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4일 화요일

8. 니체: 권력, 지식, 그리고 도덕

1. 니체, 프로이트, 베버 그리고 현대성의 문제

논의를 20세기로 옮기자. 우리가 다루게 될 니체와 프로이트 그리고 베버사이에는 많은 유사성이 있다. 그러나 뒤르켐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기억해두자. 니체는 1900년에 타계하였지만 심각한 정신병 때문에 마지막 10년간 활동할 수 없었다. 니체는 자신의 모든 작품을 19세기에 출간하였다. 프로이트와 베버도 19세기에 출간을 시작하였다. 이 세 사람은 20세기 사회이론을 향한 중요한 다리 역할을 하였다. 어떤 면에서 이들은 20세기 후반기 특히, 마지막 3, 40년 동안 쏟아진 방대한 양의 이론들에 큰 영향을 끼쳤다. 니체, 프로이트, 베버의 출발점은 맑스였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 모두 맑스의 경제적 환원주의(economic reductionism)에서 출발하였다. 경제적 환원주의는 경제적 이익을 강조한 이론으로서 맑스뿐만 아니라 애덤 스미스에게도 해당한다. 니체, 프로이트, 베버는 경제적 환원주의에서 출발하였지만 현대성을 경제시스템에서 찾기 보다는 권력과 의식에서 포착하고자 하였다. 현대성의 문제는 한편으로, 억압(repression)에 있다. 현대 생활의 문제점은 우리가 지배에 대한 종속 이유를 스스로 내부화하면서 시작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내부화된 종속(internalized subjugation)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킬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질서(orders)를 따르는가. 왜 우리는 우리자신을 종속시키는가. 이것이 니체, 프로이트 그리고 베버가 직면한 중심문제였다. 독특하게도, 이들은 시민 사회를 선한 사회의 지표(a point of reference)로 가정하였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내부화된 종속 문제를 해결해야하는가. 이것이 그들의 포인트이다. 니체, 프로이트, 베버는 20세기 사회과학이론을 예고하였을 뿐만 아니라 최초의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포스트모던 이론가들은 현대 사회의 억압적 속성을 강조하면서 이것으로부터 초월하려고 시도한다. 예들들어, 니체의 <도덕의 계보Genealogy of Morals>는 매우 도발적이고 충격적이어서 독자들을 당황케한다. 재미있게도, 니체, 프로이트 그리고 베버를 이해하는 한가지 방법은 맑스와 관련시키는 데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그들과 맑스의 차이점이란 경제문제로부터 이탈해서 권력과 지배로 옮겨갔다는 데 있다. 그들과 맑스 사이에는 연속성 또한 존재한다. 맑스와 니체와 프로이트는 인간 의식의 비판을 강조하는 비판 이론가들이었다. 우리의 마음에는 무엇이 들어있고 그것은 어떻게 마음 속에 들어갔는가. 즉 그들은 우리의 실존과 관련한 의식의 문제를 다루었다. 이것은 이전의 헤겔과 그후 청년 헤겔파로서의 맑스에 의하여 다루졌던 것이다. 맑스는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에서 인간의 소외 문제를 다루었다. 니체와 프로이트는 맑스의 전철을 밟으면서 인간의 의식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고자 시도하였다. 재미있게도, 니체는 방대한 비판 이론을 전개하였으나 우세한 비판적 관점을 얻지는 못하였다. 헤겔과 맑스를 추종하는 비판 이론가들과 20세기의 비판 이론가들은 선한 사회와 인간실존의 해방에 대한 아이디어을 갖고있었다. 그 비판이론가들은 우세한 비판적 관점을 통하여 사회 현실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니체는 달랐다. 사실, 니체는 비판이론가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이었다. 20세기 프랑스 학자, 미쉘 푸코(Michel Foucault)는 니체 위에서 가장 일관성있게 비판이론을 전개하였다. 푸코는 선good의 본질과 의지를 비판함이 없이, 인간의 실존과 의식을 비판하는 이론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바로 니체가 시도했던 것과 똑같다. 이것은 다소 우스꽝스럽다. 이를테면, 선한 결과에 대하여 무지하면서, 선한 결과의 원인이 되는 조건들에 대하여 비판할 수 있는가. 또 선한 결과에 대하여 무지하면서, 선한 사회의 개념과 선의 본질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을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니체가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달랐다. 프로이트는 헤겔과 맑스를 능가하는 비판이론가였다. 프로이트는 감각적 경험을 통하여 인간의 의식을 비판적으로 분석하였다. 프로이트는, 맑스가 그랬듯이, 인간 의식의 문제는 인간의 감각 경험에 관련시켜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점에서 프로이트는 맑스와 헤겔의 비판 이론과 동일선 상에 있다. 이들의 비판 이론은 단지 의식을 급진화(radicalize)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당신은 오직 감각적 경험 위에서만 당신의 의식과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프로이트와 맑스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맑스에 따르면 감각 활동(sensuous activity)은 경제적 생산이고 경제적 활동이었다. 그러나 프로이트에 따르면 감각 활동은 성적 경험(sexual experience)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전(our earlier life)의 억압된 성적 경험 위에서 우리의 의식을 비판해야 한다. 이것이 프로이트 비판이론의 포인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우리가 마음 속에 있는 것들이 옳다고 스스로 판단하는 것은 오류이다. 따라서 당신은 이전의 모든 성생활 경험을 되짚어보는 과정을 통하여, 억압되었던 나쁜 기억들을 찾아내야한다. 그때 비로소 건강한 정신생활을 회복할 수 있다. 한편, 베버의 비판 이론은 이것보다 더 복잡하다.

2. 역사적 맥락에서본 니체

니체의 중심아이디어는 인간의 마음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는 것이지 우세한 비판적 관점(critical vintage point)을 얻는 데 있지않다. 니체의 포인트는 선한 사회의 원칙과 선(good) 자체를비판의 도마에서 비판하자는 것이다. 그럼,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선과 선한 사회good and good society의 개념은 어디서 나오는가. 이것이 니체의 포인트(project)이다. 또 이것은 니체의 대단한 지적 모험이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시도는 원을 직사각형으로(squaring of the circle) 만들과자 하는 시도였는지 모른다. 알다시피, 니체는 권력 문제를 방대하게 다루면서 매우 도발적으로 전개하였다. 니체는 매우 도발적(provocative)이었다. 니체는 루소와 비슷했지만 루소보다 더더욱 심했다. 니체는 루소보다 훨씬 더 우리를 충격에 빠뜨렸다. 잘알다시피, 니체의 내면은 매우 감성적(sensitive)이고 인간적(humanistic)이었다.

1844년 니체는 독일의 라이프찌히 근처의 작은 마을인 로켄Rocken에서 태어났다. 니체의 부친은 루터파 목사였고 그의 가족은 모두 루터파 성직자였다. 니체는 매우 종교적인 감성 안에서 성장하였다. 여러 면에서 니체의 작품은 그의 부친과 루터파 개신교에 대한 반작용을 담고있다. 이것은 니체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점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에 대하여 심한 감정을 갖고 있는데 니체 또한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을 심하게 공격하였다. 이것은 그의 부친에 대한 반란이라고 볼 수 있다. 니체는 자신의 성장 환경에 대하여 반란을 시도하면서 자신을 찾고자했던 것같다. 따라서 니체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관용을 베풀 필요가 있겠다. 왜냐하면 당신도 니체처럼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당신도 부모에 대하여 반항하고, 어린시절 지켰던 원칙들에 대하여 반발한다.

1864년 니체는 실제로 루터파 목사가 되기위하여 본 대학(University of Bonn)에 입학하였다. 니체는 신학을 공부했다. 사실, 신학교에 입학하는 많은 학생들은 얼마 지나지않아서 무신론자(atheist)가 된다. 흔히, 신학교는 무신론자를 위한 최고의 훈련 장소라고 말한다. 니체는 1년 후에 휴학하면서 자신이 무신론자가 되어가고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65년 니체는 라이프찌히 대학애서 철학을 수학하였다.

1868년 니체는 생애의 매우 중요한 사건을 접하였다. 니체는 당대 최고의 작곡가인 리차드 바그너(Richard Wagner)를 만났다. 그들은 한동안 매우 친한 친구가 되었지만 나중에, 서로 증오하는 원수사이가 되었다. 후술하겠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1869년 니체는 학위를 받기 전에 바젤대학교의 고전철학교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래가지는 못 했다. 1877년까지 니체는 자신의 생애에 단 8년 만을 가르쳤다. 니체는 교직에서 물러난 후로 이탈리아와 스위스의 실 마리Sils Maria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873년 니체는 독일철학자 폴 레Paul Ree를 만났다. 폴 레는 니체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따.

1882년 니체는 폴 레Ree로부터 루 살로메Rou Salome를 소개받았다. 그후 살로메는 니체의 유일한 열정적 애인이 되었다.

1888년 니체는 정신병이 발발했다. 당시 니체는 이탈리아의 제노아에 있었는데 거리를 걷다가 마부가 말을 세게 채찍질하는 것을 보았다. 니체는 달려가서 말을 부여잡고 울기 시작하였고 그것으로 그의 정신은 나가버렸다. 니체는 깊은 정신병에 빠졌고 더이상 회복하지 못했다. 인간 니체는 인생의 큰 고통에 빠진 것이었다. 니체의 모친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아들을 돌보았다. 그후 운나쁘게도 여동생인 엘리지베스가 니체를 돌보았다.

1900년 니체는 여동생 엘리자베스의 집에서 타계하였다. 여동생 엘리자베스는 니체가 출생한지 2년 후에 태어났는데 1885년 버나드 포스터Bernhard Forster와 결혼하였다. 버나드Bernhard는 원조 나찌(proto-Nazis)로서 열광적인 반-유대주의자(Anti-Semite)였다. 그는 아리안족(Aryan race) 우월주의 아이디어에 매료되면서 실제로 파라과이에 아리안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엘리자베스와 함께 순수 게르만 공동체에서 생활하였다. 아직도 몇몇 공동체가 남아있고 네오나찌들이 방문한다. 현재, 그들은 생김새가 인디안들과 많이 닮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순수 아리안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이상 푸른 눈을 갖고 있지않고 블론드 머리도 아니어서 이제는 지역민들과 결혼한다. 어째든 이것이 버나드Bernhard가 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시 버나드Bernhard는 파라과이의 게르만 공동체에서 자살하였고 엘리자베스는 독일로 돌아왔다. 이전에 니체는 엘리자베스가 버나드와 결혼하자 그녀와의 관계를 끊었다. 니체는 반-유대주의자인 매제와 거리를 두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니체는 반-유대주의를 대단히 경멸했다. 그리고 이것은 니체가 리차드 바그너와 단절한 이유이기도 하였다. 재미있게도, 엘리자베스는 1894년 니체 아카이브(Nietzsche Archive)를 설립하였다. 그때 니체는 미쳤을 때인데 출간되지 않은 방대한 원고가 있었다. 그녀는 그 원고들을 아카이브에 옮겨놓고 최대한 남용하였다. 그녀는 정치적으로 우익에 가담하였고 히틀러를 추종하는 나찌즘이 등장하자 니찌 아이디어를 니체로부터 조작하기 위하여 니체의 방대한 문서들을 모았다. 그래서 오랜동안 니체는 나찌즘의 이념가로서 알려지게 되었다.

1935년 엘리자베스가 타계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그녀의 장례식에 참가하였다. 니체의 원래 작품과 엘리자베스가 편집하여 발행한 작품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니체의 원작을 읽은 사람들은 니체와 나찌즘의 관계를 의심하게 되는데 그것이 정상이다. 어쩼든 그것은 복잡한 이야기이다. 그럼, 루 살로메Lou Salome, 폴 레Paul Ree, 그라고 프리드리히 니체의 삼각관계를 살펴보자. 그들은 서로 사랑에 빠졌다. 폴 레는 실제로 매우 유복한 독일 유대인 가문 출신의 철학자였다. 폴레는 매우 좋은 친구였고 니체는 구제불능형의 인간이었다. 니체의 인간혀은 사랑에 빠지고나면 결별하는 스타일이었다. 니체는 애인을 아주 사랑하든지 아니면 아주 증오했든데 그 중간은 없었다. 니체의 주요작품인 <도덕의 계보Genealogy of morality>의 아이디어는 폴 레로부터 빌려온 것이었다. 폴 레는 니체에게 젊고 똑똑한 숙녀인 루 살로메를 소개시켜주었다. 곧 니체와 살로메는 사랑에 빠졌다. 이 때가 1882년이었다. 살로메는 21살이었고 매우 아름답고 영리하였다. 살로메는 프랑스 출신이었는데 상트 페테스부르크St. Petersburg에서 태어났다. 니체는 그녀와 같이 살기를 희망하였지만 결혼아이디어를 반대하였다. 니체가 폴 레에게 보냈던 편지 내용으로 볼 때 니체는 폴 레와 살로메가 서로 연인임을 몰랐던 것 같다. 한동안 이들의 삼각관계는 지속되었다. 그러나 니체는 구제불능형이었고 살로메는 온전한 여성이었다. 살로메는 니체의 비정상을 감당할 수 없었다. 니체는 베를린으로 옮겨갔고 한동안 폴 레와 걑이 지냈다. 재미있게도, 루 살로메 또한 결혼을 반대하였다. 당시 19세기에 결혼과 성에 대하여 대화한다는 것 자체는 매우 급진적인 아이디어였다. 나중에 루 살로메는 언어학자인 안드레아Carl Andreas와 결혼하였다. 한때 루 살로메와 폴 레와 니체는 책 한권을 같이 썼었는데 출간하지는 않았다. 한편 니체는 소년시절부터 음악광이었다. 니체는 바그너의 피아노 스크립트인 <트리스탄과 이졸데Tristan and Isolde>를 읽고서 사랑에 빠져버렸다. 그것은 니체가 찾고있었던 음악이었다. 니체는 영웅숭배자다. 때문에 사람들은 여전히 니체를 원조-나찌(proto-Nazis)로 보기도 한다. 니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신들처럼 강하고 아름답고 영웅적인 사람들을 좋아하였다. 니체는 이러한 것들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발견하면서 감성주의적인 이탈리아의 로시니Rossini나 고전적이고 냉정하고 가식적인 독일의 베토벤을 거부하였다. 니체는 새로운 음악을 바그너로부터 발견하면서 바그너에게 매료되었다. 사실, 바그너는 자신의 마지막 부인이자 작곡가 리스트Franz Liszt의 딸이기도 한 코시마 리스트Cosima Liszt의 영향력 아래서 점점 반-유대주의자가 되어갔다. 재미있게도, 바그너는 오페라 <파르시팔Parsifal>을 통하여 심미적 그리스도교인이 되었는데 니체는 그러한 바그너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니체는 그것을 용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 갈라섰다. 니체는 바그너의 반유대주의와 <파르시팔Parsifal>를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파르시팔>은 오라토리움인데 박카스적(Bachian)이면서 신의 희생양(sacrifice of the lamb of God)을 내용으로 하고있다. 즉 <파르시팔>은 에수의 희생과 예수의 피에 대한 집단 숭배를 연출하는 것이었다. 물론, 니체는 이런 류에 관심이 없었다.

3. 니체의 주요작품

니체의 최초 작품은 1872년의 <비극의 탄생The Birth of the Tragedy>이었다. 니체는 그리스 문명의 대단한 숭배자였다. 니체는 전인류의 역사는 디오니시안Dionysian 원칙과 아폴로니안Apollonian 원칙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라고 보았다. 알다시피, 디오니시안이란 감성적인 것(sentiments), 본능적으로 행동하는 것 등을 말한다. 그리고 아폴로니안이란 이성를 말한다. 그리고 이 책 <비극의 탄생>은 계몽주의(enlightenment)와도 구별된다. 알다시피, 계몽주의란 이성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시안원칙은 아폴로니안원칙에 대하여 승리를 거둔다. 니체는 포스트-모던 성향이었으므로 게몽주의와 과도한 합리주의(excessive rationalism)를 거부하였다. 이것은 실제로 니체가 바그너를 좋아했던 이유이다. 니체는 바그너에게서 다이오니시안 요소과 아폴로니안 요소가 합성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열정과 이성의 통일을 말한다. 바그너는 <비극의 탄생The Birth of Tragedy> 좋아하였다.

1879년 니체는 <인간적인 너우나 인간적인Human, All Too Human>을 썼는데 그것은 볼테르에서부터 시작하는 자유사상가의 물화(reification)아이디어를 내용으로 하고있다. 니체는 자유사상가(free thinker)였는데 낭만주의(Romanticism)와 단절하면서 폴 레를 따라갔다. 한때 니체는 선과 악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아이디어를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아야 할뿐만 아니라 상식적인 선의 개념과 원칙을 비판할 필요가 있다면서 <도덕의 계보(Genealogy of Morality)>를 쓰게 된 것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니체와 바그너는 서로 충돌하였다. 재미있게도, 니체는 유대-그리스도인 전통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고 있었지만 반면에 바그너는 <파르시팔>을 쓰면서 성배(Holy Grail)를 신으로 받들면서 심미적 그리스도인이 되어갔다. 바그너는 아마도 <도덕의 계보>를 읽지 않았던 것같다. 바그너는 그 책에 관하여 듣고서는 불편해하면서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1881년 니체는 세인트 모리츠St. Moritz 근처의 실 마리Sils-Maria를 방문하고서 이 도시에 푹 빠지게 되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Genealogy of Morals>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작품들을 발병할 때까지 여기서 썼다.

1883년에서 85년까지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썼다. 니체는 이 책에서 유대-그리스도인 전통을 공격하였다. 니체는 그 전통의 억압적인 요소들을 제기하고자 하였다. 니체가 숭배하는 영웅은 짜라투스트라였다. 짜라투스트라는 페르시아 예언자인 조로아스터를 말한다. 니체는 그들 두고 최초의 비도덕주의자(immoralist)라고 추켜세우면서 우리는 감히 비도덕주의자가 되어야한다고 일갈하였다. 니체는 억압적인 유대-그리스도 도덕과 허무주의 사이에서 중도(middle way)를 찾고자했던 것이었지 그 모든 것을 버리고자 하지는않았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는 초인(Ubermensch)아이디어를 개발하여 전개하였다. 초인이란 기본적으로 자기융합적이면서 자기지양적인 인간을 말한다Ubermensch is basically the person who brings his life under his own control. 이것은 보통 우리가 알고 있는 초인과는 다르다. 초인에 관한 고정관념(stereotypes)은 블론드 머리의 독일인 슈퍼맨을 말하는데 이것은 나찌 아이디어였다. 이제 니체는 초인 철학을 갖추게 되었다. 초인은 자기-주인성(self-mastery)을 성취한 인간으로서 생활 속에서 자기자신을 통제하면서도 소외된 인간이다. 실제로,초인은 억압적인 문화와는 거리를 두면서도 자신을 진정으로(authentically) 표현한다. 이것이 초인이다. 어떤 면에서 초인은 부처(Buddha)와 같다. 초인은 부처 아이디어였지만 수동적인 부처는 아니었다. 니체는 유대-그리스도인 전통 만큼이나 불교를 싫어했다. 니체가 볼 때 불교는 너무 수동적이라는 데 문제가 있었다. 니체는 능동적인 불교를 원했다. 니체에 따르면 자기 삶의 주인성을 이룩한 초인들은 행동을 통하여 자신의 느낌과 심지어 관능적(sensual) 본질도 표출하여야 한다. 그 초인은 영원회귀(the eternal return)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초인은 맑스가 말하는 물화된 의식(reified consciousness)의 강철법(iron law)를 깨트릴 수 있다. 즉, 법이라는 형식으로 물화된 언어(reified words)는 깨질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지배도 있을 수 없다. 이를테면, 초인은 세계에서 자신을 실현(realize)하면서 외부세계의 지배를 받지않을 것이다.

+ <도덕의 계보Genealogy of Morals>에 관하여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폴 레로부터 빌려왔던 계보학적 방법론을 재구성하여 도덕의 기원을 밝혀내었다. 선과 악은 다른 것인가. 선과 악은 어디서 오는가. 이것이 니체의 포인트이다. 니체에 따르면 게보학적 방법론의 본질은 선과 악을 이분법(dichotomy)적으로 비교하면서 선한 행동과 악한 행동을 구별하고 그것들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캐묻는 데 있다. 니체는 우세한 비판적 관점을 필요로 하지않았다. 선과 악의 개념은 선악 구별의 관점에서 비판될 수 있다. 이것이 계보학적 방법론의 핵심이다. 재미있게도, 푸코는 말하기를 "나에게 선에 대한 개념을 말해보라. 나는 그 선이 과거에 악이었다는 것을 밝혀주겠다. 또 당신이 생각하는 악을 말헤보라. 나는 그 악이 옛날에 윤리적이었다는 것을 밝혀주겠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계보학적 방법론의 핵심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도덕성이 어떻게 건축되었는지, 한쪽의 관점에서 다른쪽을 비판하고 또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이 다른쪽 관점으로도 똑같이 비판하는 것이 계보학적 방법론이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악(evil)개념의 기원을 노예성과 한(slave morality and ressetnment)를 통하여 기술하였다. 또 가장 논란이 되는 이슈중에 하나인 블론드 짐승(the blonde beast)과 먹이감(birds of prey), 우상의 기원(origins of ideals)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마지막으로 초인 아이디어, 처벌, 악한 의식, 그리고 죄(guilt)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니체는 이것들을 통하여 계보학적 방법론을 재창조하였다.

4. 계보학적 방법론의 재-구성

니체는 의미심장게 말하기를 "우리는 우리자신들에게 무지하다. 우리는 선한 이성을 갖추고서도 결코 우리자신을 들여다 본 적이 없다We are unknown to ourselves. We knowers; and with good reason. We have never looked at ourselves."라고 하였다. 이것이 니체 비판이론의 포인트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홉스, 로크, 루소, 니체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당신은 자신을 들여다보지는 못했다. 따라서 니체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자신의 의식을 비판하라고 말한다. 무엇보다 당신은 윤리적이라고 믿어지는 개념들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을 필요가 있다. 이 윤리 개념들은 어디서 나오는가. 니체의 핵심 포인트는 선악good and evil 개념의 기원과 선악의 위상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선악이 실제로 어떻게 건축되었는지 포착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도덕적 가치에 대하여 비판해야한다. 이것은 정말 멋진 아이디어이다. 그러나, 재미있게도, 니체에 따르면 이러한 가치에 대한 가치는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아서는 안된다. 따라서 무한퇴핻적으로 그 가치의 가치에 대한 비판, 그 가치의 가치의 가치에 대한 등등의 비판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니체는 궁극적인 가치가 없는 비판을 제안했던 것이다. 니체는 최종적인 가치, 이를테면, 옳음에 대한 본질가치를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허무주의적으로 "어떤 것도 괜찮다(anything goes)" 라고도 제시하지 않는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의 비참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면서 흥분(upset)할 수 있다. 니체는 채찍질당하는 말을 보면서 너무 흥분한 나머지 달려나가서 그 말을 부여잡았다. 니체는 우리 인간이 동정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론은 푸코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 좋음/나쁨 그리고 선/악의 다른 기원
우리는 종종 좋은것(good)에 대해서 말할 때 그것은 이기적(egoistic)이 아닌 것으로서 생각한다. 그러나 니체는 그렇지않다고 말하였다. 니체에 따르면 좋은것(good)이란 그 기원으로 볼 때 비-이기적(non-egoistic)인 것과 관련이 없다. 좋은것은 나중에서야 비-이기적인 것으로서 건축될 수 있었다. 이것이 좋은것good에 대한 니체의 포인트이다. 그럼, 좋은것은 어디서 나오는가. 니체에 따르면 좋은것은 지배 종족(master race)로부터 나온다. 지배종족은 자신들을 좋은것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지배종족은 어두운 피부색을 갖고있는 토종들을 나쁜것으로서 간주하고 종석시키고자 한다. 보다시피, 좋은것(good)과 나쁜것(bad)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제들의 경우는 다르다. 알다시피, 니체는 성직자가 되려고 공부하고 있었지만 사제를 정말 싫어하게 되었다. 사제(priests)들은 어두운 색의 옷을 입고 다닌다. 그들은 스스로 떳떳한 그리스의 신이나 반-신(semi-god) 같은 기사 귀족계급이 아니다. 니체에 따르면 기사 귀족(knight aristocratic)신분은 매우 아름다운 몸매를 갖추고있다. 고대 그리스의 남성들과 여성들은 자신들을 좋은것(good)으로 간주하였고 자신들 이외의 좋지않은 사람들을 불구자(crippled)로서 나쁜것(bad)으로 간주하였다. 니체는사제들이 권력을 잃어버리게 되자 이 권력상실을 증오로 대체하였다고 말한다. 즉, 사제들은 권력자들에 대하여 증오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그 권력상실자들은 권력자들을 단순히 나쁜것(bad)으로서가 아니라 악(evil)으로서 투사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이제, 문제는 좋은것과 나쁜것 사이의 대조가 아니라 선(good0과 악(evil)사이의 대조에 있다. 그리고 선과 악으로서 드러난 것은 권력관계이다.

+ 노예성과 한(slave morality and ressentiment)
니체에 따르면 사제국가(the nation of priests)는 유대인 집단이었고, 그리스도교가 등장하면서 사제국가는 전복되었다. 유대인들은 고통받는 자와 가난하고 힘없는 자만이 선하고, 반면에 부자와 권력자는 악하다고 말한다. 니체는 노예들이 최초로 도덕적 반란을 일으켰던 때는 유대인 반란이라고 하였다. 유대인 반란은 이 천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유대인 반란은 승리를 하였고 우리시대의 지배적 도덕성으로 자리잡았다. 니체는 유대-그리스도인 도덕, 특히 그리스도인 도덕을 비판하면서 역설적으로 그 도덕을 십자가에 달린 신(God on the cross) 이라고 일갈하였다.  그 도덕은 죄없는 자로 하여금 인류의 죄를 짊어지게 하는 것, 즉 인류구원을 위한 신의 자기-정죄(self-crucifixion)이다. 이것이 한(ressentiment)이다. 이제 그 적(enemy)은 단순히 나쁜것이 아니라 악(evil)이 되었다.

