과 착취이론

1. 친절한 칼 맑스

맑스는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매우 복잡하고 모순되게 진리을 추구하였다. 그럼, 맑스는 진리에 도달했는가. 맑스는 필사적으로 진리를 포착하고자 하였다. 맑스는 청년 헤겔파로서 헤겔의 소외개념을 바탕으로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를 집필하였다. 그 후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를 통하여 헤겔과 결별하면서 역사적 유물론자의 길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애덤 스미스의 영향아래 있었다. 당시 맑스는 노동분업을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사소유권에 대한 분석은 건드리지 못하였다. 이어서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 사유재산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지만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의 결정론과 소외 아디디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맑스는 역사 진화를 더 성찰했어야했다. 맑스는 생애 마지막으로 책 한권을 완성하는데 그것이 <자본론> 제 1권이다. <자본론>은 1867년 처음 츨간되었는데 그 내용은 매우 일관적이었다. 맑스는 이전의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나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 <그룬트리세Grundrisse>를 집필했을 때와는 다르게 <자본론>을 기꺼이 출판하고자 하였다. <자본론>의 포인트는 착취이론이다. 맑스의 착취 이론은 사회이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재미있게도, 오늘날 착취 이론은 맑스가 처음에 의도한 공식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 물론, 일상에서 사람들은 "나는 착취당하고 있다." 는 식으로 말하기는 한다. 맑스는 착취이론을 전개하기 전에 밀도있게 게급 개념을 연구하였다. 정치 팜플렛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은 지식인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으로 학문적으로 기술되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당시 맑스는 착취 이론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원숙한 계급 이론을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 맑스는 계급 아이디어를 창조한 것으로 평가받고있다. 물론 막스 베버도 계급이론을 갖고있다. 재미있게도, 맑스와 베버는 모두 계급이론을 전개하면서도 계급의 본질에 대하여는 일관적인 분석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물론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enifesto>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계급을 많이 다루었지만 실질적인 개념장치는 갖추지 못하였다. 맑스는 <자본론> 제 1권을 마무리 한 후에야 비로소 계급 이론을 시도하였고 엥겔스는 마침내 <자본론> 제 3권 52장에서 이제 계급이론을 전개할 때가 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엥겔스는 계급에 대하여 한 페이지 반을 할애했지만 나머지는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고 말았다. 따라서 계급이론의 장단점은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다. 사실, 막스베버도 계급이론을 엥겔스처럼 한 페이지 반을 서술하였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계급은 확실히 어렵고도 현존하는 이슈이다. 계급 아이디어는 상상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계급은 여전히 현존한다. 비록 현대 미국 사회에는 계급과 착취 아이디어에 자유롭지만, 여전히 중간계급(middle class)은 논란이 되고있다. 중간계급이란 용어는 우리에게 완전히 생소한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미국인들은  오직 중간계급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계급이 존재한다면 어찌 한 계급만 존재하겠는가.

2. 착취 이론(Theory of Exploitation)

먼저, 애덤 스미스의 노동 가치설을 살펴보자. 맑스는 상품생산사회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어떻게 구별하였는가. 애덤 스미스는 상업사회를 해명하기위해 노동가치설을 이용하였다. 맑스는 상이한 유형의 상업사회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색한 상품생산과 자본주의 'capitalist' 생산양식을 차별화하였다. 맑스는 캐피탈리즘 'capitalism' 이란 용어를 사용해본 적이 없다. 맑스는 캐피탈리즘 대신에 캐피탈리스트capitalist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아담 스미스와 더불어 당시 맑스도 자본주의에 관한 개념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독특성은 노동력을 상품으로 본다는 점이다. 맑스의 계급이론과 착취이론의 포인트는 노동력의 상품화에 있다.

