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맑스, 니체, 포로이트, 베버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
맑스, 니체, 프로이트 그리고 베버는 서로 유사점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비판 이론가였다. 맑스, 니체, 프로이트, 베버는 모두 인간 마음 속에 있는 것들에 관하여 비판적으로 분석할 것을 제시하였다. 이를테면, 비판 이론가들은 말하기를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은 반드시 당신이 생각해왔던 것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당신은 자신의 의식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아라." 라고 한다. 이들 모두 공통적으로 그렇게 주장했다. 실제로, 맑스는 각 시대의 지배 아이디어는 지배 계급의 아이디어라고 말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을 자기의 아이디어라고 생각하기 쉽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말하기를 "당신의 계급을 말해보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갖고있는 그 아디디어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겠다." 라고 하였다. 또 니체는 말하기를 "당신의 도덕적 기준을 말해보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 도덕이 비도덕적이라는 것을 보여주겠다."라고 한다. 또, 프로이트는 말하기를 "여기 누워서 당신의 아이디어를 말해보라. 나는 당신이 경험했던 이전의 섹스 생활을 상기시켜줄 것이고 당신은 진정한 자기존재를 발견할 것이다." 라고 한다. 그러나 베버는 이들 보다는 좀 더 복잡하다. 베버의 포인트는 정당성(legitimacy)과 지배(domination)아이디어에 있었다. 나중에 맑시스트들은 베버의 이 정당성과 지배 아이디어를 공유하게 된다. 베버의 근본적인 아이디어는 니체로부터 나왔다. 베버에 따르면 개인은 자기의 순종원칙(the principle of submission)을 자기 자신 안에 내부화한다. 이것이 베버가 의도했던 지배 개념의 포인트이다. 지배아이디어는 어디에서 나오는가. 지배는 얼마나 유지될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베버가 이해하고자 했던 핵심문제이다. 베버를 비롯한 맑스, 니체, 프로이트는 모두 포스트모던적인 분석가라고 할만 하다. 그들은 모두 비판 이론가들로서 인간의 의식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았다. 분명, 맑스, 니체, 프로이트, 베버 사이에는 근본적인 유사점과 차이점이 존재한다. 맑스와 프로이트는 모두 감각적인 인간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 의식을 비판하면서 물질적인 실재(material reality)을 강조한 유물론자였다. 맑스는 감각적 인간 경험을 경제로 환원시켰던 환원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맑스는 말하기를 "당신의 경제적 위치를 말해보라. 그러면 나는 당신의 경제적 관심이 무엇인지 알겠다. 당신은 경제적 관심에 따라서 행동하고 생각한다. 따라서 나는 당신의 마음 속에 있는 그 아이디어를 알겠다." 라고 한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가 주장했던 '합리적으로 행동하는 개인' 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맑스와 애덤 스미스도 서로 유사한 점이 있는 것이다. 단, 맑스는 인간 감각의 합리성을 비판적으로 제시했던 반면에 애덤 스미스는 그것을 긍정적(affirmatively)으로 제시하였을 뿐이다. 맑스는 인간 감각을 비판하면서 결국엔 인간의 감각적 경험을 경제로 환원(reductionism)하였다. 독특하게도, 맑스는 경제사회의 진화에 대한 역사적 인자(agent)를 제시하였다. 맑스는 선한 사회good society에 대한 아이디어도 갖고 있었다. 맑스는 우리를 선한 사회로 이끌고 갈 역사적 인자가 무엇인지 제시하였다. 아마도 미래세계에 대한 맑스의 비전vision을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맑스 이론의 강점중에 하나는 선한사회good society에 대한 비전이 있다는 점이다. 맑스는 선한사회에 어떻게 갈 수 있는지을 알고 있었다. 만약, 미래 사회에 대한 해답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면 맑스에게 물어도 좋겠다. 한편 프로이트는 미래사회에 대한 비전을 갖고있었는가. 