+ 블론드 짐승(blond beast)
니체에 따르면 모든 숭고한 종족들의 중심에는 먹잇감을 찾는 짐승들이 존재한다. 그 대단한 블론드 짐승들은 망가뜨리고 승리하기 위하여 으르렁댄다. 니체는 영웅숭배자였다. 그럼, 그 짐승은 독일인 블론드인가. 니체는 유럽은 오랜 세기동안 블론드 게르만 짐승의 독무대였다고 말하였다. 니체는 옛날 게르만 민족과 오늘의 게르만 민족사이에는 공통된 아이디어가 없다고 하면서 혈연관계는 제쳐두자고 하였다. 이것은 나찌 이데올로기가 아니었다. 니체에 따르면, 권력을 갖는다(being powerful)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 소원을 현실화시키는(realizing yourself)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니체는 현재 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은 평준화(levelling)라고 한탄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바라는 어떤 것도 얻지 못하면서 점점 졸아들고 있는데, 우리의 육체는 그리스인 만큼 강하지 못하고, 기질은 더 온순해졌고, 이성은 더 영악해졌고, 생활은 더 편안한 것을 선호하게 되면서 죽도 밥도 아닌 나쁜 냄새(bad air)가 난다고 일갈하였다. 얼마나 무시무시한 현대성인가. 우리는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미지근 뜨뜻해졌고  모두 똑같이 되어버렸으므로 우리자신을 살찌울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것이 현대성에 대한 니체의 포인트이다.

+ 먹이 새(birds of prey)
니체는 양(lamb) 무리들이 먹이 새 무리들을 향하여 원한을 품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다. 또 먹이 새 무리가 어린 양을 집어간다고하여 먹이새 무리를 비난할 이유도 없다고 하였다. 양들이 서로 말하기를 "이 먹이 새들은 악(evil)하다. 어떤 것도 먹이 새 같지 않거나 양과 같다면 선(good)하다. 지배하는 자는 나쁜 자이고 고통받는자는 좋은 자이다."라고 한다. 반면에 먹이 새들은 반박하면서 말하기를 "우리는 이 선한 양들에 대하여 어떤 악감정도 품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부드러운 양고기 맛보다 나은 것은 없기때문이다."라고 한다. 이것은 다소 혼동스럽다. 니체의 포인트는 개인의 자기 충족(self-fulfilment)이었다. 니체에 따르면 우리는 현대사회에서 우리 자신을 알차게 채울 수가 없다.

+ 이상이 조작되는 작업실(The workshop where ideals are fabricated)
니체에 따르면 모자람은 이상이 조작되는 작업실에서 완전으로 바뀐다. 또 보복하지 못하는 불능(impotence)은 선(goodness)으로 위장된다. 이를테면, 당신은 불임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그 불능을 선이라고 내세운다. 사실, 당신은 선하지 않고 선에 대한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리고 싫어하는 사람에게 굴복하면서도 당신은 그것을 복종이라고 부른다. 재미있게도, 당신은 그의 우월성을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가 두렵기 때문에 복종한다. 더우기 당신은 좋은 개념까지 고안해내는데 '복종은 좋은 것이다' 라고 정의내리게 된다. 이것이 이상의 작업실에 대한 니체의 포인트이다.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면서도 원수를 증오한다. 이것은 진짜 거짓말이다. 사람들은 원수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들은 배알이 찢어지게 원수를 싫어한다. 이것이 니체의 포인트이다. 분명, 이상이 창조되는 작업실이 존재한다. 이곳이 바로 정의의 승리(triumph of justice)가 존재하는 곳이다. 사실, 당신은 원수를 미워하지 않는다. 절대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당신은 원수가 아니라 불의를 미워한다. 재미있게도, 당신은 원수를 부당하고 불공정한 것으로서 투사하면서 그 원수가 자기보다 낫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않는다. 니체에 따르면 사회의 이상ideals은 이상의 작업실에서 창조되고 그 이상은 전부 다 악한 거짓말로 조작되었다. 니체는 사회의 이상은 진실되어야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니체의 포인트이다.

+ 초인
니체는 좋은것과 나쁜것, 선과 악은 서로 다투어 왔는데 이제 선과 악이 우리를 지배하게되었다고 하였다. 르네쌍스는 찬란했다. 그것은 우리의 고전아이디어를 재건축하는 것이었다. 재미있게도, 니체는 르네쌍스로 인하여 유대주의가 다시 승리들 거두게 되었다고 하였다. 분명, 그것은 반-유대주의가 아니었다. 사실, 반-유대주의는 유대인들보다 루터파를 더 적대시했다. 니체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독일의 프롤레타리아와 영국의 원한운동(English Ressentiment Movement) 덕분에 종교개혁(Reformation)이 가능했다. 이 종교개혁이 바로 니체의 진정한 원수였다.

+ 처벌의 기원, 기억의 문제
우리는 망각해야 한다. 망각이란 나빴던 기억을 억압하는 것이다. 억압하기위해서는 망각 기술nmemo-techniques이 필요하다. 망각해야 할 것을 망각하는데는 고통이 가장 유용한 방법이다. 그러나 니체는 독일인들은 끔직한 방법으로, 즉 돌로 치고 바퀴를 부수고 양쪽으로 찢고 야생마를 밟아 죽이면서까지 기억을 남기고자 한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니체는 급진적인 비판 이론가였다. 잘못된 아이디어와 거짓에 대한 비판은 궁극적 가치(ultimate value)를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서 진리를 얻어라. 이상(ideal)은 다름아니라 세계 내에서 진리자체를 얻고 세계를 정복하는 바로 그 사람이다. 이것이 니체의 포인트이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2012년 2월 11일 토요일

7-4. 맑스: 계급이론과 착취이론

1. 친절한 칼 맑스

맑스는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다르게 매우 복잡하고 모순되게 진리을 추구하였다. 그럼, 맑스는 진리에 도달했는가. 맑스는 필사적으로 진리를 포착하고자 하였다. 맑스는 청년 헤겔파로서 헤겔의 소외개념을 바탕으로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를 집필하였다. 그 후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를 통하여 헤겔과 결별하면서 역사적 유물론자의 길에 들어섰지만 여전히 애덤 스미스의 영향아래 있었다. 당시 맑스는 노동분업을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면서도 사소유권에 대한 분석은 건드리지 못하였다. 이어서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 사유재산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였지만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의 결정론과 소외 아디디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맑스는 역사 진화를 더 성찰했어야했다. 맑스는 생애 마지막으로 책 한권을 완성하는데 그것이 <자본론> 제 1권이다. <자본론>은 1867년 처음 츨간되었는데 그 내용은 매우 일관적이었다. 맑스는 이전의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나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 <그룬트리세Grundrisse>를 집필했을 때와는 다르게 <자본론>을 기꺼이 출판하고자 하였다. <자본론>의 포인트는 착취이론이다. 맑스의 착취 이론은 사회이론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재미있게도, 오늘날 착취 이론은 맑스가 처음에 의도한 공식대로 진행되고 있지 않다. 물론, 일상에서 사람들은 "나는 착취당하고 있다." 는 식으로 말하기는 한다. 맑스는 착취이론을 전개하기 전에 밀도있게 게급 개념을 연구하였다. 정치 팜플렛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은 지식인들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으로 학문적으로 기술되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당시 맑스는 착취 이론을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원숙한 계급 이론을 갖추고 있었다. 오늘날, 맑스는 계급 아이디어를 창조한 것으로 평가받고있다. 물론 막스 베버도 계급이론을 갖고있다. 재미있게도, 맑스와 베버는 모두 계급이론을 전개하면서도 계급의 본질에 대하여는 일관적인 분석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물론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enifesto>에서 맑스와 엥겔스는 계급을 많이 다루었지만 실질적인 개념장치는 갖추지 못하였다. 맑스는 <자본론> 제 1권을 마무리 한 후에야 비로소 계급 이론을 시도하였고 엥겔스는 마침내 <자본론> 제 3권 52장에서 이제 계급이론을 전개할 때가 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엥겔스는 계급에 대하여 한 페이지 반을 할애했지만 나머지는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고 말았다. 따라서 계급이론의 장단점은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다. 사실, 막스베버도 계급이론을 엥겔스처럼 한 페이지 반을 서술하였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계급은 확실히 어렵고도 현존하는 이슈이다. 계급 아이디어는 상상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계급은 여전히 현존한다. 비록 현대 미국 사회에는 계급과 착취 아이디어에 자유롭지만, 여전히 중간계급(middle class)은 논란이 되고있다. 중간계급이란 용어는 우리에게 완전히 생소한 것은 아니다. 전형적인 미국인들은  오직 중간계급만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계급이 존재한다면 어찌 한 계급만 존재하겠는가.

2. 착취 이론(Theory of Exploitation)

먼저, 애덤 스미스의 노동 가치설을 살펴보자. 맑스는 상품생산사회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어떻게 구별하였는가. 애덤 스미스는 상업사회를 해명하기위해 노동가치설을 이용하였다. 맑스는 상이한 유형의 상업사회가 있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색한 상품생산과 자본주의 'capitalist' 생산양식을 차별화하였다. 맑스는 캐피탈리즘 'capitalism' 이란 용어를 사용해본 적이 없다. 맑스는 캐피탈리즘 대신에 캐피탈리스트capitalist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아담 스미스와 더불어 당시 맑스도 자본주의에 관한 개념을 갖추지 못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독특성은 노동력을 상품으로 본다는 점이다. 맑스의 계급이론과 착취이론의 포인트는 노동력의 상품화에 있다.

+ 노동 가치설(labor theory of value)
노동가치설은 존 로크와 아담 스미스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미, 존 로크는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하여 창조된다고 밝혔다. 이를테면, 우물의 물은 모든 사람에게 속한는 것이므로 누구라도 그 물을 퍼내었다면 그 물은 퍼낸 자의 것이다. 로크는 그 물은 퍼낸 자의 노동 생산물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그 물의 가치는 퍼내는 데 필요한 노력과 더불어 그 물을 퍼내기 위한 도구, 즉 바가지 달려있다. 즉, 물의 가치는 물에 투입된 노동의 양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것이 로크의 포인트이다. 이것은 정말 멋진 재산론이자 노동가치론이 아닐 수 없다. 애덤 스미스는 로크가 밝힌 이러한 재산론을 노동가치설이라고 명명하였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가치는 노동을 통하여 창조된다(all value is created by labour)고 주장하였다. 재미있게도 애덤 스미스는 노동 가치설을 이용하여 부의 분배(distribution of wealth)를 설명하고자 했으므로 로크의 노동가치설로부터 퇴행한 것이았다. 애덤 스미스는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노동가치설을 이용하여 부와 소득의 분배를 규명하고자 하였다. 그럼, 노동가치설과 부의 분배는 어떤 관계를 갖고있는가. 맑스에 따르면 생산은 가치를 분배한다. 맑스는 애덤 스미스의 노동, 자본, 토지를 생산요소라고 말하면서 이것들로부터 임금, 이윤, 지대가 나오는데 이 가치들은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애덤 스미스에게도 모순되지 않는다. 애덤 스미스가 모든 가치는 노동을 통하여 창조된다고 하면서 의도했던 것은 인간 본성론(theory of human nature)이었다.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토지에 대한 사소유권뿐만 아니라 자본 축적도 없었다. 따라서 모든 가치는 노동을 통하여 창조된다. 그러나 이것은 현존하는 자연조건들(natural conditions of existence)위에서 단지 상상된 것이다. 모든 복합적 사회에서는 사소유권이 존재하고 자본 축적도 가능하다. 잘 알다시피, 생산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지주는 지대(rent)를 받고 또 자본가는 자본을 노동자에게 선대(advance)한다. 자본의 선대없이는 노동자는 일을 할 수가 없댜. 따라서 물주는 생산과정에서 창조된 가치의 일부분을 마땅히 요구한다. 즉, 자본가는 출자하는 위험을 무릎썼고 또 노동과정을 감시감독하기 때문에 그 위험부담과 감시감독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당신은 토지 없이 농사지을 수가 없다. 모든 활동에는 장소(site)가 요구되는데 어떤 사람이 이미 그 토지를 갖고 있다면 당신은 그 토지에 대한 보상을 해야만 이용할 수 있다. 그것이 지대(rent)이다. 아담 스미스의 주장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자본가가 이윤을 수취한다는 것은 공정한가. 토지주가 지대를 수취한다면 그 지대는 소득인가. 사실, 우리는 지대나 지대 추구행위에 대하여 불편하다. 누군가가 지대를 추구하면 그것은 악한 행위로 보인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대추구행위를 독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대추구행위는 독점적 소유권에서 나오는 것이다. 보통, 우리는 독점(monopolies)을 선호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경쟁과 자유시장을 원하지 독점을 원하지 않는다. 독점이란 아니좋은 용어이다. 분명, 독점은 문제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덤 스미스는 생산요소에서 나오는 가치, 부, 소득분배는 공정하다고 말하면서 독점은 생산과 생산의 지속을 위해서는 필연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맑스는 이러한 애덤 스미스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사실, 오늘날 착취 이론은 여전히 논란이 되고있다. 그러나 노동가치설은 폐기되었다. 대부분의 경제학자, 정치경제학자, 사회학자, 정치사회학자들은 노동기치설을 포기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착취이론을 전개할때 노동가치설보다는 지대에 중점을 둔다. 그럼, 맑스는 아담 스미스의 이론을 어떻게 급진화 시켰는가. 알다시피, 맑스는 아담 스미스를 경계하였다. 즉, 맑스는 세가지 생산요소, 토지, 자본, 노동에서 나오는 가치, 소득, 부의 분배가 공정하다고 보지 않았다. 그럼, 가치는 무엇인가. 맑스는 매우 간단한 방정식으로 정의내렸다.

 c+v+s

여기서 c는 불변자본(constant capital)이다. 불변자본이란 자본가가 노동과정이 가능하도록 하기위하여 선대한(advance) 자본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불변자본을 사용하여 생산과정에 이용되는 토지의 질을 개량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토지에 빌딩을 건축한다면 그 건축비용은  생산과정을 통하여 회수(return)되어야 한다. 또 불변자본은 생산물의 가치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다음, v는 가변자본이다. 가변자본이란 임금(wages)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s는 잉여생산물(surplus product)이다. 이를테면, 당신은 생산물을 생산하고 그것을 판다. 그리고나서 당신은 생산을 위하여 선대한 자본을 회수하고 또 생산과정에 참가한 노동자를 위하여 임금을 지불한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라면 당신의 사업은 곧 망하게 된다. 모든 영리한 기업가(entrepreneurs)는 잉여를 낳고자 한다. 그들은 처음에 시작했던 투자금보다 조금더 갖고가기를 원한다. 그렇지않다면 그들은 뭣 때문에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겠는가. 그들은 뭣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겠는가. 그들은 뭣 때문에 감시감독하면서 생산과정에 참가하겠는가. 그들은 뭣 때문에 생산이 잘될지 안 될지 고민하겠는가. 그들은 잉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잉여는 생산물의 가치(the value of a product)이다. 그럼, 불변자본은 투자인가. 맑스가 아담 스미스로부터 빌려온 것은 생산요소(factors of production)이다. 그러나 맑스는 모든 가치는 노동에 의하여 창조된다는 명제에 힘을 불어놓고자 하였다. 맑스는 묻는다. 불변자본이란 무엇인가, 불변자본은 어디서 나오는가. 맑스는 불변자본은 노동에서 나온다고 답하였다. 그 노동은 축적된 노동이다. 그 축적된 노동은 자본축적이 이루어지기 전에 수행된 축적된 노동이다.  자본가는 축적된 노동을 전유(appropriated)하였고 이제 그것을 고정자본으로 사용한다. 따라서 모든 자본은 한때 노동의 생산물이었고 지금엔 우리가 말하는 투자이다. 다음, 가변자본이란 무엇인가. 가변자본은 임금이다. 맑스는 잉여생산물 억시 노동과정의 산출물이고 노동자의 생산물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맑스는 자본, 토지, 노동 사이의 공정한 분배라는 아이디어를 피하면서 이론을 전개했던 것이다. 맑스는 이렇게 모든 가치는 노동에서 창조된다고 하면서 로크와 애덤 스미스의 노동가치설을 재구성하였고 또 착취 이론을 출발하였다. 착취 이론에 따르면 자본가는  자본을 노동자에게 선대한다. 사실, 자본가는 이전 생산사이클에서 노동자들로부터 축적된 노동을 전유하여 자본화한 것이었다. 이제 자본가는 노동에 의하여 생산된 잉여물을 손에 넣는다. 그리고 노동자는 임금을 받고 만족하지만 이 지점에서 착취가 출발한다. 착취는 자본가가 생산과정에 투입했던 것들과 관계있다. 즉 불변자본과 가변자본, 그리고 생산과정이 끝난 후에 자본가가 손에 넣은(pocketing) 잉여물의 양과 관련되어 있다. 맑스에 따르면 이것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사회 민주주의 노동조합(social democratic trade union)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존속시키면서 고용주와 집단적인 바겐닝과 협상을 통해서 자본가를 위한 합리적 이윤과 노동자를 위한 높은 임금을 창조하고자 한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이것은 매우 불합리한 착취 제도라고 역설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이윤율은 잉여물이 지출(불변자본+가변자본)에 의하여 나누어진 것이다. 그럼, 맑스가 말한 인색한 샹품생산petty commodity production은 자본주의 생산양식capitalist mode of production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애덤 스미스의 상업사회, 시장경제, 자본주의에 대한 아이디어는 단순하다. 맑스는 복합적인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었다. 맑스에 따르면 인색한 상업사회(petty commercial society)란 먼저, 상품(commodity)을 갖고 시장에 가서 이 상품을 화폐로 교환한다. 당신은 교환된 화폐를 가지고 필요한 상품을 구입한다(c-m-c). 이 자체는 상업사회이다. 이것은 상품 생산이지만 자본주의는 아니다. 맑스는 확실하지 않았던지 다소 산만하다. 19세기 초 미국사회는 자본주의였는가. 맑스는 혼란스러워 하였다. 왜냐하면 당시 미국인의 대다수는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은 매우 상업화된 사회였고 고도로 발전한 시장경제였지만 개인의 자본축적은 비교적 적었다. 대부분의 미국인은 농부였거나 자영업 위주의 장인 또는 상인으로서 생산활동에 참가하였다. 이를테면, 구두쟁이는 구두를 생산하였다. 구두쟁이는 구두제조에 특화되었지만 기꺼이 닭을 기르고 계란을 얻기도 하였다. 따라서 구두쟁이는 계란이 다 떨어지면 구두를 갖고 시장에 가서 팔고 그 돈으로 계란을 산다. 그래야 구두쟁이는 계란후라이를 먹을 수 있다. 이것이 인색한 상품생산의 포인트이다. 매우중요한 명제로서 맑스는 말하기를 "생산의 목적은 욕구충족이다(the purpose of production is satisfaction of needs)"라고 하였다. 이를테면, 당신은 물건을 생산한다. 왜냐하면 당신은 욕구를 채워야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당신은 욕구를 초과하여 물건을 과잉 생산할 수 있다. 당신의 욕구는 시장에서 화폐를 통하여 타인의 욕구와 교환된다. 이제 맑스는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에서 시장과 상품교환을 소외의 근원으로보았던 때보다 훨씬 발전한 것이다. 맑스에 따르면 인색한 상품생산 과정에서는 어떤 소외도 없었지만 자본주의는 전혀 다른 공놀이이다. 우선, 자본주의 경제싸이클은 화폐로부터 출발한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자본주의자들에 대한 악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그들을 돈자루(moneybags)라고 칭하였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다. 맑스는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경제 시스템에는 자본을 축장하는 자들이 있고 그들은 시장에서 더많은 돈을 얻기위하여 상품을 생산한다는 식으로 말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가 확실하고 명백하게 상업사회 경제와 구별되는 매우 간단하고, 통찰력있고, 정확하고, 설득력있는 주장이다. 덧 붙여서, 왜 자본가는 처음 시작과정 때보다 더많은 자본을 창출하는가.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 왜 자본가들은 자본을 선대하는 위험을 무릅쓰겠는가. 자본가는 더많은 돈으로 보상받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 자체로서 명백한 이유이다. 또, 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경쟁 시장(marketplace)이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인류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경제이고 거기에는 기술진보가 있다. 자본가들은 더 많은 자본을 창출하여야 하는데 그 이유는 자본가는 이 자본을 생산과정에 재투자하기 때문이다. 자본가는 그 자본으로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 기술이 중단된다면 경쟁에서 밀려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는 초기에 출발했던 생산과정에서보다 훨씬 더많은 자본을 회수해야한다. 따라서 가장 이타적인 자본가라할지라도 생산과정의 마지막 단계에서 더많은 자본을 회수해야한다. 이를테면, 어떤 자본가는 자신이 매우 정직하고 오직 빈민들을 위해 직업을 창출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 이타적인 자본가는 빈민들이 교외에 주택을 마련하고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우면서도 어떤 댓가도 바라지 않는다. 이제 이타적인 돈자루에 대하여 생각해볼 때가 왔다. 그 불쌍한 자본가는 더 많은 돈을 회수해야한다. 그렇지않으면, 그는 내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경쟁이 그 이타적인 자본가를 쓸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맑스의 포인트이다. 맑스는 큰 변화가 도래했다고 말하였다. 이제, 생산의 목적은 욕구의 충족이 아니라 이윤의 창출이기 때문이다.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은 필연적이댜. 자본가들은 서로 어떻게 경쟁하는가. 도대체 자본가들은 어디서 더많은 자본을 회수하는가. 도대체 자본가들은 어떻게 자본으로 상품을 사면서도 결국엔 더많은 돈을 회수하는가. 자본가들은 우리를 속이고 있는가. 자본가들은 상품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가. 맑스는 아니라고 말하였다. 자본가가 물건을 싸게 사서 비싸게 팔고 난 후에 이윤을 챙기다면 다른 자본가가 나타나서 그 물건을 덜 비싸게 팔면서 더 많이 팔고 더 많은 이윤을 챙긴다. 그 자본가는 높은 가격을 낮게 내리면서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가격은 수요와 공급에 따라 정해진다. 따라서 더많은 자본은 자본가의 속임수에서 나올 수 없다. 더 많은 자본은 순환(circulation)에서 나올 수 없고 어떻게든 생산에서 흘러나와야 한다. 그럼, 어떻게 더많은 자본이 창조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맑스는 상품으로서의 노동력 아이디어를 끌어왔다. 보통, 자본가가 하는 일은 특정한 상품을 시장에서 구입하는 것이다. 이 특정한 상품이란 노동을 말한다. 맑스에 따르면 노동은 상품이다. 이 노동상품은 소비되었을때 그 상품 고유의 가치보다 훨씬 더 높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상품이다. 이를테면, 원료(raw material)는 노동과정에서 소비되고 이 노동과정에 투입된 노동의 양은 생산된 상품의 가치로 이전된다. 예를들어, 당신은 냉장고를 생산하기 위하여 강철과 알루미늄 등을 이용한다. 당신이 구입한 강철과 알루미늄의 생산에 투입된 가치는 바로 당신이 생산하는 냉장고의 가치에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따라서 당신은 강철과 알루미늄 원료상품으로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는 없다. 더 많은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유일한 상품은 노동력이다. 맑스는 노동자가 팔아야 하는 것은 노동일 수 없고 노동력(labour power)이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탈무드의 꼬인 말 같기도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맑스의 노동력 아이디어는 매우 중요하다. 존 로크가 말했던 것처럼, 모든 가치가 노동자에 의해 창조되고 노동자에 속한다는 것이 옳다면 당신이 노동력을 팔았을 때 자본가는 당신을 속여야한다. 왜냐하면 자본가는 잉여가치와 이윤을 취해야하기 때문에 당신 노동에 대한 완전한 가치를 지불할 수 없다. 이것이 맑스의 포인트이다. 따라서 자본가는 노동이 아니라 노동력, 즉 일능력(capacity of work)을 사야할 것이다. 맑스는 말하기를, "이 시스템에서 자본가는 노동력에 대하여 적절하고 올바른 시장가격을 지불하고 있는가." 라고 물었다. 근로자는 사기당하지는 않지만 착취당한다. 그럼, 왜 그렇게 노동력이 문제가 되는가. 시장에서 서로 교환되어야 하는 것들은 항상 등가물(equivalents)이 있다. 따라서 속임수는 없다. 근로자는 사기당하는 것이 아니다. 근로자들은 노동력의 댓가로 적절한 값을 받는다. 그럼, 노동력의 값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정확히 여타 다른 상품의 가격과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노동력의 재생산 가격이기 때문이다. 그 노동력 상품을 재생산하는 데는 얼마나 많은 노동력이 필요한가. 노동력이 상품이라면 분명, 노동력의 가격은 그 노동력 상품을 생산하는데 들어간 비용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를테면, 당신의 노동력상품 가격은 당신의 주택비용과 생활비용 그리고 노동력의 연장된 재생산을 포함한다. 그 가격은 당신의 자녀들을 위한 양육비와 교육비와 인적 자본투자 등을 포함한다. 이 모든 것이 노동자를 위해 보상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때 노동자는 자신의 일능력, 즉 노동력이 보상받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본가의 감시하에 일할 것이고 자본가는 노동자 노동력의 재생산 비용을 확보한 후에 노동자에게 또다른 서너 다섯시간의 일을 시켜서 잉여가치나 이윤을 창출할 것이다. 이것이 맑스로부터 나온 천재적인 아이디어이다. 이것이 계급과 착취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맑스의 포인트였다. 물론 맑스는 자본주의를 싫어하였고 착취도 싫어하였다. 맑스의 분석 논리는 매우 냉정하였고 가치판단에 눈을 감았다. 맑스는 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의 작동방식이다. 맑스는 그것을 싫어하였고 그 감정표현을 멈출 수가 없었다.