+ 노동 가치설(labor theory of value)
노동가치설은 존 로크와 아담 스미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미, 존 로크는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하여 창조된다고 밝혔다. 이를테면, 우물의 물은 모든 사람에게 속한는 것이므로 누구라도 그 물을 퍼내었다면 그 물은 퍼낸 자의 것이다. 로크는 그 물은 퍼낸 자의 노동 생산물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 물의 가치는 퍼내는 데 필요한 노력과 더불어 그 물을 퍼내기 위한 도구, 즉 바가지 달려있다. 즉, 물의 가치는 물에 투입된 노동의 양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것이 로크의 포인트이다. 이것은 정말 멋진 재산론이자 노동가치론이 아닐 수 없다. 애덤 스미스는 로크가 밝힌 이러한 재산론을 노동가치설이라고 명명하였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가치는 노동을 통하여 창조된다(all value is created by labour)고 주장하였다. 재미있게도 애덤 스미스는 노동 가치설을 이용하여 부의 분배(distribution of wealth)를 설명하고자 했으므로 로크의 노동가치설로부터 퇴행한 것이았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노동가치설을 이용하여 부와 소득의 분배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럼, 노동가치설과 부의 분배는 어떤 관계를 갖고있는가. 맑스에 따르면 생산은 가치를 분배한다. 맑스는 애덤 스미스의 노동, 자본, 토지를 생산요소라고 말하면서 이것들로부터 임금, 이윤, 지대가 나오는데 이 가치들은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에게도 모순되지 않는다. 애덤 스미스가 모든 가치는 노동을 통하여 창조된다고 하면서 의도했던 것은 인간 본성론(theory of human nature)이었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토지에 대한 사소유권뿐만 아니라 자본 축적도 없었다. 따라서 모든 가치는 노동을 통하여 창조된다. 그러나 이것은 현존하는 자연조건들(natural conditions of existence)위에서 단지 상상된 것이다. 모든 복합적 사회에서는 사소유권이 존재하고 자본 축적도 가능하다. 잘 알다시피, 생산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지주는 지대(rent)를 받고 또 자본가는 자본을 노동자에게 선대(advance)한다. 자본의 선대없이는 노동자는 일을 할 수가 없댜. 따라서 물주는 생산과정에서 창조된 가치의 일부분을 마땅히 요구한다. 즉, 자본가는 출자하는 위험을 무릎썼고 또 노동과정을 감시감독하기 때문에 그 위험부담과 감시감독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당신은 토지 없이 농사지을 수가 없다. 모든 활동에는 장소(site)가 요구되는데 어떤 사람이 이미 그 토지를 갖고 있다면 당신은 그 토지에 대한 보상을 해야만 이용할 수 있다. 그것이 지대(rent)이다. 아담 스미스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자본가가 이윤을 수취한다는 것은 공정한가. 토지주가 지대를 수취한다면 그 지대는 소득인가. 사실, 우리는 지대나 지대 추구행위에 대하여 불편하다. 누군가가 지대를 추구하면 그것은 악한 행위로 보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대추구행위를 독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대추구행위는 독점적 소유권에서 나오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독점(monopolies)을 선호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경쟁과 자유시장을 원하지 독점을 원하지 않는다. 독점이란 아니좋은 용어이다. 분명, 독점은 문제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덤 스미스는 생산요소에서 나오는 가치, 부, 소득분배는 공정하다고 말하면서 독점은 생산과 생산의 지속을 위해서는 필연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맑스는 이러한 애덤 스미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사실, 오늘날 착취 이론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있다. 그러나 노동가치설은 폐기되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 정치경제학자, 사회학자, 정치사회학자들은 노동기치설을 포기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착취이론을 전개할때 노동가치설보다는 지대에 중점을 둔다. 그럼, 맑스는 아담 스미스의 이론을 어떻게 급진화 시켰는가. 알다시피, 맑스는 아담 스미스를 경계하였다. 즉, 맑스는 세가지 생산요소, 토지, 자본, 노동에서 나오는 가치, 소득, 부의 분배가 공정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럼, 가치는 무엇인가. 맑스는 매우 간단한 방정식으로 정의내렸다.