프로이트는 미래사회에 대한 해답을 갖고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를테면, 프로이트는 당신을 소파에 눕힌다. 이어서 당신은 프로이트의 도움으로 고통의 원인인 억압된 욕망을 발견할 것이다. 당신은 마음 속의 절망, 걱정, 그리고 히스테리 등 모든 고통을 제거하게 될 것이다. 물론 자신 안에 억눌려 있는 질료들을 발견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려있다. 프로이트는 단지 그것을 찾도록 당신을 도울 뿐이다. 그러면, 프로이트는 선한 시회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을 갖고있었는가. 프로이트는 다소 애매모호한 자세를 취하였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현대도시사회는 억압으로부터 창조되었다. 따라서 도시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통제하고있다. 인간 무의식 이드Id 안의 추악하고 공격적인 많은 질료(stuff)들은 억압되지 않으면 안된다. 애매하게도, 프로이트는 도시를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도시의 어두운 면과 인간의 어두운 면을 동시에 보았던 것 같다. 그러면 프로이트는 니체와 공통되는 점이 있는가. 프로이트와 니체는 모두 인간의 감각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하면서 인간의 감각적 경험은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아이디어의 근거라고 하였다. 따라서 니체는 인간 의식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고자 했던 것이다. 니체는 베버처럼 권력과 지배를 이슈화하였다. 니체와 베버의 포인트는 경제나 섹스가 아니라 권력이었다. 재미있게도, 니체와 베버는 홉스로 되돌아간 것이었다. 니체와 베버에 따르면 인류의 모든 역사는 권력을 위한 투쟁이다. 니체는 이것을 매우 급진적으로 전개하였다. 실제로, 니체는 우리들 마음 속에 있는 가장 숭고한 아이디어가 이상의 작업실(workshop of ideals)에서 강제와 고문을 통하여 더럽게 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니체가 말하는 강제 도구란 무엇인가. 맑스의 역사 박물관은 생산수단을 전시한다. 박물관은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가옥구조는 어떠했는지, 어떤 도구를 제작했는지 보여준다. 이것이 현대의 박물관이다. 이 현대 박물관은 맑시스트에 의하여 설계된 것은 아니지만 맑스의 아이디어를 많이 참고한 것이다. 그럼, 니체의 박물관은 어떤가. 먼저, 당신은 단두대를 발견하고나서 고문도구를 발견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이고 또 고문의 역사이다. 이 지점이 니체와 베버가 서로 만나는 포인트이다. 니체와 베버는 인류의 역사는 진화하지만 단점(down side)을 가지고있다고 하였다. 현대사회에서 우리의 육체는 더이상 고문당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의 영혼(soul)은 포로로 붙잡혀있다. 이것은 분명 기쁜 이야기가 아니다. 이상, 맑스, 니체, 프로이트, 베버 사이의 유사점과 차이점을 살펴보았다.
2. 역사적 맥락에서 본 막스 베버Max Weber
막스 베버는1864년 태어나서 1920년 타계하였다. 막스 베버는 더 오래 살 수도 있었을텐데 폐결핵(pneumonia)으로 사망하였다. 운좋게도 베버는 나찌즘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친-나찌였다는 등의 불쾌햔 질문을 피할 수 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아마도 베버는 나찌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베버는 합스부르크 제국(Hapsburg Empire)의 살쯔버그Salzburg의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자랐다. 살쯔버그Salzburg는 실제로 대주교가 지배하던 독립 캐돌릭 도시였다. 18세기 후반까지 대주교(archbishops)들은 반-개혁(counter-Reformation)을 너무 강하게 밀어붙였다. 따라서 로만 캐돌릭이 아닌 자들은 그 도시에서 떠나는 게 더 나았다. 베버의 가족은 독일의 라인란트Rhineland로 이주하였고 빌레필트Bielefeld에 정착하였다. 거기서 베버 가족은 섬유제조업을 시작하였고 성공을 거두었다. 베버의 부친인 막스 시니어 베버는 두 아들 중 막내였다. 사업은 성공적으로 잘 운영이 되었지만 두 가족을 먹여살리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래서 막스 시니어 베버는 무역을 배웠고 나중에는 공무원이 되었고 그 다음에는 정치인이 되었다.