+ 역사상의 계급
먼저, 게급에 대하여 살펴보기 위하여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으로 돌아가자. 여기에는 몇가지 이슈가 있다. 맑스는 계급을 초-역사적인 범주(trans-historical category)로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어떤 면에서 <자본론>의 주장과 모순된다. 맑스는 부르조아지를 신계급이면서 진보계급이라고 말한다.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은 자본론이 완성되기 거의 20년 전에 착취 이론없이 쓰여졌다. 맑스는 이전의 모든 존재했던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하였다. 이 아이디어는 이미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 있었는데 맑스는 이 계급투쟁을 역사 진화를 설명하는 원인기계론(causal mechanism)으로 개발시키고자 했었다. 계급투쟁이란 노예의 주인에 대항한 투쟁, 농노의 영주에 대항한 투쟁,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의 부르조와에 대항한 투쟁을 말한다. 보다시피, 이 계급투쟁 개념은 초-역사적인 방법으로 사용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명백히 잘못되었다는 데 있다. 이 계급이론은 맑스의 착취이론과 관련해도 잘못되었고 실제로 경험적으로도 잘못되었다. 계급이론은 맑스의 착취이론과 들어맞지 않는다. 착취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독특한 것이라면 계급 문제는 노동력이 자유로운 자본주의에서만 가능하게 된다. 양의적인 의미dual sense of the term로서 노동력은 먼저, 법적으로 자유롭게 되었고 다음,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이제 노동력은 팔 수 있게 되었다. 노동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계급이란 용어를 써서는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맑스의 계급 이론은 자기모순인 것이다. 또 계급 이론은 경험적으로로 오류이다. 역사적으로 계급이 존재해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예들이 주인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서 고대사회가 전복되었는가. 알다시피, 그렇지않다. 맑스도 인정했듯이, 고대 로마제국은 게르만 부족의 침략에 의하여 무너졌다. 미국 남부 주의 노예제는 노예들이 노예주인에 대한 반란으로 무너졌는가. 그렇지 않았다. 북부 주의 자본가들이 남부주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킨 후에 노예제가 무너졌다.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조와지를 전복하기 위햐여 반란을 일으켰는가. 그렇지 않았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났던 나라들이 있다. 그러나 그 프롤레타리아들은 결코 프롤레타리아라고 할만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1949년 중국에는 얼마나 많은 프롤레타리아가 있었는가. 그들은 분명히 압도적인 농부들이었다. 당시 농부 대중들 마오쩌둥의 리더쉽에 따라서 토지를 요구하면서 혁명을 일으켰던 것이었다. 1917년의 러시아도 크게 다를 바 없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사실과 다르다. 또  종속 계급이 새로운 사회에서 지배계급이 될 것이라는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즉, 노예들은 지주가 되지 못하였고 농노들도 부르조와지가 되지 못했다. 알다시피, 프롤레타리아는 중국과 소비에트에서 지배계급이 되지 못하였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부르조와지는 지배계급이고 역사 최초로 진정한 계급이라고 말했다. 또 지주가 계급이 아닌 이유는 지주가  경제적 용어로 규정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지주는 시장에서 경쟁이나 교환에 따라서가 아니라 관습법에 따라 규정되었던 것이다. 또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조와 계급은 매우 혁명적인 세력이었다고 강조하면서 실제로 모든 사회를 전환(transformed)시켰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맑스의 자기모순이다. 맑스에 따르면 부르조아세력은 이전의 명예로운 전통적 신분을 계급의 위치로 전환시켰다고 강조하였다. 이전의 전통적인 의사, 판사, 성직자 신분은 이제 계급으로 전환되었다. 그들의 권력은 전통적으로 명예에 기초했지만 이제 급료가 지불되는 지위로 전환된 것이다. 맑스는 부르조와지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진보적 역할을 했다고 보았다. 물론, 맑스는 본질적으로 부르조와지를 싫어했지만 현대사회에 기여한 공헌에 대하여는 고맙게 생각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부르조와지는 생산도구를 지속적으로 개발하였고 지난 100년간의 생산력 발전은 이전의 모든 사회를 통틀은 것보다 훨씬 거대하고 방대했다. 이것은 어찌보면 자본주의 애호가의 말처럼 들린다. 물론 맑스는 그렇지 않았다. 분명, 맑스는 자본주의는 스스로 붕괴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럼, 자본주의에는 어떠한 계급이 존재하는가.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에는 두 계급, 브르조와지 계급과 프롤레타리앗 계급, 즉 돈자루와 근로자가 있다. 알다시피, 노동자들은 돈자루들에 의하여 착취당한다. 계급투쟁은 여기서 비롯되고 결국 결국 혁명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맑스의 포인트이다. 그러면 중간계급은 어디 있는가. 1867년에는 그렇게 많은 프롤레타리아가 존재하지 않았다. 단,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인구의 대다수가 산업 노동자였긴 하지만 그들은 지배계급이 아니었다. 그들은 인구의 다수를 점하였고 착취당하고 억압당하였다. 그러한 산업 노동자는 서방사회에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점에 도달하지 못하였고 산업 노동자는 감소해오고 있는 중이다. 현재, 미국의 산업근로자는 전체 인구의 15퍼센트를 넘지 않는다. 그럼, 중간계급은 어디 있는가. 맑스는 브르조와지와 프롤레타리앗 사이에는 기본적인 대립이 존재한다고 하였지만, 당시 착취이론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시원스럽게 설명할 수 없었다. 따라서 착취 이론을 연구해보라. 당신이 <자본론>을 갖고 한번 시도해보라. 분명, 프롤레타리아는 노동력을 팔 수 밖에 없다는 것과 착취당한다는 것 사이에는 서로 충돌하는 모순이 존재한다. 물론 이 모순은 화해 불가능하다. 그럼, 중산계급은 어떤가. 1848년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르조아지도 프롤레타리앗도 아니었다. 맑스는 정치 팜플렛<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에서조차 중간계급이 사라지고 있다고 하면서 대다수 농부들과 장인들, 상인들이 사라질 것이고 그들 중에 극소수는 대자본가가 될 것이지만 압도적인 대다수는 근로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맑스의 이러한 주장은 통찰력이 있어보인다.  왜냐하면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이 발간된지 약 100년 후, 사회적 흐름은 그와 같이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영업(self-employment)은 줄어들고 있었고 임금 노동자는 증가하고 있었다. 19세기 중반, 인구의 70에서 80퍼센트는 농업과 자영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미국의 농업인구는 1퍼센트 내지 2퍼센트에 불과하다. 자영업은 오랜동안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맑스가 간과했던 점이 있다. 그것은 두가지이다. 첫째, 실제로 자영업 인구의 감소는 더 이상 없다는 점이다. 사실, 자영업 인구가 다소 증가하였다. 그것은 나라마다 다르다. 일본은 크게 증가하였고 미국은 다소 증가하였다. 자영업은 자생력이 매우 강하다. 이를테면, 수퍼마켓의 구석에는 조제식품 코너(deli shops)가 있다. 그들은 쉽게 사라질 것 같지않다. 또 사람들은 신발을 고치기 위하여 구두점에 갈 수 있다. 250달러를 주고 새로 사느니 25달러를 주고 고치는 것이 낫기 때문이댜. 말하자면, 대량생산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장인들은 질높은 상품을 생산을 한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임금 노동자를 육체노동자와 동일시하여 개념화하였다. 알다시피, 진보한 국가에서 육체 노동자는 사회적으로 소수이면서 수동적 노동자이다. 그러나 전지구적으로 볼 때, 육체 노동자를 요구하는 제조업 등 산업활동은 제 3세계로 지역화되고있다. 미국과 유럽대륙의 육체 노동자는 소수이다. 오늘날 거대한 새 중간계급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화이트 칼라 근로자이다. 맑스의 개념으로 볼 때  이 중간계급은 거의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럼, 그들은 어떤 가치를 창출하는가. 그들은 착취를 당하는가. 사장은 그들을 착취하는가. 화이트 칼라 근로자는 사장에 의해서 착취당하는가. 그렇지 않다. 새로운 중간계급은 맑스의 분석에 들어맞지 않는다. 따라서 착취 이론은 더 이상 힘을 못쓰게 된 것이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2012년 2월 9일 목요일

7-3. 맑스: 역사론

1. 맑스의 다면성

맑스는 한때 자신은 맑시스트가 아니라고 밝혔었다. 이것은 많은 진실을 담고 있다. 맑스는 창조적이었고 새로운 주장과 증거에 직면했을 때는 자신의 주장을 바꿀 정도로 열정적인 인간이었다. 또 맑스는 여러 얼굴을 하고있다. 맑스는 헤겔관념론을 기반으로 청년헤겔파로서 소외문제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맑스는 헤겔의 다소 애매한 소외개념에 실망하였다. 맑스는 그 헤겔의 소외alienation를 현실적으로 구체화 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환원주의적 오류를 범하였다. 맑스는 자신 고유의 소외개념을 포기하였고 급하게 그리고 다소 별 뜻 없이 유물론자로 전향하였던 것이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역사적 유물론과 관련하여 "문제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라고 하였고 또 "진리는 실제적인 문제(practical question)" 라고도 하였다. 맑스는 그 후 6개월도 안 되어서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 에서는 실증주의 학자가 되어있었다. 맑스는 이론의 전개에 있어서 개인과 개인이 속한 실제적 사회환경에서 이론의 출발점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스스로 입증가능한 가설을 제시하였다. 맑스는 어떤면에서 실증주의 사회학자로 남아있다. 맑스는 실제로 자신이 갖고있던 원래의 생각을 바꾸었으므로 일반적인 맑시스트보다 훨씬 덜 독단적이게 되었다. 맑스의 가장 중요한 이론중에 하나가 바로 맑스의 역사론이다. 맑스의 역사론에는 모순과 긴장이 교차되지만 놀랄만큼 탄탄한 명제들을 발견할 수 있다. 초기 사회의 형성과 발전댠계와 관련하여 많은 학자들은 특정한 아이이어를 가지고 사회진화의 유형과 과정을 정립하고 해석하였다. 몽테스키외나 애덤 스미스도 그러한 학자들에 속하였지만 맑스는 독특하게도 그들과는 달랐다. 맑스는 자신의 역사론에서 매우 강한 어조로 이전 단계의 사회에서 다음 단계의 사회로 변천하게 하는 기계적 동력, 즉 사회진화를 견인하는 인자(agent)에 대하여 대단히 많은 중점을 두었다. 맑스는 이러한 점에서 진짜로 사회학자들 중의 다윈이라고 할 만하겠다. 맑스는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이루냈던 것을 자신의 역사론을 통해서 이루어 낼 수 있었다. 다른 힌편으로 맑스는 진정한 이론가였다. 진정한 이론가란 원인 기계론(causal mechanism)을 통하여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일관성을 해명할 수 있어야 한다. 맑스는 일관적인 이론을 가지고 있었다. 독일의 막스 베버는 위대한 사회학자였지만 그런 이론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물론 맑스 역사론의 불리한 점은 역사가 그가 틀렸음을 입증했다는 것이다(history proved him to be wrong). 이것은 맑스의 단점이 아닐 수 없겠다. 이론이라고 해서 반드시 사실에 입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이란 긴장된 명제들을 담고있고 그러한 명제들은 검증되면서 이론이 전개되는 것이다. 맑스의 이론은 맑스를 위대하게 만들었다. 맑스의 이론은 경험적 실재에 훨씬 잘 들어 맞았다. 맑스의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와 <그룬트리세Grudrisse>가 그렇다. 그룬트리세란 밑그림(sketch) 또는 개요(outline)란 뜻이다. 이 <그룬트리세>는 1,000 페이지로 되어있고 수작업을 통해서 1857년과 1858년 사이에 매우 급하게 작성되었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와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글이 마무리 되어갈 즈음에 스스로 오류를 발견하게되자 처음부터 다시 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10년 가까이 지나서 <자본론Das Kapital>을 쓰게 된다. 그러면 맑스의 <그룬트리세>는 정말로 잘못된 내용이었는가. 우리는 이것에 대하여 살펴볼 것이다. 한편 영국의 사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um)은 이 <그룬트리세>를 <Pre-Capitalist  Economic Formations>이란 제목으로 영역하였다. 에릭 홉스봄은 현재 90세로서 생존해 있고 건강하게 활동하고 있다. 

2. <그룬트리세>의 주요내용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로부터 <그룬트리세>로 옮겨가게 됐던 주된 아이디어는 무엇이었을까. 맑스가 1845년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최초로 도입한 아이디어는 생산양식(modes of production)이었다. 맑스는 인간은 의식과 종교 등에서 동물들과 구별되지만 무엇보다 생산을 시작하면서 그리고 필요에 따라서 세계를 변화시키기 시작하면서 동물들과 구별되기 시작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맑스가 밝힌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통찰이다. 이러한 통찰은 물론 간과될 수도 있겠지만 매우 중요한 명제이다. 인간이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생존해 왔는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매우 재미있는 일이다. 인간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인간들은 먹기위하여 무엇을 생산해 내었을까. 인간들은 어떤 집에서 살았을까. 인간들은 어떻게 집을 지었을까. 인간들은 어떻게 돌아다녔을까. 인간들은 수레바퀴를 알았을까. 인간들은 불을 지필 수 있었을까, 없었을까. 인간들은 어떻게 사슴을 죽였을까. 인간들은 어떤 무기를 가졌을까. 인간들은 식물을 재배할때 어떤 도구를 사용했을까. 바로 이런 것들이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것이다. 맑스는 이러한 생산양식이 단지 재생산으로서만 여겨져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이러한 것들은 분명 생활양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산양식은 단지 경제에만 한정될 필요는 없겠다. 사람들은 다양한 생활양식을 갖고있다. 이를테면 당신은 술마시고  밥먹고 누울 집을 찾는다. 당신은 먼저 배를 채우고 안전하게 비를 피한 후에야 비로소 생각다운 생각를 시작한다. 이것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합리적인 주장이다. 역사와 관련하여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와 <그룬트리세> 사이에는 차이점이 있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역사라는 것은 증가하는 노동분업에 견인되어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였다. 맑스는 그 아이디어를 애덤 스미스로부터 직접 빌려왔다. 사실 애덤 스미스는 기본적으로 그렇게 주장하였다. 반면에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는 역사라는 것은 사소유권을 향한 점진적 운동이라고 보았다. 맑스는 사소유권을 향한 운동이 역사를 견인하면서 끌고나아가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말하자면 맑스는 인간역사라는 것은 노동하는 주체와 객체적 조건사이의 틈이 점진적으로 벌어지면서 분리해가는 과정으로 보았던 것이다. 맑스가 <그룬트리세>에서 주장한 노동하는 주체와 노동자의 객체적조건 사이의 점진적 분리라는 아이디어는 맑스 자신이 스스로 잊어왔던 소외의 개념을 다시 불러들인 것에 불과하다.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 소외개념을 사소유권과 관련지었고 소외란 다름아닌 노동하는 주체, 즉 노동자와 노동자의 객체적조건 사이의 점진적 분리로써 재해석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이다. 또 한가지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와 <그룬트리세Gruntrisse>사이에 큰 차이점이 있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역사는 매우 결정론적(deterministic)이고 일-직선적(uni-linear)인 것으로 보았다. 맑스는 자신의 후반기에 다시 이 견해로 돌아오게 되고 또 맑시스트의 여러 분파들은 이 견해를 추종하게 된다. 일-직선적이라는 것은 모든 사회체는 동일한 출발점을 가지고 있으므로 노예제, 봉건제, 자본제의 과정을 순서대로 통과하여 진행하게 되고 마침내는 공산주의에 도착한다는 가정에 기초한다. 따라서 모든 사회는 직선적 과정으로서 이러한 각 단계를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므로 이전 단계의 사회는 반드시 순서상 다음 단계의 사회로 이전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맑스는 이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하아 원인 기계론(causal mechanism)을 이용하여 밝혔다. 반면에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 이와는 다른 식으로 역사발전이론을 전개하였다. 맑스는 인간역사에 대하여 어지럽게 기술하면서 역사는 다-직선적(multi-linear trajectory)이라고 말하였다. 맑스는 직선적 궤도에서 멋지게 다선적 궤도로 옮겨갔고 비록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완전히 망쳐놓았지만 그 당시 잘 들어맞았던 역사발전단계 이론의 명제를 생산해내게 되었다. 역사발전단계 이론은 더 나아가서 나중의 역사진화(historical evolution)에도 훨씬 더 잘 들어맞게 된다.

3.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 있어서 노동분업의 핵심

그러면 잠깐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로 돌아가자. 이 책 <독일 이데올로기>의 핵심 아디디어는 노동분업(division of labor)이다. 맑스는 생산양식을 규정하면서 자신이 관찰하였던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변증법적 상호작용(dialectical interaction)을 기술하였다. 생산력(forces of production)이란 기본적으로 기술, 원료(raw material), 노동력을 의미한다. 그리고 생산관계(relation of production)란 맑스가 조어한 용어로서 재산관계(property relations)라고도 하는데 상호작용이나 노동분업의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변증법적 상호작용이란 이미 언급하였듯이 맑스는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떤 사안에 대하여 아직 이해하지 못할때 이것을 '변증법적' 이라고 부른다고 말했었다. 따라서 '변증법적' 이라는 개념은 맑스에게 아주 확실한 아이디어는 아니었다. 그러나 '변증법적' 이라는 것과는 다르게 '변증법' 은 기본적으로 상호적인 관계(interactive relation)을 말한다. 잘 알다시피 오늘날 사회학적인 용어로 인과 화살(causal arrow)이 양쪽으로 박히는 것을 말한다. 상호적인 관계란 단지 생산력이 생산관계를 결정한다는 것만은 아니다. 어떤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발전을 방해할 수 있고 또 생산력이 바뀌면 새로운 생산관계가 그 발전된 생산력에 맞물리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변증법이다. 인과 화살은 이쪽에서 저쪽을 가리키면서 단지 결정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다시 돌아오는 고리(feedback loop)안에 있다는 것을 말한다. 맑스의 초기 공식에 따르면, 변증법은 분명 재산관계property relations에 이용된 것이 아니라 노동분업과 관련하여 이용되었던 것이다. 잘 알다시피 노동분업이론은 애덤 스미스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국가들은 각 나라의 생산력의 발전, 노동분업, 그리고 내적 상호작용에 관련되어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모든 사회, 즉 수렵채집사회, 목축사회, 농업사회, 상업사회 등 이들 사회는 각각 서로 다른 단계의 노동분업에 대응하고 있다고 하였다. 맑스는 이 노동분업을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처음으로 시도하고자 했다. 또 맑스는 재산관계에 대한 문제를 다루면서 "재산관계 또한 변화한다. 그러나 이 변화하는 재산관계는 증가한 노동분업의 산물일 뿐이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재산관계는 기본적으로 노동분업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내가 노동분업의 단계을 안다면 재산관계property relations 또한 알게되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일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이 노동분업과 재산관계에 관한 이론은 1950년대 맑시스트에 의하여, 특히 소비에트 연방에 살고있던 맑시스트에 의하여 재발견되기에 이르렀다. 폴란드의 사회학자 오소프스키Ossowski는 1957년 <독일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를 재해석하였는데 그전까지 맑스이론은 공산주의의 기초가 된 재산관계이론이었다. 따라서 사소유권을 폐지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으므로 사람들 사이의 평등 뿐만아니라 역동적인 경제발전 또한 기대할 수 있었다. 잘 알다시피 소비에트 연방은 사소유권을 폐지하였다. 그렇지만 소비에트 연방은 평등한 사회였는가. 그렇지 않았다. 그러면 역동적인 사회였는가. 그렇지도 않았다. 오소프스키Ossowski는 맑스를 재발견하면서 맑스가 강조했던 것은 재산관계가 아니라 그것은 바로 노동분업이라고 역설하였다. 물론 당시 공산주의사회에도 노동분업이 존재하였지만 적절하지 않았고 그것은 오히려 불평등을 초래하였다. 어쨌든 이것은 재미있는 제안이었고 오소프스키는 서방사회학자들로부터 대단한 환영을 받았다.

4. 생산양식들(modes of production)

맑스는 댜양한 생산양식을 논하였다.

+ 첫번째 생산양식: 부족제(tribalism)
이 부족제 사회에서는 매우 원시적인 생산양식이 가능한데 수렵, 어획, 채집 등으로서 노동분업은 매우 단순하다. 맑스는 성차별주의자sexist처럼 말하면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자연적인 노동분업만 존재하였다고 강조하였다. 여성들은 채집해서 모으고 남성들은 수렵을 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남성은 강하고 여성은 약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이것은 자연적(natural)인 것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부족제에서는 자연적 노동분업(natural division of labor)이 이루어졌다. .

+ 두번째 생산양식: 노예제(slavery)
맑스는 여기 노예제에서 생산력이 발전하기 시작한다고 하였다. 부족제 사회에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하여 모두가 밖으로 나가서 채집과 수렵과 어획을 하였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였다. 그 기술은 훨씬 더 생산적이었으므로 어떤 사람은 사냥하러 나가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사람은 노예를 고용하였고 노예는 그를 위하여 사냥을 대신하였다. 노예들은 주인의 생존을 위하여 필요한 것들을 생산하였다. 노예는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최소한의 물자만 제공받았다. 이를테면 주인은 노예들 덕택으로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철학을 논하면서 드라마를 쓰고 시를 쓸 수 있다. 대신에 노예들은 들판에 나가서 농사를 짓고 주인의 필요를 위하여 잉여물을 생산하였다. 노동분업은 기술이 진보함에 따라서 증가하게 되는데 그 결과로서 재산관계가 변화한다. 노예와 주인은 공동적 관계(communal relationship)가 아니었고 또한 동일한 공동체 내의 일원이 아니었으므로 주인은 노예를 매우 억압할 수 있었다.

+ 세번째 생산양식: 봉건제(feudalism)
노예제의 문제점은 무엇이었는가. 노예들은 생산하는 데 절대적으로 무관심하였다. 노예들은 단지 생산을 위하여 육체적으로 강제되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노예들은 생산도구를 사용하는 데 꽤나 게을렀다. 그래서 노예들은 항상 감시 감독될 필요가 있었고 때로는 매를 맞으며 일을 하였고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한편 새로운 노예를 얻기위해서는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켜야 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했다. 그래서 농노(serfs)와 농부(peasants)가 등장하였고 그들이 노예를 대체하였다. 이것은 대변화였다. 이제 농부는 자신을 위하여 씨를 뿌리고 경작할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일주일에 두 세번만 봉건영주의 장원(large estate of feudal lord)에서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의 땅을 경작하고 자신의 집에 머물렀다. 농노들은 집을 지을 수 있었고 가족을 가질 수 있었다. 농노들은 결혼할 수 있었고 농노들의 자녀들은 더 이상 봉건영주의 소유가 아니게 되었다. 고대 노에제에서 자녀들은 결혼할 수 없었고 집도 없이 초막에서 살았으므로 가족제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예를들면 미국 남부 주의 노예제는 그리스와 로마, 또는 이집트의 고대 노예제와는 달랐지만 많은 유사성이 있었다. 노예주인들은 노예의 아이들에 대하여 많은 권리를 행사하였는데 19세기 미국에서 조차도 법적인 결혼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 농노serfs들은 매우 달랐다. 농노들은 가족이 있고 집이 있었다. 농노들은 집과 땅에 대한 권원(title)은 없었지만 집과 땅을 소유(possession)할 수 있었다. 그러나 농노들은 이틀이나 사흘 열심히 영주의 토지에서 일하지 않는다면 쫓겨날 수 있다. 이제 농노 자신들은 이전사회의 노예들 보다 좀 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이것이 바로봉건제 아이디어이다. 맑스는 유럽의 중세 봉건주의를 고대 로마와 그리스의 노예제와 비교하면서 노동분업이 과연 증가했는가라고 물었다. 그리고는 맑스는 아니라고 답하였다. 맑스는 중세시대에 오히려 노동분업이 감소했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르네상스시대에 발굴되었던 고대유물들(antique)은 중세의 것들보다 훨씬 우월한 것들이었다. 중세시대에 이르러서 로마와 같은 큰 도시는 버려졌을 뿐만아니라 그 영화로웠던 도시는 폐허가 된 채 염소들을 위한 방목지가 되어버렸다. 로마와 그리스인들은 높은 수준의 관개수로 시스템과 산업시설을가지고 있었지만 중세가 들어서자 그것들은 모두 버려졌다. 그러면 중세시대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중세는 역사적으로 퇴행한 단계라고 말한다. 그 당시 중세는 종교재판(inquisition), 암흑기(Dark Middle Ages), 도시의 황폐화 등으로 노동분업의 퇴행적 단계였다. 맑스는 그러한 역사적 사실에 당황하면서 자신의 이론을 어떻게 전개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맑스는 여기서 원고를 포기하였고 노동분업 이론이 맞지 않는다고 인정하였다. 그럼 중세시대 노동분업의 후퇴를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까.