 c+v+s

여기서 c는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이다. 불변자본이란 자본가가 노동과정이 가능하도록 하기위하여 선대한(advance) 자본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불변자본을 사용하여 생산과정에 이용되는 토지의 질을 개량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토지에 빌딩을 건축한다면 그 건축비용은  생산과정을 통하여 회수(return)되어야 한다. 또 불변자본은 생산물의 가치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다음, v는 가변자본이다. 가변자본이란 임금(wages)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s는 잉여생산물(surplus product)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생산물을 생산하고 그것을 판다. 그리고나서 당신은 생산을 위하여 선대한 자본을 회수하고 또 생산과정에 참가한 노동자를 위하여 임금을 지불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면 당신의 사업은 곧 망하게 된다. 모든 영리한 기업가(entrepreneurs)는 잉여를 낳고자 한다. 그들은 처음에 시작했던 투자금보다 조금더 갖고가기를 원한다. 그렇지않다면 그들은 뭣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그들은 뭣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겠는가. 그들은 뭣 때문에 감시감독하면서 생산과정에 참가하겠는가. 그들은 뭣 때문에 생산이 잘될지 안 될지 고민하겠는가. 그들은 잉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잉여는 생산물의 가치(the value of a product)이다. 그럼, 불변자본은 투자인가. 맑스가 아담 스미스로부터 빌려온 것은 생산요소(factors of production)이다. 그러나 맑스는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명제에 힘을 불어놓고자 하였다. 맑스는 묻는다. 불변자본이란 무엇인가, 불변자본은 어디서 나오는가. 맑스는 불변자본은 노동에서 나온다고 답하였다. 그 노동은 축적된 노동이다. 그 축적된 노동은 자본축적이 이루어지기 전에 수행된 축적된 노동이다.  자본가는 축적된 노동을 전유(appropriated)하였고 이제 그것을 고정자본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모든 자본은 한때 노동의 생산물이었고 지금엔 우리가 말하는 투자이다. 다음, 가변자본이란 무엇인가. 가변자본은 임금이다. 맑스는 잉여생산물 억시 노동과정의 산출물이고 노동자의 생산물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맑스는 자본, 토지, 노동 사이의 공정한 분배라는 아이디어를 피하면서 이론을 전개했던 것이다. 맑스는 이렇게 모든 가치는 노동에서 창조된다고 하면서 로크와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설을 재구성하였고 또 착취 이론을 출발하였다. 착취 이론에 따르면 자본가는  자본을 노동자에게 선대한다. 사실, 자본가는 이전 생산사이클에서 노동자들로부터 축적된 노동을 전유하여 자본화한 것이었다. 이제 자본가는 노동에 의하여 생산된 잉여물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 노동자는 임금을 받고 만족하지만 이 지점에서 착취가 출발한다. 착취는 자본가가 생산과정에 투입했던 것들과 관계있다. 즉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그리고 생산과정이 끝난 후에 자본가가 손에 넣은(pocketing) 잉여물의 양과 관련되어 있다. 맑스에 따르면 이것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사회 민주주의 노동조합(social democratic trade union)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존속시키면서 고용주와 집단적인 바겐닝과 협상을 통해서 자본가를 위한 합리적 이윤과 노동자를 위한 높은 임금을 창조하고자 한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이것은 매우 불합리한 착취 제도라고 역설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이윤율은 잉여물이 지출(불변자본+가변자본)에 의하여 나누어진 것이다. 그럼, 맑스가 말한 인색한 샹품생산petty commodity production은 자본주의 생산양식capitalist mode of production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애덤 스미스의 상업사회, 시장경제, 자본주의에 대한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맑스는 복합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맑스에 따르면 인색한 상업사회(petty commercial society)란 먼저, 상품(commodity)을 갖고 시장에 가서 이 상품을 화폐로 교환한다. 당신은 교환된 화폐를 가지고 필요한 상품을 구입한다(c-m-c). 