1864년 막스 베버는 당시 부친이 머물고 있던 독일 동부의 에어푸르트Erfurt에서 태어났다. 막스 베버의 모친은 팔렌슈타인Helene Fallenstein 이었다. 팔렌슈타인은 매우 멋지고 예민한 여성이었는데 막스 시니어 베버와의 사이에 8남매를 두었다. 막스 베버의 동생인 알프레드 베버는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철학자이면서 사회학자가 되었다. 알프레드 베버는 당시 산업지역 이론theory of industrial location으로 유명했는데 하이델베르그 대학의 교수였다. 1933년 알프레드 베버는 나찌에 의하여 해고되었지만 전쟁 후 1945년 대학에 복귀하였다. 사실 알프레드 베버는 막스 베버 보다 더 유명했다. 한편 막스 베버의 모친인 헬레나는 멋진 여성이었다. 헬레나 팔렌슈타인은 독실한 칼빈주의자였고 사회이슈와 박애주의에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베버의 사회감각(social sensitivity)은 이런 모친의 영향을 받았다. 예민한 헬레나와 권위적인 막스 시니어 사이에는 대단한 갈등관계가 있었다. 막스 시니어는 정치적으로도 매우 보수적이었다. 그 부부 사이에는 대단한 다툼이 있었다. 베버는 어린시절 부친을 편들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오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해낸 자는 자신을 자신의 부친과 동일시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베버는 성장하여 결국엔 모친편이 되었다. 막스 시니어는 에어푸르트Erfrut 지방자치단체의 공무원으로서 출발하였다. 그리고나서 국민자유당National Liberal Party의 하원의원(deputy)이 되었다. 그런데 그 정당은 자유주의와는 전혀 관계가 없었던 보수주의 정당이었다. 당시 국민자유당의 당수는 철의 재상이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였다. 비스마르크는 매우 보수적이었다. 베버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수학하였고 그리고나서 베를린에서 법학과 농업사(agrarian history)를 수학하였다. 실제로 베버는 법학이론가, 역사학자 그리고 경제학자였고 마지막으로 사회학자였다.
1892년 베버는 마리안느Marianne Schnitger와 결혼했다. 사실, 마리안느는 베버의 재종조카(second-cousin)였다.
1895년 베버는 프라이베르크 대학의 경제학교수가 되었다. 그 후 베버는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옮겨가서 나머지 생애를 보냈다. 베버는 정치학 교수이기도 하였다. 베버는 초기에 학문적으로 매우 열정적이었다. 베버는 법학과 역사학 박사학위 논문을 발간하였다. 법학박사학위는 중세 이탈리아의 상업법에 관한 것이었고 역사학 박사학위는 로마의 농업사에 관한 것이었다.
1897년 베버는 매우 심한 신경실조(nervous breakdown)에 빠졌다. 그해 여름에 있었던 그의 부친과의 불화 때문이었다. 당시 베버는 베를린에 있는 부모를 방문했었다. 그때 모친은 부친에게 베버가 정착하고 있던 하이델베르크를 방문하겠노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친은 모친에게 안된다고 하면서 당신이 가면 누가 식사를 준비하느냐고 따지면서 다그쳤다. 그 자리에 있던 베버는 부친을 향하여 반발하면서 모친이 원하면 자신을 방문할 수 있다고 대꾸하였다. 이것이 베버가 처음으로 부친에게 대항했던 반발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 부친은 3개월도 채 안되어서 타계하고 말았다. 베버는 부친이 타계하자 심각한 신경실조를 겪었다. 부친이 어떤 일로 타계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확실히 이 사건과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베버의 병은 매우 심각했는데 운좋게도 정말 멋지고 똑똑한 부인인 마리안느의 도움으로 신경실조로부터 회복할 수 있었다. 베버는 5년동안 가르칠 수도, 쓸 수도, 읽을 수도 없었다. 베버는 방 구석에 쪼그려 앉아서 그냥 멍하니 쳐다보기만 하였다. 마리안느는 그런 베버를 데리고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1902년 베버는 결국 회복되었고 하이델베르크로 돌아가서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지만 예전처럼 정규적으로 가르치지는 못하였다.
1904년 베버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미국을 방문하였다. 베버는 그 당시 세인트 루이스 세계박람회에서 훌륭한 글을 남기기도 했다.
1906년 베버는 엘자Elsa von Richthofen와 사랑에 빠졌다.사실, 엘자는 베버의 친구이자 동료였던 정치사회학자 야페Jaffe의 부인이었다. 이것은 베버의 생애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엘자와의 관계는 베버가 죽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실제로 베버의 임종을 지켜봤던 이는 마리안느가 아니라 엘자였다. 엘자와 마리안느는 매우 절친한 친구였다. 그런데 베버는 마리안느보다는 엘자와의 관계를 통하여 진정한 에로틱 경험을 할 수 있었다. 베버는 엘자와의 관계에서 에로티시즘을 재발견하면서 현대사회modernity와 생활에 대한 아이디어를 바꾸기 시작하였다.