+ 네번째 생산양식: 자본주의(capitalism)
맑스는 노동분업이론과 결별하고 새로운 생산관계의 개념을 개발하기 시작하였다. 맑스는 봉건주의는 고대 노예제보다 우월하다고 강조하였는데 그 이유는 봉건주의는 보다 더 발전된 재산양식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말하자면 맑스는 사소유권 개념을 향하여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었다. 왜냐하면 일꾼은 자신이 경작하는 토지를 소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 역사의 변화; 생산력과 생산관계
생산력과 생산관계는 역사의 변화(historical change)에 관한 맑스의 낡은 견해로서 나중에 <그룬트리세>에서 자신의 입장을 바꾸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충격적이고 중요한 이론이다. 맑스는 생산양식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조응한다고 하였다. 맑스는 특정한 단계의 생산력은 특정한 유형의 생산관계를 요구한다고 하였다. 그것은 개별자들 간의 관계에 있어서 특정한 유형의 생산관계를 말한다. 이것은 맑스의 사후 20세기초 사회과학에서 구조주의structuralism라고 불리우게 되는 것이다. 맑스가 강조했던 것은 한마디로 구조주의자들의 전형적인 발언이었던 것이다. 구조주의자들은 분석을 하기 위하여 시스템의 서로 다른 요소들의 대응점들을 찾을려고 혈안이 되는데 맑스의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바로 그렇다는 것이다. 맑스는 더 나아가서 변화의 동력인 원인기계론causal mechanism을 밝혀내고자 하였다. 맑스는 생산력의 발전이 가능하다고 말하였다. 현재 맑시스트 롸이트Eric Olin Wright는 생산력의 발전이 떼기 힘들게 딱 달라붙었다sticky down라고 명명하였는데 생산력의 발전은 계속해서 복잡해진다는 의미이다. 생산력이 끈끈이 달라붙었다는 것은 실제로 사실은 아니지만 기억해 둘 필요는 있겠다. 기술은 계속해서 발전해나간다. 그러나 기술의 진화는 결국 사회내의 재산관계와 더불어 사회관계 속에서 정면으로 생산관계와 충돌하게 된다. 그 기술은 결국 낡아빠져서 쓸모없게 된다. 노예들은 기술발전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리고 농노들은 노에들보다는 관심을 갖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현대사회의 근로자들은 심여를 기울여서 기술을 개발한다. 왜냐하면 기술은 높은 급료를 위한 인센티브가 되기 때문이다. 맑스는 낡은outmoded사회관계는 결국에는 생산력과 충돌하게 되고 마침내 우리는 사회발전을 원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낡은 생산관계와 필요에 따라서 새롭게 등장한 생산력 사이에는 긴장관계가 놓여있다. 이것이 맑스가 정의하는 혁명운동revolutionary movement이다. 맑스는 이때 혁명이 도래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낡은 사회관계에 대항하여 들고 일어나서 그것을 새로운 사회관계로 대체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사회공간에서 더 진보된 생산력의 발전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한편 맑스와 관련된 오해들이 있다. 맑스는 자본주의가 비효율적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그와는 반대로 맑스는 자본주의는 인류역사상 가장 생산적인 시스템이라고 하면서 지난 100년 간의 자본주의는 이전의 전 인류역사가 해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진보를 이루어냈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분명 잘못되었지만 맑스는 자본주의는 영원히 지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다른 생산양식들 처럼 생산관계와 충돌하게 될 것이고 그때 혁명이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 비추어 본다면 맑스의 명제는 분명 잘못된 것이다. 맑스는 자본주의가 비범하게 위기관리에 대처하는 능력을 간과하였다.  지난 18개월을 본다면 자본주의는 그런대로 잘 굴러갔다. 리만 브라더스Lehman Brothers 사태를 보라. 3월에는 매우 흔들렸지만 그 후 우리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회복하는가를 배우게 되었다. 어쨌든 맑스의 포인트는 자본주의는 엄청난 혁명이고 생산력의 발전을 촉발했다는 것이다.

5. <그룬트리세>의 업적

맑스는 무엇보다 생산양식의 진화는 재산관계(property relations)의 변화로부터 나온다고 하였다. 이것이 기본적으로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를 끝내는 지점이다. 맑스는 <독일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생산양식의 진화의 출발점을 노동분업으로서 전개하였지만 맑스는 자신의 잘못된 노동분업의 오류를 인정하였다. 이제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는 생산양식의 진화동력을 재산관계라고 주장하였다. 맑스는 사소유권을 새롭게 정의하였다. 맑스는 사소유권은 노동주체가 객체적 노동조건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될 때 발생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맑스가 소외의 본질은 상품관계에 있다고 주장한 <파리원고Paris manuscripts>로부터 나온 장족의 발전이었다. 이제 소외의 본질은 상품관계(commodity relationships)에 있는것이 아니다. 맑스는 사소유권의 본성 안에 있는 소외의 본질을 포착하였는데 그것에 대하여는 후술할 것이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으로의 발전은 다름아닌 노동자와 노동조건의 분리이다. 맑스는 그것을 매우 강조하였다. 이 개념은 우리를 황홀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아이디어일 뿐만 아니라 또 막스 베버를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아이디어이다. 현재 일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큰 진보는 노동자는 양의적으로(in the double sense)말하자면 전통사회 또는 봉건사회에서와는 매우 대조적으로 자유롭다는데 있다. 이를테면 나는 노예였다. 그러나 내전이 일어난 후에 나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닌 것으로 선포되었고, 나는 법적으로 자유롭다. 그러나 맑스는 말한다. 자본주의는 당신에게 법적 자유와 법적 평등을 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본주의는 당신을 토지로부터 격리시키고 도시로 몰아내었다. 이제 당신은 도시에서 노동을 팔지 않으면 아니되게 되었으므로 역설적으로 당신은 밭일도구(possessions)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다. 말하자면 당신은 이전에 농부로서 가졌던 수단들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확실히 그 농부는 이제 생계수단(means of subsistence)을 상실하였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생계수단을 갖고있지 않기를 요구한다. 이를테면 당신은 계란을 사기 위하여 수퍼마켓에 가야한다. 이 자본주의 시스템은 당신이 정원에서 필요한 것들을 모두 기르고 재배한다면 잘 작동할 수가 없다. 당신이 그런 일을 해야하는 인센티브는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그러나 운좋게도 우리는 필요한 야채를 재배할 수 없다. 우리는 직장이든 어디든 차를 몰고 가고 또 그것을 위해서는 가솔린을 사야한다. 우리는 스스로 노동력을 팔지 않으면 아니되도록 강제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유(free)의 양의적 의미(in the dual sense of term)이다. 다시말해서 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은 법적으로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생계수단으로부터도 자유롭다. 물론 자유의 개념은 아이러니한 면이 있다. 맑스는 다-선적인 것(multi-linealiy)과 관련하여 사회가 부족제로부터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맑스는 고대사회에 대하여 기술하면서 아시아적 양식(Asiatic mode)을 덧붙였다. 또 생산양식의 변종된 형식으로서 슬라브 형식(Slavic form)과 독일 형식에 대하여도 언급하였다.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 사회 형성(social formation) 또는 경제 형성에 대하여 논하였는데 이것은 재미있는 변화였다. 이것은 단지 용어의 변화 뿐만 아니라 이론의 변화였다. 맑스는 생산양식의 진화 또는 변화하는 재산관계와 관련하여 낡은 전-자본주의 구조(old pre-capitalist formations)에서 노동은 자연적 조건들을 전유(appropriation)하였고 또 자연적 도구인 토지를 전유하였는데 개인들은 이 객관적인 조건들을 자기자신의 것으로 여긴다고 말하였다. 실제로 전-자본주의사회에서 노동자는 객관적인 조건들과 어떤 분리도 없었다. 노예제가 명백한 예가 되겠는데 그리스인들은 노에를 가리켜 일하는 짐승(working animal)이라고 하였다. 노예들은 주체로서 여겨진 것이 아니라 객체로서 다루어졌는데 노예들은 개인적 주체로서의 권라가 없었다. 고대노예제 사회는 노예를 위한 어떤 개인적 자유가 없었을 때였다. 그러다가 중세사회의 농노들은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실제로 소유권(ownership)은 없었지만 생산수단을 소유(possession)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농노들은 법적으로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또는 주체로서 대우받지는 못하였다. 초야권을 생각해보라. 봉건영주는 결혼식이 열리는 경우 농노의 딸인 신부와 첫날밤을 보낼 권리가 있었다. 모짜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the marriage of Figaro>을 보라. 피가로는 수잔나와 깊은 사랑에 빠지고 그녀에게 구혼하였다. 그러나 피가로는 봉건영주가 신부와의 초야권을 주장하자 충격에 빠졌다. 피가로는 영주가 자기신부와 첫날 밤에 동침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이것은 매우 재미있는 18세기 이야기이다. 어쨌든 농노는 아직 주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노동자 또는 자유 노동자는 주체자이다. 맑스는 사소유권과 관련하여 자본주의에서 일work, 즉 객체는 완전히 노동자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말하였다. 그것은 이중분리(double separation)를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법적으로 자유롭게 분리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실존수단(means of existence)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분리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가지 시장경제로의 이전(transition)이란 사람들이 토지에서 쫒겨나고 도시로 밀려날 때 발생한다. 그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노동을 팔아서 임금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하게 되는 노동자로 전락하게 된다.

6. <그룬트리세>의 다면성

맑스의 초기 아이디어는 단-선적(uni-linear)적 이었다. 부족제 사회는 노예제 사회에 의하여 견인되었고 그 후 노예제 사회는 봉건제 사회에 의하여 견인되었다. 그 후 봉건제 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하여 견인되었다. 맑스는 변증법과 관련하여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화는 혁명을 초래하고 이전 단계의 사회에서 다음단계의 사회로 넘어가게 된다고 말하였다. 이러한 변증법적인 상호작용으로 인하여 사람들은 이전의 낡은 옛시스템을 던져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매우 다른 견해를 보게 될 것이다. 맑스는 다양한 개인 소유권의 형태들을 제시하면서 독특한 게르만 형식(germanic form), 즉 게르만 부족제가 개인소유(individual possession)을 이끌어 내었다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정말로 역사책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처럼 게르만 부족의 독특한 특징이다. 게르만족은 각 계절이 시작되기 전에 추첨(lottery)을 통해서 토지의 분깃을 나누었고 분깃을 할당받은 가족은 그 할당된 토지를 경작하였다. 그들은 그 토지에 대한 개인적인 재산권(property rights)을 갖고있지는 않았지만 할당된 토지를 소유(possession)할 수는 있었다. 그것은 공통 토지(common land)가 개인 또는 가족에게 분양(divided up)된 것이다. 이것이 게르만 부족의 독특한 토지소유 형태이다. 맑스는 <그룬트리세>에서 다-선적 발전(multi-trajectory development)과 관련하여 모든 부족제 사회가 고대노예제 사회로 진입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대영도서관에서 오전 8시부터 밤 10시까지 미친듯이 책을 읽었다. 맑스는 마침내 아시아에서는 보편화된 노예제가 없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중국에는 노예들이 존재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노예(family slave)형태였고 이집트나 고대로마에서 행해졌던 것처럼 노예들에 의하여 경작되는 대토지(great plantation)는 없었다. 맑스는 그리스, 로마, 이집트사회를 노예생산양식의 개념으로서 지나치게 일반화한 면이 없지않다. 이 사회들은 독특한 고대사회였다. 맑스는 아시아와 콜롬부스 이전의 미국대륙(Pre-Columbian America)에서는 보편화된 노예제가 없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아사아적 형식(asiatic form)이라고 명명하였다. 맑스는 콜럼부스 이전의 미대륙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아시아적 형태의 독특성은 수경사회(hydraulic society)에 있다고 하였다. 맑스는 아시아의 나라들은 모두 수리관개(irrigation)와 홍수대비를 위한 방제 작업를 통하여 대제국을 이룩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수리관개와 홍수방지 작업을 위해서는 대제국이 필수적이라고 하였다. 또 중국의 대 황제들은 수리시설과 방조제 망(networks)을 건설할 수 있을 정도의 세금이 거두어질때까지 마을 공동체를 내버려 두었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 마을 공동체는 공동체 자체로서 남겨졌으므로 그 주민들은 농노나 노예로서 전환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중국은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이 겪었던 고전적인 봉건제를 결코 경험해보지 못하였다. 봉건제는 중국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시아적 형태인 것이었다. 아시아적 형태란 다름아니라 중앙집권화된 황제권력과 물로 인한 문제 때문에 초래된 수리경제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맑스는 개인소유와 관련하여 가족소유의 게르만 헝식이 있다고 하였다. 한편 맑스는 봉건제는 어디서 오는가라고 물었다. 맑스의 초기이론에 따르면 내부적 계급투쟁(internal class struggle)은 이전의 생산양식에서 다음 단계의 생산양식으로 이전하게 되는 중요한 동력이었다. 따라서 노예제에서 노예들은 노예제가 무너지고 봉건제가 들어서기를 기대해야 했다. 맑스에 따르면 노예들은 봉기해야 했고 주인들을 목메달고 새로운 사회를 창조해야 했다. 이것에 대하여 맑스는 자신이 바보였다고 시인하면서 사실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맑스는 로마가 어떻게 무너졌는지를 보라고 말하면서 로마는 게르만 부족에 침략당하면서 망했다고 하였다. 한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 게르만 부족은 실제로 군사기술 및 일반적인 기술에 있어서 로마제국보다 훨씬 덜 진보한 부족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우월한 사회관계제도를 갗추고 있었다. 게르만 부족은 로마보다 훨씬 더 발전된 사소유권 아이디어를 갖고있었다. 그래서 로마제국은 게르만 부족의 침략을 받고 무너졌고 게르만 부족은 로마제국을 봉건사회로 전환시켰다. 게르만 부족은 노예를 농노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맑스는 또 소유와 관련하여 슬라브형식(Slavic form)이 있다고 하였다. 러시아의 옵시나(Obshchina)는 봉건제와 같은 것인데 봉건영주는 실제로 옵시나, 즉 마을 공동체를 한 단위(unit)로 취급한다. 사실 지대를 거두는 것은 러시아의 중앙권력이 아니라 봉건영주였다. 그러나 봉건영주는 옵시나를 공동체 방식으로 운영하기위하여 많은 재량을 옵시나 즉 마을공동체에 남겨둔 것이었다. 맑스는 이같은 게르만 형식과 아시아 형식 그리고 슬라브 형식를 전개하면서 자신이 이전에 갖고 있던 사회변화의 동력으로서 계급투쟁설을 포기하였다. 맑스는 혁명을 이끄는 것은 내부적 계급투쟁이 아니라 다름아닌 바로 외부적 힘(external force)이 사회를 다른 형태의 생산양식으로 변화을 이끈다고 역설하였다. 또 맑스는 봉건제가 부재했던 아시아적 형식이 스스로 자본주의에 도달하기 전에 봉건제 단계를 통과할 것인가를 물었다. 맑스는그것에 대하여 아니라고 답하면서 중국은 봉건제를 창조하지 않았지만 이미 자본주의를 향하여 운동하는 몇가지 흔적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맑스는 마오쩌둥이 등장하여 "그러면 우리 중국인은 먼저 자본주의자가 되어야 하는가"라고 물을 줄 몰랐다. 마오쩌둥은 자신은 자본주의를 싫어한다고 말하면서 중국은 아시아적 형식에서 바로 공산주의를 창조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마오쩌둥은 그것을 바로 시도하였다. 마오쩌둥는 아시아적 형식에서 바로 공산주의로 변화시켰다. 이것은 분명 맑스가 예상했던 것은 아니다. 그럼 맑스의 생산양식 이론은 중국의 경우에 잘 맞아 떨어졌는가. 아니다. 중요한 점은 중국의 공산주의는 맑스가 말한 마지막 단계로서의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 이전단계라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성공적으로 아시아적 형식에서 공산주의로 전환시켰지만 그것은 자본주의로 옮겨가기 위한 전 단계라고 보는것이 낫겠다. 이것은 맑스가 고려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룬트리세>제안했던 분석유형과 비교하여 완전한 일관성을 가지고있다. 맑스는 마지막으로 슬라브 형태와 관련하여 러시아 무정부주의자인 베라 자술리치Vera Zasulich로 부터 편지 한장을 받았다. 베라 자술리치는 맑스를 대단히 존경하였다. 그녀는 포퓰리스트 무정부주의 좌파였다. 그녀는 맑스에게 묻기를 "정말로 우리는 이 아름다운 러시아의 옵시나 마을 공동체를 파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마을 공동체에서 형제 자매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는데 이런 가증스런 자본주의를 창출해야 하는가, 우리는 바로 공산주의로 옯겨갈 수는 없는가. 옵시나는 공산체 형식(communistic form)이다." 라고 하였다. 맑스는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재미있는 아이디어라고 답하였다. 이것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과 스탈린이 행하였던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러사아의 옵시나를 집단농장인 콜호즈로 바꾸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오쩌둥의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가장 진보된 사회형태를 향한 길은 아닌것으로 판명되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은 자본주의를 향한 갓길(side way)이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면 그러한 갓길은 필요한 것인가. 그 갓길은 자본주의를 향한 가장 효과적인 길인가. 그 갓길로부터 나온 자본주의는 최고로 가능한 형식의 자본주의인가.






<참고문헌>

원문번역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2012년 2월 3일 금요일

7-2. 맑스: 역사적 유물론

1. 맑스 소외론(the theory of alienation)의 중요성

맑스는 두 얼굴을 갖고 있다. 먼저, 맑스는 계급투쟁 이론, 착취 이론, 공산주의 이론을 전개하였다. 다음, 맑스는 헤겔의 관념론을 신봉하면서 소외 이론을 전개했던 인간주의자였다. 맑스는 현대성 아래에 놓여있는 인간의 조건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맑스는 이런 양면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오랜동안 맑스는 헤겔주의자로서는 잊혀져왔으나 1960년대 이후로 재발견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맑스의 한 쪽 면만을 봄으로써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맑스의 소외개념은 많은 문학작품들에 영향을 끼쳤다.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 프란츠 카프카의 여러 작품들, 헨리크 입센의 연극 <페르 귄트Peer Gynt>는 소외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또한 21세기의 사회이론은 맑스의 소외 이론 없이는 설명될 수 없을 정도이다. 재미있게도 맑스의 <파리원고Paris Manuscripts>는 1931년이 되어서야 최초로 출판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소외 아이디어는 일찌기 회자되고 있었다. 게오르크 루카치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아르도노, 호크하이머, 마르쿠제 등은 맑스 소외론의 전문가들이었다. 더 나아가서 오늘날 소외이론이 없이는 문화이론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소외론은 중요하다. 소외론이 없었다면 바우만Bauman도 콜라코프스키kolakowski도 없었을 것이다.

+ 헤겔의 소외론
헤겔은 관념론자였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 의식은 물질적 실존(material existence)에 선행한다. 이 아이디어 때문에 헤겔은 관념론자인 것이다. 헤겔이 얼마나 종교적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이디어는 종교적이거나 신학적인 명제가 아니다. 이 아이디어는 물질적 세계가 존재하기 전에 이미 절대정신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따라서 세계의 기원은 절대정신absolute spirit이고, 이 절대정신은 물질세계 속으로 실존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전 세계의 역사는 소외문제와 직결되고 주체와 객체 사이의 점진적 분리 문제로서 설명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맑스의 이론뿐만 아니라 현대 비판이론에서도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헤겔의 근본적인 아이디어는 절대정신(absolute spirit)이다. 절대정신은 단지 신(God)일 뿐만 아니라 관념(idea)이다. 절대정신은 총체(totality)로서 그 자체(in itself)안에서 주체이자 동시에 객체이다. 비판이론에서 말하는 절대정신이란 바로 이 총체이다. 따라서 절대정신을 찾았다는 의미는 주체와 객체의 통일(unity)을 말하는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주체와 객체는 서로 분리되었고 또한 의식이 없이는 물질세계가 존재하지 못한다. 결국, 의식은 절대의식에 도달한다. 왜냐하면 그 의식은 물질세계 속으로 투사되기 때문이다. 헤겔에 따르면 소외란 주체로부터 객체가 분리되어지는 것을 말한다. 의식은 인간의 주체와 객체가 서로 통합되기 시작할때 등장한다. 이를테면, 주체subject는 당신이고 객체object는 당신의 생활조건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신이 누군가와 상호작용하고 있다면 그는 당신의 객체, 즉 당신의 생활 조건(conditions of your life)이다. 예를들어, 당신이 방안에 있다고 치자. 이제 방은 객체, 즉 객관적 조건objective condition이 된다. 그리고 당신은 주체이면서 주체의 위치에서 반성reflet하게 된다. 당신은 자신의 의식을 더 세련되게 연마하면서 객체, 즉 생활의 조건을 정복하기 시작한다. 헤겔은 주체가 객관적 조건를 통어할 수 있게 될때 비로소 소외 문제가 극복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때 당신의 의식은 자신의 실존에 꼭 들어맞게 되고 당신은 스스로 인생의 주인이 될것이고 생활의 조건의 주인이 될 것이다. 따라서 생활의 조건들은 더 이상 당신을 지배하지 못한다. 당신이 바로 생활의 조건의 주인이 되었기 띠문이다. 이것이 헤겔 소외론의 핵심 아이디어이다. 맑스는 이 헤겔의 아이디어를 따라갔다. 그러나 맑스는 헤겔의 절대정신 아이디어는 제거하였다. 맑스는 헤겔의 절대정신 아이디어는 너무 사변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맑스는 소외 문제를 결코 사유(thought)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따라서 맑스는 소외 문제를 보다 현실적으로 일상의 경험칙을 통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당시 맑스는 불운하게도 현대사회(modernity)의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대한 개념을 갖고있지 못했다. 심지어 맑스는 애매모호한 자신의 사소유권 개념을 이용하여 당시 현대modernity 산업도시생활을 이전의 농촌 공동체생활로부터 구별짓고 개념화하고자 시도하였다. 맑스는 이 현대성(modernity)을 진보(progress)라고 말하였다. 맑스는 이 현대성, 즉 진보에 대하여 사람들은 비싼 댓가를 지불하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 비싼 대가는 바로 주체와 객체의 분리를 말한다. 이전 농촌사회의 농부는 자신의 실존인 객관적인 조건objective condition으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당시 농부는 자신의 객관적인 조건과 통일되어 있었다. 말하자면, 그 농부는 토지에 묶여 있었다. 심지어 노예들도 스스로 실존의 객관적 조건으로부터 분리되어있지 않았다. 따라서 노예들은 거래의 대상으로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보다시피, 이전 사회에서는 어떤 주제도 객체로부터 분리되지 않았다. 맑스는 현대적 조건 아래에서 주체는 객체와 분리되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이 바로 맑스의 독특한 아이디어이다. 이 아이디어는 혜겔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맑스의 소외 이론은 마침내 착취 이론으로 이어진다. 맑스는 청년기를 거쳐서 노년기를 맞이하였고 자신의 이론을 노련하게 다듬었다. 맑스의 포인트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의지에 반하여 타인의 강요로 일을 한다면 그 사람은 소외된 것이라는 데 있다. 물론 당신이 스스로 선택하여 일을 하고있다면 때때로 그 일이 하기싫더라도 강제될 수 있다. 이 때문에 당신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분명 당신은 자유를 갖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의 객관적 조건을 통어할 수 없다면 당신은 소외인 것이다. 당신은 스스로 자유롭고 자신의 선택으로 일을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제로 당신은 강요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맑스의 포인트이다. 당신은 자유롭고 타인들과 평등하다고 느끼지만 당신은 정말로 자유롭지 못하다. 왜냐하면 당신은 스스로 창출한 객관적 조건 때문에 문제를 겪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자기개발(self-development)이 일work과 함께 동기화 되어있지 않다면 그것은 소외된 것이다.


2. 소외론에 대한 지성적 각성

밁스는 1843년과 1844년 두 해를 통해서 엄청난 지적 발전을 이루었다. 맑스는 1843년 여름, 비완성 원고인 <헤겔 법철학에 대한 비판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을 썼다. 맑스는 처음에 프랑스 혁명을 열렬히 옹호한 급진주의자였지만 점차 나이가 듦에 따라 보수적이 되어가면서 프랑스 혁명의 결과들에 대하여 걱정하였다. 맑스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관하여 회의적이었다. 왜냐하면 혁명 후 프랑스 사회는 두 계급(classes)로 갈라졌기 때문이다. 그 두 계급이란 자본과 노동을 말한다. 그러나 맑스는 헤겔만큼 정확히 이것을 짚어내지는 못했다. 헤겔은 프랑스인들을 빗대어 말하기를 "도대체 누가 옳은지, 누가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라고 하였다. 당시 프랑스인들은 서로 싸웠다. 주인들과 일꾼들은 서로 대적하면서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그들은 각각 서로 다른 특별한 이익을 내세웠던 것이다. 헤겔은 묻는다. 보편적 이익(universal interests)은 어디에 있는가. 공통선과 같은 보편적 정의가 있다면 자본과 노동을 통합할 수 있을 터이다. 그 공통선은 어디서 나오는가. 재미있게도 헤겔은 <법철학Philosophy of Right>에서 공통선은 정부, 즉 국가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헤겔은 국가가 보편적 이익을 대변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헤겔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은 현대 부르조와 사회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현대 부르조와 사회는 특수한 계급들을 창조하였다. 특수한 계급들은 공통선으로서 보편적 인자가 필요하다. 이 보편적 인자는 바로 보편적 계급이다. 헤겔은 보편적 계급은 국가가 떠맡아야한다면서 국가공무원civil sevants은 공통선을 표상해야한다고 말하였다. 헤겔 자신은 죽기전에 분명히 <법철학>에서 보편적 계급은 공무원 조직이라고 밝혔다. 이 헤겔의 아이디어는 결코 어리석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여러 면에서 로크와 루소의 일반의지 아이디어와 맥을 같이한다. 정부는 때때로 일반의지를 시민들에게 알리면서 보편적 이익을 표현할 수 있다. 미국시민들은 때때로 연방정부가 그렇게 하기를 기대한다. 물론 연방정부는 우리의 그러한 기대를 져버리지 않는다. 시민권운동(civil rights movement)을 보라. 누가 시민들에게 법을 준수하도록 강제하고 누가 사회의 각 조직들을 통어할 수 있는가. 그것은 다름아닌 연방정부이다. 바비 케네디Bobby Kennedy는 남부의 각 주(Southern States)에 내려가서 그들에게 법을 따르도록 권고하였다. 우리 시민들은 정부가 보편적 이익을 표출할 것을 기대한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맑스는 그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맑스는 헤겔은 너무 나이브한 정부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맑스는  정부는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렇게 비-편파적(non-partial)이지 않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정부는 가난한 자들보다 부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배려를 아끼지 않는다. 사실, 워싱턴 D.C에는 많은 로비스트들이 있다. 그 로비스트들은 대기업의 이익을 위하여 여러 활동을 한다. 로비스트들은 특히 입법부에 많은 입김을 불어넣는다. 건강보험 법률안을 생각해 보라. 당신은 그 법안을 위하여 상원의원을 방문하거나 이 메일 또는 편지를 보내어 무언가를 요청할 수 있다. 그러나 거대한 제약회사들은 상원의원들에게 막대한 로비자금을 써가면서 특정 법률안이 통과되도록 강요한다.  로비스트들은 상원의원들을 압박하면서 다음선거에 낙선할 수 있다고 위협한다. 물론 당신은 개인적으로 이메일을 보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정부는 개인보다는 대기업에  더 많은 관심과 배려를 할 것이다. 따라서 맑스가 말했듯이, 어떻게 정부가 보편적 계급이 될 수 있겠는가. 이것이 맑스가 헤겔에 반박한 포인트이다. 국가는 보편적이지 않다. 다만, 정부는 보편을 가장했을 뿐이다. 맑스는 국가는 보편적인 체하지만 그러한 정당성은 진정한 보편이 아니라고 하였고 또한 공무원도 보편적 계급이 아니라고 하였다. 때때로 매우 부패한 공무원들을 볼 수 있다. 미국은 안 그렇지만 어떤 나라의 공무원들은 부정부패가 매우 심하다. 그들은 무료좌석이나 개인 항공기를 제안받으면 기꺼이 접수한다. 그 공무원은 그것을 제공한 사장에게 무언가를 보답한다. 모든 공무원이 다 순수한 것은 아니다. 공무원은 언제라도 부폐할 수 있다. 따라서 공무원은 그렇게 보편적인 계급이 아니다. 모든 공무원이 다 천사인 것은 아니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보편적 참정권이 도입된다면 우리는 보편적 선거를 통하여 보편적 대표를 선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잘 알다시피, 맑스는 옳아 보이지 않는다. 현재 우리는 모두 동등한 한 표를 가지고 있지만 동등한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맑스는 1843년 여름까지 여전히 그렇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한 부르조와 리버럴이었다.