이 자체는 상업사회이다. 이것은 상품 생산이지만 자본주의는 아니다. 맑스는 확실하지 않았던지 다소 산만하다. 19세기 초 미국사회는 자본주의였는가. 맑스는 혼란스러워 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인의 대다수는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매우 상업화된 사회였고 고도로 발전한 시장경제였지만 개인의 자본축적은 비교적 적었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농부였거나 자영업 위주의 장인 또는 상인으로서 생산활동에 참가하였다. 이를테면, 구두쟁이는 구두를 생산하였다. 구두쟁이는 구두제조에 특화되었지만 기꺼이 닭을 기르고 계란을 얻기도 하였다. 따라서 구두쟁이는 계란이 다 떨어지면 구두를 갖고 시장에 가서 팔고 그 돈으로 계란을 산다. 그래야 구두쟁이는 계란후라이를 먹을 수 있다. 이것이 인색한 상품생산의 포인트이다. 매우중요한 명제로서 맑스는 말하기를 "생산의 목적은 욕구충족이다(the purpose of production is satisfaction of needs)"라고 하였다. 이를테면, 당신은 물건을 생산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욕구를 채워야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당신은 욕구를 초과하여 물건을 과잉 생산할 수 있다. 당신의 욕구는 시장에서 화폐를 통하여 타인의 욕구와 교환된다. 이제 맑스는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에서 시장과 상품교환을 소외의 근원으로보았던 때보다 훨씬 발전한 것이다. 맑스에 따르면 인색한 상품생산 과정에서는 어떤 소외도 없었지만 자본주의는 전혀 다른 공놀이이다. 우선, 자본주의 경제싸이클은 화폐로부터 출발한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자본주의자들에 대한 악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들을 돈자루(moneybags)라고 칭하였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맑스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경제 시스템에는 자본을 축장하는 자들이 있고 그들은 시장에서 더많은 돈을 얻기위하여 상품을 생산한다는 식으로 말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가 확실하고 명백하게 상업사회 경제와 구별되는 매우 간단하고, 통찰력있고, 정확하고, 설득력있는 주장이다. 덧 붙여서, 왜 자본가는 처음 시작과정 때보다 더많은 자본을 창출하는가.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왜 자본가들은 자본을 선대하는 위험을 무릅쓰겠는가. 자본가는 더많은 돈으로 보상받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자체로서 명백한 이유이다. 또,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경쟁 시장(marketplace)이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인류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경제이고 거기에는 기술진보가 있다. 자본가들은 더 많은 자본을 창출하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자본가는 이 자본을 생산과정에 재투자하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그 자본으로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기술이 중단된다면 경쟁에서 밀려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는 초기에 출발했던 생산과정에서보다 훨씬 더많은 자본을 회수해야한다. 따라서 가장 이타적인 자본가라할지라도 생산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더많은 자본을 회수해야한다. 이를테면, 어떤 자본가는 자신이 매우 정직하고 오직 빈민들을 위해 직업을 창출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이타적인 자본가는 빈민들이 교외에 주택을 마련하고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도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는다. 이제 이타적인 돈자루에 대하여 생각해볼 때가 왔다. 그 불쌍한 자본가는 더 많은 돈을 회수해야한다. 그렇지않으면, 그는 내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경쟁이 그 이타적인 자본가를 쓸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맑스의 포인트이다. 맑스는 큰 변화가 도래했다고 말하였다. 이제, 생산의 목적은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이윤의 창출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은 필연적이댜. 자본가들은 서로 어떻게 경쟁하는가. 도대체 자본가들은 어디서 더많은 자본을 회수하는가. 