1913년부터 1919년까지 베버는 종교에 대한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것은 대부분 자신의 저작에 햔 비평에 대하여 답하는 글이었다. 베버는 여러 종교들을 논박하면서 어떤 종교도 그리스도교 만큼 합리화(rationalization)의 과정을 거치지는 못했다고 강조하였다.
베버는 1914년부터 20년까지 경제와 사회에 관하여 작업하였는데 끝내지 못하고 1920년 타계하였다. 한편 베버의 연인인 엘자 폰 리히토펜은 저명한 독일가문 출신으로서 리히토펜 세자매는 모두 아름다웠다. 엘자는 야페Jaffe의 부인이 되었고 프리다Frieda 리히토펜은 로렌스D.H Lawrence와 열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다가 끝내는 결혼하였다. 로렌스는 자신과 리히토펜과의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Sons and Lovers>를 발간하였다. 베버는 신경실조 이전의 초기의 작품들에서 주로 고대에 관한 것들을 논박하였다. 1903년에서 1904년까지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를 저술하였다. 1913년부터 1919년까지 세계종교, 중국, 인도, 유대교에 대한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나서 경제와 사회에 관한 작업을 하였는데 끝내지 못하였다. 마리안느는 실제로 베버의 재종조카였다. 말하자면 마리안느의 할아버지는 베버의 부친과 형제였다. 마리안느는 대단한 지성인이었다. 그녀는 1907년 <Wives and mothers in the evolution of law>를 발간하였는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에밀 뒤르켐은 이 책을 리뷰하였다. 그 당시 마리안느가 베버보다 더 유명했다. 베버는 1차 세계대전동안 다른 독일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매우 민족적이었다. 그러나 베버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끔직스러움을 경험하고나서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엘자와의 관계로 인하여 스스로 자유주의로 기울어졌다. 그 당시 자유주의는 절망한 자유주의liberal in despair라고 불릴 정도로 현대성에 저항할 만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베버는 그 후 평생 자유주의자로 남아있었다. 베버는 항상 자본주의는 우리가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생존시스템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현대사회modernity는 자본주의를 대체할 만한 어떤 대안alternative도 갖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베버는 점차적으로 현대사회가 안고있는 단점들을 보여주기 시작하였다. 베버는 "나는 어떤 나은 것도 생각해낼 수 없다. 그렇다고 하여 현대세계가 마법을 상실loss of magic한 것에 대하여 환멸감과 공포감을 느끼지 않는것도 아니다.'' 라고 말하였다. 베버는 민족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베버는 베르사이유 평화조약Versailles Peace Treaty의 대표단의 일원이었고 조약의 48조Article 48를 바이바르 헌법에 삽입하는데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불운하게도 그 바이마르 헌법은 히틀러가 1933년 권력을 거머쥐는데 발판이 되고말았다. 베버가 나찌즘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알아둘 필요는 있겠다. 베버는 나중에 경제와 사회에 관하여 집필하게 되는데 주로 지배이론theory of domination에 관한 것이었다. 베버는 기본적으로 정당한 권력을 지배개념과 연결하면서 맑스사관를 빌려왔다. 베버는 인간역사를 지배 유형subsequent types of domination으로 분류하면서 전개하였다. 따라서 베버의 사회역사는 맑스처럼 생산에 딸린 생산양식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에 딸린 상이한 지배유형을 기술하는 것이다.
3. <프롵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베버는 신경실조로부터 회복한 후에 자신의 첫 대작인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Protestant Ethics and Spirit of Capitalism>을 발표하였다. 베버는 신경실조 이전에는 자본주의와 자유주의 지향자Pro-liberal였다. 베버는 1897년 이전까지는 주로 독일 동부지역의 저개발의 원인을 비롯하여 자본주의가 어떻게 저개발을 극복할 수 있는지에 관하여 관심을 가졌다. 베버는 애덤 스미스나 존 스튜어트 밀의 관점에서 본다면 매우 자유주의적이었다. 그 후 베버는 신경실조을 겪게 되자 니체처럼 되어갔다. 베버가 이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작업할 당시 독일의 지배적인 지적 압력intellectual force은 맑시즘이었다. 독일의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은 멋지게 민주적인 기초를 세우고 선거에서도 매우 성공적이었다. 베버의 계획은 근본적으로 맑시즘에 정면도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맑시즘에 대한 첫 도전의 발판이자 큰 걸음이었다. 그러면 막스 베버는 무엇과 관련하여 맑스와 다투었는지 살펴보자.