+ 청년 맑스의 지적 발전
맑스가 원고 <헤겔 법철학에 대한 비판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을 폐기하게 되는데는 세가지 중요한 단계가 있다. 맑스는 헤겔로부터 떠나면서 자신의 고유한 지성적, 정치적 계획을 급진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맑스는 <유대인 문제On the Jewish Question>에서 헤겔을 옳다고 지지하면서 보편적인 것의 필요성을 인정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사회는 특정한 이익(particularistic interest)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도록 방관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어떤면에서 존 스튜어트 밀과 아담 스미스의 공리주의에 역행하는 것이다. 맑스는 개인이 자기-이익을 추구하면서 서로 싸우는 것으로 보편선에 이르게 된다는 아이디어는 마땅하지 않다고 보았다. 맑스에 따르면  보편선은 분명히 필요하다. 그러나 보편선은 특정한 이익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맑스는 <헤겔 법철학에 대한 비판Th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의 전문에서 '우리는 보편적 해방이 필요하다. 그러나 누가 보편적 해방을 인류에게 가져다 줄 것인가.' 라고 물었다. 맑스는 인류의 보편적 해방을 수행할 인자(agent)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맑스는 그 전문에서 그것을 수행할 인자는 분명히 프롤레타리아라고 밝혔다. 이제 맑스는 정말로 잘못된 길로 들어섰는가. 실제로 맑스는 이것을 계기로 프롤레타리가 우리들을 해방시키고 선한 사회로 인도할 것이라는 밑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사실, 맑스는 이후 자신의 나머지 인생을 깊은 코너로 몰고가게 되었다. 바판가들은 맑스의 해방 이론은 쓸데없는 소리라고 폄훼하면서 철학자들도 인류를 해방시키지 못했는데, 어떻게 어리석은 노동자들인 프롤레타리아가 인류를 해방시키겠는가라면서 맹비난하였다. 비판가들은 소외 의식을 갖고있는 노동자들이 완전히 비소외적인(unalienated)세계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해방이론 아이디어는 무식의 소치라고 보았다. 맑스는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에서 자신의 소외 이론을 구체화하였다. 맑스는 소외를 경제적인 상품생산(commodity production)과 연계하면서 현대사회에서 가장 완벽하게 소외된 자들은 오직 노동자들 뿐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이야말로 진정으로 자신들의 소외를 극복하자 시도할 것이라고 하였다. 맑스는 분명 노동자 계급이 인류의 해방을 가져오리라는 아이디어를 갖고있었다. 물론 맑스는 <파리원고>을 발간하지 않았다. 비록 맑스는 이 책을 써놓긴 하였지만 누구도 자기의 이론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맑스는 아무리 소리높여 노동자계급의 소외를 울부짖더라도 어느 한 노동자도 바리케이트 앞에서 목숨을 내던질 것이라고 믿지않았다. 맑스는 사실, 노동자들은 소외에 관하여 관심조차  없으므로 차라리 왜 노동자계급이 난동을 일으키는지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이 나으리라고 믿었다. 여기까지가 청년맑스의 아이디어였다. 한편 성년 맑스는 애덤 스미스와 리카아도, 그리고 정치경제학을 접하면서 착취 이론을 전개해 갈 것이다.


 3. <유대인 문제On the Jewish Question>, 보편적 해방.

브루노 바우어는 반-유대주의(anti-Semitism)의 기원에 대한 글을 썼다. 바우어에 따르면 독일인들은 반-유대주의를 갖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도교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바우어는 어떤 국가든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세우면 모두 반-유대주의적이 된다고 말하였다. 바우어에 따르면 반-유대주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와 교회를 분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해방으로 인하여 반-유대주의는 반드시 철폐될 것이라고 확신하였댜. 재미있게도, 맑스는 바우어를 비판하면서 미국의 예를 들었다. 맑스는 미국은 국가와 교회가 분리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유대주의가 적지 않다고 말하였다. 미국은 19세기 뿐만아니라 1920년대와 1930년대에도 반-유대주의가 만연하였다. 사회학자 제레미 카라벨Jeremy Karabel은 1920년대 대학 입학정책에 대한 책을 쓰면서 예일Yale대학을 포함한 아이비비그Ivy League 대학들은 입학쿼터제를 통하여 미국 내의 유대인 인구와 연동하여 유대인의 입학을 제한하였다고 말하였다. 믿든지 말든지 그것은 공식적인 정책은 아니었지만 실제로 시행되었었다. 따라서 국가가 교회로부터 분리되었더라도 국가가 비세속적인 경우에는 반-유대주의가 충분히 가능하다. 맑스는 인종주의(racism)는 어디서 나오는가라고 물었다. 맑스는 인종주의는 시민사회(civil society)에서 나온다고 답하였다. 당시 맑스는 자본주의 개념을 아직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맑스는 인종주의는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뿌리박고 있다고 하면서 반-유대주의는 다름아닌 시민사회로부터 나온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일부 사람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반-아프리카계 아메리칸니즘(anti-African Americanism)이 생기는 이유는 일부 미국인들이 미국 내 아프리카인들의 위협을 받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종주의가 발생하는 이유이다. 시민사회의 문제들은 고쳐쳐야 한다. 문제는 바로 시민사회에 있는 것이지 국가에 있는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보편적 해방(universal emancipation)이 필요하겠다. 이것이 <유대인 문제On the Jewish Quesestion>의 포인트이다.


4. <헤겔 법철학에 대한 비판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의 전문

여기에는 아주 대단한 것들이 있다. <헤겔 법철학에 대한 비판>은 사회과학서라기 보다는 강한 어조의 시라고 보는 편이 낫겠다. 맑스는 우리의 현재 상황를 단지 관조(contemplation)하기만 하는 포이에르바하를 넘어서설 필요가 있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현실 속에서 자기-탈존(self-estrangement)의 신성한 형상이 드러나기를 기대하면서 살아간다. 포이에르 바하에 따르면 인간은 신을 창조하였댜. 그리고 인간은 신을 창조하면서 소외의 길로 들어섰다고 강조하였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인간 존재의 자기-탈존은 소외( alienation)라고 해석해버렸다. 맑스는 이 소외는 세속적인 형태(unholy form), 즉 매일 매일 일상의 경제활동을 통해서 드러나게 된다고 밀하였다. 이것이 맑스의 포인트이다. 더 나아가서 맑스는 청년 헤겔파들을 공격하면서 '비판적인 비판가가 되어라(Be a critical critic)' 라고 일갈하였다. 당시 청년 헤겔파들은 주로 자신들이 신봉하는 헤겔의 이론을 비판하였다. 맑스는 이것은 옳은 비판이 아니라고 하였다. 맑스는 매우 논란이 되면서도 매우 아름다운 문장으로 반박하기를 "비판론의 무기는 비판을 무기로 삼는 것이 아니다(The weapons of criticism cannot be replace the criticism by weapons)." 라고 하였다. 이것은 단지 사유로만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미였다. 비판 위에서 행동으로 옮기고 무언가를 해야하는 것이지 단지 이야기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맑스는 다시 아름다운 문장으로 말하기를, "이론은 대중을 사로잡는 순간 물질적 힘이 된다(Theory becomes a material force as soon as it has gripped the masses)." 고 하였다. 이론은 광고ad hominem 하자마자 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준비된 힘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맑스의 포인트이다. 맑스에 따르면 좋은 이론이란 자신을 해방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이론이고 좋은 이론의 본질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것이다. 이를테먼, "아하, 그랬구나(It did me)" 라는 말이 절로 나오면 좋은 이론이다. 물론 좋은 이론은 사람들에게 알리고ad hominem 당면한 문제를 지적할 때만 가능하다. 사람들이 이론에 무지하고 또 그 이론은 사람들과 무관하다면 그 이론은 쓰레기에 불과하다. 더 나아가서 이론이 지루하다면 그 이론은 나쁜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좋은 이론은 사람들을 놀라게(fascinated) 할 필요가 있겠다. 이론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고 사람들이 스스로 생활을 바꿀 정도로 감동을 주어야 한다. 그러면 이론은 어떤 대중에 충격을 주어야 하는가. 이론은 어떤 청중을 포착해야 하는가. 맑스는 근로자 계급(working class)이 물질적인 토대(material base)로서 이론과 아이디어를 장착하였을 때 비로소 혁명적 변화를 이끌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노동자 계급을 얼마나 호의적으로 보았는지 모르겠지만, 맑스는 노동자들을 물질적 토대의 수동적 요소(passive element)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프롤레타리아이다. 맑스는 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면 아니 되는가에 답하면서 '그들은 쇠사슬을 뻬고는 잃을 게 없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였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는 보편적 본성을 갖고 있으므로 그들은 보편적 계급이라고 말하였다. 당시 1843년의 상황에서 그 발언은 진리였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현대사회의 노동계급은 쇠사슬 이외에도 잃어버릴 것이 너무 많이 있다. 확실히 2009년의 시점에서 볼때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노동계급은 쇠사슬 이외에도 잃어벌릴 것이 너무 많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멋진 교외의 주택이 될 수 있고 자가용 두 대가 될 수도 있으며 주식시장의 연금펀드(pension fund)가 될 수도 있다. 아주 평범한 노동자조차도 어제의 다우존스를 확인하면서 오늘을 준비한다. 그러나 맑스의 시대에서는 그것이 옳았다. 맑스는 그것으로 시대의 문제를 풀고자 하였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당연히 보편적 계급이 되어야 했다. 맑스는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에서 가장 소외된 것은 프롤레타리아라고 강조하였다. 맑스는 프롤레타리아를 논리적으로 소외 이론과 연계하였지만 소외 문제를 노동계층에 한정하고 말았다. 따라서 맑스가 소외 이론을 공장의 산업생산 노동자에 한정하여 집중적으로 조명했던 것은 흠결(damage)이 아닐 수 없겠다. 맑스 소외론의 메세지는 현대 생활의 일반적인 불편한 경험들에 확장하여 해석할 수는 없는가. 이것이 20세기 초 소외론의 큰 틀(frame)이었다. 우리는 고향상실(homelessness)로 인하여 상실감(homeless mind)속에서 세계를 방황하고 있다. 이것이  맑스가 포착하고자 했던 소외이다. 불운하게도 맑스는 소외 문제를 노동자들에만 한정하였다. 분명 맑스는 정치적인 계획 속에서 혁명적인 계급을 창조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이러한 계획을 포기하였다. 그 후 맑스는 역사적 유물론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5. 역사적 유물론

맑스는 역사적 유물론을 전개하면서 두 단계를 이용하였다. 첫 단계는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변증법(dialectics)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포이에르바하는 기계론적 유물론자(mechanical materialist)였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에 동력(dynamics)을 불어넣고자 하였다. 맑스가 말하는 동력이란 역사적으로 특화된 물질적 힘(historically specified material force)이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이 역사적으로 특화된 힘으로서 이론을 전개하였다. 또 맑스는 새로운 유물론적 접근법을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Theses on Feuerbach>에서 시도하였다. 이것은 열 한 개의 테제로 되어있고 매우 짧다.

1. 구 유물론은 반성적이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은 매우 반성적(reflective)이라고 반박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에서 주체는 객체에서 분리된 채로, 객체를 주체의 밖에서 반성하는 데 그친다고 하였다. 또한 주체는 자기의 활동만을 지배하므로 객체적 조건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이 단지 주관적 조건들만을 반성한다고 비난하였다.

2. 새 유물론의 진리는 실천적인 것(practical question)이다.
맑스는 새 유물론의 진리는 실천적(practical)인 것이라고 말하였다. 맑스의 새 유물론에 따르면 인간은 실습(practice)을 통하여 주체와 객체를 통합하게된다. 이를테면 당신은 객관적인 생활조건들을 변화시켜 나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수동적 인자(passive agent)와 초결정론(over-determination)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다. 사실, 맑스는 결정론자로서 알려져있는데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맑스의 철학은 프락시스praxis의 철학이기 때문이다. 맑스 유물론의 키 포인트는 프락시스Praxis, 즉 실천적 활동(practical activity)이다.

3.인간은 환경을 변화시켜 나간다.
우리는 각자 특정한 조건에서 태어났지만 그 조건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그 조건들을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홀로 행동할 수는 없다. 맑스는 우리는 협력하여야 한다고 말하였다.

4. 우리는 대중이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5. 헤겔은 추상적 사유로부터 출발하였다. 반면에 포이에르바하는 감각(sensuous)과 관조(contemplative)로부터 출발하였다.
이들과는 다르계, 맑스는 감각과 실천적 활동(sensuous and practical activity), 즉 사회적 활동으로부터 출발한다.

6. 구 유물론은 개인을 강조하였다. 반면에 신 유물론은 집단적 사회관계(social relation)을 강조하였다.
맑스는 개인보다는 관계(relational)를 강조한다.

7. 종교 또한 사회 생산물이다.
8. 사회 생활은 실습적(practical) 이다.
9.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이 관조(contemplation)한다.
10. 새 유물론은 인간을 사회화 시킨다.
맑스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함께 행동해야 한다. 왜냐하면 집단행동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11. 철학자들은 이제까지 세계를 해석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면서도 논란이 되어온 것이다. 그리고 분명 잘못 되었다. 좋은 이론은 단지 기술하는 것 뿐만아니라 인생에 대한 행동 지침 또한 내릴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들이 맑스 아이디어의 포인트이다.

+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요점

-테제 1.구유물론은 반성적이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비롯한 구 유물론을 비판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구 유물론은  지나치게 관조를 강조한다. 구 유물론에서 인간은 관조를 통하여 대상(Gegenstand), 실재(reality), 감각성(sensuousness)을 객체 형상으로서 표상한다. 맑스는 이러한 유물론은 인간의 감각적 활동, 즉 실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비난하였다. 사실, 우리는 관조로서 객체를 감각한다. 그러나 감각성(sensuousness) 자체는 인간행위로써 지각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질료(stuff)를 감각할 뿐이고 그 질료를 위하여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맑스는 감각적 활동(sensuous activity)의 실행을 강조한다.

-테제 2. 새 유물론에서 진리는 실천적인 것(practical question)이다.
객관적 진리는 인간 사유로부터 나올 수 있는가. 맑스는 진리는 이론이 아니라 실천적인 문제이다. 이-세계성(worldliness)의 진리는 실천in practice을 통하여 증명되어야 한다. 진리는 단지 관조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여기 맛있는 푸딩이 있다. 진리는 단지 그것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먹는 데 있다. 맑시스트 철학자이자 무솔리니에 의하여 옥사했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맑시즘을 프락시스Praxis 철학이라고 불렀다. 맑시즘의 핵심(essence)은 진리는 주체가 자신의 객체를 반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사이의 상호작용이다. 따라서 주체는 자신의 필요에 따라서 객체를 변화시켜 나간다. 이것이 안토니오 그람시의 포인트이다. 맑스는 우리의 가능한 활동영역 밖의 객관적인 조건들을 가리켜, 실증주의(positivism)라고 불렀다. 맑시즘은 단지 실증주의가 아니다. 왜냐하면 맑시즘은 단순히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바꾸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감옥에서 <옥중 수기The Prison Notebooks>를 쓰면서 맑시즘이란 용어를 쓰지 않았다. 그람시는 간수가 맑시즘이란 용어를 발견하면 자신을 억압할 것이라고 염려했다. <옥중 수기>는 그의 생전에 감옥 밖으로 밀반출 되었다. 그람시는 맑시즘(Marxism)이란 용어 대신에 프락시스 철학(Philosophy of Praxis)을 사용하였다. 물론 그 파시스트 간수는 프락시스Praxis 철학이 무엇인지 몰랐다. 따라서 간수들은 그가 맑시즘에 관한 책을 쓰는지 몰랐다. 어쨌든 그람시는 맑시즘의 포인트를 잘 짚었다.

-테제 3. 인간은 환경을 바꾼다.
맑스에 따르면 환경은 인간에 의하여 변화된다. 맑스는 아주 멋진 문장으로 '선생은 자기자신을 가르쳐야한다.' 고 말하였다. 교육자는 교육되지 않으면 안된다(The educator must be educated)는 것이다.

-테제 4. 우리는 대중이 담당하는 중요한 역할을 발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맑스의 정치계획과 다름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무언가를 얻기위해서 당신은 혼자서 행동할 수 없다. 당신은 누군가와 협력하여야 한다. 당신은 타인과 협력하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이룰 수 없다.

-테제 5. 추상적 사유, 관조, 그리고 프락시스Praxis
헤겔은 추상적 사유로부터 출발하였다. 반면에 유물론자인 포이에르바하는 감각을 통하여 실재를 포착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맑스는 포이에르바하를 반박하면서, 감각적인 실천적 행동(sensuous practical activity)을 통해서만 실재reality를 포착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맑스는 우리가 감각적이고 실천적이기를 기대한다. 맑스의 유물론은 20세기 최고 철학자인 유르겐 하버마스를 매료시켰다. 맑스가 생각한 인간의 본질은 감각하는 인간 행동 자체에 있었다. 맑스는 생애의 후반기에 환원주의자(reductionist)가 되었다. 왜냐하면 맑스는 인간의 감각적 활동을 경제적 활동으로 환원하였기 때문이었다. 맑스는 섹스를 포함한 모든 인간상호작용을 감각적 활동으로서 인식하였다. 따라서 맑스와 프로이트는 물질적 실재(material reality)개념과 관련하여 큰 차이는 없다.

-테제 6. 구 유물론은 개인을 강조한다. 반면에 새 유물론은 사회관계를 강조한다.
맑스는 현대사회의 문제는 고립된 부르조아 개인에서 비롯된다고 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이 고립된 부르조아 개인은 인간상호작용을 통하여 타인들과 결합하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맑스는 공동체주의자(communitarian)였고 공산주의자(communist)였다  맑스는 개인이 고립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맑스는 인간들이 상호작용하기를 원하였다.

-테제 7. 종교는 또한 사회 생산물이다.

-테제 8. 사회 생활은 실천적이다.
이것은 매우 명백한 사실이다.

-테제 9.사회에서 고립된 개인은 관조한다.
맑스에 따르면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은 항상 서로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따라서 원자화된 개인들은 어떤 것도 바꿀 수 없다.

-테제 10. 새 유물론은 사회화된 인간성을 창조한다.
구 유물론의 출발점은 시민사회와 고립된 부르조와 개인이었다. 반면에 새 유물론의 출발점은 인간사회(human society)이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형제와 자매가 될 수 있고 연대(solidarity) 행동을 통하여 조화를 이룰 수 있다.

-테제 11. 세계 바꾸기.
이것는 매우 논란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 잘못된 점이 없지 않다. 맑스에 따르면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여러모로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맑스는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라고 하였다. 어떤 면에서 이 명제는 초기의 아이디어, 즉 프락시스Praxis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프락시스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는 실천적인 것이다. 이를테면, 한 철학자가 어떤 개인의 인생을 변화시켰다면 그것으로 그 철학자의 소명은 충족되었다. 만약 당신이 어느 철학자의 책 또는 이론을 읽다가 잠들어 버렸다면, 아마도 그 이론이 잘못되었든지 아니면 그 철학자가 잘못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철학자의 이론이 재미있다면 당신은 수면제를 먹어가면서 잠들어야 할 것이다. 그때 당신은 단지 세상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열정으로 넘쳐날지도 모르겠다.


6, 변증법(Dialectics)

맑스는 초기의 자연주의를 거쳐서 역사적 유물론으로 전향했다. 맑스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는 유물론 보다는 실천적 행동(praxis action), 변화(change), 그리고 미완의 결정론에 관한 것이었다. 맑스는 유물론자, 결정론자, 특히 경제적 결정론자가 되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 진실과 사연이 있었다. 맑스가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를 계기로 많은 갈등을 겪으면서 자연주의에서 유물론으로 전향하는 데는 프락시스praxis, 즉 인간실천(human practices)아이디어가  중심동력이 되었었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그 아이디어를 밝혀다. 사실 그 내용은 변증법적이었댜. 맑스는 매우 드물게 '변증법적dialectical' 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맑스는 분명 '변증법dialectics과 '변증법적dialectical'의 의미를 구별하여 사용하였다. 맑스는 생애 후반기에 엥겔스에게 편지를 쓰면서 자기는 무엇인가를 혼동할때 그것을 '변증법적' 이라고 말하였다. 따라서 '변증법적' 이란 두 현상사이의 관계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설명은 너무 단순한 면이 없지 않다. 사실, '변증법적' 이란 용어는 고대 그리스철학에서 사용되었다. 변증법 아이디어는 변화와 과정을 강조하였다. 한 유명한 그리스 철학자는 변증법적 본질에 대하여 아주 시원하게 정의하였다. 그 철학자는 말하기를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You cannot step into same water twice)." 라고 하였다. 이를테면, 5분 후에 그 강물에 다시 발을 담글지라도 그 물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같은 강물이 아니라는 얘기이다. 따라서 '변증법적' 이란 세계는 흐름(flux)속에 있고 변화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변증법적' 인 것을 이해하는 포인트이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우리는 세계를 단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변화시키고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맑스는 '변증법적' 이었다. 따라서 당시 맑스는 유물론과 결정론에 대하여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변증법(dialectics)이란 용어는 헤겔로부터 유래하였다. 사실, 맑스는 '변증법' 이란 용어를 꺼려하였다. 그러나 친구인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변증법' 이란 용어를 애용하였다. 엥겔스는 심지어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이란 용어도 조어하였다. 알다시피, 엥겔스는 역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을 구별하여 사용하였다. 그러면 헤겔의 변증법이란 무엇인지 살펴보자. 헤겔은 세계의 변화 과정들을 포착하고자 시도하였다. 이미 그리스철학의 변증법자들은 세계를 들여다보면서 세계는 그림이 아니라 영화라고 강조했었다. 우리는 영화에서 매초마다 달라지는 영상들을 본다. 헤겔은 그러한 변화의 본질에 대하여 능란하게 파악하고자 시도했던 것이다. 헤겔은 이 변화의 본질 속에서 숨어있는 대립을 발견하였다. 헤겔은 바로 이 대립이 변화를 이끌어 간다(Contradictions drive changes)고 말하였다. 헤겔은 정립, 반정립, 그리고 종합(thesis, antithesis, synthesis)을 명확히 구별하여 변증법을 기초하였다. 변증법은 일상 생활에서 변화를 포착한다. 변증법은 정립, 즉 실제적 조건에서 출발하여 반정립, 즉 그 조건의 부정에 이르고,  마지막으로 종합, 즉 부정의 부정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 초기 조건들은 결과적으로 재구성되어지는데 헤겔이 말한 바와 같이 그것은 초기의 것과는 다르게 재구성되어진다. 헤겔은 그것을 '폐지함으로써 보존한다(preserving it by abolishing it)' 고 하였다. 맑스와 맑스 주의자들은 이러한 헤겔의 통찰력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변증법적'이겠다. 맑스는 '변증법적'으로 프락시스praxis 철학에서 결정론적인 실증주의 사회과학으로 전향했다. 실증주의는 실제의 원인과 결과에 관한 명백한 아이디어를 파악하고 제시하는 것이다. 오늘날 실증주의 사회과학은 종속변수와 독립변수를 규정하고  종속변수와 독립변수가 각각  작용할 수 있는 가설을 세우고 실제와 비교하고 기술하는 학문이다. 이것이 성년 맑스가 몰입했던 포인트이다. 실제로 맑스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과학자(normal science)였다. 사실, 맑스는 과학과 사회과학 사이의 규정되지 못한 많은 차이점을 인식하면서 과학자가 되어갔다. 맑스는 자신을 사회과학계의 다윈으로 보고 싶어하였다. 맑스는 생애 후반기에 과학적인 추론(scientific reasoning)에 매료되었고 심지어 <자본론Das Kapital>을 찰스 다윈에게 봉헌하고자 하였다. 맑스는 자신이 인간역사를 위하여 연구한 것은 다윈이 종의 진화에 관하여 연구한 것과 다를 바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맑스는 분명 인간사회의 진화에 기여하고 싶어했던 것으로 보인다. 운좋게도 맑스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였고 사회다윈주이자(social Darwinist)가 되지도 못하였다.