도대체 자본가들은 어떻게 자본으로 상품을 사면서도 결국엔 더많은 돈을 회수하는가. 자본가들은 우리를 속이고 있는가. 자본가들은 상품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가. 맑스는 아니라고 말하였다. 자본가가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고 난 후에 이윤을 챙기다면 다른 자본가가 나타나서 그 물건을 덜 비싸게 팔면서 더 많이 팔고 더 많은 이윤을 챙긴다. 그 자본가는 높은 가격을 낮게 내리면서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정해진다. 따라서 더많은 자본은 자본가의 속임수에서 나올 수 없다. 더 많은 자본은 순환(circulation)에서 나올 수 없고 어떻게든 생산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그럼, 어떻게 더많은 자본이 창조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맑스는 상품으로서의 노동력 아이디어를 끌어왔다. 보통, 자본가가 하는 일은 특정한 상품을 시장에서 구입하는 것이다. 이 특정한 상품이란 노동을 말한다. 맑스에 따르면 노동은 상품이다. 이 노동상품은 소비되었을때 그 상품 고유의 가치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상품이다. 이를테면, 원료(raw material)는 노동과정에서 소비되고 이 노동과정에 투입된 노동의 양은 생산된 상품의 가치로 이전된다. 예를들어, 당신은 냉장고를 생산하기 위하여 강철과 알루미늄 등을 이용한다. 당신이 구입한 강철과 알루미늄의 생산에 투입된 가치는 바로 당신이 생산하는 냉장고의 가치에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강철과 알루미늄 원료상품으로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는 없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상품은 노동력이다. 맑스는 노동자가 팔아야 하는 것은 노동일 수 없고 노동력(labour power)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탈무드의 꼬인 말 같기도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맑스의 노동력 아이디어는 매우 중요하다. 존 로크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가치가 노동자에 의해 창조되고 노동자에 속한다는 것이 옳다면 당신이 노동력을 팔았을 때 자본가는 당신을 속여야한다. 왜냐하면 자본가는 잉여가치와 이윤을 취해야하기 때문에 당신 노동에 대한 완전한 가치를 지불할 수 없다. 이것이 맑스의 포인트이다. 따라서 자본가는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 즉 일능력(capacity of work)을 사야할 것이다. 맑스는 말하기를, "이 시스템에서 자본가는 노동력에 대하여 적절하고 올바른 시장가격을 지불하고 있는가." 라고 물었다. 근로자는 사기당하지는 않지만 착취당한다. 그럼, 왜 그렇게 노동력이 문제가 되는가. 시장에서 서로 교환되어야 하는 것들은 항상 등가물(equivalents)이 있다. 따라서 속임수는 없다. 근로자는 사기당하는 것이 아니다. 근로자들은 노동력의 댓가로 적절한 값을 받는다. 그럼, 노동력의 값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확히 여타 다른 상품의 가격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력의 재생산 가격이기 때문이다. 그 노동력 상품을 재생산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가. 노동력이 상품이라면 분명, 노동력의 가격은 그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는데 들어간 비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를테면, 당신의 노동력상품 가격은 당신의 주택비용과 생활비용 그리고 노동력의 연장된 재생산을 포함한다. 그 가격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한 양육비와 교육비와 인적 자본투자 등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이 노동자를 위해 보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 노동자는 자신의 일능력, 즉 노동력이 보상받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본가의 감시하에 일할 것이고 자본가는 노동자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을 확보한 후에 노동자에게 또다른 서너 다섯시간의 일을 시켜서 잉여가치나 이윤을 창출할 것이다. 이것이 맑스로부터 나온 천재적인 아이디어이다. 이것이 계급과 착취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맑스의 포인트였다. 물론 맑스는 자본주의를 싫어하였고 착취도 싫어하였다. 맑스의 분석 논리는 매우 냉정하였고 가치판단에 눈을 감았다. 맑스는 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작동방식이다. 맑스는 그것을 싫어하였고 그 감정표현을 멈출 수가 없었다.