+ 역사적 유물론과 그 진화
맑스의 역사적 유물론에 따르면 역사는 오직 경제적 힘economic forces에 의해서만 설명 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베버는 아이디어Idea도 역사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말하자면 베버가 말하는 아이디어와 문화적 특질들은 경제적 조건들로부터 연역deduce되는 것이 아니다.
+ 인간 동기화human motivation
인간에게 동기를 부여하는 인자와 관련하여 맑스는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었다. 맑스와 관련하여 인간 동기부여 인자는 생존과 경제적 이윤이었다. 그러나 베버는 우리 인간은 경제적 이윤에 동기부여가 될 뿐만아니라 전통tradition에 의해서도 동기부여가 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인간은 가치에 의해서 동기부여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베버는 인간동기에 관하여 맑스보다 더 복잡한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 생산양식
베버에 따르면 맑스가 말하는 역사는 후속하는 생산양식에 의하여 기술될 수 없다. 왜냐하면 권력의 본성nature of power은 시간에 따라서 변화하는데 그 후속하는 역사형태는 인간동기의 상이한 유형에 따라서 결정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역사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것은 권력의 위치에 있는 자들이 어떻게 사람들을 복종케하고 그리고 사람들은 어떻게 그 종속의 원칙principles of subordination을 자신 안에 내부화 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래서 베버는 세가지 상이한 지배의 유형different types of authorities을 개발하였다. 이 세가지 유형이란 전통적 지배, 카리스마적 지배 그리고 자유주의적인 성격의 법-합리적 지배를 말한다. 이 법-합리적 지배는 자유주의를 표현하는 다소 어색한 용어이다.
+ 계급
베버는 계급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계급을 재산관계나 시장에 관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베버는 맑스는 계급은 역사 속에 항상 존재하여왔다고 믿었지만 그것은 오류라고 말하였다. 베버에 따르면 계급이란 오직 현대 시장경제에서 등장한 새로운 현상이다.
4.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사이의 상관관계
베버는 먼저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윤리 사이에는 서로 상관하는 경헙적 증거empirical evidence가 존재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부자와 프로테스탄트교도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인과관계causality가 있다는 증거는 아니었다. 이것은 다소 첫눈에 그럴듯prima facie해보이는 증거였다.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윤리 사이의 인과관계는 아마도 이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있어서 가장 빈약한 부분이겠다. 베버는 자본주의는 과연 무엇이냐고 물었다. 베버는 루터의 소명calling의 개념을 살피면서 이 소명이 자본주의 정신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그리고 베버는 세계의 종교 근원을 살펴면서 이 세속적 심미주의this worldly asceticism, 특히 칼빈의 심미주의와 예정론predestinaion이 어떻게 종교개혁Reformation을 이끌었는지 살펴보았다. 이것들은 중요한 이슈들이었다. 그러나 종교의 계층화와 기원적 결연stratification and affiliation 그리고 사회의 계층화와 관련된 것들은 이 책의 빈약한 부분이겠다. 데이타를 한번 살펴보라. 프로테스탄트국가들은 자본주의적으로 캐돌릭 국가보다 앞서있다. 큰 부자들을 보라. 프로테스탄트교도 부자가 캐돌릭교도 부자보다 훨씬 더 많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그렇게 설득적이지는 못하다고 보겠다. 베버는 자신의 이러한 주장에 다소 확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왜냐하면 베버는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트 윤리 사이의 인과관계를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프로테스탄트교도는 캐돌릭교도에 비하여 더 많은 상속을 받는가. 아니면 프로테스탄트교도이기 때문에 캐돌릭교도보다 더 많은 부를 창출할 수 있는가. 미국역사를 살펴본다면 확실히 첫눈에 그럴듯한prima pacie 증거가 존재한다. 19세기 미국을 생각해보라. 부자들은 먼저 백인-앵글로섹슨-프로테스탄트교도WASP였다. 그리고나서 가난한 이민자들이 미국에 들어왔다. 그들은 아일랜드인들과 이탈리아인들이었다. 그들의 종교는 무엇이었나. 로만 캐돌릭이었다. 그러므로 19세기의 미국을 본다면 그 첫눈에 그럴듯한prima facie 증거는 꽤 설득력이 있다고 보겠다.