7. 문제가 되는 두 가지 테제

+ 제 1테제: 구 유물론은 반성적이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를 비롯한 이전의 유물론자들을 비판하였다. 구 유물론에 따르면 객체적 사물, 즉 대상은 주체의 밖에 놓여있다. 주체는 자신의 밖에 놓여있는 이 객체적 지식 또는 대상(gegenstand)을 마음의 반성작용을 통하여 포착하게 된다. 이것은 진리에 관한 매우 전형적인 이론이다. 이것은 오늘날 매우 광범위하게 알려진 이론이다. 지식은 언제 정확해지는가. 당신의 마음 거울이 객체의 영상(image of object), 즉 주체의 밖에 놓여있는 객관적 세계(objective world)를 정확히 반성할 때 오류없는 지식이 가능하다. 따라서 가장 완벽한 주체의 마음거울이 최대한 정밀하게 객관적 실재(objective reality)를 포착하는 것이다. 그러나 맑스는 이것을 반박하였다.맑스에 따르면 이것은 단순한 반성일 뿐이고 중요한 것은 이것을 너머서는 것이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가 말하는 선(good)이란 몽테스키외의 선과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맑스는 홉스를 비롯한 유물론자들은 감각성sensuousness으로부터 출발하면서 인간의 본질을 생물학적 조건에서 찾았다고 하였다. 따라서 맑스는 구 유물론에서 말하는 실재란 감각을 통하여 포착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를테면, 우리는 냄새맡고, 만지고, 본다. 또 만지지는 못해도 볼 수 있거나 냄새 맡을 수 있는 것이 있다. 따라서 유물론자는 실제로 그것이 존재하는지 어떤지 의심하게된다. 이것이 바로 유물론자가 관념론자와 구별되는 포인트이다. 그러나 인간은 감각을 통하여 아이디어를 얻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마음을 통하여 아이디어를 얻기 때문이다. 밁스는 이러한 유물론은 감각적인 관조(in the sense of contemplation)에 기초한다고 비판하였다. 구 유물론에서 우리의 감각은 주체의 밖에 놓여있는 객체를 포착할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새 유물론적 접근법을 제시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감각적인 인간활동(sensuous human activity)을 통하여 객체적 대상를 포착할 수 있다고 하였다. 20세기 최고의 철학자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맑스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이렇게 주장한 것에 찬성하였다. 하버마스는 한때 유물론자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러나 하버마스는 자신은 오로지 유물론자라고 고집하고 있다. 하버마스는 우리 인간은 감각적인 경험, 즉 감각을 통해서 궁극적인 실재(ultimate reality)를 포착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버마스는 맑스를 평하면서, 맑스는 환원주의자(reductionist)가 되었는데 그 이유는 맑스는 감각적인 인간활동을 생산, 경제활동으로 환언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버마스는 맑스의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는 옳다고 하였는데 그 이유는 모든 감각적 인간행동은 물질적(material)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멋지게도 하버마스는 인간의 감각적 행동은 생산과 경제에 한정될 수 없으므로 인간상호작용에까지 확장하자고 제안하였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칼 맑스와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서로 화해시킨 것이나 다름없다. 하버마스의 주장은 맑스의 생산이나 프로이트의 성적 충동에 상반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당신의 성적 충동 또는 타인과의 성적 상호작용은 매우 감각적이다. 실제로 그것은 일하는 것보다 더 감각적이다. 맥도날드 가게에서 햄버거를 서빙하는 것은 감각적 활동이다. 그러나 타인과의 성적상호작용은 훨씬 더 한 감각적 행동이다. 이것이 하버마스의 포인트이다.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감각적 인간활동을 공개하였지만 너무 애매모호하였고, 결국 출판을 거부하게 되는 이유가 되고 말았다. 따라서 맑스는 자신의 이론이 더 정교해질필요을 느꼈고 드디어 대영도서관에서 아담스미스와 리카아도를 읽으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게 된다. 이후 맑스는 자신의 유물론에서 감각적 인간활동(sensuous human activity)을 보다 현실적으로 구체화하면서 경제와 경제적 이익으로 환원하게 된다.

+ 제 2테제: 새 유물론의 진리는 실천적인 것이다.
이것은 진리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하다. 진리란 무엇인가. 두 가지 유력한 진리 이론이 있다.  첫째, 대다수가 공유하는 진리 반성론(reflection theory of truth)이다. 우리들 각자의 마음은 거울이다. 각자의 마음이 더 멀리있는 객관적 실재를 반성하면 할수록 그 마음은 더욱더 진리와 지식으로 빛나게 된다. 그러나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에서 그것을 반박하였다. 맑스는 진리는 실천적인 문제(practical question)라고 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진리 반성론은 실증주의적(positivist)와 소외에 중점을 두고있다. 20세기 철학자 게오르크 루카치는 진리반성을 물화된 의식(reified consciousness)라고 불렀다. 물화Reified는 독일어로 verdinglichung을 말하는 것으로서 여기서 ding은 사물thing을 의미한다. 또 Reified에서 rei는 라틴어로서 사물thing을 의미한다. 물화(reification)란 아직 사물이 아닌것을 객관적 사물(objective thing)로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재미있게도 루카치는 맑스의 소외 개념(notion of alienation)을 재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물화(reification)는 독일어로 entfremdung인데 fremt는 alien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당신이 스스로 동떨어짐alien을 느끼면 그것은 소외alienated , 즉 고향상실homeless in the world한 것이다. 루카치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이 세계를 창조하였다. 따라서 우리는 이 객관적 세계의 주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객관적 세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할 때 개인은 소외되기 시작한다. 소외의 본질은 우리 각자는 자신을 세계의 주인으로 보지 못하고 오히혀 피지배자으로 본다는 데 있다. 이것이 루가치가 강조하는 소외의 본질이다. 루카치는 소외를 물화된 의식상태라고 하면서, 인간이 스스로 물화된 의식상태에서 객관적 실재를 보면 그는 그 현실에 대한 어떤 대처도 불가능하게 된다고 하였다. 잘알다시피, 청년 맑스의 프락시스praxis 철학은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를 통하여 끝났다. 프락시스praxis 철학의 포인트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었다. 오늘날 이것은 실증주의라고 불린다. 실증주의자는 객관적인 사실이 저 밖에 있다고 가정하는 사회과학자이다. 실증주의자는 가장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객관적 사실들의 실체를 밝히기 위하여 사회적 조사(social investigation)를 실시한다. 경제학자들은 객관적 사실들을 기술한다. 사업자들은 자신들의 이윤을 극대화 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은 사업계에서 도태되기 때문이다. 잘알다시피, 자기-이익 추구는 마치 자연의 힘처럼 파괴적이다. 게오르크 루카치는 멋지게 이것을 제 2의 자연(second nature)이라고 조어하였다. 루카치는 우리 인간이 사회생활에 몰입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자연의 힘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여러 경제법칙들은 번개나 지진같은 자연현상처럼 매우 위력적이어서 우리는 어떤 대처도 할 수 없을 때가 있다. 우리는 예측 불가능한 일을 예측할 수는 없다. 갑자기 허리케인이 온다면 우리는 차 안으로 들어가서 그곳을 탈출하여야 한다. 실증주의자들에 따르면 사회현상은 자연과 같은 위력적인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바로 루카치가 사회를 제 2의 자연으로 보는 이유이다. 루카치는 이 세계를 창조한 것은 우리들이고 우리들이 세계를 지배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제 2의 자연은 바람직한 개념이 아니라고 하였다. 루카치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의 주인으로서 객관적 조건들(objective conditions)을 변화시키면서 소외을 극복하고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인간은 조건들을 바꾸어 나간다(change).''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각자 특정한 환경조건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그 조건을 절대로 바꿀 수 없다거나, 어느 정도는 바꿀 수 있다는 것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있을 수 있다. 어쨌든 이것은 홉스의 자발적 행동(voluntary action)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

+ 주체와 객체의 문제
주체와 객체의 문제는 맑스뿐만 아니라 비판이론과 20세기와 21세기의 반-실증주의(anti-positivism)에도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예를들어, 문화이론(cultural theory)가들은 반-실증주의적이고 사회과학을 보통의 과학으로서 폄훼하기도 한다. 주체와 객체는 이를테면 주체는 당신이고 당신은 인지적으로 지식을 창출하는 인식활동(cognitive activity)을 한다. 객체는 당신이 인식활동을 통하여 창조한 지식내용이다. 진리반성론(reflection theory of truth)에 따르면 주체의 마음거울은 객체를 포착한다. 이 포착된 객체는 진리라고 말한다.  이 과정은 바로 가설에 대하여 입증하는 검증 테스트이다. 예를들어, 나는 한가지 가설을 세웠다. 나는 밖으로 나가서 그 가설을 사회현실에 비추어 보면서 검증 테스트를 한다. 가설이 현실과 들어맞는다면 그 가설은 입증된 것이다. 따라서 나는 진리를 얻은 것이다. 한편 맑스의 프락시스praxis 철학에 따르면 진리는 단순히 반성이 아니다. 맑스의 진리실천론(practice theory of truth) 주체와 객체 사이의 상호작용이다. 아르도노(Adorno)라는 멋진 철학자가 있었다. 아르도노는 프랑크프루트학파 학자였고 주로1930년대 40년대 60년대에 활약하였다. 아르도노는 매우 강력한 진리 공식을 제안하면서 말하기를 "진리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힘-장이다."(the truth is force-field between subject and object)라고 하였다. 진리는 단지 주체가 객체를 반성이 아니라 주체와 객체의 긴장(tension)사이에 놓여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말 멋진 명제이다. 진리는 주체와 객체 사이의 힘-장(force-field)의 어딘가에 숨어있다. 그러면 아이디어는 언제 진리가 되는가. 아르도노는 나찌즘의 실재(reality)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면서 나찌 아이디어는 너무 잔인(miserable)해서 역사적 사실(true)이라고 부를만한 가치도 없다고 비난하였다. 사실, 아르도노는 유대인이었고 그의 가족들은 다수가 나찌에 의하여 희생되었다. 우리는 무시무시한 것을 보게되면 이것은 사실(true)일 수 없다고 말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아르도노가 주장하는 포인트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비참하므로 그것이 사실일 수 없다고 말한다. 나찌 아이디어의 잔인성은 마치 자연의 힘처럼 강력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 앞에서 완전히 무력해질 수 밖에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에 대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어야 했다. 사람들은 아우슈비츠와 관련하여 무언가를 해야했지만 어떤 것도 하지 못했다. 이것이 아르도노가 말하고자 하는 포인트였다. 아르도노는 이 실재는 사실이라고 불러서느 아니되고 진리일 수 없다고 말하였다. 마지막으로, 칼 만하임(Karl Mannheim)의 진리이론을 짚고 너머가자. 만하임은 매우 보수적인 철학자로서 맑시즘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의 저작은 주로 영국에서 이루어졌다. 칼 만하임은 말하기를 "진리는 존재가 아니다The truth is not being. 진리는 생성이다The truth is becoming."라고 하였다. 정말 멋진 명제이다. 진리는 단지 사물이 어떻게 있는지에 관한 것이 아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은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고또 그것에 관하여 무언가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 인식의 진정한 목적은 세계를 단지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세계로 바꾸는 것이다. 진정한 진리는 더 나은 세계를 위한 길을 알고있다. 따라서 진리는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다. 이것이 칼 만하임의 포인트이다. 재미있게도 칼 만하임의 포인트는 프락시스praxis 철학과 일치한다. 맑스는 프락시스 철학을 기초로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를 썼지만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는  프락시스 아이디어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맑스는 이 책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를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공동저술하였지만 내용이 너무 자의적(voluntaristic)이라고 판단하여 발간하지 않았다. 맑스는 이전에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가 모호(fluffy)하다고 하여 출간을 포기한 적이 있었다. 맑스는 말하기를 "어느 누구도 소외된 프롤레타리아가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단정하면서 그 책의 발간을 포기하였다.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의 11개 테제가 모두 탁월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중 몇 몇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맑스는 그 책을 완성하였지만 결코 출간하지 않았다. 맑스는 그 내용이 너무 자의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맑스는 임박한 혁명과 자본주의 붕괴를 입증할만한 이론을 아직 개발하지 못했다. 맑스는 그 변화를 이끌 주체나 그 변화의 필요성에 관한 이론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필연적 붕괴에 대한 이론을 정립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맑스는 결정론(deterministic)적 궤도위에 올라서게 되었다.그러나 실제로 맑스는 결정론적이 아니었다. 맑스는 분명 아이디어가 세계를 변화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맑스는 대영 도서관에서 하루종일 책과 씨름할 수 있었다. 결국 맑스는 결정론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그가 완성한 책의 내용은 경제적 결정론을 향하고 있었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사회변화를 이끌면서 이전사회와 비교하여 대댠한 업적을 이루어냈지만 결국에는 영원히 존속할 수는 없다. 이것이 맑스가 이론화하고자 했던 포인트이다. 때문에 맑스는  결정론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 맑스는 자신의 유물론을 전개하면서 물질적 조건들이 인간의 행동과 의식을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역사적 유물론을 전개하였다..


8.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 1845-46, 주요내용

맑스는 <독일 이데돌로기> 제 1권에서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 포함된 유물론적 내용들을 보완하면서 포이에르바하을 비판하였다. 맑스는 자신이 개발한 새 유물론, 즉 역사적 유물론을 전개하면서 '변증법적'인 것을 자제하였고, 역사와 역사 발전을 유물적으로 개념화 하였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아담스미스가 정립한 수렵사회에서 시작하여 채집, 방목, 농업, 상업시회로 이어지는 역사유형을 새롭게 유형화 하였다. 맑스가 들고나온 새 유형typology은 생산방식(mode of production)이었다. 사실, 맑스는 이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아담 스미스를 매우 친절하게 다루었다. 결국 이것을 기화로 맑스이론은 헛점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완성도 못하고 출간도 못하였다. 그러나 맑스와 엥겔스가 타계하고 난 후인 1903년 최초로 미완의 형태로 발간되었다. 먼저,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역사의 이데올로기느 어디에서 나오는가라고 물었다. 다음, 맑스는 생산력(productive forces)의 개념과 생산력의 발전 그리고 생산관계(relations of production)에 대하여 서술하였다. 재미있게도 당시 맑스는 생산관계의 의미를 정확히 모르고 있었으므로 결국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는 실패하게 되었던 것이다. 맑스는 청년헤겔파인 부르노 바우어와 막스 슈티너(Max Stirner)애 대하여도 서술하였다. <독일 이데올로기> 제 2권은 별로 재미가 없다. 따라서 맑스이론의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별다른 관심을 갖지 않는다.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의 포인트는 역사적 유물론과 생산양식(modes of production)을 구성하는 생산력(the force of production)과 생산관계(relations of production) 그리고 노동분업(division of labour)이다. 당시 맑스는 여전히 애덤 스미스의 아류였으므로 사회 진화를 노동분업의 진화로서 이해하였다. 맑스는 인간 사회와 역사를 전개하면서 인간의 양심과 의식을 사회적으로 조명하고자하였다.

+ 역사와 유물론materialism
맑스는 최초의 실증주의 사회과학자였다. 맑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밝힌 내용들은 오늘날 실증주의적 정치학, 사회학, 경제학, 심리학에서 무리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자의적이거나 독단적인 전제들을 제외하면서 자신의 유물론을 다듬어갔다. 맑스는 방법론적으로 추상(abstraction)은 전제로부터 상상(imagination)으로 발현하게 됨으로 우리는 먼저 객관적 조건들을 조사(speculate)해야 한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맑스 이론의 출발점은 개인과 인간행동이었다. 맑스에 따르면 모든 인간 행동은 생산으로 이어지고, 생산에 의한 모든 생산물은 인간생활의 조건이 된다. 생활의 조건이란 이미 존재하는 것들과 더불어 인간행동에 의하여 생산된 모든 것을 말한다. 맑스는 말하기를 "독일철학자들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왔지만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올라간다." 고 하였다. 아이디어는 연역(deduction)이 아니라 귀납(deduction)을 통해서 나온다. 이것이 맑스의 포인트이다. 이것은 실증주의자들이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증주의자들은 귀납법이야말 진정한 과학이라고 말한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아이디어(ideas)는 어떤 역사도 없고 어떤 발전도 없었다고 말하면서 인간은 물질적인 조건들을 발전시켜왔고 물질적인 조건들은 인간의 사유thought를 바꾸어 왔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우리의 물질적 실존(material existence)만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아이디어(ideas)는 다만 이 물질적 조건에서 반성된 것이다..

+생산양식(the mode of production)
맑스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과 다를 수 있는 것은 의식과 종교 때문이다. 인간은 생산하고 또 목적에 따라서 환경environment을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새롭게 변화되어질 환경에 대한 비전(image)을 갖고 있다. 이것이 맑스의 포인트이다. 그러나 맑스는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생산하는 생산물이 아니라 생산환경(양식)이라고 하였다. 생산양식(환경)은 생산자가 어떻게 생산하고 생산자들이 어떻게 서로 묶여있느냐와 관련되어있다. 사실 생산양식은 역사를 통하여 변화하면서 생산물을 창조하였다. 맑스의 생산양식 아이디어는 완전히 새롭고 놀라운 개념이었다. 맑스 이전의 박물관은 위대한 인물, 왕과 여왕, 장군, 교황의 초상화을 걸어놓고 그들의 역사를 기술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박물관은 로마시대의 왕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요리하고 어떻게 식사했는지 거실과 식기와 요리도구들을 전시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맑스로부터 연유한 혁명적 아이디어이다. 역사는 위대한 아이디어와 위대한 사람들의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사람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았지에 관한 아이디어이고 그 아이디어가 어떻게 생산되고 재생산되는지에 관한 아이디어이다.

+ 생산력, 생산관계, 그리고 노동분업
맑스는 생산력, 즉 기술개발과 더불어 내부 상호작용(internal intercourse), 즉 노동분업이 국가들 사이의 차별을 가져온다고 하였다. 이것은 매우 애덤 스미스적이다. 에밀 뒤르깽 또한 노동분업의 발전정도를 사회진화의 척도로 보았다.

+ 인간 역사
맑스에 따르면 역사는 생산양식의 차이에 따라서 기술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생산양식은 부족재산제(tribunal property)이다. 부족재산제는 기술technology이 매우 단순하고 노동분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남성과 여성의 자연적인 노동분업이 있었을 뿐이다. 남성은 사냥을 나갔고 여성은 숲에서 땔감을 모았다. 맑스는 이것을 자연적(natural)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것은 성차별주의(sexist)이다. 두번째 생산양식은 고대공동재산제(ancient communal or state property)이다. 고대공동재산제는 기술을 통한 생산력 발전으로 소유권(ownership)과 노동분업이 분리되므로써 사람들은 초과 생산을 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리스와 로마의 노예들은 밤낮 일하였고 철학자들은 여유롭게 아이디어를 구상하였다. 노예들은 주인을 위해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였고 주인은 먹고 즐길 수 있었다. 이것이 노동분업이다. 세번째 생산양식은 봉건재산제(feudal property)이다. 이전의 고대공동사회에서 노예들은 생산을 위해서 값싸게 이용되었다 그러나 고급 노예는 자신의 기술을 싼 값에 제공하려들지 않았다. 따라서 봉건재산제가 개발되었던 것이다. 봉건제산제에서 농노들(serfs)은 노예들을 대체하였다. 농노들은 집과 토지를 가질 수 있었다. 농노들은 일주일 중 며칠을 영주의 가택과 토지를 위하여 생산하였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의 재산을 위하여 생산할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그리스와 로마의 멸망 이후 샤를마뉴의 등장에 이어서 중세시대(Dark Middle Ages)에 도달하였을 때 노동분업의 발전은 더이상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놀랍게도, 11세기와 12세기의 노동분업은 1세기나 2세기의 노동분업 보다 진화하지 못하였다. 이제 맑스는 더이상 자신의 방법론을 들이밀 수 없게 되고말았다. 맑스는 깊은 수렁에 빠진 나머지 <독일 이데올로기>를 더아상 밀고나갈 수 없게 되었다. 물론 맑스는 네번째 생산양식을 전개할 수 없었다.

+ 지식 사회학(sociology of knowledge)
맑스는 매우 중요한 제안을 하면서 말하기를 "생활이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Life determines consciousness, rather than the other way around." 라고 하였다. 또 맑스는 통찰력있게 말하기를 "지배계급은 모든 사람과 관련하여 지배아이디어를 결정한다Ruling class always determines ruling ideas of each people." 고 하였다. 이것은 분명 오류이다.

+ 생활이 의식을 결정한다
의식이 생활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명제는 유물론의 핵심이다. 맑스에 따르면 특별히 생산적인 개인(definitive individuals)은 특별한 사회적, 정치적 관계속으로 진입한다. 아이디어라는 것은 인간들이 물질적 행동들을 통한 상호작용으로 생산된다. 이것이 맑스의 포인트이다. 이를테면 " 돈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말해보라. 나는 당신이 갖고있는 아이디어를 알 수 있겠다." 또 "당신이 어떤 계급에 속해 있는지 말해보라. 나는 당신이 어떤 아이디어를 갖고있는지 알겠다." 재미있게도 아이디어의 계급적 속성은 투표행위에도 매우 대조적으로 존재한다. 보통 미국에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투표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 민주당은 노동계급의 표를 얻기 위하여 중산층의 눈치를 보면서 여러가지를 시도한다. 이것이 미국 민주당의 전통적인 약점이다. 반면에 오스트레일리아의 노동당은 탄탄한 노동계급의 표를 확보하고 있다. 당신의 계급적 위치를 말하라. 그러면 나는 다음선거에서 당신이어떻게 투표할지 알겠다. 미국 부자들은 공화당에 기우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맑스주의자들이 바라는 바이다. 당신의 물질적 관심을 말하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  프로이트는 말한다. " 당신의 성생활을 말하라. 그러면 나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  맑스 유물론의 포인트는 한마디로 '바로, 실존이 의식을 결정한다It is existence which determines consciousness.' 는 것이다. 당신은 아이디어가 있기 때문에 자기이익your interests form your ideas을 추구한다.

+지배계급과 지배이념(idea)

지배계급이 지배이념을 생산한다는 것은 그렇게 옳은 아이디어는 아니지만 수긍 못 할 것도 없겠다. 분명 세계에는 이념의 헤게모니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원문번역,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2012년 2월 2일 목요일

7-1. 맑스: 소외론

1. 맑스의 초기 생애

1818년 칼 하인리히 맑스Karl Heinrich Marx는 독일의 트리어Trier에서 태어났다. 맑스의 부친인 하인리히 맑스는 성공한 변호사이자 계몽주의자로서 볼테르를 매우 존경했다. 맑스의 할아버지는 트리어의 랍비였던 맑스 레비Marx Levi 였는데 맑스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죽었고 맑스의 부친 하인리히 맑스는 루터교로 개종하였다. 그래서 맑스는 세속적인 가정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1830년 맑스는 트리어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고 1835년 본 대학University of Bonn에 입학하여 그리스로마 신화와 역사를 수학하면서 학생운동(student politics)에 참가하였다. 맑스는 Bonn에서의 생활이 지루해져가자 1836년 그때 막 활기넘치던 베를린 대학으로 옮겨가서 법학을 수학하였다. 당시 맑스는 헤겔의 제자로서 청년헤겔파(young Hegelian)였던 브루노 바우어Bruno Bauer의 강의를 수강하면서 급진적 학생모임에 들어갔다.

1841년 맑스는 예나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받고 졸업하였다. 그 당시 베를린 대학에서 학위를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맑스는 법학보다는 철학과 정치에 더많은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독일의 철학자인 헤겔은 인간의 역사는 인간 의식이 전개되는 것이라고 보았고 또 인간은 주체와 객체가 서로 분리된 소외 상태에 놓여져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헤겔은 자기-의식을 교양하고 통합Totality함으로써 소외를 극복될 수 있다고 하였다. 헤겔이 말하는 소외상태란 낯선 상태를 말한다. 소외로 인하여 인간의 객체는 주체로부터 벗어나서 분리된 채로 독립된 가치가 부여된다. 그 소외상태는 진정한 자기가 아니다. 헤겔은 자기를 찾기위해서는 자기-의식의 교양을 통하여 소외가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한편 헤겔의 제자이자 맑스의 스승이었던 브루노 바우어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강사로서 청년헤겔파(Young Hegelian)였다. 맑스는 바우어의 강의를 수강하였다. 나중에 맑스는 부르노를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하지만, 부루노 바우어가 없었더라면 맑스뿐만 아니라 맑시즘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맑스는 과격한 용어를 즐겨 사용하는 성깔있는 학생이었고 아주 멋지거나 열받게 언어를 구사하기도 하였다.

2. 비판적인 비판가(the critical critic)

브무노 바우어는 헤겔 좌파였다. 재미있게도, 헤겔 좌파는 헤겔의 방법론을 이용하여 헤겔을 비판한다. 바우어나 포이어바하같은 헤겔좌파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비판적인 비판가라고 말한다. 이 '비판적인 비판가' 는 종종 맑스의 저작에도 등장하는데 아이러닉한 용어이다. 알다시피, 헤겔는 비판철학의 창시자로 불리운다. 비판이론의 핵심은 인간의 의식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는 데 있다. 비판이론가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과 인간의 조건 사이에는 모순이 있다. 따라서 우리의 의식은 적절하게 우리의 조건을 반성하지 못하므로 우리는 의식을 비판하고 옳은 의식에 도달해야 한다. 그럼, 최초의 비판이론가는 누구인가. 먼저, 독일의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가 거론된다. 재미있게도, 칸트는 즉자Ding an sich(Things in themselves)와 대자Ding fur sich(Thing for themselves)를 구별하였다. 칸트에 따르면 우리가 마음 속에 지닌 모든 아이디어는 대자이다. 그 대자things for themselves는 우리의 세계(world around us)와 대응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세계는 무한해서 인간들이 이제까지 개발한 어떠한 개념들도 이 세계와 완전히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인식행위(the act of cognition)를 통하여 의미있는 질료(stuff)를 세계 속에서 골라낸다. 따라서 이 골라낸 아이디어는 바로 대자(things for themselves)인 것이다. 이것이 칸트의 포인트이다. 우리는 인식행위와 학습과정을 통하여 세계 속에서 유용한 것들을 골라내는 것이다. 칸트는 인간 의식은 완전하지 않으므로 우리 각자는 인간 의식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비판의 도마에서 인간의 마음은 세계의 무한함과 실재(reality)를 결코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 이것이 칸트와 비판이론을 이해하는 포인트이다. 또한, 헤겔도 최초의 비판이론가로서 거론된다. 칸트는 불가지론자로서 인간의 세계포착은 개념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였지만 헤겔은 철학을 통하여 소외가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청년헤겔파(the young Hegelian)는 자신들을 비판의 비판가라고 부른다. 그들은 헤겔의 방법론으로써 헤겔 이론을 비판하였다. 청년 헤겔파는 헤겔의 시스템 자체를 이용하여 헤겔의 이론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고자 한다. 사실, 맑스는 이러한 청년헤겔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맑스는 여러 면에서 비판적인 비판가였다. 또한, 맑스는 청년헤겔파,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기도 했다. 포이에르바하는 자연주의(naturalism) 방법론을 이용하였는데 맑스는 한때 이 자연주의를 추종하였다. 알다시피, 맑스는 유물론자로서 알려져있다. 그러나 맑스는 스스로 유물론(materialism)과 사적 유물론(historical materialism)이란 용어 대신에 자연주의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이 자연주의의 핵심은 정신 의식(the importance of consciousness in spirit)의 중요성을 깨닫고, 인간 의식과 정신 사이의 상호작용과 자연 자체를 강조하는 데 있다. 놀랍게도, 포이에르바하는 <기독교의 본질The Essence of Christianity>에서 신(God)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고 주장하였다. 바우어와도 이렇게 주장했었지만 포이에르바하는 더 급진적이었다. 포이에르바하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소외의 절박함을 신 이이디어(the idea of God)에 투사하면서 소외를 극복하고 해방하고자 한다. 한편 바우어는 헤겔을 비판하면서도 존재론적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알다시피, 존재론Ontology은 사물의 근원을 다룬다. 바우어에 따르면 정신 세계는 인간의 반성reflection을 통하여 형성된다. 재미있게도, 바우어는 이것을 자연주의라고 부르면서 관념론(idealism)과 차별화하였다. 관념론자는 물질세계는 아이디어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한다. 관념론에 따르면 신과 같은 초월적인 존재가 자신의 의지를 실행하여 세계를 창조하고 인간을 창조했다. 따라서 그 아이디어idea는 인간의 행동양식을 해명할 수 있다. 반면에 유물론자들은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출발하여 아이디어를 얻고자 한다. 포이에르바하에 따르면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 그러나 맑스는 더 나아가서 말하기를 "당신은 머리 속에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다. 그 아이디어는 당신의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라고 한다. 맑스에 따르면 개인은 사회적 위치에 따라서 자기-이익을 추구하고 사유한다. 이것은 유물론적인 접근법으로서, 맑스는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아이이어를 이끌어내고자 했던 것이다. 이상, 헤겔의 비판이론, 청년헤겔파의 급진적 비판이론, 그리고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살펴보았다. 이것들은 모두 맑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3. 결혼과 초기 경력

1842년 맑스는 콜론으로 이사하고 라인 신문사에서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편집자가 되었다. 당시 맑스는 자유주의 저널리스트였으므로 아직 급진주의자는 아니었다. 맑스는 부르조아 자유주의자로서 언론의 자유와 시민의 자유에 관한 아티클을 쓰고 있었다. 맑스의 글감들은 존 스튜어트 밀도 반대하지 않을 만한 것들이었다.