+ 역사상의 계급
먼저, 게급에 대하여 살펴보기 위하여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으로 돌아가자. 여기에는 몇가지 이슈가 있다. 맑스는 계급을 초-역사적인 범주(trans-historical category)로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떤 면에서 <자본론>의 주장과 모순된다. 맑스는 부르조아지를 신계급이면서 진보계급이라고 말한다.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은 자본론이 완성되기 거의 20년 전에 착취 이론없이 쓰여졌다. 맑스는 이전의 모든 존재했던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하였다. 이 아이디어는 이미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 있었는데 맑스는 이 계급투쟁을 역사 진화를 설명하는 원인기계론(causal mechanism)으로 개발시키고자 했었다. 계급투쟁이란 노예의 주인에 대항한 투쟁, 농노의 영주에 대항한 투쟁,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부르조와에 대항한 투쟁을 말한다. 보다시피, 이 계급투쟁 개념은 초-역사적인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명백히 잘못되었다는 데 있다. 이 계급이론은 맑스의 착취이론과 관련해도 잘못되었고 실제로 경험적으로도 잘못되었다. 계급이론은 맑스의 착취이론과 들어맞지 않는다. 착취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독특한 것이라면 계급 문제는 노동력이 자유로운 자본주의에서만 가능하게 된다. 양의적인 의미dual sense of the term로서 노동력은 먼저, 법적으로 자유롭게 되었고 다음,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 노동력은 팔 수 있게 되었다. 노동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계급이란 용어를 써서는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의 계급 이론은 자기모순인 것이다. 또 계급 이론은 경험적으로로 오류이다. 역사적으로 계급이 존재해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예들이 주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서 고대사회가 전복되었는가. 알다시피, 그렇지않다. 맑스도 인정했듯이, 고대 로마제국은 게르만 부족의 침략에 의하여 무너졌다. 미국 남부 주의 노예제는 노예들이 노예주인에 대한 반란으로 무너졌는가. 그렇지 않았다. 북부 주의 자본가들이 남부주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킨 후에 노예제가 무너졌다.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조와지를 전복하기 위햐여 반란을 일으켰는가. 그렇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났던 나라들이 있다. 그러나 그 프롤레타리아들은 결코 프롤레타리아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1949년 중국에는 얼마나 많은 프롤레타리아가 있었는가. 그들은 분명히 압도적인 농부들이었다. 당시 농부 대중들 마오쩌둥의 리더쉽에 따라서 토지를 요구하면서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었다. 1917년의 러시아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사실과 다르다. 또  종속 계급이 새로운 사회에서 지배계급이 될 것이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즉, 노예들은 지주가 되지 못하였고 농노들도 부르조와지가 되지 못했다. 알다시피, 프롤레타리아는 중국과 소비에트에서 지배계급이 되지 못하였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부르조와지는 지배계급이고 역사 최초로 진정한 계급이라고 말했다. 또 지주가 계급이 아닌 이유는 지주가  경제적 용어로 규정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지주는 시장에서 경쟁이나 교환에 따라서가 아니라 관습법에 따라 규정되었던 것이다. 또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조와 계급은 매우 혁명적인 세력이었다고 강조하면서 실제로 모든 사회를 전환(transformed)시켰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맑스의 자기모순이다. 맑스에 따르면 부르조아세력은 이전의 명예로운 전통적 신분을 계급의 위치로 전환시켰다고 강조하였다. 이전의 전통적인 의사, 판사, 성직자 신분은 이제 계급으로 전환되었다. 그들의 권력은 전통적으로 명예에 기초했지만 이제 급료가 지불되는 지위로 전환된 것이다. 맑스는 부르조와지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진보적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물론, 맑스는 본질적으로 부르조와지를 싫어했지만 현대사회에 기여한 공헌에 대하여는 고맙게 생각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부르조와지는 생산도구를 지속적으로 개발하였고 지난 100년간의 생산력 발전은 이전의 모든 사회를 통틀은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방대했다. 