5. 자본주의 정신이란 무엇인가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과 관련하여 두 가지 중요한 점을 밝히고 있다. 베버는 먼저 인간의 탐욕greed이 윤리적 명령ethical imperative으로 변신하는 자본주의의 독특성과 다음으로 자본주의의 본성은 합리주의와 계산calculation이라는 점을 꼽았다.
+탐욕은 윤리적 정언명령으로 변신한다.
인간의 탐욕이 정언명령으로 변신한다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점이겠다. 왜냐하면 이전의 맑스는 한 번도 왜 자본주의자들이 갑자기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하는지를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맑스는 자본의 축적동기를 기원적으로 설명할 어떤 이론도 갖고있지 못하였다. 맑스는 단지 자본의 본원적 축적original accumulation of capital은 도둑질이라고 하면서도 한번 자본을 갖게되면 더 이상 도둑일 필요가 없다고 말하였다. 본원적 자본축적은 도둑질에 가깝다. 그러나 맑스는 왜 사람들이 자본을 축적하기 시작하는지 설명하지 못했다. 베버는 재미있게도 대부분의 역사에서 우리같이 밤 낮 일하는 사람들은 적은 돈이나마 은행이나 주식시장 등에 넣는다. 인간역사를 통틀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이 사람들은 바보들이다. 왜 이 사람들은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지 못하느냐. 먹을 거리가 충분하므로 이제부터 즐겨야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하다.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하여 밤낮 일한다. 그것은 어디서 오는가. 베버는 이것은 자본주의의 독특한 특질이라고 하였댜. 베버는 탐욕자가 부자가 되는것은 윤리적 명령이라고 하면서 이것은 현대사회의 독특한 특질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베버가 말하는 자본주의의 본질essence이다. 베버는 자본주의는 현대성의 합리화와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댜.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가 칼빈주의와 예정론 그리고 루터의 소명개념과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자본주의 이전의 정신
실제로 자본주의 이전 사회의 사람들은 현재의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들도 밤낮을 일했지만 생존하기 위해서 일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충분한 양식과 주거를 마련하게 되자 더 이상 돈을 좇아 달려가지는 않았다. 따라서 자본주의 정신은 현대인에게 독특한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은 우리들 각자의 헌신devotion을 돈 버는데 이바지하도록 요구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들의 윤리적 명령이다. 그리고 예정론과 관련하여 부자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더 부자가 되어야겠다. 왜냐하면 부자가 되는 것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타인들을 위하여 직업을 창출하고 있으므로 얼마나 선한 사람인가." 이것이 바로 당신이 부자가 되고싶어하는 이유이겠다.
+ 계산
이것은 베버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베버는 자본주의는 합리적인 경제적 계산으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자본주의 이전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다. 베버는 애담 스미스가 주장한 합리적 계산이론으로 부터 논의를 출발한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합리적이지 못했다. 베버는 우리가 서로에 대하여 노력과 댓가effort and return을 계산하기 시작한 것은 역사적으로 독특한 현상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계산을 통하여 이중부기double bookkeeping를 발명했다. 이 이중부기는 우리가 돈과 정력을 들여서 고안해낸 것인데 이 이중부기가 댓가이자 이윤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합리적인 경제적 계산이 자본주의 정신의 키포인트이겠다. 이 두가지을 명심하자. 일을 열심히 해서 돈을 벌기위해서는 당신은 먼저 선한 사람이어야 한다. 당신은 오직 이타적인 행위를 통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 다음, 당신은 합리적인 이중부기를 함으로써 진정한 자본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당신이 이중부기를 하지 않는다면 잘 알다시피 당신의 소득과 지출에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진정한 자본주의자가 아닌 것이다. 당신은 발란스를 체크하면서 얼마를 쓰고 얼마를 벌어들이는지에 대하여 기억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 합리주의
역사에는 하나의 큰 흐름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점점 더 합리적이 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베버에 따르면 오직 나이브한 역사적 유물론자들만이, 아이디어는 경제적 조건들에 대한 반성으로써 도출한다고 주장한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은 이미 자본주의 질서 이전에 존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베버는 역사적 유물론자들은 자본주의와 자본축적 이전 단계에서 합리주의와 합리적 계산 아이디어를 발명했어야 했다고 논박하였다.