1843년 맑스는 7년 간의 연애를 끝내고 제니Jenny von Westphalen와 혼인하였다. 제니는 독일 귀족가문 출신이었다.

1843년 맑스는 두 문제작을 내놓았다. 먼저, 맑스는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the State>를 썼다. 다음, 맑스는 바우어를 공격하면서 에세이 <유대인 문제On the Jewish question>를 썼다. 그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었다. 이때 맑스는 청년헤겔파와 갈라섰다. 그러나 이 에세이 <유대인 문제>는 반독일적인 사회성과 정치성을 담고 있었으므로 맑스는 독일을 탈출하여 프랑스 파리의 38 Rue Vaneau로 피난하였다.

1844년 맑스는 파리에서 <파리 원고The Paris Manuscript of 1844>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또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전문A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Law, An Introduction>을 완성하였다. 맑스는 이때부터 자신의 철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맑스는 당시 24세 되던 1844년 여름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를 완성하였다. 이어서, 맑스는 프리드리히 엥겔스를 처음 만났는데 그 후 평생동안 엥겔스와 우정관계를 유지하였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동으로 <신성가족The Holy Family>, <공산당 선언The Communist Manifesto>, <독일 이데올로기The German Ideology>  저술하였다. 사실, 엥겔스는 맑스보다 훨씬 더 명료한 분석력과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맑스는 다소 추상적이었으나 대단히 천재적이었다.

1845년 맑스와 엥겔스는 파리에서 추방당하였고 브뤼셀로 이사했다. 1845년 4월 맑스는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테제Theses On Feuerbach>를 발표하면서 인식론적 돌파구를 마련하였다. 맑스는 이 책에서 역사적 유물론이란 용어를 조어하였고 유물론자의 길로 들어섰다..

1846년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를 쓰면서 헤겔관념론자에서 역사적 유물론자로 완전하게 돌아섰다.

1848년 2월 22일- 24일 파리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맑스와 엥겔스는 팜플렛 <공산당 선언The Manifesto of Communist Party>을 출간하였다. 맑스는 이해 브뤼셀에서 추방당하였고 3월 5일 혁명도시 파리로 옮겨갔다. 3월 13일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3월 15일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전 유럽으로 확산될 조짐이었다. 3월 18일에는 베를린에서 혁명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맑스가 혁명을 예견하고있었는데 정말로 일어났던 것이다. 4월 맑스와 엥겔스는 독일의 혁명을 지지하기 위하여 독일로 돌아왔다. 그러나 10월 오스트리아에서는 반혁명(counter revolution)이 일어났다. 11월 8일에는 프러시아에서 반혁명 쿠데타가 일어났다. 12월에는 프랑스에서 반혁명은 아니었지만 루이 보나파르테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루이 보나파르테 나폴레옹은 나폴레옹의 조카였는데 그의 부친은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네델란드의 왕이 되었었다. 루이 보나파르테 나폴레옹은 스위스에서 망명객의 신분으로서 살고있었다. 루이 보나파르테는 그렇게 지혜로운 편이 아니어서 여러 소동에 휘말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 3세로서 황제로 등극한다.

1849년 5월 맑스는 루이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혁명의 불씨를 기대하면서 파리로 돌아왔는데 곧 오스트리아로 추방되고 말았다. 그러자 맑스는 런던으로 이사했고 거기서 나머지 생애를 보냈다.

1858년 맑스는 <그룬트리세Grudrisse>를 완성하였다. 이 책은 맑스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책이다.

1867년 맑스는 <자본론Das kapital>을 썼다.

4. 파리꼬뮨과 그후

1871년 파리에서는 자신들을 꼬윈Commune이라 부르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났다. 그 혁명의 근거이자 교과서는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Communist Manifesto>이었다. 맑스 1864년에 이미 정치조직인 국제 노동자 조합International Worker's Organization, 즉 후일의 제 1인터내셔날The First International을 러시아 무정부주의자인 바쿠닌Bakunin과 함께 창설하였었다. 한편 이 파리 꼬뮌Paris Commune은 1871년 5월 28일 단 2주만에 전복되고 말았다. 이 꼬뮌Commune이 실패로 돌아가자 맑스와 바쿠닌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제 1인터내션날은 해체되었다. 바쿠닌은 밑에서 올라가려는Bottom-up성향의 무정부주의자로서 국가를 해체하고자 하였다. 한편, 이 파리꼬뮨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재판없이 처형되었다. 그 꼬뮌이 지나가자 유럽은 보수주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독일에서는 철의 재상인 비스마르크가 등장하였다. 영국에서는 빅토리아여왕이 등장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는 카이저 프란츠 조셉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혁명적인 맑스주의는 들어갈 여지가 없었다.

1883년 맑스는 타계하였고 자신보다 18개월 먼저 타계한 부인 제니Jenny와 함께 런던의 하이게ㅐ디트 묘지Highgate Cemetery에 묻혔다.

1889년 엥겔스는 제 2인터내션날을 창설하였다. 오늘날 제 2안터내션날은 사회 민주당원social democrats로서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 민주당은 JFK가 있을 당시 자유주의적 정당이었는데 제 2인터내션날 회의에 옵저버를 보내기도 했다. 바비 케네디Bobby kennedy는 제2인터내션날에 매우 공감하였고 미국 민주당이 사회민주주의 국제운동Social Democratic International Movement에 참가하지말도록 권고하기도 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공샨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1919년 공산주의자들은 제 2인터네션날의 역할에 회의적이었으므로 제 3인터내션날을 창설하였다. 이 공산주의 인터내션날은 2차대전까지 존속하였다. 그때 당시 소비에트 러시아는 독일을 침공하기 위하여 미국의 원조가 필요했는데 미국은 원조를 조건으로 공산주의 인터내션날을 해체하도록 권고하였다. 참고로, 레온 트로츠키의 제 4인터내션날도 있었다.

6. <피리 원고The Paris Manuscript>와 소외론

맑스 소외론(the theory of alienation)의 출발점은 헤겔이다.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에서 자신의 소외론을 전개하였다. 헤겔은 <법철학>에서 공무원(civil servants)이 보편적 계급(universal class)이라고 말했다. 헤겔은 프랑스 혁명과 부르조와 사회를 비판하였다. 헤겔에 따르면 노동자와 자본가는 각기 다른 특별한 이익(interests)를 대표하는 반면에 공무원은 질서와 명령을 내릴 수 할 수 있고 정부는 보편적 이익을 표상한다.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그러한 헤겔의 관점을 비판하였다. 이어서 맑스는 <유대인 문제On the Jewish question>을 저술하였다. 맑스에 따르면 국가 관료(bureaucrats)는 보편적이 아니므로 보편적 관점과 보편적 해방(emancipation)의 담지자가 필요하다. 그럼, 보편적 이익과 해방을 수행할 인자는 누구인가. 맑스는 <헤겔 법철학 비판, 전문Introduction,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law>에서 그것은 프롤레타리아라고 말하였다. 왜 프롤레타리아가 보편적 계급이 되어야 하는가. 맑스는 그 이유를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에서 밝혔다. 맑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는 어는 누구보다 완전히 소외되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는 소외 해방에 대단한 관심을 갖는다.

+ <파리 원고Paris manuscripts, 1844>
재미있게도, 첫번째 원고는 27페이지로 되어있는데 임금, 이윤 그리고 지대 뿐만아니라 사소유권과 소외에 대하여 서술하고있다. 특히 제 5장이 매우 중요하다. 두번째와 세번째원고는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 어쨌든 이 책 <파리원고>는 헤겔을 재해석한 것이다. 맑스에 따르면 소외는 아이디어idea에서 오는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경제의 본질인 물질적 조건에서 나온다. 당시 맑스는 자본주의 개념을 갖고있지 않았지만 상품을 생산하는 상업사회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는데 그것이 소외의 출발점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상품 생산사회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소외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맑스는 소외의 4가지 특질을 정의하였다. 첫째, 소외는 생산의 객체로부터 나온다. 둘째, 소외는 생산행위로부터 나온다. 셋째, 소외는 종(species being)로부터 나온다.종이란 인간의 본질에 관한 것이므로 동물과 구별되는 개념이다. 넷째, 소외는 동료들로부터 나온다. 맑스는 사유 속에서 소외를 극복하고자 했던 헤겔을 재해석했던 것이다. 헤겔에 따르면 소외는 의식상태의 문제였다. 그러나 맑스는 그 헤겔의 소외론을 물질적 현실로 끌어내렸던 것이다. 그럼, 소외는 언제 나타나는가. 맑스에 따르면 소외는 노동이 상품화되고 이윤이 경제원칙이 될때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그것은 사소유권이 등장하는 지점이다. 맑스는 애덤 스미스가 밝힌 상품 생산 상업사회를 탐구하면서 진정한 사회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 1. 생산 객체로부터의 소외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German ideology>에서 자본주의 생산양식capitalist mode of production이란 용어를 조어하였다. 맑스의 자본주의 생산양식에 따르면 노동자는 노동을 통하여 생산물,즉 객체를 생산하지만 그 생산물은 노동자로부터 소외되었다. 따라서 생산물은 노동자와 대립한다. 이러한 조건에서 노동자가 노동을 한다는 것은 소외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색한 상품생산과는 대조적으로, 장인들은 자신의 생산물에 대하여 소외되지 않는다. 장인은 자기가 생산한 생산물과 일체이다. 구두공은 멋진 구두를 생산하고 난 후, 자기가 만든 구두를 자랑스러워한다. 그 구두공은 일요일 교회에서 예쁜 아가씨가 자기가 만든 구두를 신고 다니는 걸 보면, 저 구두는 '나의 것' 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 구두공은 자신의 생산물로부터 소외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량생산업체의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그렇지 않다. 예를들어, 도요타 캠리Toyota Camry에서 작업하는 근로자는 실제로 자신이 무엇을 생산하는지 모른다. 그 근로자는 상품에서 소외된 것이다. 노동자는 생산물을 위하여 노동을 가하지만 노동자는 그 상품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노동이 다 생산물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나 학자를 보라.  그들은 자신의 일과 일체이고 자신의 생산물에서 저작권을 갖는다. 그러나 평범한 근로자는 저작권을 갖고있지 않다. 근로자는 자신이 생산한 일에 대하여 라이센스할 수 없다. 따라서 그들은 일로부터 소외된 것이다.

+ 2. 생산 행위로부터의 소외
맑스에 따르면 노동은 노동자의 외적인 것이다. 노동은 노동자의 본질적인 속성이 아니다. 따라서 노동자는 작업장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개발하는 것을 긍정하기보다 부정한다. 이를테면, 노동자는 말하기를 "이제 5시 50분이다. 10분만 기다리면 퇴근이다." 라고 한다. 노동자의 인생은 일이 끝나면서 시작한다. 따라서 근로자는 자신의 일인 생산 행위에서 소외되었다. 그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강제된 것이다. 만약, 당신이 굶주려 있다면 당신은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당신의 노동은 경제적으로 강제되는 것이다. 재미있게도, 맑스는 자기의 노동은 타인에게 속한다고 말하였다. 이를테면, 사장은 직원에게 명령하고 직원은 명령에 따라 작업을 수행한다. 따라서 직원은 생산 행위로부터 소외된 것이다.

+ 3. 종으로부터의 소외
맑스에 따르면 노동자는 다른 인간으로부터 소외된다. 자연상태에서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인간은 동물과 다른가. 독일의 시인 쉴러는 무대극(play)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고 하였다. 맑스는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일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머리 속에서 계획한 필요한물품을 물질세계에 창조한다. 맑스는 이러한 노동이 우리를 인간답게 만든다고 했던 것이다. 예를들어, 벌은 일하는 동물이다. 그러나 벌은 계획을 갖고 일하지는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아이디어를 준비한 후에 자기 집을 건축한다. 인간은 자신이 구상한 아이디어대로 집을 완성한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이다. 이것이 맑스의 포인트이다. 맑스에 따르면 우리는 상품생산사회에서 우리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우리의 가장 본질적인 인간다움을 소외시켰다. 맑스는 이것이 가장 큰 문제라고 하였다. 다른 종으로부터의 소외는 맑스에게 가장 큰 충격이었다.

+ 4. 동료로부터의 소외
맑스는 동료로부터의 소외가 가장 충격적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상품생산사회에서 서로를 대상으로 취급하기 시작한다. 우리는 이윤 극대화, 자기-이익의 추구, 공리의 최대화, 세계에 대한 도구적 사고방식 등을 통하여 최소 비용으로 목적에 도달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때 마다 서로를 도구로서 취급한다. 맑스는 이것을 최악의 소외라고 말하였다. 재미있게도, 이 소외는 헤겔이 구상했던  인류의 일반적 조건과는 거리가 멀다. 이 소외는 현대사회(modernity)로부터 출현하여 자본주의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스며들었다. 동료로부터의 소외는 현대성과 현대 산업사회 그리고 도시생활의 특질이다. 우리는 인간적으로 서로 상호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대상으로서 취급한다. 개인은 타인을 성적 대상으로 취급한다. 때때로 에로틱한 관계는 잔인한 성행위로 전락하기도 한다. 개인은 타인을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대상으로 취급한다. 개인은 목적을 위해서 필요할 때만 타인을 부른다. 우리는 동정심이 부족하고 사랑이 부족하다. 또 우리는 공감이 부족하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The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





2012년 1월 25일 수요일

6. 존 스튜어트 밀: 공리주의와 자유


1. 존 스튜어트 밀의 스승인 벤담

공리주의는 근본적으로 매우 중요한 아이디어이다. 공리주의는 현대 경제 이론과 정치사회 이론들이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 아이디어에 따라 굴러가도록 예고하였던 것이다. 공리주의의 출발점은 벤담이다.  여러 면에서 벤담은 공리주의의 창시자라고 볼 수 있지만, 공리주의란 용어를 써본 적은 없었고 단지, 존 스튜어트 밀에게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부친인 제임스 밀은 식민지 인도의 역사와 인도에서의 영국 역사를 방대한 세권의 책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제임스 밀은 1808년 벤담을 만나면서 공리주의에 매료되었고 자신의 아들인 존 스튜어트 밀의 교육을 부탁하였다. 벤담은 1789년 <도덕과 입법의 원리The Principle of Morals and Legislation>를 출간했었다. 벤담은 <도덕과 입법의 원리>에서 매우 중요한 주장을 하였다. 처음에 그것은 매우 이성적으로 보였으나 지나친 면이 없지 않았다. 벤담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쾌락을 좇고 고통을 피하도록 설계되어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가능한 고통을 최소화하려고 하고 쾌락을 최대화하려고 시도한다. 이때 바로 최대의 행복(greatest happiness)이루어 진다. 이것이 공리(utility)이다. 공리는 근본적으로 벤담의 아이이디어이다. 따라서 무엇이든 행복으로 이끌어주기만 한다면 어떠한 행동도 올바르다는 결론이 나올수 있다. 실제로 이 행복은 양화(quantified)될 수 있다고 하였다. 재미있게도, 쾌락의 합계에서 고통의 합계를 뺀 결과가 증가한다면 그 행동은 올바르고 도덕적으로도 옳다. 이러한 벤담의 주장은 꽤 이성적으로 보인다. 벤담에 따르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진다면 그 사회 또한 더 행복해지게 된다. 벤담의 포인트는 쾌락과 고통에 있었다. 우리 인간은 자연적으로 두 주권자를 떠받들도록 설계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쾌락과 고통이다. 벤담은 개인의 행동은 공리utility의 원칙에 순응하여야 할뿐만 아니라 공동체 행복의 증가분은 그 감소분보다 훨씬 더 커야한다고 하였다. 벤담의 공리(utility)란 개인이 미래의 이익을 위하여 자신의 행복을 증가 또는 감소시키는, 찬성 또는 반대하는 행동원칙이다. 따라서 공리는 이익, 혜택, 쾌락, 선, 행복을 창조하는 속성(property)을 가지고 있다. 이 공리 개념은 오늘날 경제학자들이 사용하는 경제학적 효용개념과 큰 차이가 없다. 재미있게도, 벤담은 행복한 사람들의 수와 불행한 사람들의 수를 계산한 후에 행복의 총합이 불행의 총합을 능가하면 그것은 좋은 사회라고 보았다.


2. 역사적 맥락에서 본 존 스튜어트 밀

1806년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의 런던에서 태어났다. 밀은 운좋게도 학교에 다녀 본 적이 없다. 그러나 그렇게 좋은 운은 아니었다. 부친인 제임스 밀과 벤담이 그의 선생이 되었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세살 때부터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1822년 18세의 어린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 학회Utilitarian Society를 창설하였고 공리주의Utilitarianism란 용어를 처음으로 조어하였다. 그리고나서 밀은 신경실조를 겪었다. 밀은 공리주의와 도구주의를 설파하는 중에 격렬한 논쟁를 벌리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다. 그 후 존 스튜어트 밀은 시문학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결국 멋진 여성인 해리엇 테일러Harriet Taylor를 만나게 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그녀와 절친한 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 해리엇 테일러는 놀랄만한 지식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당시 영국 최초의 급진적 페미니스트라고 할 만 하였다. 사실 헤리엇 테일러는 존 스튜어트 밀의 작품들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만약 존 스튜어트 밀이 진정한 페미니스트였더라면 아마도 자기 저작들의 공동저자로서 해리엇 테일러의 이름을 올렸을 것이다. 해리엇 테일러는 유부녀였는데 그녀의 남편을 포함한 셋은 재미있게도 삼각관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테일러 부부와 존 스튜어트 밀은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하였다.

1851년 존 스튜어트 밀은 헤리엇 테일러의 남편이 사망하자 즉각 그녀와 결혼하였다.
1858년 존 스튜어트 밀의 부인인 헤리엇 테일러가 불행하게도 결혼 후 7년만에 사망하고 말았다.
1873년 존 스튜어트 밀은 Avignon에서 타계하였다. 향년 67세였다.


3. 존 스투어트 밀의 주요작품과 <공리주의>의 주요내용

1859년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On Liberty>를 출간하였고 1861년 <공리주의Utilitarianism>를 출간하였다.
1865년 존 스튜어트 밀은 의회의원이 되었댜. 당시 밀은 영국 최초로 여성참정권을 주장한 사람중에 한 명이었다.
1868년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투표권을 주장하는 바람에 재선거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1869년 밀은 <어성의 종속Subjection of Woman>을 출간하였다. 그 책은 여러 면에서 페니니스트적이었다. 그 책은 당시 남성들이 읽기에는 어려웠다.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시도하였다. 밀은 공리주의가 너무 냉정하다는 것을 발견하고서 감성적인것(sentiments)을 덧붙일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침 해리엇 테일러는 밀에게 풍부한 시문학의 감성세계를 소개하였다. 이제 밀은 더 높은 행복(a higher happiness)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낮은 행복과 높은 행복을 구별하였다. 이를테면 좋은 스테이크를 먹는 것은 매우 즐거운 일이다. 그러나 베토벤의 9번 심포니를 듣는 것은 더 큰 행복이다. 당신은 9번 심포니의 마지막 합창을 들을 때 더 높은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당신은 좋은 스테이크를 먹을때 보다 훨씬 더 큰 기쁨의 절정 속에서 더 높은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존 스튜어트 밀이 말하는 더 높은 수준의 행복(a higher level of happiness)이다. 재미있게도 밀은 공리(utility)는 편의(expediency)보다 훨씬 큰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또 자유는 최종의 가치이면서도 편의라고 강조하였다. 밀에 따르면 편의(expediency)란 최소의 수단을 사용하여 최대의 이익(return)을 얻는 것아다. 존 스튜어트 밀은 말하기를 ''편의는 개인의 자유에 반하는 간섭을 정당화할 수 없다(expediency cannot justify intervention against individual liberty)''고 강조하였다. 여기에 딱 맞는 매우 적절한 예가 있다. 미국의 9/11을 생각해 보라. 당시 많은 사람들이 편의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침해당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가 얼마나 제한 될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편의는 무시될 수는 없겠지만 개인의 머리 위에 무언가chips가 떨어지면 그것은 개인적 자유(individual liberty)에 해당한다고 말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지상주의자(libertarian)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의 신성을 강조하였다. 어떤 면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 개인주의의 완성자이자  정신적 지주라고 할만 항다.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문제와 관련하여 여성의 법적 지위는 노예의 상황과 유사하지만 사실 노예보다 훨씬 더 열악하다고 주장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은 직업과 공공생활, 그리고 교육에 있어서 평등권을 가져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사실, 존 스튜어트 밀의 이러한 주장은 장 자크 루소와 완전히 정반대되는 것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들은 결혼을 통하여 남성과 친밀한 유대를 창조할 수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해리엇 테일러는 그것에 동의하지 않았다. 헤리엇 테일러는 두 번 결혼하였지만 두 번 모두 성공적이지 못랬다. 그녀는 두 번 결혼했지만 결혼제도를 신뢰하지 않았다.


4. 존 스튜어트 밀의 행복론

오늘날까지도 존 스튜어트 밀의 영향력은 매우 강하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주의의 완성자이다. 어떤 면에서 존 스튜어트 밀은 가장 일관적이고 명확하게 이론을 전개한 학자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신의 이론의 출발점인 아담 스미스에서부터 자신의 스승인 벤담에 이르기까지 가장 논리적으로 공리주의를 완성하였다. 오늘날 존 스튜어트 밀은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이론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많은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를 신보수주의 또는 신자유주의로 전향시키면서 그들을 공화당으로 넘어가게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의 이론은 매우 중요한 분할선(dividing line)이었다. 개인의 자유는 어느 정도까지 인정되어야 하는가. 국가는 어는 정도까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있는가.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포인트였다. 존 스튜어트 밀의 이론은 1960년대 말과 70년대 초의 많은 정치적 좌파, 중도좌파, 극좌파들이 차별철폐조치(affirmative action)와 빈곤과의 전쟁 등에 직면했을때 자신들의 노선을 버리게 되었던 분할선이었다. 정말로 민주주의자들은 자유주의를 배신했는가. 그렇지 않다. 존 스튜어트 밀을 읽어라. 존 스튜어트 밀은 진정한 자유주의가 무엇인지를 선포하였다. 오늘날까지도 그의 메세지는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는 많은 조명을 받고있다. 비판가들은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적 자유를 지나치게 강조했다고 바난하면서 정부야말로 일반선(general good)을 위하여 많은 역할을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존 스튜어트 밀이 벤담으로부터 출발하여 전개한 공리주의의 주요내용을 살펴볼 것이다. 또 존 스튜어트 밀이 공리주의 중요한 변수로서 더 높은 행복을 강조했다는 정을 기억해두자. 일반적으로 우리가 갈구하는 것은 양적 행복일 뿐만아니라 질적인 행복이다.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 행복론의 포인트이다. 이 행복론은 이전에 아담스미스가 손대긴 하였으나 적절하게 전개되지 못했던 아이디어였고 벤담 또한 전혀 생각치 못했던 것이다. 이 행복 아이디어는 현대경제학인 신고전주의 경제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은 이 행복 아이디어를 선호(preference)라고 부른다.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개인은 저마다 선호를 가지고 있으면서.자신의 선호가치에 저마다의 효용(utility)을 부여한다. 이것은 정말로 존 스튜어트 밀의 이론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법(legality)과 정의를 구별하면서 합법적(legal)인 것이 반드시 정당한 것은 아니며 정당하다고 하여 반드시 법의 승인을 받은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또 편의와 정의에 관련해서는 편의는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며 정의로운 것은 비용이 들 뿐만아니라 목적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도 아니라고 하였다.