이것은 어찌보면 자본주의 애호가의 말처럼 들린다. 물론 맑스는 그렇지 않았다. 분명, 맑스는 자본주의는 스스로 붕괴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럼, 자본주의에는 어떠한 계급이 존재하는가.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에는 두 계급, 브르조와지 계급과 프롤레타리앗 계급, 즉 돈자루와 근로자가 있다. 알다시피, 노동자들은 돈자루들에 의하여 착취당한다. 계급투쟁은 여기서 비롯되고 결국 결국 혁명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맑스의 포인트이다. 그러면 중간계급은 어디 있는가. 1867년에는 그렇게 많은 프롤레타리아가 존재하지 않았다. 단,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인구의 대다수가 산업 노동자였긴 하지만 그들은 지배계급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구의 다수를 점하였고 착취당하고 억압당하였다. 그러한 산업 노동자는 서방사회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점에 도달하지 못하였고 산업 노동자는 감소해오고 있는 중이다. 현재, 미국의 산업근로자는 전체 인구의 15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그럼, 중간계급은 어디 있는가. 맑스는 브르조와지와 프롤레타리앗 사이에는 기본적인 대립이 존재한다고 하였지만, 당시 착취이론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시원스럽게 설명할 수 없었다. 따라서 착취 이론을 연구해보라. 당신이 <자본론>을 갖고 한번 시도해보라. 분명, 프롤레타리아는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다는 것과 착취당한다는 것 사이에는 서로 충돌하는 모순이 존재한다. 물론 이 모순은 화해 불가능하다. 그럼, 중산계급은 어떤가. 1848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르조아지도 프롤레타리앗도 아니었다. 맑스는 정치 팜플렛<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조차 중간계급이 사라지고 있다고 하면서 대다수 농부들과 장인들, 상인들이 사라질 것이고 그들 중에 극소수는 대자본가가 될 것이지만 압도적인 대다수는 근로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맑스의 이러한 주장은 통찰력이 있어보인다.  왜냐하면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이 발간된지 약 100년 후, 사회적 흐름은 그와 같이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영업(self-employment)은 줄어들고 있었고 임금 노동자는 증가하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인구의 70에서 80퍼센트는 농업과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농업인구는 1퍼센트 내지 2퍼센트에 불과하다. 자영업은 오랜동안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맑스가 간과했던 점이 있다. 그것은 두가지이다. 첫째, 실제로 자영업 인구의 감소는 더 이상 없다는 점이다. 사실, 자영업 인구가 다소 증가하였다. 그것은 나라마다 다르다. 일본은 크게 증가하였고 미국은 다소 증가하였다. 자영업은 자생력이 매우 강하다. 이를테면, 수퍼마켓의 구석에는 조제식품 코너(deli shops)가 있다. 그들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않다. 또 사람들은 신발을 고치기 위하여 구두점에 갈 수 있다. 250달러를 주고 새로 사느니 25달러를 주고 고치는 것이 낫기 때문이댜. 말하자면, 대량생산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장인들은 질높은 상품을 생산을 한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임금 노동자를 육체노동자와 동일시하여 개념화하였다. 알다시피, 진보한 국가에서 육체 노동자는 사회적으로 소수이면서 수동적 노동자이다. 그러나 전지구적으로 볼 때, 육체 노동자를 요구하는 제조업 등 산업활동은 제 3세계로 지역화되고있다. 미국과 유럽대륙의 육체 노동자는 소수이다. 오늘날 거대한 새 중간계급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화이트 칼라 근로자이다. 맑스의 개념으로 볼 때  이 중간계급은 거의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럼, 그들은 어떤 가치를 창출하는가. 그들은 착취를 당하는가. 사장은 그들을 착취하는가. 화이트 칼라 근로자는 사장에 의해서 착취당하는가. 그렇지 않다. 새로운 중간계급은 맑스의 분석에 들어맞지 않는다. 따라서 착취 이론은 더 이상 힘을 못쓰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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