6. 루터의 소명개념
루터의 소명calling은 매우 중요한 세속적 개념이다. 소명 개념은 중세 캐돌릭이론으로부터 탈출한 대변화였다.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면서 베루프Beruf란 용어를 조어하였다. 베루프Beruf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베루프는 영어로 소명calling으로 번역된다. 베루프는 독일어로 간단히 직업occupation을 의미하지만 소명calling을 의미하기도 한다. Ruf는 독일어로 call이다. 그래서 Beruf란 신이 부르는 것God calls you이다. 당신은 부름을 받았다You got call 등으로 쓰일 수 있다. 소명이란 신을 위해서 뭔가를 해야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소명Beruf, calling의 의미이다. 그러면 신은 무엇 때문에 당신을 부르는가. 그것은 당신이 소명을 잘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중세의 심미주의에서 보면 생활의 핵심essence of life은 죽음이후lifeafer에 있었다. 이를테면 당신은 생뢀로부터 물러났을때 성인saint이 된다. 당신은 거의 먹지 않는다. 당신은 하루동안 단지 계란 하나를 먹고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성인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이 중세로마캐돌릭의 성인성sainthood이다. 그러나 이제 이것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 루터는 생활속에서 직업에 적극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때 바로 당신은 성인이 되는 것이지 생활에서 물러나서 죽음이후를 기다리는 것으로는 성인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루터는 당시 신학에 대단한 변혁을 일으켰던 것이다. 신이 당신에게 바라는 것은 이 세계에서 물러나서 소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의무를 이행하라는 것이었다. 베버는 루터를 평가하면서 루터 또한 전통적인 이론가라고 하였다. 사실 루터가 소명을 강조한 것은 당신이 사회적 지위 안에서 스스로 직업을 수행하라는 의미였다. 이 소명은 결코 변혁을 위한 이론이 아니었다. 이 소명은 현상유지status quo의 재생산을 위한 이론이었다. 실제로 루터는 당시 독일 농민혁명peasants revolutions을 확실하게 반대하였고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자들과 한패를 이루었다. 베버는 이러한 루터의 비역동적인non-dynamic 역사관 때문에 루터주의는 역사의 진정한 동력moving force가 될 수 없다고 보았고 따라서 루터주의는 너무 전통적인 것으로 밖에 남을 수가 없었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이 바로 루터주의에 이어서 칼빈주의가 등장하게 되는 이유이다. 그러면 왜 칼빈주의가 중요한가. 베버에 따르면 현대성에 있어서 큰 변화는 마법magic이 제거되었다는데 있었다. 마법이란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신에 대하여 일종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신에게 우리를 위하여 뭔가를 하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세상 일에는 일종의 처방전이 필요하였다. 비가 오지 않으면 마법사들이 꼼수tricks를 써서 비가 오도록 하였는데 이것은 마법적 수단을 동원하였다. 이것이 마법이댜. 그러나 세계가 합리화rationalize되는 과정에서 마법은 제거될 필요가 있었다. 세계가 합리화되자 사람들은 비와 날씨에 대하여 이해하게 되었고 비를 내리게 하기위하여 할만한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이것으로 마법이 제거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 교회에서 보게되는 것이다. 칼빈주의 교회, 즉 장로교회는 어떤 성인의 초상화도 걸어놓지 않고 합리주의적 냉정함을 강조한다.