+ 더 높은 행복(the higher happiness)
우리 인간은 동물보다 더 높은 식욕(appetite)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또 동물이 가지고 있지 않은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또 우리는 도덕감정(moral sentiments)를 가지고 있다. 이 도덕감정은 우리를 이끌어서 대상을 선택하도록 할 수 있다. 아담 스미스의 인간공감설(sympathy theory of human)은 존 스튜어트 밀의 더 높은 행복과 맥을 같이 한다. 때문에 존 스튜어 밀은 인간의 식욕(appetite)이 동물의 것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강조하였다. 벤담은 식욕 하나를 더 추가하면 개인의 식욕이 만족스럽게 증가하고 또 사회가 훨씬 나아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존 스튜어트 밀은 그렇지 않았다.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제일의 선(good)은 덕(virtue)이었다. 따라서 ''덕스러워라, 그러면 당신은 선해질 것이다.'' 라고 말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이 덕스러우면 개인은 더 행복해 질 것이라고 말한다. 덕virtue은 공리주의의 기본적인 자격요건이다. 대부분의 합리적 선택 이론가들이나 신고전주의 경제학자들도 이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반-신자유주의자들과 반-공리주의자들은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utilities)는 질적인 차이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오해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 개인은 합리적 행위자이고, 개인은 자기이익을 추구하면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안다. 우리 개인은 각자 필요한 상품들의 가치가 행복한 가격으로 매겨져 있는지 어떤지 잘 파악한다. 이것이 오늘날 살아있는 공리주의의 근본적인 아이디어이다. 찬성자와 반대자가 있을 수 있지만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포인트이다. 존 스퓨어트 밀은 더 높은 행복과 관련하여 짐승들의 쾌락(pleasure)은 저질적인 것으로서 폄훼하였다. 우리는 동물적인 만족보다 더 높은 만족을 갖고자 한다. 당신은 적은 양의 음식을 제공받더라도 오성급 레스토랑에 가고자 한다. 거기는 음식이 매우 맛있다. 그곳은 동물적 식욕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음식을 주는 우스터 스트리트Wooster Street의 이탈리안 패밀리 레스토랑과는 다르다. 우리 인간은 더 높은 차원의 만족과 더 높은 차원의 식욕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단지 배를 채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방법으로 식사가 제공되길 바란다. 우리는 지성적이면서 풍부한 상상적 쾌락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상상력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이미 루소를 통해서 보았다. 당신이 비교문학이나 영문학을 전공하였다면 독일 시인이자 심미주의 이론가인 쉴러를 접했을 것이다. 쉴러는 아름다움(beauty)의 본질을 그려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상상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 쾌락의 질(the quality of pleasures)
우리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은 단지 쾌락의 양뿐만 아니라 쾌락의 질에 달려있다. 이것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어느 인간도 저급한 동물로 변신하느데 동의하지 않는다. 실제로 바보들이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만족스럽게 산다고 할지라도 어떤 지성인들도 바보가 되려고하지 않을 것이다. 바보들을 만족시키기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졍말 멋진 말이 있다. "만족한 돼지보다 불만족한 인간이 낫다.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포인트이다. 누구도 이 말에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은 필요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존재자보다 소크라테스처럼 불만족스럽게 살아가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5. 정의와 법, 정의와 편의

+ 정의와 법(justice and legality)
정의와 법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누군가가 타인의 재산을 침해한다면 그것은 법이 규정하고 있듯이 부당한 행위이다. 잘 알다시피, 공산주의 정부는 사람들의 재산을 몰수하였지만 그것은 합법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그것은 정의롭지 못한 행위이다. 그것은 법적으로 행하여졌지만 부정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재산을 침해당한 자의 정의감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법률 중에는 마땅히 존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아직 생성되지 못한 법률들이 있다. 그 법률들은 개인 권리를 적절하게 보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생성되어 제졍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존 스튜어트 밀의 시대에는 여성의 권리나 노예의 권리를 보호할 법들이 생성되지 못했다. 최근 미국사회에서 벌어지는 감시기술(surveillance techniques)은 개인의 자유권(individual liberties)로 인하여 미국 시민의 자유권이 적절하게 보호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새 법률이 생성되어서 정부의 민간인 전화 감청을 엄격하게 규제할 필요가 있다. 또 법률은 고문의 개념을 정확히 정의할 법 조항이 필요하다. 개인의 인권을 보호하는 법률의 개념적 불비는 인권침해를 초래할 수 있다. 실제로 차별철폐조치(affirmative action)는 인간자유(people's freedom)의 불평등을 다소나마 제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자유는 인간에 따라 각각 다르다. 분명 어떤 사람의 자유는 더 제한되어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제각각 출발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재미있게도 존 스튜어트 밀은 사람들의 자유의 평등을 창조할 새로운 입법이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포인트이다. 현실에는 마땅히 생성되지 말았어야할 법률들이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부당한 악법들에 대하여 논박할 것이다. 정부는 살인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사형제(death penalty)를 반대한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형제를 찬성한다. 사형제는 타인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하여 필요한가. 존 스튜어트 밀은 아마도 사형제를 반대하면서 사형제 폐지를 입법하였을 것이다. 낙태의 자유는 인정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법으로 금지되어야 하는가. 낙태 금지론자들은 태아의 자유와 권리가 보호되어야 하므로 낙태의 자유는 인정될 수 없다고 믿는다. 반면에 낙태 찬성론자는 수태한 여성의 자유(liberty)가 방어되어야 하므로 낙태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은 오늘날 매우 논란이 되고있는 이슈이다.

+ 정의와 평등
재미있게도 존 스튜어트 밀은 사람들은 실제로 정의를 평등과 관련시키려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불평등이 지나치면 그것을 정의롭지 못한 것으로 느낀다. 적법하게 목적이 실현되었더라도 그것이 정의롭지 못한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불평등은 편의라는 이름으로 왜곡되고 정당화된다. 사실 높은 수준의 불평등으로 인하여 이익이 돌아올 수 있다. 예를들어 월 스트리트 금융기업의 CEO를 생각해보라. 그 사장은 직원들의 보너스를 삭감하려고 하고 있다.그러나 사장은 이러한 조치로 인하여 큰 타격을 받을지 모른다. 그 능력있는 브로커 직원들은 사장의 결정에 반발하여 기꺼이 다른 회사의 스카웃 제의에 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장은 브로커 직원들을 계속 고용하기 위해서라도 수백만 달러에 상당하는 높은 수준의보너스를 지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장은 회사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미국의 은행을 생각해보라. 미국의 은행들은 수 십억 달러의 부채를 연방정부에 되갚았다. 왜나하면 그 은행들은 부채상환의 혜택으로서 정부의 간섭을 피할 수 있었으므로 과다한 보너스 지불에 대한 법적, 행정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편의이다. 정의로운 사회에서 어떻게 수백만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할 수 있는가. 사람들은 의아해하면서 그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 월스트리트의 브로커들은 엄청난 보너스를 받고있다. 그 직둰들은 다른 회사로 이적하면 더 많은 보너스를 받을 수도 있다. 이것은 분명 편의에 따른 것이지 정의에 따른 것이 아니다. 정의의 핵심 포인트는 무엇인가. 정의는 '타인의 자유와 재산을 침해하는 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고 강조한다.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중요 포인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individual liberty)를 매우 강조한다. 재미있게도 존 스튜어트 밀은 '만약 개인의 법적 권리가 침해되었다면 그것은 그 개인에게 속해서는 아니되는 권리일 수 있다.'고 미묘하게 말하였다. 사실 이것은 현대사회에 흔한 일이 아니다. 당시 존 스튜어트 밀이 살던 시대는 여러 봉건적 특권들이 보장되고 있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 봉권적 특권들을 폐지하고자 하였다. 왜냐하면 그 법들은 정의롭지 못하였기(unjust)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은 비록 법으로 보증되지는 않더라도 자신에게 합당한 것을 얻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 또한 대단한 논쟁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실제로 복지국가의 국민은 정부릃 향하여 기본적인 물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라고 주장할 수 있다. 모든 개인는 주거을 제공받고 거주하면서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존 스튜어트 밀과 맥을 같이하는 주장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사람들의 믿음을 깨버리는것은 정의롭지 못하다고 말하였다. 무언가를 하겠다고 약속하고나서 그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정의롭지 못하다. 누구도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존 스튜어트 밀은 정의는 편파적일 수 없다고 강조하였다. 정의는 모든 사람에게 완벽하고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다..

+ 정의와 편의
존 스튜어트 밀은 편의적인 것이 반드시 정의로운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를테면 최소한의 노력을 가지고 어떤 목적을 달성하였다면 그것은 편의적인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편의상 지름길로 간다. 그러나 지름길로 가지 않는것 이 훨씬 나은 이유는 그것은 정의롭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은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국가와 전인류와도 공감할 수 있다. 이것은 루소의 아모르 프로퍼 아이디어와 비슷하다. 정의와 편의의 관계는 안타깝게도 서로 혼동될 소지가 있다.


6. <자유론The Liberty>: 자유와 개인성

벤담은 우리 인간은 단지 쾌락을 좇는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기-개발(self -development)을 강조하였다. 우리는 생애 전반에 걸쳐서 자신들의 능력을 개발하여야 한다. 개인주의와 자유는 자기-개발로부터 시작된다. 자기-개발은 단지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이라기 보다는 개인의 중심가치이겠다. 자유는 존 스튜어트 밀의 가장 중요한 아이디어이이다. 또 자유는 가장 존 스튜어트 밀다운 아이디어이다. 우리는 단지 자유를 당연히 주어진 것으로서 믿어서는 안된다. 존 스튜어트 밀은 말하기를 "지배자가 자신을 대중들(the people) 동일시한다면 그 지배자를 매우 조심하라. 그 지배자는 자유를 보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지배자는 다수에 의한 횡포(the tyranny by majority) 정치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은 개인의 권리와 소수의 권리를 방어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왜냐하면 개인은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해야하기 때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선호(preference) 개념과 더 높은 행복 개념을 강조했던 것이다. 개인은 정부의 선택결정과는 무관하게 개인 스스로 공리(utility)에 따라서는 더 높은 가치를 선택하고 결정한다. 따라서 소수자는 대다수가 선택한 것과는 다른 선호를 갖고 선택할 수 있다. 물론 소수자의 선호는 마땅히 존중되어야 한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존 스튜어트 밀의 아이디어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에서 가장 선행하는 것은 다름아닌 개인의 자유라는 것을 기억해두자.것이다. 자유의 중심가치는 논리적으로 개인의 선호preference 아이디어와 공리(utilities)간의 질적 차이에서 나오는데 그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자신에게 최악인 것을 선택하여 결정할 수 있는 유일자는 바로 개인 자신이다. 다른 어느 누구도 개인을 위하여 선택하고 결정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것은 애덤 스미스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 표현의 자유
존 스튜어트 밀은 매우 독특하게도, 완전하고 무제한적인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였다.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러한 표현의 자유에 근접해있다. 사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적이고 자유롭고 리버럴한 국가들에서조차도 제한될 수 있다. 실제로 표현의 자유는 여러 방식으로 제한될 수 있다. 독일에서는 홀로코스트(holocaust)를 부정하면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존 스튜어트 밀의 아이디어에 매우 근접해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절대적인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였다. 이를테먼 어떤 개인이 자신의 의견(opinion)으로서 타인의 권리를 억압했다고 치자. 이때 절대적 표현의 자유가 없다면 그 개인은 자신의 과오와 진실(truths)을 논변할 표현의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발언의 기회가 허용되지 않으면 아니되는 것이 진리이다. 자신의 과오를 발언하도록 허용하다면 더 큰 문제를 불러오지는 않을까. 분명 홀로코스트에는 유력한 증거들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홀로코스트의 부존재를 주장하는 발언을 허용해야 하는가. 존 스튜어트 밀은 확실히 그 발언을 허용하라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과오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매우 논란이 되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동조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양쪽 편에 똑같이 귀기울여라. 그것이 진실을 발견하는 유일한 길이다.'

+다수에 의한 횡포(tyranny by the majority)
다수에 의한 참주제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다수에 의한 횡포는 대중 민주주의사회에서 벌어질 수 있는 가장 큰 악행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수에 의한 참주지배자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소수 의견을 억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한 다수의 횡포에 저항하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없다.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의 포인트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인간 본성은 인간의 자기걔발(self development)을 원하는 것이지 인간의 사회화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현대사회에서 벌어지는 동형주의(conformism)는 도덕적 억압이다. 동형주의는 개인에게 많은 압력을 가하여 다수, 즉 주류에 동참하도록 억압한다.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이것은 악행으로서 우리가 저항해서 고쳐야 한다. 우리는 개인적 자유를 방어해야하고 법적이든 비법적이든 어떤 간섭에도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오늘날 대중매체는 주입과 세뇌를 통하여 개인들을 동형적 개조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격노할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한 라이프스타일, 성적 선호, 기타 가치들은 보호되어야 한다. 재미있게도 아담 스미스도 기본적으로 이와 똑같은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스미스는 존 스튜어트 밀처럼 확실하고 명백하게 자유를 강조하지는 않았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정부의 간섭은 단지 개인의 자유가 침해(injury)되었을때만 허용된다고 하였다. 정부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수 없고 다만 침해되었을때는 예외라는 것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은 동정심(compassion)으로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으로부터는 관용(tolerance)을 기대하라고 하면서 타인의 선택을 존중하고 타인의 선택을 대신 결정해주지는 말라고 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실제로 동형(conformity)을 매우 싫어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도덕적 기준(moral standards)를 강화해 나가지 않으면 참주 또는 다수에 의한 횡포가 시회를 전복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밀의 주장은 시대에 앞선 것이다. 동형주의(conformism)가 악(evil)이라는 것은 1960년대와 70년대에 대단한 화제가 되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이것을 이미 18세기 중반에 언급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정부는 오로지 개인의 보호(self-protection)를 위해서 개입할 때만 그 간섭intervetion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홉스의 주장과 같은 선상에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우리는 서로 무관심할 것이 아니라 관용(tolerance)으로서 서로 도와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개인 또는 국가의 의지, 취미 또는 선호를 타인들에게 강요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어린이는 누구나 성년이 되면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선택하고 결정할 자격이 있다고 말하였다. 이것은 매우 문제가 될 수 있는 주장이다. 마약사용 문제를 생각해 보라. 존 스튜어트 밀 자신이 그러한 실수를 한다면 아마도 그는 자유지상주의(libertarian)편을 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존 스튜어트 밀은 아마도 마약사용을 비불법화(decriminalization)할지도 모르겠다.  마약사용 여부는 오로지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마약의 위험성과 생명에 해롭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 사용자들의 문제인 것이다.


7. <여성의 종속The Subjection of Women> 주요 내용

잘 알다시피, 여성들은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미국에서는 물론 영국에서도 평등권을 갖지 못했다. 여성들은 투표할 권리뿐만 아니라 실제로 재산을 소유할 권리조차 갖지 못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의 애인이자 부인이었던 해리엇 태일러는 급진적 페미니스트였다. 그녀는 매우 똑똑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존 스튜어트 밀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사실, 그녀는 결혼제도도 반대하였다. 이 책 <여성의 종속>의 중심 주제와 관련하여 포인트는 결혼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노에상태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노예는 세계 어디서나 존재했고 불운하게도 사실상(de facto) 여전히 세계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존 스튜어늩 밀은 여성의 종속은 노예상태의 한 예이고 그것은 여성의 본성으로는 설명될 수 없다고 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결혼에서의 법적 평등과 더불어 정치와 교육에서의 여성의 평등을 기술하였다. 마지막으로 우정관계로서의 결혼에 대하여 기술하였다.

+결혼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노예상태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결혼은 유일하게 남아있는 노예상태의 한 예라고 하였다. 사실, 부인들은 재산들 소유할 수 없고  남편들은 성적인 욕망의 대상으로서 부인들을 사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부인들은 노예들보다 훨씬 더 나쁜 상황에 놓여있다. 노예는 적어도 주인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부인은 자기의 남편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된다. 부인들은 노예들보다 최악의 상태에 놓여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남편이 원하는 것은 단지 부인의 복종뿐만 아니라 부인의 사랑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관계 19세기에 흔한 현상이었고 현재 21세기에서 조차도 많은 예가 있다. 남편은 부인에게 사랑표현을 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지만 부인의 사랑표현은 기꺼이 기대한다. 불행운하게도 아직도 이런 남편들이 많다. 어쨌든 <여성의 종속>이 19세기 중반에 쓰여진 것 치고는 매우 도발적이고 중요한 발언이다. 한펀 존 스튜어트  밀은 이러한 노예상태는 여성의 본성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루소는 이러한 존 스튜어트 밀의 주장을 반박할 것이다. 루소는 여성은 남성과 다르다고 주장하였다. 루소에 따르면 여성은 바느질하기를 좋아하고 종속되기를 원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두가지 점에서그러한 여성의 본성에 대한 편견을 반박(counter argument)한다. 첫째, 보통 여성의 본성이 간과되는 이유는 여성은 자기-개발(self-development)을 위한 기회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여성의 종속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여성들의 정치적 무능력을 입증해야한다. 만약 여성들의 정치적 능력이 인정된다면 여서의 종속은 여성의 본성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겠다. 이것은 깔끔한 논박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여성의 본성을 회의적으로 보는 자체는 타당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또 존 스튜어트 밀은 결혼의 평등성을 주장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상식이 되었다. 여성의 평등은 정치, 교육, 그리고 직업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바드 대학 총장인 래리 서머스Larry Summers는 여성들은 공학(engineering)을 전공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하였다. 아마도 그는 존 스튜어트 밀을 주의깊게 읽지 않았던 것 같다. 여성의 속성은 남성만큼 공학에 능하지 못한데 있지 않다. 여성의 속성은 매우 다양하다. 여성들은 확실히 정치적 직업에도 적합한 면이 있다. 존 스튜어트 밀은 결혼과 우정에 대하여 말하기를 "내가 여전히 결혼을 믿는 이유는 결혼은 파트너와의 평등을 토대로 하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 이것이 존 스튜어트 밀이다. 존 스튜어트 밀은 논란이 되는 이론가였지만  자기 이론을 가능한 최대로 밀어 부쳤다. 존 스튜어트 밀은  매우 영리한 사람인 것 같다.


8. 질문과 검토

+ 질문 1: 인간본성과 관련하여 홉스는 성악설을 주장하였다. 반면에 로크와 루소는 성선설을 주장하였다. 그들을 서로 비교하라.

사람들은 홉스를 읽으면서 인간은 본성적으로 악하다고 믿게 된다. 이것은 결코 비이성적인 생각이 아니다. 인간들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결국 리바이어탄같은 괴물은 필요없었을 것이다. 한편 로크는 자연상태에서의 인간 합리성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루소의 숭고한 야만인(noble savage)아이디어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창조주의 손으로부터 완벽하게 만들어져 나왔지만 사회가 인간을 타락시키고 억압하였다. 여기에는 다소 논쟁이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반면에 홉스는 인간은 선호와 공포사이에서 저울질하면서 합리적 결정을 한다고 믿었다. 홉스는 인간의 합리적 선택을 인정했던 것이다. 루소에 따르면 선하게 태어난 우리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야만인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사회에는 야만적인 개인들의 결정을 뒤집어 엎을 만한 일반의지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인간은 정말로 악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법과 질서가 필요하고, 또 정부의 간섭(intervention)이 필요하다. 그러나 로크나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인간은 결국 윤리적이고 선의지에 따라서 행동한다. 따라서 개인은 중앙의 계획자에게 필요한 것과 해야할 것을 결정해달라고 부탁할 것이 아니라 개인 스스로 선택하고 자유롭게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 질문 2: 홉스는 강력한 주권자 국가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로크의 주요 관심사는 집행부의 권력을 제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로크는 집행권이 입법권으로부터 분리되기를 원했다. 두 이론가를 비교하면서 강한 국가가 필요한지 아니면 권력을 남용하지 않는 최소 국가가 필요한지 검토하여라.

이에 대하여 홉스는 할 말이 많을 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9/11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강한 정부가 필요하다. 우리는 안보가 필요하다. 우리는 평등에 너무 많은 것을 의존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9/11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살펴보라. 개인의 자유는 너무 많이 제한되어 버렸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유와 짝해왔던 미국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쨌든 이 문제와 관련하여 확실히 의견이 나누어질 수 있겠다.

+ 질문 3: 몽테스키외와 루소는 방법론적 집단주의자이다. 반면에 홉스와 로크는 방법론적 개인주의자이다.  이 문제를 살펴보고 당신은 어떠한 입장인지 또 왜 그러한지 검토하라.

방법론적 집단주의자들은 개인들의 총합을 넘어서는 질료(stuff)가 있다고 주장한다. 좋은 예로서 몽테스키외는 방법론적으로 법을 강조하였다. 법은 각 개인들을 규율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먼저 선천적인 법이 존재하였고 그 후 개인들 속으로 입력된다. 따라서 집단양심 또한 선행하는 것이고 집단양심은 개인 속으로 들어간다. 반면에 홉스와 로크는 정반대로 주장한다. 그들의 방법론적 출발점은 개인들이다. 홉스와 로크는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은 개인들의 행동, 욕망, 그리고 의지이고 결국 이것을 가지고 집단(collectivity)의 문제를 살필 수 있다고 하였다.

+ 질문 4: 루소의 일반의지(general will)가 가능한 강력한 예를 들어라. 로크, 몽테스키외, 그리고 존 스튜어트 밀을 이용하여 일반의지를 비판하라.

분명 일반의지를 필요로 하는것이 있다. 예를들어서 보편적 건강보험이 그렇다. 개인에게 건강보험에 가입할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은 건강보혐에 가입해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편적 건강보험에는 일반의지가 필요하다. 한편 로크와 몽테스키외, 존 스튜어늩 밀은 보편적 건강보험을 반박할 수 있다.. 도대체 일반의지는 어디서 나오는가. 일반의지가 나온다면 그것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일반의지는 개인의 의식에서도 나올 수 있는가. 정부는 개인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정부는 개인이 필요로서 선택하고 결정한 개인의 선호를 뒤집을 만큼 개인보다 더 잘 알 수 있는가. 이것은 분명 문제이다. 확실히 일반의지는 전체주의의 길을 열었다. 칼 맑스와 레닌은 루소의 일반의지를 매우 좋아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중앙의 계획자가 일반의지로서 개인들에게 명령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중앙의 계획자는 말하기를 "물론 당신은 무엇이 필요한지 스스로 잘 알고 있소. 그러나 그것은 단기간의 필요일 뿐이오. 나는 당신이 장기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소. 따라서 내 말에 따라 행동하시오." 라고 한다. 루소는 말하기를 "자유롭기 위해서 강제된다(you have to forced to be free)"고 하였다. "나는 당신을 자유롭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나는 당신의 진정한 자유와 진정한 필요를 잘 알고있다." 이렇게 말한다면 이것은 비판받을 만한 발언이다.

+ 질문 5: 애덤 스미스는 자기-이익(self-interest)을 추구하는 것이 곧 공통선(common good)에 따르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루소는 일반의지는 개인의지의 총합(sum total of individual will)을 너머선 그 이상이라고 믿었다. 두 이론가의 공통선을 대조하고 누구의 아론이 더 설득력이 있는지 말하라.

애덤 스미스가 옳은 이유는 개인들이 자기 스스로 무엇이 필요하지 결정하지 않는다면 어느누구도 그를 대신해서 자기-이익을 잘 파악하고 결정할 수 없다는 가정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는 자기규제(self regulating)적인 시장과 완벽한 정보체계를 가정하였다. 불운하게도 그러한 가정은 현실세계에서 실현되기 힘들다. 반면에 루소의 일반의지는 현실적이라고 말한다.

+ 질문 6: 홉스는 강한 정부를 옹호하였다. 반면에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과 작은 정부를 옹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두 이론의 강력한 예를 들어보라. 그리고 강한 정부와 작은 정부 중에 어느 쪽이 더 나은가.

21세기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은 애덤 스미스를 보이지 않는 손과 작은 정부의 아이콘으로서 생각한다. 로날드 레이건 정부는 작은 정부로서 정말로 문제의 불씨였는가. 자유 민주주의자들은 현재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금융 위기에 대처하기 위하여 큰 정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금융위기가 초래된 이유는 정부가 제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또 규제완화를 시행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조지 더블유 부시가 했던 것처럼 규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부시는 납세자의 돈으로 금융기업을 구제(bail-out)하였다. 이것이 포인트이다.

질문 7: 루소와 존 스튜어트 밀은 성차별(gender relation)과 관련하여 서로 상반되는 주장을 하였다. 각각의 가능한 예를 들고 당신의 입장는 어떤지 밝히라.

성(gender)차별과 관련하여 루소를 방어하기란 매우 힘들다. 루소는 진짜로 성차별주의자이다. 재미있게도 루소는 sex와 gender를 최초로 개념화 하였다. 그런 면에서 루소는 섬세힌 페미니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루소는 여성은 남성과 같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여성은 똑같이 인간이고 똑같은 인권을 가지고 있지만 남성처럼 옷을 입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였다. 루소는 여자들이 여성다움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으로 루소와 뜻을 같이하는 페미니스트들이 있다. 한편 존 스튜어트 밀은 성(gender)과 관련하여 큰 문제가 될 것이 없다.

+ 질문 8: 존 스튜어트 밀은 공리주의자였다. 존 스튜어트 밀에 따르면 개인은 합리적으로 자기이익을 추구한다. 그러면 존 스튜어트 밀은 아담 스미스와는 어떻게 다른가.

이것은 어려운 질문이다. 거기에는 그렇게 많은 차이는 없다고 보겠다. 존 스튜어트 밀은 상이한 공리(different utilities)에는 개인의 선호(preference)와 질적 차이(qualitative differences)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하였다. 존 스튜어트 밀은 애덤 스미스보다 훨씬 더 우아하게 자기-이익 아이디어를 전개하였던 것이다.

+ 질문 9: 홉스는 안보(security)을 강조하였다. 반면에 로크와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를 강조하였다. 이것들이 가능한 예를 들어보아라.

총기소지와 관련하여 로크와 존 스튜어트 밀은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총기소지가 가능하다고 볼 것이다. 반면에 홉스는 학교에서 벌어지는 총기에 의한 대량 학살을 보면서 총기소지는 미친짓이고 세계 대부분의 나라는 총기소지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홉스는 고문, 감청 등과 관련하여 우리는 위험한 세계에 살고있으므로 CIA에게 그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반면에 로크와 밀은 그것을 부정하면서 개인의 자유는 신성하므로 개인은 먼저 고문과 감청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참고문헌>

원문, 동영상.
Szelenyi, Ivan. Foundations of Modern Social Thought, Open Yale Courses, 2009.