7. 세속적 심미주의의 종교적 기초로서의 예정론
가장 중요한 칼빈주의의 요소는 예정론theory of predestination이다. 예정론은 매우 재미있는 교리이다. 칼빈은 기본적으로 이 예정론을 가지고 급진적으로 마법개념을 제거하고자 시도하였다. 사실 당신이 구원을 받든지 버림을 받든지 그것은 전적으로 신에 의해 결정되었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잘 알다시피 루터는 이것 때문에 중세 로만캐돌릭 교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불운하게도 몇몇 타락한 로만캐돌릭 사제들이 있었다. 그 사제들은 돈을 받고 천국 시민권을 팔았던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구원salvation을 돈 주고 살 수 있었다. 잘알다시피 칼빈은 그러한 가르침에 반박하면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칼빈은 사제들에게 돈을 주는 것은 타락한 개인의 행실practice이라고 하였다. 칼빈은 구원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면서 구원은 예정되어 있다고 하였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이 칼빈의 예정론이 실제로 프로테스탄트 직업윤리를 창출할 수 있었는가. 구원이 이미 결정되었다면 우리는 왜 열심히 일하는가. 이러한 결정론은 실제로 칼빈주의 성직자들의 설교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들은 청교도 도시들이 진정한 예정론의 장소라고 설교하였다. 청교도들은 미국의 뉴헤븐New Haven을 건설하였다. 그들은 '당신이 천국에 가게 될지 지옥에 가게 될지 걱정스러운가' 라며 설교를 시작하곤 하였다. 물론 당신은 천국에 가게 될지 어떨지 알고 싶다. 칼빈주의 성직자들은 이것을 알아낼 수 있는 단 한가지 방법이 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바로 '열심히 일하라. 그러면 당신의 일이 당신을 위해 보답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이 당신을 사랑하는 징표이고 따라서 당신은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당신은 천국시민권을 사기위하여 일을 열심히 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스스로 바른 길 위에 있다는 신의 징표sign of God를 얻기 위하여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베버는 이 구원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는 불운한 프로테스틴트 윤리는 이미 이 현대 자본주의사회에서 사라졌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청교도들은 일을 열심히 하도록 강권하였지만 이들은 지금 모두 사라지고 없다. 그리고 실제로 창조된 것은 우리를 가두는 철장in iron cage만이 남아있다. 베버는 '현대사회는 철장을 창조하였고 사람들은 거기서 열심히 일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일을 열심히 하도록 강요당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8. 심미주의와 자본주의 정신
베버는 베블런Veblen의 <유한게급론theory of leisure class>을 접했던 것 같다. 20세기 초 미국의 부자들은 구원을 위해서가 아니라 선한생활을 위하여 일을 하였다. 그들은 벤자민 프랭클린의 충고를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 해가 뜰때 일찍 일어나서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어가라. 왜냐하면 양초를 태우지 않아도 되고 양초 태울 돈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진정한 청교도 정신이다. 이 정신은 바로 이 학교 예일대학을 창조한 정신이기도 하였다. 양초를 태우지 마라. 그렇지않으면 돈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돈을 아껴라. 이것이 신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당신이 구원받았다는 징표이다. 그러나 베버는 이러한 명제는 불운하게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고 하면서 실제로 사람들은 유별난 소비를 하고자 한다고 하였다. 베버는 아주 중요한 말을 했는데 이것은 맑스와 분명 구별되므로 기억해두는 것이 좋겠다. 베버는 "나는 맑스가 제안햐는 역사에 대한 편파적one-sided인 유물론적 설명을 편파적인 관념론적 역사로 대체하는것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자본주의가 칼빈주의에서 나왔다고 제안하지 않는다. 내가 제안 하는것은 중세에서 종교개혁Reformation까지의 신학 교리에 독립적인 변화independent change가 있어왔다는 것이다. 그 독립적 변화란 종교적 사고에 대한 합리화였다. 즉 그것은 마법의 상실loss of magic, 합리주의, 예정론이다. 이것들이 없었더라면 자본주의 제도는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법의 상실, 합리주의, 예정론 자체가 스스로 자본주의 제도를 초래한 것은 아니겠다. 그것은 경제제도에 진화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 쪽에서는 물질적인 변화가 일어났고 다른 쪽에서는 이념계sphere of idea의 변화가 일어났다. 베버는 이 둘 사이에 선택적 친화elective affinity가 있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적절한 아이디어는 적절한 경제제도와 만나서 변화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 변화의 발생이 바로 현대 자본주의라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주의는 적절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지만 자본주의와는 공존이 불가능하였다. 12세기의 중국에서는 모든사람이 자본주의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일어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당시 중국의 유교Confucian아이디어와 도교Taoist아이디어는 자본주의를 도모할 수 있는 이념적 틀ideological framing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이 정체된 이유였다. 그리고 칼빈주의 경우에 아이디어의 합리화는 일어났지만 자본주의를 위한 경제적 조건이 없었가 때문에 자본주의가 불가능하였다. 이것이 선택적 친화 아이디어이다. 베버는 아이디어와 물질적 조건 사이의 단순한 인과관계를 거부하였고 이것을 상호작용 효과interactive effect로 대체하였다. 아이디어와 물질적조건material conditions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있다. 베버는 이것을 선택적 친화elective affinity라고 불렀다.
<참고문헌>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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